바탄 죽음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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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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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C급 전범
일반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피의자 약 5,700여 명[2\]

범죄 사건
학살 사건
난징 대학살(100인 참수 경쟁) | 마닐라 대학살 | 밀리환초 학살 | 바탄 학살 | 보르네오 학살 | 중국 북부 학살 | 치치지마 식인 사건 | 파푸아뉴기니 학살 | 팔라완 학살 | 베허호 사건 | 아라시함 포로 학살
생체 실험
731 부대 | 규슈대학 생체해부
전시 강간
일본군 위안부
강제 노역
정신대 | 죽음의 철도 | 하시마
정치적 추종 세력 및 사상
순국7사묘 · 신사본청 · 야스쿠니 신사 · 팔굉일우 · 일본의 우경화 · 일본의 역사왜곡 · 일본의 피해자 행세 · 일본회의 · 국가신토 · 새역모
가나다 순 배열
[1] 불기소 피의자, 재판 전 사망자 포함.
[2] 개별 사건의 중복 피고인까지 합계되었으며, 이 밖에 추축국 피점령지 내 부역자, 기소유예자가 포함된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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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포로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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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포로 이송 장면
일본군의 포로 학대를 표현한 일러스트

1. 개요
2. 바탄 전투의 패배
3. 참상
4. 사건 이후
5. 일본의 반응
5.1. 우엉과 관련한 역사왜곡
6. 창작물에서
7. 기타


1. 개요[편집]


영어: Bataan Death March
일본어: バターン死の行進

태평양 전쟁 기간인 1942년 4월 일본군이 바탄 반도를 점령하여 7만여 명[2]의 연합군 포로들을 잡아 마리벨레스에서 카파스까지 120㎞를 강제 이동시키면서 포로 다수를 학대하고 살해한 대규모 전쟁범죄 사건이다.


2. 바탄 전투의 패배[편집]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 직후 필리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미합중국 육군 대장필리핀군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는 가족 및 참모 일부와 함께 미합중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명령에 따라 미합중국 해군 PT보트 편대를 통해 호주로 탈출했다. 남은 미군과 필리핀군은 1942년 1월 7일부터 바탄 반도에서 저항했으나 물자 보급이 차단되고 보유 물자는 거진 소모한 상태에 말라리아까지 발생하자 지휘권을 인계받은 육군 중장 조나단 웨인라이트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항복을 승인받은 후 1942년 4월 9일 일본군에게 항복한다.

수만 명의 포로들을 붙잡은 일본군은 이들을 바탄 반도에서 내륙의 수용소로 이송했다. 당시 싱가포르를 접수한 장군 야마시타 토모유키의 간청으로 중좌 츠지 마사노부가 필리핀 14군으로 파견 나왔는데[3], 그는 여기서도 근성을 외치는 지휘를 하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명령을 왜곡해 "포로 감시를 엄중히 하라"는 명령을 "미군과 필리핀군 포로를 처형하라"는 지시로 바꾸어 내린다.


3. 참상[편집]


파일:external/www.bataansurvivor.com/map.jpg

일본군은 승리했으나 내부적으로는 보급선이 한계에 달한 상황이었고 부대의 기계화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데다 포로의 규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포로를 처형하라는 지시는 실탄을 소모하지도 않고 운송 수단도 필요없는 식량 배급 없는 장거리 행군이라는 형태로 실행했다.

포로들은 바탄 반도의 남쪽 끝 마리벨레스에서 북쪽 산페르난도까지 약 88㎞를 행군한 뒤 여기서 카파스까지 열차를 타고 이동하여 카파스에서 오도넬 수용소까지 약 13㎞를 행군하였다. 항복 직전까지 체력이 매우 저하된 상태에서 식수와 식량도 주어지지 않아 행군에서 수많은 탈락자들이 발생했는데, 일본군은 상부 지시에 따라 이들을 총검으로 살해하였다. 그런데 한 육군 대좌 하나가 이런 지시에 의구심을 품고 대본영에 확인해보자 대본영은 "그러한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는 답을 보내 14군측이 조사에 나서보니 츠지 마사노부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지시를 날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군 내 미국통으로 통하는 14군 사령관 육군 중장 혼마 마사하루는 서구권에서 포로 수용소를 운용하는 일반적인 방식인, 포로 간의 자치 조직을 결성해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노동을 시키는 형태를 주장했다. 포로 처형 지시가 한 파견 참모의 날조라는 것을 알아차린 14군은 즉각 지시를 철회했으나 이미 10,000여 명의 포로가 사망해버렸다.

