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완/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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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박경완


1. 개요
3.1. FA
4.1. 2003~2008 시즌
4.2. 2009 시즌
4.3. 2010 시즌
4.4. 2011 시즌
4.5. 2012 시즌
4.6. 2013 시즌
4.6.1. 은퇴식
6.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편집]


박경완의 선수 경력을 담은 문서이다.


2.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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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전주고를 졸업하고 쌍방울에서 프로로 입단할 당시 김원형과 함께 고려대의 스카우트를 받았으나 당시 전주고 감독이 원광대 측에서 다른 전주고 학생들을 같이 입학시켜주겠다 하자 박경완을 원광대에 보내주겠다는 약조를 하여 진학이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쌍방울이 계약금 1300만원에 연봉 1000만원으로 입단 제의를 하기도 했으나 박경완의 상황을 알고 있던 당시 쌍방울 프런트가 입단 계약을 지연시켜 입단하지 못할 뻔 했다.[1]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부터 항상 같이 붙어다녔던 영혼의 배터리 김원형1991년 쌍방울에 고졸연고지명을 받고 입단할 당시 박경완을 위해 "난 경완이 아니면 볼 안 던져"라고 완강히 버텨서 연습생 신분으로나마 프로에 입단하게 된 에피소드가 있다.[2]

물론 고졸에 연습생으로 입단하여 연봉은 고작 600만원에 불과했고, 이 탓에 무시를 당한 적도 꽤 있다고 한다. 다른 선수들이 박경완의 사인에 따르지 않기도 하였다고 한다.[3] 그러나 박경완의 은퇴 직후 인터뷰를 보면 쌍방울 내에서의 그 일화는 신고선수 신분이나 연봉 탓 보다는 그 대학 입학을 갑자기 거부하고 입단한 것으로 인해 그로 인해 대학을 못 가고 함께 신고선수로 입단한 동기들에 의해 선수단 내에서 나쁜 쪽으로[4] 소문이 나서 왕따를 당한 게 더 컸다고 한다.[5] 그러자 박경완은 실력의 부족함도 있는데 이런 분위기까지 있어서 상황이 좋아질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방위로 군입대를 결심하고, 구단이 만류함에도 그냥 우겨서 이른 나이에 방위로 입대를 강행하는데, 그 때부터 방위근무 후 퇴근을 할 때마다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의 배터리코치였던 조범현에게 지옥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이 훈련은 혹독하였으나 굉장히 효과적이었고,[6] 덕분에 실력이 날로 일취월장하게 되어 방위 복무 기간이 끝나기 전에[7] 1군 경기도 조범현의 추천으로 조금이지만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점점 좋은 모습을 보여 소집해제 후에는 쌍방울의 주전포수가 된다. 앞서 서술한 선수들이 박경완의 리드를 거부했을 때, 조범현 배터리코치가 작정하고 포수 리드를 따르지 않고 멋대로 던지느냐고 일갈하며 하이킥을 날린 일화도 있다. 어찌됐건 좋은 장타력과, 안정된 수비력, 강견을 갖추고 1998년 현대로 트레이드되기 전까지 쌍방울의 주전 안방마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1996년에는 쌍방울의 깜짝 가을 야구 진출과 함께[8] 생애 최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다. 쌍방울 시절 김원형과의 에피소드(?) 밑의 5시 방향 조그만 기사도 둘의 기사다.


3. 현대 유니콘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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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적 후 찍은 사진.[9]

1998년, 쌍방울의 자금난과 포수를 필요로 하던 현대의 사정이 맞물리면서[10] 이근엽+김형남[11]+9억↔박경완의 트레이드가 이루어지면서 현대 유니콘스로 이적, 타율은 좀 낮았지만(0.250) 생애 첫 세 자리 수 안타와 두 자릿 수 홈런도 치고(19개) 중요할 때마다 타점도 올리며 정민태[12][13] 등 수준급 투수들과 호흡을 맞추는 등 전천후로 활약을 했다. 그 결과 현대의 창단 첫 우승인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면서 첫 우승 반지도 따내고 개인 통산 두 번째 골든글러브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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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7월 21일 개인 통산 100호 홈런을 기록하고 나서.[14]
그리고 이듬해인 1999년, 데뷔 후 처음으로 20홈런을 기록하게 된다.(23홈런)[15] 다만 타율은 0.221로 상당히 저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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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연타석 홈런을 날린 박경완
히스토리 40 박경완, 불멸의 4연타석 홈런
2000년 5월 19일, 대전 한밭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전에서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한 경기 4연타석 홈런'을 달성하였다.[16][17][18]

박경완은 4연타석 홈런을 쳤을 때, 자신이 4연타석 홈런을 쳤다는 것도 모른 채 덕아웃으로 돌아오는데 덕아웃에 있던 모든 선수들이 거의 발광 상태였고 관중들 함성이 너무 커서 그제야 4연타석 홈런을 친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5연타석 홈런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바로 교체한 김재박 감독에 대해 말이 많았는데, 당시 상황을 기억하던 투수 조웅천[19]의 말로는 상대 팀이 거칠어져서 빈볼이 나올 수도 있기에 선수 보호 차원에서 교체를 했던 거라고 한다.[20] 박경완도 "당시 기록에 대한 욕심은 없었고, 감독의 의견에 따랐다. 그다지 크게 아쉬움은 없었다."라고 말했지만...[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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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정규시즌 MVP 시상식에서
결국 2000년 40홈런 95타점으로 홈런왕과 MVP를 수상했다.[23][24] MVP 수상소감에서 "내년에는 20-20을 해보고 싶다"고 말하자 시상식장에 있던 선수들이 웃었다고 한다. 이 때는 그냥 한 소리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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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c81e 2001년 9월 20일, 20-20 클럽을 가입한 박경완[* 하지만 이 해 국내 최초와 세계에서 2번째 포수 20-20이라는 역대급 기록을 세우고도 KBO 골든글러브홍성흔에게 내주어야만 했다. 역대 골든글러브 시상식 중에서 논란이 많은 수상 중 하나이기도 한 이 수상에서 홍성흔이 골든글러브를 받은 이유는 간단하다. 약간 앞서는 타율 및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버프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3년 뒤 똑같은 상황이 재발했다. 이때는 박경완이 홈런왕 타이틀을 먹었는데 하필 이때 최다안타 타이틀을 차지한 홍성흔 한테 빼앗긴 것. 이때는 홍성흔은 지명타자 출장이 더 많았기에 더 논란이 되었다.]}}}
2001년에는 24홈런-21도루를 기록하여 KBO의 유일무이한 20-20 클럽 포수 가입자가 된다.[26] 2001년을 제외하곤 그 외의 시즌에서 두 자릿수 이상의 도루를 기록한 시즌이 없는 만큼 엄청난 기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압도적인 성적에도 불구하고 포수 골든글러브는 그 해 우승한 두산 베어스의 주전포수였던 홍성흔에게 돌아갔다. 2001 시즌 홍성흔과 박경완의 성적 차이[27]가 어마어마했기에 그 당시에도 골든글러브를 뺏겼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 그리고 박경완은 그해 골든글러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골든글러브는 별 의미가 없어요..."

