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커터칼 피습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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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커터칼 피습 사건

파일:3480101.jpg

발생일
2006년 5월 20일 19시 15분
발생 위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현대백화점 신촌점 앞 광장
유형
흉기 피습
가해자
지충호
피해자
박근혜
1. 개요
2. 사건 경위
3. 범인 지충호는 누구인가?
4. 기타
5. 유사 사례



1. 개요[편집]


2006년 5월 20일 오후 7시 15분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서울 현대백화점 신촌점 앞에서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 후보 지원유세에 참가하던 도중 괴한 지충호(당시 50세)에게 커터칼로 얼굴을 피습당해 상해를 입은 사건.


2. 사건 경위[편집]


사건 당일 범인 지충호는 청중으로 잠입해있다가 박근혜에게 다가가 10cm 가량의 커터칼을 박근혜의 우측 뺨에 대고 그어서 11cm 길이의 자창을 입혔다. 이 사고로 박근혜는 인근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져 봉합수술을 받았으며, 범인 지충호는 테러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유세장에서 '대한민국만세'라고 외친 뒤 칼을 버리고 달아나려 했으나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이후 경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때 박근혜가 입은 상처는 아슬아슬하게 안면신경을 비껴갔다고 하며 경동맥에 부상을 입었다면 사망하거나 정계를 은퇴해야할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얼굴 근처로 워낙 위험한 급소라 이런 사건이 터지면 으레 나오는 자작극 의혹도 거의 없었다. 범행 배후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재판 전, 국선변호사와의 접견시 민주 투사의 이미지를 내세우기 위해 '박근혜가 독재자의 딸이며, 자신이 5공화국 시절 억울하게 옥살이하여 범행했다'고 밝혔으나 거짓으로 밝혀졌다.[1] 2006년 5월 29일 '폭력, 간통 등의 혐의'로 15년의 복역한 것에 대해 "내가 지은 죄에 비해 옥살이를 너무 오래해 억울하다. 먹고 살 방법을 마련해 달라"며 억울함을 호소했고 결국 박근혜에게 "박 대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미안하다"고 했다. 이후 재판에서 공직선거법과 폭력행위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의 상해로 징역 10년을 받고 수감되었다가 2016년 5월에 출소했다.

그 이후에도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사건이 있을 때마다 자주 회자되는 사건인데, 박근혜 개인에게는 불행이겠지만 정치인으로서는 동정표를 받으며 선거 승리에 도움이 됐다. 이미 선거 중반부터 한나라당의 압승이 예고되어있던 4회 지방선거에서 대전시장 만큼은 열린우리당 염홍철 후보의 우세로 예측되고 있었으나, 이 사건이 대전시장 선거의 판세를 뒤엎어서 한나라당 박성효 후보의 당선으로 결말이 났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전라북도 단 한 곳만 얻게 되는 유례 없는 참패를 거두게 한 효과를 보였다. 정치에 관심있다면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대전은요? 라는 별칭으로 자주 회자된다. 박근혜가 병원에서 깨어나서 한 말이 바로 이 말이다. 다만 세간에는 "대전은요?" 말 한마디 때문에 대전시장이 뒤집혔다는 식의 호도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선정적 보도에 가깝다. 동정표에 의해 결과가 뒤집힌 것은 피습 사건 자체 때문이지 박근혜의 말 한마디 때문이라 보기 어렵다.

3. 범인 지충호는 누구인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지충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지충호1956년생으로 경기도 인천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선인중학교를 중퇴한 후, 구두방 점원, 공사장 막일 등을 여러가지 일에 종사하다가, 유부녀와 간통을 했고 그녀의 남편에게 공갈 협박으로 돈을 뜯다 징역 4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고 출소한 뒤에도 내연녀를 찾아가 남편에게 협박했다. 그 뒤 특수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전과 8범이 되어 총 1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2005년 12월 17일, 지충호는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 장회 집회에서 한나라당 곽성문 의원의 관자놀이를 가격하여 구속되기도 하였다.

범행 동기는 지충호의 자기 과시욕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충호는 한나라당과 관계된 4명과 평소부터 알고 지냈다고 한다.[2] 구의원 이 씨, 주민 자치 모임 간부를 지낸 황 씨, 절친 최 씨, 서 씨 등의 주변 인물들이며, 그중 이씨와 황씨는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 심사에서 모두 공천을 받지 못하고 탈락했고, 주민들의 제보에 따르면 그들은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해 앞장섰는데 막상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한나라당에 대해 공공연히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범행 한 달 전, 지충호는 한나라당 관계자 4명을 포함한 자리에서 지충호는 "야당(한나라당)이나 무소속은 힘이 없다. 내가 한나라당 의원도 한번 패봤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며 얘기했다는 것이다. 그에 구의원 이씨는 "작년 말에 한나라당 의원을 폭행했다는 얘기를 자랑스럽게 하는 것을 듣고 거짓말인 줄 알고 곧이듣지 않았다"고 허풍으로 들었다고 한다.