다만 위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혼마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혼마 마사하루의 14군은 대규모 포로들의 장거리 이송을 계획하면서, 이동수단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고, 가혹한 현지 환경에서 포로들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조차 취하지 않았다. 특히 물자 부족과 전염병 등으로 이미 체력이 약해진 포로들을 이송하는 계획을 세우면서 가혹한 현지 환경을 고려하기는 커녕 포로들이 먹고 마실 식수와 식량조차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 이것도 모자라 일본 육군 장병들이 포로 이송 과정에서 폭언과 폭행 등의 가혹행위를 가하는데도 이를 저지하기는 커녕 방관하거나 되려 조장하는 전쟁범죄 행위를 거리낌없이 저질렀으며, 심지어 상당수의 포로들을 처형하기까지 했다.[4]

7~8만 명에 달하는 연합군 포로들 중 약 1~2만 명이 이송 과정에서 사망했다. 츠지 마사노부가 처형 명령을 날조했다 주장하기 이전에 포로 이송 과정에서 필요한 최소의 조치조차 하달하지 않은 시점에서 이 모든 사태의 제1책임자는 당연히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다. 일본군 장병들이 처형한 포로들의 수는 최대 수천 명이고 바탄에서 사망한 포로들은 대부분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다 탈진하거나 질병을 얻은 것이 원인이 되어 죽은 것이다.

종전 이후 연합군이 혼마 마사하루를 전쟁범죄 혐의로 재판에 기소한 것은 당연지사. 이러고도 혼마는 끝까지 자신은 포로들을 공정하게 대우했다고 항변했으니 사형 판결이 내려진 것도 당연한 일이다.


4. 사건 이후[편집]


혼마 마사하루는 이후 수상 도조 히데키와의 마찰로 예편했으나, 종전 이후 민간인 신분으로 필리핀으로 압송되었고 바탄 반도에서 펼쳐진 '죽음의 행진'에 관하여 인류에 대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로 전쟁범죄 재판에 기소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당시 혼마가 직접적인 학대 지시를 내린 것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휘하 장병들의 학대 행위를 방조했다는 점이 인정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다만 본인이 명예롭게 죽겠다는 요청이 받아들여져 민간인 신분이지만 일본 육군의 군복을 입고 맥아더의 명령으로 총살형을 선고받아 죽었으며, 거기다 사형되는 날 직전까지는 그래도 전범으로 기소된 다른 일본군 장군들과는 다르게[5] 후하게 예우를 받았고 사형 직전에는 최후의 만찬으로 비프 스테이크와 맥주, 샌드위치를 청해 맛있게 먹은 후 커피까지 주문해 다 마신 후에야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실 총살형도 명예롭게 죽게는 해주겠다는 것이니 상당히 온정 섞인 판결을 받은 것이다. 비슷한 사례의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죄수복을 입고 교수형으로 죽었다. 츠지는 당시 사태에 공식적인 개입이 확인되지 않고 그가 내린 지시들이 일선 부대에 보통 이행된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고려해 아예 기소되지도 않았다.

이 참상이 알려진 이후 미국 전역에는 극도의 적개심과 일본에 대한 응징의 의지가 충천했다. 논픽션 더 퍼시픽에 의하면 1943년 초기까지만 해도 미국민들은 필리핀의 참상을 전혀 몰랐으며 필리핀에서의 미군이 짊어진 역할에 대한 온갖 의문으로 가득했으나, 퍼시픽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미합중국 해병대 보병 소령 오스틴 쇼프너를 비롯한 일단의 미군 포로들이 수용소를 탈출, 잠수함 등의 루트로 본토로 귀환하면서 실상이 알려져 범국민적 보복 여론 형성에 크게 일조했다. 이후 전쟁 말기에 벌어진 도쿄 대공습원자탄 투하 실행엔 보복 여론의 정당성이 뒷받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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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 쪽바리들을 다 쓸어낼 때까지 임무를 계속하자'고 쓴 당시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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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들의 유해가 담긴 관이 성조기로 덮였다.