2002년에는 .203의 타율을 기록한다.[28] 그래도 홈런만은 19개를 찍었다. 그리고 FA로 풀리는데...


3.1. FA[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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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시즌이 끝나고 FA를 선언하여 3년 19억에 SK 와이번스로 이적한다.[29] 이때 당시 박경완은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은사 조범현 감독의 뜻에 따라 이적한 것이었다. 만약, 조범현 감독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그대로 현대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밝혔다.[30] 한 편 박경완을 놓친 현대는 좌완 투수인 조규제[31]를 보상선수로 지명했으며, 비슷한 시기 SK에서 포수 김동수가 방출되자 대체자원으로 영입했다.[32]

그의 영입은 SK 와이번스가 강팀으로 성장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박경완 영입 전, SK의 포수진은 그리 좋지 못했다. 당시 포수진에는 쌍방울에서 흡수된 양용모, 장재중, 롯데에 있던 강성우, 현대에서 온 장광호, 2001년 1차 지명으로 뽑은 동산고의 정상호, 1년만 잠시 SK에 몸담았던 김동수 등이 있었다. 박경완 영입 이전의 상황을 보면 2000년은 쌍방울에서 그대로 넘어온 양용모장재중이 플래툰으로 나왔고, 창단지원선수로 10억을 주고 현대에서 영입한 장광호, 한화에서 영입한 김충민은 얼마 나오지도 못 했다. 2001년도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장재중을 LG로 보내고 롯데에서 영입한 강성우양용모와 함께 플레툰으로 나왔으며 신인 정상호가 빈 자리를 채운 정도였다. 2002년에는 삼성에서 90년대 최고의 포수였던 김동수를 영입했지만, 확고한 주전은 절대 아니었다.[33][34]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2000~2002년 주전과 백업을 오갔던 양용모는 발이 빨랐으나 그게 끝. 정작 가장 중요한 포수 수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삼성 라이온즈 시절에 김영진에게 밀려서 백업포수에 그쳤던 선수였다. 한화 시절에는 장점을 살려 백업 외야수로도 종종 나왔을 정도. 2000~2001년에 플레툰으로 나오던 장재중은 수비가 준수했지만 양용모에 비해서 공격력이 떨어지던 선수였다. 2001년 롯데에서 영입한 강성우도 전형적인 수비형 포수로 장재중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정상호는 2001년에 입단한 신인이었기 때문에 백업으로 가끔씩 나왔다 정도지 주전은 아니었으며, 2000년에 잠깐 있던 장광호김충민도 타격이 시원찮던 수비형 포수였고 둘 다 오래 못 가서 팀을 떠났다.[35] 그래서 박경완이 SK로 합류하기 이전까지는 그리 좋은 포수진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4. SK 와이번스 시절[편집]


{{{#fff [[SK 와이번스|SK 와이번스]] 등번호 26번}}}
양용모
(2000~2002)

박경완
(2003~2013)


KBO 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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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2003~2008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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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SK 와이번스로 이적한 그는 다시 절친인 김원형과 배터리를 맞출 수 있게 됐고, 야심차게 팀에 이적한 지 1년차에 준우승을 이끌어냈다.[36] 물론, 당시 창단 4년차에 불과한 신생팀이었던 SK의 뎁스가 약한건 어쩔 수 없던 시절인걸 감안하면 대단한 성적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4년에는 SK의 핵심 거포로 활약[37]하며 34홈런을 기록, 2000년 현대 시절 이후 4년만에 커리어 2번째 홈런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2004년 포수 골든글러브는 2001년에 이어 또 다시 홍성흔이 가져갔다.[38][39][40]

2005년~2006년 2년간은 비록 장타력이 급감하긴 했지만 이후로도 SK의 주전 포수로 꾸준히 활약해 주다가[41] 쌍방울 시절 감독으로 모셨던 김성근 감독이 2007년 SK 와이번스로 부임한 이후 더더욱 두터운 신뢰를 받게 되었다. 김성근 감독이 '웬만한 볼배합은 박경완에게 다 맡긴다' 고 할 정도로 믿음을 보내기도.[42] 그리고 팀을 2007년 한국시리즈[43], 2008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해냈다. 2007년에는 7년만에 포수 골든글러브도 탈환했다.[44] 당시 정상호와 이재원은 박경완의 백업이었는데, 수비형 포수 정상호, 공격형 포수 이재원이라는 점에서 나름 균형있는 출장을 했다.


4.2. 2009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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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4일 광주 KIA경기에서 주루 중에 왼 아킬레스건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정상호가 주전 마스크를 썼으며, 이때 상황을 보자면 9회 초 3:3으로 맞서는 팽팽한 상황에 선두타자로 올라온 박경완이 유격수 쪽 땅볼을 쳤다. 충분히 아웃될 수 있는 상황이라 주루 플레이를 1루 직선 방향으로 전력질주했지만[45] 유격수 이현곤이 실책을 하는 것을 보고 급격하게 2루 쪽으로 방향을 바꾸다 아킬레스건이 파열한 것이다. 그라운드에 나동그라져 왼쪽 다리를 못쓰는 상황이었으나 남은 오른쪽 다리로 황급히 1루로 되돌아가 베이스에 손을 올려놓은 채 쓰러진 장면은 많은 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당시 기사 결국 시즌 아웃. 한국시리즈에도 나오지 못했다. 부상 전까지 포수 통산 최다홈런 기록인 299홈런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부상으로 300홈런 달성은 2010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여담으로 2009년 5월 12일 LG 트윈스와의 무박 2일 5시간 39분의 혈투에서 투수를 다 소진한 LG가 고육책으로 최동수를 마운드에 올렸는데[46] 최동수의 2구에 2루수 내야플라이로 아웃당하며 최동수를 미스터 제로[47]로 만들어줬다.