또한 지충호는 범행 이전부터 한나라당을 '보호감호소 제도를 만든 나쁜 당이라는 인식'과 모임에서 주변인들의 성토(한나라당에 대한 불만), 지충호의 자기과시적이고 우쭐하는 성격에 '한나라당 의원을 폭행했다는 말'을 무시하는 듯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더해져, 더 큰 사건을 벌이려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 지충호는 경찰 진술에서 "장기간 교도소 생활 등에 대한 억울함을 풀기 위해 큰 사건을 저지르기로 결심하고 2005년 12월에 연설 중인 한나라당 곽성문 의원의 멱살을 잡았으나 별다른 처벌 없이 경찰에서 풀려나 더 큰 사건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

지충호는 이 사건으로 폭처법 및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16년 5월 만기출소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다른 범죄로 재수감된 것으로 보였지만 현재는 다시 출소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근황은 불명이다.

4. 기타[편집]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 사건으로 입원한 박근혜를 문병했는데, "나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질산 테러테러를 많이 받았다." 라는 말을 하였다.

당시 일본 관방장관이었던 아베 신조는 박근혜에게 와규를 선물했다고 한다.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로는 지충호 열사라거나 지라툴, 제2의 김재규 등의 드립이 성행하는 등 그의 행적을 재평가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당사자 박근혜가 본인의 행적에 의해서는 나쁘게 평가 받을 뿐, 그것과 별개로, 지충호의 행동은 살인 미수. 분명한 중범죄이다.

당초 범인은 서울특별시장 후보였던 오세훈을 노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 2020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유세 중이던 오세훈 후보를 흉기로 습격하려던 범인이 제압당하면서 이 사건이 재조명되고 있다. #


5. 유사 사례[편집]


브라질에서는 2018년 10월, 극우 성향 대선 후보인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피습을 당하면서 반대로 보수층의 결집을 부르고 결국 보우소나루가 대통령에 당선이 된 유사한 사례가 발생했다.

2022년 신촌에서 송영길 피습 사건이 발생하며 주요 정치인, 그 중에서도 당대표에 대한 공격이 또 한번 발생했다. 2006년 당시 박근혜는 제1야당 대표였고, 2022년 당시 송영길은 집권여당 대표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두 사건 모두 범인이 정치적으로 반대 진영이 아닌 극단적인 부류에게 습격받았다는 점이 같다. 다만 송영길이 대표로 있던 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당의 후보 이재명은 해당 선거인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패배했다.

2022년 3월 24일에 사면을 받은 후 퇴원해, 대구 자택으로 내려가서 인터뷰를 하는 도중 또 누군가의 소주병 테러가 일어났지만 곧 경호원에 의해 제지당했다. MBC 채널A

2022년 7월 8일, 이 사건으로 습격 받았던 박근혜에게 선물을 한 바 있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기간 동안 찬조연설을 하던 중, 피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에서는 박근혜 피습사건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력정치인이 선거를 앞두고 지원유세를 하다가 피습당했으며, 그 여파로 보수정당에게 압승을 안겨줄 것으로 예측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로부터 9개월 뒤, 일본에서 또 기시다 후미오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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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정희는 2공화국 시기(1961년)에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가 대통령 중심제로 3공화국 헌법이 개정되어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67년 6대 대통령 재선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의 경우 원래라면 3선 금지에 막혀 출마가 불가능하지만 1969년 3선 개헌을 진행하여 접전 끝에 당선되었다. 이후 1972년 유신 헌법 개헌을 단행하여 4공화국 대통령으로 임기를 수행하다 1979년 10월 26일 사망했고, 1980년까지 4공화국이었다. 그래서 5공화국 시절은 틀린말이다.[2] 이 씨와 황 씨는 지충호와의 친분을 부인하고 있다. 황 씨는 지충호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라고 말했으며, 구의원 이씨는 "우연한 계기로 단 한번 만났을 뿐 친하게 지낸 사이는 결코 아니다"라고 부인했다.[3] 참고로 아베 신조와는 달리 기시다는 살해당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