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독립운동가)

덤프버전 : r20210301


파일:박경철2.jpg
성명
박경철(朴景喆)
이명
박경철(朴景哲, 朴京喆)
생몰
1885년 3월 14일 ~ 1967년
출생지
서울특별시
사망지
카자흐스탄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경철은 1885년 3월 14일에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0년에 러시아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주했고, 1916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정촌에서 명동학교(明東學校) 학감 겸 교사로 근무했다. 1919년 3월 간도 지역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6월에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개최된 동지회(同志會)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대표로 참석했고, 12월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참모로 발탁되어 홍범도와 함께 일제에 맞서 항일 투쟁을 벌일 것이며 한인 동포들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유고문을 발표했다.

1920년 8월, 박경철은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의 참모부장이 되었고, 이후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정하자 이에 맞서기 위해 시베리아로 이동해 1920년 11월 이승조가 이끄는 신민단(新民團)의 한 부대에 합류하여 참모로 종군했다. 이후 한창걸 등과 함께 연해주에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노농군회(勞農軍會)를 조직하고 참모장이 되었으며, 1921년 5월 강국모(姜國模), 김응천(金應天), 정재관 등의 혈성단(血誠團)과 통합하여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하고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어 러시아 백군에 가담해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1923년 2월 고려 제1군사령부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최고 기관 설치를 주장하는 창조파에 가담했으며, 그해 6월 윤해, 신숙 등 39명과 함께 헌법초안 수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2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조파가 조직한 국민위원회에 가담해 후보국민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24년 9월 이동휘의 고려공산당의 지원에 힘입어 동양혁명대의단(東洋革命大義團)을 조직하고 군사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제와의 마찰을 피하고 싶었던 소련 당국의 압력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독립운동단체들이 강제 해산당하고 행동에 제약이 가하자, 박경철은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1925년 9월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이송되었고, 1967년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박경철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