4.3. 2010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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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시즌 초에도 복귀 여부는 불확실하였으나, 빠른 회복을 보이며 개막전 선발 포수로 나왔다. 한 달이 넘는 아홉수 끝에 결국 4월 30일 LG 트윈스와의 문학 야구장 경기 5회말에 박명환의 5구를 통타, 포수 300홈런이란 대기록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시즌 내내 왼 아킬레스건의 부상으로 인한 오른 아킬레스건의 부담 가중으로 정상적인 주루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펜스 직격 1루타가 자주 나올 정도였고, 평범한 타자에게 안타가 주어질 상황에도, 뛸 수 없기에 아웃이 되곤 하는 형편이었다. 이는 보조 포수인 정상호 또한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는 상황에 기인했다. 안 그래도 몸이 불편한데 이 시즌에 몸에 맞는 공만 27개로 단독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9월 3일 잠실 두산전에서 역대 5번째 2,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팀이 시리즈 전적 1승으로 앞선 10월 16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8회말 권혁을 상대로 1:4로 달아나는 솔로 홈런을 때려냈다. 참고로 이 홈런이 박경완 본인의 한국시리즈 첫 홈런이었고 팀은 스코어 1:4로 승리했다.

팀이 시리즈 전적 3승으로 앞선 10월 19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2010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는 6회초 차우찬 상대로 4:0으로 달아나는 1타점 적시 2루타를 쳐냈고, 7회말 1사 1,2루 상황에서 박진만 파울 플라이를 호수비로 잡아내는 등 공수주에서 맹활약하며 팀의 스코어 4:2 승리에 기여하였다.

박경완은 2010년 한국시리즈 전 경기에 포수로 선발 출장하여 단 한 번도 교체되지 않고 13타수 3안타 1홈런 2볼넷 1몸에 맞는 공 3타점 1득점, 타율 .231, 장타율 .538, 출루율 .375를 기록했고 팀의 시리즈 전적 4승으로 우승했다. 시리즈 MVP 투표에서 박정권에 이어 2위를 할 정도로 그 공이 매우 컸다.

KBO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에서는 조인성에게 138:136, 단 '2'표 차로 수상에 실패하였다. 이는 역대 1-2위간 최소 표차 기록으로 남았는데,[48][49] 3할+포수 최초 100타점을 기록한 조인성이 2할 6푼대 타율을 기록한 박경완을 상대로 1표만 덜 받았어도 동률이 나올 뻔한 상황이 나온 데 대하여 2009년에 이어 이름값과 우승팀 프리미엄만 보고 표를 던진 기자들의 몰개념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나왔다. 게다가 2001년과 2004년 거의 똑같은 상황에서 골든글러브를 뺏긴 뼈저린 경험이 있던 박경완으로서는 골든글러브 시상식 한참 전부터 포수 골든글러브는 조인성이 받는 게 이치에 맞다며 본인이 직접 조인성을 밀어주기까지 했다.

2010년 시즌 후에 FA가 아님에도 불구, 타격은 예전같지 않지만 역대 최고급의 수비와 투수 리드를 인정받아, 마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2년간 총 14억의 금액에 대박을 터트렸다. 절친인 김원형이 팔꿈치 부상으로 2010 시즌 8월에 복귀하여 단 3경기밖에 못 나옴으로써 연봉이 2억 5천에서 1억으로 깎인 것을 보면 둘이 데뷔 초하고 지금하고의 명암이 갈린 상황(...)[50]

하지만 이 2년 계약으로 2011년 시즌 후 FA 파문이 일어나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2011 시즌 항목 참고.


4.4. 2011 시즌[편집]


2011시즌에도 부상 여파로 제대로 출장하지 못하였다. 안 그래도 2010시즌에 부상이 있었는데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을 위해 수술도 미루고 뛰면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 이재원도 군 복무를 위해 팀을 떠나서 당장은 정상호가 주전포수가 되었다.

5월 22일 넥센전에 선발출장하여 1타점 적시타를 기록했다.그러나 다시 고질적인 발목 통증이 재발, 얼마 안 가 2군으로 내려가 재활 치료를 계속했지만, 결국 다시 발목 수술을 하기로 결정되어 회복하는 데 4~5개월 정도 걸릴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사실상 시즌 아웃 확정. 설령 회복된다 하더라도 재발 부위에 또 칼을 들인데다 노쇠화까지 고려한다면 선수로 뛸 날이 얼마 안 남은 셈이다. 결국 2011년 SK 포수진은 정상호가 주축이 되었다. 정상호까지 결코 좋지 않은 몸상태임을 감안하면 SK의 포수난이 좀 심각했던 상태. 그나마 허웅이 포수진에서 새로이 발굴되면서[51] 포수 구멍을 어찌어찌 잠시라도 막아내긴 했다. SK의 포수 안정은 이재원이 군 제대 후 포텐이 터진 2014 시즌 부터 였다.

2011년 시즌이 종료된 11월 초, KBO에서 박경완의 이름이 들어간 FA 명단을 발표하면서 갑자기 파문이 일어났다. 이유인 즉슨 2010년 시즌 종료 후 SK는 FA 자격을 취득하지 않은 박경완과 2년간 14억원으로 재계약을 하면서 KBO에는 1년 계약을 한 것으로 서류를 제출했는데, KBO 규약에 따르면 FA가 아닌 선수들은 다년 계약을 할 수 없으며 반드시 1년 계약만 할 수 있다.

따라서 야구규약 46조 '위반처분' 조항[52]에 의거하여 2010년의 2년짜리 계약은 무효이고, 다음 해에는 SK에서 뛸 수 없으며 반드시 다른 구단에서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2010년에 SK 프런트에서 재계약 사실을 발표하면서 공개적으로 보도자료(@)까지 돌렸건만 KBO는 여태까지 모르고 있다가 이제서야 알았다는 것.

일단 박경완 측에서는 FA 자격을 취득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을 하지 못했으며, 재활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구단 측이 2년 계약을 제시하여 그저 감사한 마음에 계약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정상 참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를 수용하면 KBO가 사실상 이면 계약을 인정하게 되는, 협회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게 되는 상황. 네티즌들은 '레전드에 대한 예우로서로라도 박경완 특별법 만들어라'라는 의견과 '어쩔 수 없지만 원칙은 준수해야 한다'라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시즌 후 SK가 조인성을 영입함에 따라 LG에 보호선수 20인 외의 보상선수를 지급할 의무를 갖게 되어, FA 파문을 맞은데다 조인성의 존재로 인해 이전에 비해 입지가 더욱 줄어든 박경완이 보상선수의 형태로 LG로 가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실제로 포수난이 심각한 LG의 현실[53]로 보건대 SK가 박경완을 보상선수에서 제외한다면 그 즉시 데려갈 가능성이 컸고, FA 파문이 일어난 상황에서 그게 모양새도 나았다.