사건 직후에는 본래 미합중국 해군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USS 버팔로로 기공한 함선이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 USS 바탄으로 변경되어 일제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 전후에도 이 죽음의 행진을 기억하기 위해 미군 부대 곳곳에서 바탄 행진이라는 이름으로 마라톤 대회를 개최하며, 해군의 와스프급 강습상륙함 5번함도 바탄으로 명명했다. 영국 또한 호주 해군 소속 트라이벌급 구축함 중 한 척을 HMAS 바탄으로 명명해 희생자들을 추모했다.[6]

필리핀군 및 민간인도 많이 희생되었기에 4월 9일필리핀의 공휴일인 용사의 날로 지정되었다.


1945년 1월 30일 미 육군 레인저 부대와 필리핀군 게릴라 부대가 카바나투안 포로 수용소를 습격해 수감된 포로들을 구출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패퇴하던 일본 육군이 포로들을 학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2005년에 '그레이트 레이드'라는 영화로 제작되었다.

1945년 1월에는 산다칸에서 산다칸 죽음의 행진을 하였다. 바탄 죽음의 행진에 비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비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5. 일본의 반응[편집]


일본 우익이 작성한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이 사건에 대한 일본 극우 세력의 시각이 그대로 담겼다.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포로 이송 당시, 바란가에서 산페드로에 이르는 53㎞ 구간은 트럭을 동원해 이송했고 산페드로에서 카파스까지의 48㎞ 구간은 철도로 이동했으니 행군은 42㎞에 불과한데 '일본군에게 하루 10~20㎞를 행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포로들이 몇 십㎞를 행군했다고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한 것이지 잔혹행위를 벌인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

그러나 당시 일본군이 보유한 트럭은 약 200대 뿐이었다. 위 주장대로면 트럭 한 대당 380명의 포로가 탑승했다는 것으로 물리적으로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다. 열차 운송도 마찬가지로 열차 1량당 수백 단위의 포로들을 태웠다는 소리. 정말 이렇게 포로를 이송했다면 가혹한 열대환경에서 환기도 안되고 온도 조절도 안되며 화장실도 없는 운송 수단에서 수만 단위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7]

또한 이들은 일본군에 의한 학대 및 학살 행위를 전면 부정한다. 포로들의 사망 원인은 현지에서 들끓은 말라리아가 원인이지 일본군 장병들이 저지른 전쟁범죄 혐의는 무고하다는 것. 일본군의 부정한 행위를 인정하는 부류에서도 바탄의 비극은 츠지 마사노부의 조작 행위가 원인이라고 책임 소지를 매우 축소시킨다.

애초에 체력이 약해진 포로들을 위한 최소한의 물자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으니 설령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라 해도 일본군이 총칼로 직접 죽이지 않았으니 학살이 아니라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츠지 마사노부의 명령 위조는 당시 연합군이 주도한 전범 재판에서도 '츠지 마사노부의 지시는 이행된 사례가 거의 드물어 학살의 적극 가담 혹은 기여했다고 보기 힘들다'고 인정되어 재판에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타츠노코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애니멘터리 결단(1971)에서는 2300명이 희생되기는 했지만 7만 명을 그대로 방치해 전멸하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은 결정이라며, 일본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평가하였다. 88km를 걸어야 했다는 점은 나오지만 포로를 학살, 학대 및 살해했다는 서술은 전혀 없다. 애니멘터리 결단 11화 바탄 코레히도르 공략(19분부터)

한국에도 번역되어 출판한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야마모토 시치헤이 저)에서는, 일본군은 '포로 행군'이라는 것이 잔혹행위라는 인식을 가지지 못했고, 오히려 온정을 베푸는 것쯤으로 생각했다고 서술한다. 당시 일본군은 6km 행군에서조차 10~20%가 쓰러지며 낙오했기 때문에, 걸어가는 중에 포로 손실이 발생하는 것은 특별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후에 혼마의 재판 소식을 들었을 때, (저자 자신을 포함한) 일본군은 부당한 재판이라고 생각해 분노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당시의 자세한 내막이나 미국인들이 분노한 이유를 알려 하지 않은 채로 재판 소식만 듣고 분노만 앞세운 것은 잘못되었다며 비판적인 시각으로 이야기한다. 일본군이 저지른 악명 높은 잔학한 사건이라는걸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렇듯 일본 내에서도 잘못을 인정하고 이 사건에 대해 비판하는 시각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5.1. 우엉과 관련한 역사왜곡[편집]