그러나 SK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11월 23일 박경완이 보호선수 명단에 포함되어 있음을 공식 발표하여 보상선수설을 단숨에 일축했다. 또한 조인성이 포수가 아닌 지명타자로 활용될 것이라고 밝혀 이변이 없는 한 2012년에도 박경완-정상호 체제는 유지될 거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리고 LG에서는 보상 선수로 투수 임정우를 지명하였다.


4.5. 2012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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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시즌이 시작되자 박경완은 회복이 더디고 정상호는 예전의 그 부상이 또 재발하면서 결국 LG에서 넘어온 조인성이 주전 포수를 보게 되었다.[54] 정상호가 복귀한 뒤로는 조인성과 정상호가 번갈아가면서 포수를 봤다. 조인성 영입 당시의 예측과는 상황이 다르게 되었다. 부상에서 회복되었으나 2군에서 1할도 되지 않는 타율을 기록하며 타격면에서 극도의 부진을 보였다.

2012년 6월 15일 1군에 올라왔다가 극심한 타격 부진으로 7월 1일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2군에서도 타율 0.136의 기록을 남기면서 확실히 몸 상태가 예전같지 않음을 보였다. 한 편 이만수 감독이 고의로 박경완을 출전시키지 않으면서 은퇴를 종용한다는 설이 돌았는데, 당시 박경완은 2군에서 겨우 66타수 밖에 나오지 않았다. 또한 스토브리그 기간과 전지훈련 등에서도 의도적으로 박경완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이 논란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2군이 선수 육성을 하는 곳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부상도 있고 나이도 41살인 박경완의 부활을 기다리느니 이재원 같은 포수 유망주를 조련해서 1군 포수로 만드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좋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모양새가 상당히 나빴다는게 흠.

2012 시즌이 지나가면서 SK의 주전포수는 FA로 영입한 조인성정상호로 굳어져갔고, 여기에 일발장타력이 있는 대타요원 이재원까지 군 복무를 마치고 1군에 합세해서인지 가을야구는 고사하고 2군에서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 선수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백전노장이자 팀 전력의 절반이라고 평가받았던 주전포수가 점점 팀에서의 입지가 좁아지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점차 팀내에서 입지를 잃어가는 가운데 타팀에서라도 뛰기 위해 조건없는 방출을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FA 대상자이기는 하지만, 고액연봉으로 인한 보상금과 유망주 유출, 많은 나이등을 고려하면 FA로 팀을 이적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기 때문이었다. FA는 신청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보류선수 명단에 포함되며 2013년에도 SK 선수로 뛰게 되었다.


4.6. 2013 시즌[편집]


3월 19일 목동 넥센전에서 복귀전을 치렀다. 그러나 박경완이 리드했던 투수 여건욱의 성적이 썩 좋지 못해 포수 리드에 대한 감이 떨어졌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이날 전까지 8이닝 무실점에 볼넷은 단 1개를 기록하고 있었지만 이날은 4.2이닝만에 볼넷 2개를 내주고 홈런까지 허용하며 3실점했다. 결국 경기 중반에 백업포수 김정훈과 교체되었다. 타격에서는 2타수 무안타 1삼진.

3월 20일 목동 넥센전에서는 경기 중반에 대수비로 투입되었다. 이날 타격 성적은 2타수 무안타(상대 실책으로 1번 출루)를 기록하였다.

3월 23일 문학 NC전에서도 경기 중반에 윤길현과 배터리로 대수비로 투입되었다. 윤길현은 똥볼을 집어던졌으나 야수들의 호수비에 힘입어 실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허준혁과의 배터리 상황에선 허준혁이 안타와 홈런을 허용하며 1이닝 2실점으로 무너졌다. 타격에서는 1타수 무안타 1삼진. 시범경기에서 계속 무안타 기록을 이어가며 타격에서 영 감을 잡지 못했다.

3월 24일 문학 NC 시범경기 최종전에서도 경기 중반에 대수비로 투입되었고 오랜만에 안타를 기록하였다. 타격성적 1타수 1안타.

그러나 햄스트링 부상으로 인해 개막전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팬들은 시범경기때 고작 몇 이닝 소화하지도 않았는데 퍼졌다며 박경완의 내구성에 대한 회의와 의구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당시 박경완은 39살의 나이에도 130경기를 출전했을 정도 건강했던 포수라 팬들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그런 모습 때문에 박경완이 부상을 안은 상태로 2010 시즌을 뛰었고 이로 인해 회복이 늦어지고 이후 급격히 기량저하까지 왔다는 사실은 팬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개막전 엔트리에서 제외된 이후 3군[55]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2군으로 올라왔는데, 2군 합류 시점부터 2013년 5월까지 2군에서 썩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었는데도 불구하고 1군행 소식은 없었다. 일부 팬들은 2군에서 훌륭한 타격감을 보여주는 박윤[56]과 더불어 왜 1군으로 올리지 않느냐며 불만을 표출했다.

5월 28일 정상호와 교대로 1군에 등록됐고, 30일 6회 조인성과 교체출장하며 333일만에 1군 출장을 기록했다.

6월 5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시즌 첫 선발 출장했다. 투수는 김광현. 불안불안한 김광현의 피칭을 2실점으로 막았지만, 이호준에게 만루홈런을 허용하며 불펜의 대량실점을 막지 못했다. 이재영을 비롯한 불펜진의 피칭이 워낙 막장이긴 했지만...

6월 7일 선발 포수로 출장, 2회말에는 선두타자로 나와 김혁민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치며 1군 복귀 후 첫 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하는데 성공했다. 통산 314호 홈런.

하지만 이후 부진의 늪에 빠지고 2013년 6월 16일 광주 KIA전이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6월 19일 문학 삼성전을 앞두고 팔꿈치 통증까지 겹쳐 2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시즌 막바지까지 소식이 없었다.

2013년 10월 22일 스포츠동아와의 인터뷰를 통해 결국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적지 않은 나이와 팀 내에서 줄어든 입지 때문인 듯. 단독보도 헤드라인부터 "이젠 지쳤다"였으니 얼마나 그에 대한 압박을 받아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더 필요없을 것이다. 현역 생활의 의지가 강했음에도 프런트와 코치진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유니폼을 벗은 경험이 있는 이만수 감독이 정작 박경완에게 똑같은 짓을 3년 동안 강요한 끝에 은퇴시켜 버렸다는 점에서 여러가지로 뒷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 찝찝한 은퇴 과정이었다. 잘 모른다면 과거 선동열양준혁이 삼성에서 있었던 일을 상상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쉽다. 5타점만 더 올렸으면 1000타점이며, 10경기만 더 포수로 출장했으면 KBO 최초 2000경기 포수 출장[57]이라는 대기록을 쓸 수 있었던 상황이라 더욱 아쉽다.

하지만 이 서술은 박경완의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 한 서술에 가깝다. 그 당시 박경완의 기량은 전성기 때, 아니 2010년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져있었고, 실제로 2010년 이후 3년간 10타점도 올리지 못했다. 현역 생활을 더 연장했더라도 과연 그것이 팀에 도움이 됐을지는 미스터리. 어찌보면 40을 코앞에 둔 상황에 김성근 아래에서 아킬레스건 부상을 안고도 거의 풀타임을 뛴 2010년의 혹사가 선수 생명엔 치명적이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58]

다만 포수 마스크를 벗는 대신 SK 와이번스 2군 감독으로 선임, 지도자로 제2의 야구인생을 출발했다.

최의민이 박경완의 레전드 카툰을 그렸다.


4.6.1. 은퇴식[편집]



파일:박경완 영구결번식 3.jpg


파일:박경완 은퇴.jpg


파일:/image/318/2014/04/07/090428199_%25B9%25DA%25B0%25E6%25BF%25CF1.jpg



박경완: "원형아!"

김원형: "이게 마지막 공이다."

박경완: "그래, 고맙다."

김원형: "수고했다."

박경완: "어... 고맙다!"


은퇴식은 2014년 4월 5일 한화와의 홈경기에서 진행되었다. 박경완의 SK 구단 사상 최초의 영구결번식[59] 포수였던 선수 시절 포지션답게 박경완은 시구가 아닌 시포자로 등장했고, 시구자는 그의 평생 절친이자 영혼의 배터리를 이루었던 친구 김원형 투수코치가 맡았다. 김원형이 공을 던지고 박경완이 받아서 2루로 도루저지하듯 던지는 형식으로 시구-시포 행사가 이루어졌고, 이로써 두 번 다신 나오지 못할 21년차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장수 배터리가 서로에게 마지막이 된 한 개의 공을 던지고 받으며 둘의 프로생활 20여 년의 대장정을 성대하게 마무리지었다. 그 뒤에 이 영혼의 배터리의 마운드에서의 간단한 마지막 대화가 뭇 야구팬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SK 와이번스 영구결번

파일:박경완 영구결번식.jpg


파일:박경완 영구결번식 2.jpg

No.26 박경완

경기는 2:6으로 SK가 재역전승을 거두었고, 경기 종료 후 SK의 최창원 구단주, 이만수 감독, 2014년 주장 박진만 등이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이후 선수단이 마운드에서 헹가래도 해 주고 그라운드를 차례대로 돈 후 홈베이스에 놓인 포수장구와 마스크에 입을 맞추었다. 이후에는 자동차를 탄 채 그라운드를 돈 후 선수단과 악수와 포옹까지 한 다음, 1루 응원단상에 직접 올라가 간단한 소감과 사랑합니다를 외치고 불꽃놀이로 은퇴식의 끝을 장식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분 은퇴와는 다르게, 장내 아나운서가 말조심을 정말 제대로 했다. [60] 박경완의 영구결번 26번은 그린존 우측 벽면에 야구공 모양 패널로 부착되었다가 빅보드가 설치된 2015시즌부터는 백스크린 오른쪽(스코어 전광판 아래)으로 자리를 옮겼다. 야간 경기 때는 패널에 불도 들어온다.

공식 은퇴식 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정우영 아나운서가 존경하는 감독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각각 조범현, 김성근, 김재박이라고 답변했다. 팬들은 사제관계가 깊은 2명은 그렇다 쳐도 현대에서 5년 정도만 함께 지낸 김재박을 꼽은 걸 의외로 생각했다고.[61][62]


파일:20170326133643_11.jpg

당연하게도 은퇴 후에 은퇴식 때 입었던 기념 유니폼과 배트[63]인천 SSG 랜더스필드 안에 위치한 L's 갤러리[64] 레전드 플레이어 존에 진열되어 2021년 박물관이 폐관될 때까지 전시됐었다.