한편 일본은 이 사건에 대하여 '포로들에게 우엉을 식량으로 지급했는데 식문화적 차이로 우엉을 나무 뿌리로 착각한 포로들에 의해 일본군이 가혹행위로 전범 재판에서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왜곡된 주장은 상당히 오래된 기원을 가진다. 급기야 전쟁의 참혹함과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는 명작 맨발의 겐에서조차 우엉을 언급하며 당시 사건을 '문화적 차이로 발생한 비극'으로 평가할 정도. 이후 문화 컨텐츠에 우엉에 대한 왜곡 주장은 잘 나오지 않다 2012년부터 연재한 식극의 소마에서 뜬금없이 언급한다. 우엉 요리를 묘사하며 '2차 대전 중 일본의 포로가 된 병사의 식사에 우엉이 쓰여 일본인이 나무 뿌리를 먹게 했다며 국제재판으로까지 발전했다'는 설을 언급한 것.

일단 우엉은 냉대 한대기후에서 자라는 작물로, 바탄을 포함한 동남아 현지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한 물건이다. 현지에서 재배하는 작물[8]이 많음에도 일본이나 조선 등지에서 수확한 우엉을 포로들에게 식량으로 지급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주요 전쟁 물자도 아닌 우엉을 수백 km 떨어진 필리핀까지 운송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9] 애초에 바탄에서 굶주림으로 사망한 포로만 만 단위에 달한다. 또 바탄의 생존자들은 우엉이 지급되기는 커녕 먹을 것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고 증언하기에 식습관 차이로 인한 오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우엉 뿐만 아니라 도 일본군 장병들이 연합군 포로들에게 식량으로 지급했다. 서양인 포로들은 김을 검은색 종이라고 착각해 전후 일본군 병사들이 식량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가혹행위를 저질렀다는 누명을 쓰고 전범 재판에서 유죄를 받았다는 식의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김 또한 동북아시아 3국 외에서는 재배하지 않는다. 힘들게 구한 김을 포로에게 주는 것 또한 이상하다.

그리고 김이든 우엉이든 무게 대비 칼로리가 매우 낮기 때문에 이것외 주식인 곡식을 지급하지 않았다면 포로 학대로 볼 혐의가 충분하다.


6. 창작물에서[편집]


  • 1943년 영화 Cry 'Havoc'
MGM에서 제작한 영화로 마거릿 설러번, 앤 소던, 조앤 블론델이 주연으로 출연하며 로버트 미첨이 군인 단역으로 출연했다. 제목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줄리어스 시저 대사에서 따왔다.
바탄 전투의 한복판인 바탄 야전병원에서 일하는 미국 육군 간호장교 2명과 마닐라에서 탈출한 11명의 민간인 자원 간호인들의 비참한 고난을 묘사했다. 이들은 퀴닌을 구하지 못해 군인들이 기껏 부상 치료를 받고도 말라리아로 죽어가는 걸 보고, 본인들 중 일부도 이로 인해 사망하게 되며, 말, 노새, 원숭이를 먹는데 익숙해지고, 일본군의 폭격으로 사망/부상당해 시체에 둘러싸인 쇼크로 비명을 지른다. 더글러스 맥아더호주에 있다는 소식을 전달받는데, 결국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행진을 시작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 1943년 영화 바탄


  • 1945년 영화 바탄으로의 귀환(Back to Bataan)

존 웨인이 출연한 영화로, 전반적으로 엄친아 미군과 동맹인 필리핀 민중들이 찌질한 일본군[10]을 물리친다는 수준의 영화이지만 죽음의 행진은 나름 잘 묘사한 편이다. 영화 앞부분과 뒷부분의 포로 수용소 해방 장면에 출연하는 엑스트라들은 실제 죽음의 행진의 생존자들이다.[11] 극중 학살 현장에서 구조되는 필리핀군 장교는 앤서니 퀸으로, 이외 안필립이 일본군 대령으로 출연했다.

  • 1986년 바탄의 천사들(Women of Valor)
죽음의 행진에 동행한[12] 미국인 간호사들을 다룬 수잔 서랜든 주연의 TV 영화로, 한국에서도 방영했다.