5. 국가대표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경완/선수 경력/국가대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1
쌍방울
10
6
.000
0
0
0
0
0
0
0
2
.000
.250
1992
31
49
.224
11
1
0
3
6
5
0
3
.429
.269
1993
26
48
.208
10
2
0
0
2
1
0
5
.250
.283
1994
102
240
.238
57
8
2
14
31
31
0
30
.463
.322
1995
121
361
.227
82
13
2
19
46
48
5
64
.432
.344
1996
126
367
.218
80
19
2
15
74
58
2
79
.403
.349
1997
82
239
.280
67
15
1
16
48
46
2
66
.552
.430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8
현대
123
404
.250
101
25
1
19
66
54
3
45
.458
.324
1999
124
367
.221
81
16
1
23
67
67
2
80
.458
.359
2000
130
408
.282
115
16
0
40
(1위)
95
83
7
99
.615
(2위)
.419
(3위)
2001
130
421
.257
108
13
1
24
81
66
21
98
.463
.395
2002
119
330
.203
67
10
1
19
42
42
6
53
.412
.311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3
SK
122
336
.250
84
16
2
15
60
49
6
68
.443
.373
2004
132
410
.295
121
19
1
34
(1위)
79
94
(4위)
2
108
.595
(2위)
.440
(2위)
2005
114
347
.245
85
17
0
11
44
43
1
64
.389
.357
2006
111
324
.253
82
13
0
13
51
38
2
46
.414
.342
2007
119
352
.247
87
21
1
15
60
60
6
65
.440
.357
2008
101
304
.273
83
17
0
7
36
44
6
54
.398
.377
2009
65
198
.268
53
10
0
12
38
32
3
35
.500
.375
2010
129
381
.262
100
20
0
14
67
51
1
73
.425
.379
2011
10
15
.133
2
0
0
0
1
0
0
2
.133
.235
2012
8
20
.100
2
0
0
0
0
0
0
2
.100
.182
2013
8
19
.105
2
0
0
1
1
1
0
1
.263
.150
KBO 통산
(23시즌)
2043
5946
.249
1480
271
15
314
995
913
75
1140
.458
.367
[1] 당시 고졸 선수가 프로와 입단 계약을 맺기 위해선 10월 15일까지 KBO에 계약서를 제출해야 했다. 만약 기간 내에 계약을 하지 못하면 2차 지명을 받기 위해 1년을 기다리거나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하거나 대학에 진학해야만 했다.[2] 그 뒤로도, 박경완이 모기업의 자금난으로 트레이드되어 현대에서 있었던 5년을 제외하고는 근 22년 동안 항상 함께 있었다![3] 현대 유니콘스 시절에도 한 대졸 출신 투수가 박경완이 고졸이라고 무시하면서 박경완의 사인대로 공을 안 던진 적도 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필드에 뛴 정수근과 박명환의 증언에도 고졸 출신에 대한 차별이 대놓고 있었다고 한다.[4] 친구들을 배신한 이기적인 선수라고 알려졌다고 한다.[5] 당시에는 고교 운동선수들은 실력이 부족하여 운동선수로 성공하지 못할 거 같으면 일단 특기자로 대학을 들어가서 운동을 그만두고 학업을 충실히 하는 쪽으로 전환하여 대졸 학벌로 취업을 하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고교 때까지 운동만 하다가 운동 자체를 그만두고 갑자기 대학입시 공부를 하는 건 불가능 수준으로 어려우니 일단 입학은 체육특기자로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같은 학교의 동창 중 잘하는 선수를 따라 입학하는 걸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근데 그것이 좌절되었으니 박경완을 원망하는 분위기는 자연스러웠다. 참고로 대학의 케이스는 아니지만 축구 선수 안정환의 경우도 같은 중학교 축구부 동창들을 끼워팔기처럼 같이 받아주는 조건으로 축구 명문고가 아닌 유명하지 않은 고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기도 했었다고 한다.[6] 박경완의 재능을 꿰뚫어본 조범현은 아예 박경완 옆집으로 이사를 와서 그가 퇴근하면 근처 체육관에 데려가서 훈련을 시켰다. 너무 힘들어 조범현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욕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7] 당시 방위로 복무하고 있던 선수들은 국방부와 KBO 사이의 협약에 따라 퇴근 후에도 홈 경기에 한하여 출전이 허가되었다. 단, 같은 구장을 사용하는 LG-두산의 경우 양 팀의 경기에 한하여 원정 경기라도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8]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 첫 포스트시즌 진출이다.[9] 단, 유니폼은 1996년 유니폼이기 때문에 실제로 박경완이 뛰던 실질적인 유니폼의 패치 로고는 현대해상걸리버다.[10] 그 방법은 김시진 당시 현대의 투수 코치였다.[11] 이근엽은 유격수였다. 1972년생으로 대졸 염경엽과 같이 1991년에 입단했는데 염경엽보다도 타격이 더 안 좋았기 때문에 밀려서 백업으로 뛰었다. 그나 1995년에는 주전 자리를 잡나 싶었지만(그래봐야 염경엽은 0.162, 이근엽은 0.170으로 둘 다 1할대 타율을 찍었다.) 1996년 인천고를 졸업한 고졸 최고의 유격수 유망주인 박진만이 입단하면서 염경엽에게 대주자, 대수비 자리마저 내줘야했다. 김형남은 신인포수로 정명원1996년 한국시리즈 4차전 당시 노히트 노런 당시 8회까지 포수를 봤다.그 뒤 장광호 포수로 교체[12] 허나, 서로 사인은 잘 맞지 않았다. 정민태는 자신의 공에 자신이 있으니 스트라이크존에 우겨넣는 타입이었고, 박경완은 인-아웃을 잘 활용하는 타입이었다. 박경완이 아웃사인을 내면 정민태가 무시당하는 기분에 일부로 인코스로 던졌다거나 하는 일이 그 당시엔 많았다. 물론 박경완이 영리했다고 하지만 그 당시 정민태는 그냥 던져도 못치는 수준, 즉 레벨이 다른 투수였다. 그러니 자존심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그리고 이전 박경완의 투수리드를 따르지 않았던 현대 투수들 중 유일하게 정민태가 유독 심했다. 대졸과 고졸 이라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면밀히 말하자면, 박경완은 포수인데 고졸 최초로 골든글러브를 받은 선수다. 이후 강민호, 양의지가 수상하기 전까지는 김동수,홍성흔, 진갑용 대졸 선수들이 고루 받았었다.[13] 정민태의 이런 강한 자신감과 자존심은 NPB에서 실패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하라 다쓰노리 감독과는 나름 괜찮았지만 미야케 투수코치와는 별로 관계가 나빴다고.[14] 지금의 수원구장과는 다소 이질적인 감이 있다.[15] 위에 서술 된 사진에 개인 통산 첫 100홈런을 달성한다.