7. 기타[편집]


  • 필리핀의 수영 선수 테오필로 일데폰소가 이 사건의 희생자이다. 1928년, 1932년 올림픽 200m 평영에서 동메달을 수상해 동남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이자 필리핀인 중에서는 유이하게 올림픽에서 1개 이상의 메달을 딴 선수이다. 죽음의 행진에서는 살아남았으나 1942년 6월 19일 타를락 주 카파스에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 필리핀의 바탄 주 사맛산에는 이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사맛산 십자가 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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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의 인물 세명 중 한명은 종군 기자로 나중에 적성국 민간인의 교환 협정으로 송환되었고 후일 1945년 2월에 벌어진 마닐라 전투에 종군하여 옛 포로 전우들을 다시 재회하게 된다.[2] 이견이 있지만 7만~7만 6천 명이 정설이며 오차 범위까지 고려해도 6~8만 명으로 잡는다.[3] 싱가포르에서 필리핀으로 파견 나간 것이다. 그러니까 야마시타는 츠지를 자기에게 보내 달라고 간청한 게 아니라 자기에게서 떨어뜨려 다른 데로 보내버리라고 간청한 것이다. 츠지가 이시하라 간지 계파에서 도조 히데키 계파로 줄을 갈아타기도 했을뿐더러, 대본영 참모라 일선 부대의 장군들에 맞먹기까지 했기 때문이다.[4] 일본군 장병들은 참혹한 이송 과정에서 탈진 등의 이유로 낙오된 포로들은 가차없이 살해했고, 극심한 굶주림과 갈증을 호소하는 포로 역시 마찬가지로 죽였다.[5] 치치지마 섬 식인 사건의 주동자 다치바나 요시오 같은 경우에는 사형 전까지 아주 심하게 학대를 당했다고 전해진다.(이상 일본어 위키백과) 혼마 마사하루는 이에 비하면 대접이 훨씬 좋은 것이다. 다치바나 요시오는 미 군사경찰들이 아주 열받은 나머지 알루미늄 배트로 흠씬 두들겨 팼다고 하며, 다치바나 요시오가 수감된 감옥에는 무타구치 렌야 밑에 있던 일본군 출신 포로도 있었는데 그가 벌인 식인 사건을 듣고는 "무타구치도 채식하라 했지, 식인하라 하진 않았다! 또라이야!"라며 두들겨 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로 인해 지독한 학대로 사형 집행 당시에는 인사불성이 되어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전범의 사형 방식인 교수형이 집행되었다.[6] 함급명(tribal)을 보면 알겠지만, 트라이벌급은 원래 소수민족들의 이름에서 함명을 따오는 함급이었다. 해당 함(I91)도 본래 계획명은 쿠나이(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한 부족)였으나, 이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함급명과의 괴리를 감수하고 함명을 변경한 것. 또 바탄함의 진수더글라스 맥아더의 부인 진 맥아더에 의해 진행되었다.[7] 바탄 죽음의 행진 기간은 대략 10여일이다. 10일 안에 8만 가량의 인원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수송 계획과 여기에 필요한 엄청난 숫자의 물자 보급 계획을 갖춰야 한다.[8] 동남아 현지에는 쌀도 자라고, 얌이나 타로같은 작물들도 많다. 현지에서 자라는 작물이면 어렵지 않게 대량으로 징발 가능하다.[9] 그리고 이 거짓 주장을 믿어준다고 해도 포로들이 우엉을 나무 뿌리로 착각했다는 소리는 손질도 조리도 안된 생 우엉을 식량이라고 지급했다는 것인데, 이는 제대로 된 식량이라고 할 수도 없다. 또한 우엉의 열량은 100g당 약 62kcal로 쌀의 절반 가량이라 주식으로 먹을 종류의 작물도 아니다.[10] 실제 혼마는 영관급 시절 미국 유학 경험이 있어 상당히 후덕하고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는데, 1941~42년 필리핀 전역 당시 미군의 항복을 받을 땐 기선 제압을 위해 일부러 영어를 쓰지 않은 전적이 있으나 전범 재판에서 최후 진술을 할 때는 영어로 말했다. 반면 작중에서는 삐쩍 마른 히틀러 체형에 알아듣기 어려운 억양의 영어로 찌질거린다. 그리고 필리핀 패망 때까지 존 웨인에게 발린다.[11] 일부 엑스트라들은 손발이 없는 장애인으로 나오는데 실제 그때 장애를 입은 사람들이다.[12] 완주하지는 않았고 중간에 차량을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