[16] 2014년 야마이코 나바로가 두 경기에 걸쳐 4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면서 연타석 홈런 기록은 공동 타이가 되었다. 이후 박병호최정,한유섬이 한 경기 4홈런을 치면서 한 경기 최다 홈런 기록도 공동 타이가 되었다. 그러나 '한 경기 4연타석 홈런' 기록은 2017년 6월 15일 기준으로 박경완이 유일했지만 2017년 6월 16일 윌린 로사리오가 기록하면서 이 기록은 유이한 기록이 되었다. 물론 토종 타자로 한정하면 박경완이 유일하다.[17] 5연타석 홈런이 나오지 않는 이상 깨지기 힘들 기록. 5연타석 홈런은 프로야구에서는 NPB의 무라카미 무네타카가 2022년 두 경기에 걸쳐 한 번 만들어낸 것이 전부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강기웅이 실업 시절에 한 번 기록했을 뿐이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연타석 홈런 기록도 4연타석이다. 외에도 2000년도에 박경완은 3연타석 홈런만 세 개를 기록하기도 했다.[18]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21년 후인 2021년 5월 19일, 키움 히어로즈 박동원이 대구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2021 시즌 들어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원태인을 상대로 3연타석 홈런을 뻥뻥 때려냈다.[19] 당시 현대의 셋업맨으로 00 현대의 3명의 다승왕과 더불어 우승의 주역이었다.[20] SK 코치가 된 후 KBS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는데 4연타석 홈런때는 사실 빈볼을 피하려고 뒤로 떨어진 상황에서 타석에 섰다가 얼떨결에 이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고. 여담으로 그 날은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에 간신히 잠들어서 비몽사몽 상태에서 연습용 배트를 들고 경기를 나섰다고 밝혔다.[21] 이 선수는 90년대 초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잠시 주전으로 뛰던 선수였다. 다만, 한국에 와서는 향수병당뇨병 이 겹쳐 중도 퇴출 된다.[22] 사실 2000년 4월 5일 개막전에도 한화는 현대에게 홈런 10개를 헌납하며 13:17로 진 적이 있다. 이 경기에서도 진기록이 나왔는데, 7회애 백투백투백+몸에맞는공+백투백으로 6타자 5연타수 홈런이 나왔다. 기록의 당사자는 박종호 - 박재홍 - 에디 윌리엄스[21] - 심재학(몸에맞는공) - 톰 퀸란 - 이숭용. 여하튼 한경기 최대 피홈런 신기록과 타이기록을 한달 새 연달아 헌납한 팀이 상대 타자에게 좋게 대응할 리가 없다. 이 해 현대는 대전 10게임에서 42홈런을 기록했다.[23] 의외로 타점이 적은데, 이는 박경완이 이 해 주로 4번 ~ 6번 타순에 나오고 앞의 타자들인 박재홍심재학이 타점을 죄다 쓸어갔기 때문이다. 이 해 타점왕은 팀 동료 박재홍.[24] 실제로 2000년은 타자 부분 다관왕이 배출되지 않았던 해다.[25] 온라인 게임인 마구마구에서 B.J라는 별명을 달린 잠재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이 선수다[26] 포수는 발이 느린 선수가 많은 편이라 20도루는 커녕 한 시즌에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한 포수도 거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상 위험 때문에 도루를 시도하지 않는 이유도 있다, 또한 포수가 발이 빠르면 뭐하냐는 풍조와 현실도 한몫한다. 실제 유명한 대도중 하나인 크레이그 비지오역시 시작은 포수로 시작했지만, 빠른 발을 포수에서만 썩히는건 아깝다는 이유로 내야로 전향한 케이스, 윌리엄 서호프[25]도 있고, 제이슨 켄달은 말년에 외야 전향을 시도했다. 박경완 이전이나 이후에도 포수로서 20-20을 기록한 선수가 박경완을 뺀다면 전 세계를 통틀어 1999년의 이반 로드리게스와 2022년의 J.T. 리얼무토뿐인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고 그가 99시즌 MVP를 수상한 것에서 포수로서 이 20-20을 달성 한 것 자체가 엄청난 것임은 자명하다. 박경완이 홍성흔에게 골든글러브를 뺏긴게 이상하다 싶을 정도.[27] 타율로는 홍성흔이 조금만 앞서지 세부 스탯은 박경완이 좀 더 우위였다.[28] 한국프로야구에서 규정 타석을 채운 선수들 중에서도 1할을 친 선수는 의외로 많지 않다. 1997년의 박진만김호가 기록한 적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주전 유격수였기 때문에 타율이 바닥이었음에도 꾸준히 출장해서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유격수, 2루수, 중견수, 포수는 수비에 체력을 많이 쏟는 센터라인 포지션이라 공격면에서는 디버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공교롭게도 2000년 골든글러브를 휩쓸었던 현대의 센터라인, 밀레니엄 4박은 2002년에 모두 성적이 안 좋았다.[29] 참고로 SK는 박경완의 친정팀이었던 쌍방울이 해체된 뒤 갈 곳이 없어진 선수들을 인수하여 재창단한 팀이다.[30] 하지만, 이것도 와전된 이야기라는 말이 있는데 FA 자격을 얻기 직전인 2002년 경기 중 태업성 플레이를 선보이기도 하는 등, 현대를 떠날거라는 모습을 암시하기도 했고 시즌이 끝나자마자 FA 계약 조건으로 7년 42억이라는 거액을 요구하는 등 대놓고 현대가 싫은 티를 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과거 현대 팬이었던 사람들 중에는 박경완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어디까지나, 이는 블로그의 글이었으며, 현대에 대해서 잘 아는 관계자들은 오히려 박경완을 잡지 못하면 순순히 포기하는 결정으로 따랐다고 했다.[31] 2000 시즌이 끝나자 마자 SK의 전력보강 선수가 되어 조웅천과 같이 SK로 떠났었다.[32] 당초 박경완이 떠난 현대는 강귀태이택근을 주전포수로 쓸 계획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동수가 방출되자 백업요원으로 쓰기 위해 바로 자유계약선수로 영입한 것. 결과적으로 희한하게도 김동수는 방출 후 박경완이 있었던 현대 유니콘스로 가서 회춘을 하여,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우승도 하며, KBO 골든글러브도 수상한다.[33] 김동수는 95경기에 나왔고, 양용모와 강성우가 각각 74, 62경기에 나오며 백업으로 뛰었다.[34] LG의 프랜차이즈나 다름없던 김동수는 삼성 라이온즈를 거쳐 2002년 한 해동안 SK에서 뛰며 문학구장 개장 첫 홈런을 치기도 하는 등 포수진이 부족했던 SK에서 어느 정도 출장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2002년 말 조범현이 SK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방출당했다. 이는 조범현이 삼성 배터리코치 시절부터 김동수와 사이가 안 좋아서 그랬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덧붙히면 김동수는 이미 삼성 시절에 2시즌간 먹튀였었다.[35] 장광호는 10억원에 SK로 팔려왔지만 다시 현대에 5천만원에 팔려가 2년간 더 뛰다가 은퇴했으며, 김충민은 2001년에는 아예 1군에 올라오지 못 했다.[36] 하필 한국시리즈 상대는 전년도까지 박경완의 소속팀이었던 현대 유니콘스였다. 더군다나 SK가 박경완을 영입한 뒤 베테랑 포수 김동수를 방출시켰는데, 정작 이 김동수를 데려간 팀 역시 다름 아닌 현대 유니콘스. 김동수는 이 해 현대 유니폼을 입고 커리어 유일한 3할 타율을 기록하는 등 완벽히 부활하면서 현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개인적으로도 4년만에 골든글러브를 탈환한다.[37] 이호준은 4번 타자로 뛰면서 타점왕을 차지했고, 이진영은 거포이기 전에 중장거리형 타자였으나, 이듬해 개인 첫 20홈런을 치며 데뷔 첫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발탁이 된다. 허나, 도하 참사를 겪는다...[38] 홍성흔의 성적은 타출장 OPS 0.329/0.384/0.475/0.859의 성적을 찍었고, 최다안타와 전경기 출장의 기록을 남겼지만 박경완은 더 넘사벽의 성적을 찍었다. 0.295/0.440/0.595/1.03634홈런(홈런왕)을 기록했다. 참고로 이 기록은 역대 포수 단일시즌 sWAR 1위(8.36)다. 무엇보다도 박경완은 거의 모든 경기를 포수로 출장했지만, 홍성흔은 이 해 지명타자 출장 빈도도 어느 정도 높았던 편이었다. 이 해 골든글러브 수상에 말이 상당히 많았다. 기자들과 친한 것 때문에 받은 거 아니냐는 비아냥도 상당히 들었던 상황. 기자들의 3할에 대한 어느 정도 집착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39] 홈런왕을 차지하고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지 못한 경우는 2004년 박경완을 비롯하여 1998년의 타이론 우즈, 2015년의 박병호가 있다.[40] 단지 박병호는 테임즈가 어마어마한 기록을 수차례에 남겼기에 수상 받지 못한 거다. 만약, 박병호가 받았다면 서술 된 홍성흔처럼 대참사가 날 뻔했다.[41] SK는 2004년에 최경철을 신인드래프트에서 지명 후 영입했고, 이재원을 2006년에 류현진을 거르고 지명 후 영입했다. 하지만 둘 다 박경완을 넘어설 수 없었다.[42] 이게 얼마나 대단한 포수라는 소리냐면, 2020시즌 현재 벤치의 지시를 듣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볼배합을 하는 포수는 국가대표 1옵션이자 125억 FA, 이만수 이후 최초의 포수 타격왕 등 괴물같은 타이틀을 가진 양의지뿐이다.[43] 2연패 뒤 첫 4연승이기에 더더욱 값진 우승이라고 인터뷰를 하였다.[44] 이 해에는 논란이 조금 있었는데, 자기랑 성적이 얼추 비슷한 조인성이 받아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냐는 등 우승 프리미엄 하나로 받았다며 커뮤니티에서 수 많은 댓글 전쟁이 있었다. 당시 LG는 5위로 시즌을 마쳤다. 66685[45] 2루타 이상 장타가 나올 것을 예상할 땐 1루측 파울라인 안으로 둥글게 들어가 방향을 바꾸기 수월하게 베이스러닝을 한다.[46] 당시 LG는 웬만한 투수를 다 써서 선발투수인 심수창을 뺴면 투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날 지명타자였던 최동수를 올린 것. 당시 3루수 정성훈과 우익수 이진영이 서로 던지겠다고 마운드로 걸어왔으나 김재박 감독이 최동수 자신을 지목했다고 밝힌 바 있다.[47] 0.1이닝 1타자 상대 0실점[48] 유일한 기록은 아니다. 2008년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에서 1위인 박기혁과 2위인 박진만의 표차도 2표.[49] 참고로 눈을 약간 돌려 다른 방향을 보게 되면, 전체 최소 표차는 2004 외야수 부문의 3위와 4위의 경우이다. 이병규와 박한이의 표수가 같았고, 때문에 2004년 외야수 부문의 골든글러브 수상자는 4명이었다.[50] 위를 보면 알겠지만, 데뷔 초 김원형은 고려대학교 야구부와 불꽃 튀는 경쟁을 해서 겨우 영입한 받은 스타이자 초특급 유망주였고, 박경완은 대학에서 부름을 받기는 했으나,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은 신인 선수에 불과했다![51] 당초 SK는 2010년 보류선수 명단에서 허웅을 제외했었다. 2011년에 그대로 남긴 했지만 신고선수로 신분이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52] 본 규약에 위반해 체결한 선수계약은 무효이다. 위반 구단은 총재에 의해 500만원의 제재금이 과해지며 그 선수와 향후 선수 계약을 다시 체결하지 못한다.[53] 당시 조인성은 압도적인 LG의 주전포수였고, 김태군은 미완의 유망주였다. 윤요섭은 공격력은 무난했지만 수비가 애매했고, 심광호는 1할대 타율을 보여주며 2군에서나 나왔다.[54] 결과적으로 조인성 영입은 신의 한수였다. 조인성이라도 없었더라면 허웅이나 최경철이 주전으로 나와야 했다.[55] 루키팀이라고도 하며 영혼의 배터리인 김원형이 코치로 있다.[56] 박종훈 LG 전 감독의 아들로 주목받았던 그 선수다. 항목 참고.[57] MLB에도 5명밖에 없는 기록이다.[58] 실제로 조인성한화 이글스 시절 김성근을 만나자마자 바로 치명적인 노쇠화를 달고 다녔다. 4월인데 한국시리즈 7차전 뛰는 포수마냥 지친 모습. 나중에 극한 훈련 때문에 무릎에 무리가 심해졌고, 종아리 근육, 어깨 등의 부상으로 주루는커녕 도루저지조차 힘겨워하다 트레이드로 두산에서 이적한 최재훈의 맹활약으로 자리가 없어졌다. 어찌어찌 2,000경기 출장은 채웠지만 나이가 나이다보니 재활과정을 밟기도 무리였는지 김성근의 경질 이후 선수단 정리 과정에서 시즌 중 은퇴 코스를 밟았다.[59] 인천 연고 팀사상 최초 영구 결번이기도 하다. 삼미-청보-태평양-현대는 영구 결번 지정자가 없었으며, 설령 있었어도 팀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쓰자면 정명원의 28번이 2001~2007년에 주인이 아예 없어서 준영구결번에 가까웠지만 정식으로 지정된 것은 아니니 논외.[60] 전년도 박재홍 은퇴식 당시에 장내 아나운서가 영원한 감독 이 만 수라고 했다가 오히려 야유소리를 더 크게 만드는 역효과를 불러왔다.[61] 사실 의외일 것도 없는 것이, 1~2년만에 짤리는 감독도 부지기수인데 5년이나 같이 한 건 야구계에선 꽤 오래 같이 있던 거다. 실제로도 쌍방울 - SK 시절에 함께한 조범현과 김성근을 제외하면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지도자 중 하나이기도 하고. 더욱이 현대 시절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과 2000년 MVP 수상, 2001년 KBO 포수 유일 20-20 클럽 달성 등 여러 가지 영광의 순간을 김재박 감독과 함께하기도 하였다.[62] 이와는 반대로 박재홍은 은퇴발표 기자회견 때 가장 기억나는 감독으로 김재박을 먼저 뽑았다. 박재홍은 현대 창단시절에 신인 데뷔를 했고 그 때가 전성기였으니 당연하다는 의견이 많았다.[63] 2000년 5월 19일 한화전에서 KBO 최초 4연타석 홈런을 칠 때 사용한 배트[64] 전신팀인 SK 와이번스부터 이어저 오는 구단 역사관으로 인천야구의 변천사와 SK 와이번스 히스토리, 레전드 플레이어존 및 우승 트로피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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