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평가/대통령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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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긍정적 평가
2.1. 광우병 사태 우려 발언
2.2. 세종특별자치시 원안 고수
3. 부정적 평가
3.1. 의정 활동 부진
4. 논란이 있는 평가
4.1. 선거의 여왕
4.1.1. 선거에서 이기는 게 장점인가?


1. 개요[편집]


제18대 대통령 박근혜의 대통령 이전의 평가를 서술한 문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대통령으로서의 평가가 곤두박질 치며 탄핵된 대통령 박근혜와 국회의원 또는 한나라당/새누리당 대표 박근혜의 평가를 나눠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 박근혜/비판 문서에서 분리했다.


2. 긍정적 평가[편집]


국회의원 재직 당시 한나라당, 새누리당 때 중요한 때마다 당에서 나선 이미지로 정치적 실체가 드러나기 이전까지는 지지자들에게 약간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단지 아버지의 후광에 불과했고, 대통령이 된 후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세운 긍정적인 업적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2.1. 광우병 사태 우려 발언[편집]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졸속 협상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친이계와 친박계의 뿌리깊은 갈등이 숨어 있었으며 사실상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박근혜의 불쾌감을 드러낸 것 뿐이다. 사실 국민의 우려가 걱정되었다면 사실상 이명박 정부 초기 야당의 수장이나 다를 바 없었던 박근혜가 협상 전에 진취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섰어야 했으나 광우병 협상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드러낸 것은 바로 국민이었다.[1] 당시 박근혜는 시위대의 흐름에 숟가락 하나 얹은 것 뿐이다.

2.2. 세종특별자치시 원안 고수[편집]



이명박 정부는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을 무효화하려고 했으나, 박근혜는 이에 반대하여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을 지지하는 연설을 국회에서 하였으며, 결국 이 연설 덕으로 세종시는 행정수도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이 때 박근혜가 행정수도를 옮기기 위한 이유로 국토를 균형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수도권 편중화가 심각한 지금의 한국의 실태로 봤을 때, 박근혜가 원안을 고수한 것은 조금이나마 수도권에 인구가 밀집한 현상을 제어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박근혜의 국회 활동은 18대 대선에서 충청권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데에 기여를 하였다.[2]

위의 우려 발언과는 다르게 박근혜의 국정에 대한 진정성 있는 의정활동 중 하나. 박근혜가 내세운 수도권 밀집 완화, 정책의 일관성 유지의 필요 등 당위성도 충분했으며, 박근혜가 본인의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저지를 했으며, 친박계와 친이계의 정치 다툼이라는 배경을 떠나서 반드시 했어야 했다는 점 때문에 높이 평가받아야 겠지만 그놈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묻혔다.

3. 부정적 평가[편집]




3.1. 의정 활동 부진[편집]




3.2. 최태민·최순실 일가[편집]


박근혜의 정계 입문 때부터 최순실과 비서실장이였던 정윤회, 최태민의 아내이자 최순실의 어머니인 임선이가 박근혜에게 관여 했었고 임선이는 1998년 재보궐, 15대 총선에서 불법 선거 자금를 제공했단 의혹도 있다.

4. 논란이 있는 평가[편집]




4.1. 선거의 여왕[편집]


박근혜는 98년 재보선을 통해 정계에 들어오고 난 후 본인이 출마한 선거에서는 거의 대부분 당선됐다. 07년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에서 이명박에게 접전끝에 석패한 것이 유일한 패배였을 뿐이다. 그나마도 당내 경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선거 본선에서 진 적은 없다. 08년 친박계가 대규모로 낙천했을 때인 18대 총선에서도 본인은 당선됐다.

당 지도부로서 선거를 이끌 때도 대부분 승리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역풍으로 한나라당의 완패가 예측 됐던 17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 대표로서 120석 이상을 얻어 예상 이상의 선방을 해냈다. 천막당사 등 절실한 한나라당의 모습을 어필한 것이 선방의 주요원인으로 분석된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도 면도칼 테러를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선거운동을 완수하며 한나라당의 완승을 이끌었다. 19대 총선에서도 이명박 정권 말기 여당의 입장에서 비대위원장으로 당을 이끌며 과반의석을 확보했다. 그해 18대 대선에서는 본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며 마무리.

공식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으나 박근혜 개인의 이름 내건 친박연대와 '친박 무소속 연대'가 18대 총선에서 대선전하여 친박연대 14명, 무소속 연대 12~16명[3]이 당선 되었고 특히 친박연대의 비례대표 득표율은 당시 제3당이었던 자유선진당보다 높은 득표율을 냈다. 당시 박근혜의 이름값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즉, 본인이 출마하거나 지도부로서 이끌었던 선거는 모두 이긴 셈이다.


4.1.1. 선거에서 이기는 게 장점인가?[편집]


박근혜 본인에게는 당연히 장점이지만 국민들 입장에서는 손해.
선거에선 이겨놓고 정작 뽑아준 국민을 위해 그 국회의원들이 한 일이 없다.

대선에서 박근혜를 뽑은 이유

'선거의 여왕'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의 여왕'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유

17대 총선, 19대 총선 등 한나라당/새누리당이 위험할 때마다 박근혜가 선거를 지휘해 좋은 결과로 이끈 건 사실이고. 이것은 지지자들이 박근혜를 좋게 보는 이유지만 이런 현상에 대한 반론들 역시 존재한다.

선거의 여왕이란 이명은 허울 뿐인 것으로. 북풍, 민주당계 정당과 진보 정당의 자멸, 의 후광, 여성 정치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성립한다는 의견이 바로 그것이다.

그 반론에 대해 살펴보자면, 일단 북풍은 박근혜뿐만 아닌 보수당의 주요 선거 레파토리가 된 지 오래고, 민주당계 정당과 진보 정당의 자멸은 2004년 17대 총선 중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60대 이상은 선거 안 해도 된다.', 2006년 지방선거참여정부의 실정으로 인한 반사이익, 18대 대선 중 이정희의 의도치 않은 박근혜 서포트 등 발언 논란은 매 선거마다 있는 것이긴 하나 선거의 승리의 도움이 됐다. 백괴사전의 박근혜 문서에는 '무능한 야당에 의해서 승리 당한 박근혜'란 서술이 있다. 부모의 후광쪽은 박근혜의 정치 인생의 기반이 되고 있으며 박정희의 딸이 아니였다면 대통령은 물론이고 정계 입문은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에는, 박근혜가 선거에서 이기기만 했지 뭘 한게 없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사실 대부분 국민들에게는 정치인 박근혜가 아닌 박정희의 딸 박근혜의 이미지가 더 크며, 특히 노인층에게는 박정희 시절의 그리움과 박정희 딸이니 잘 할 거라는 기대도 컸다. 여기에 유명 여성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표를 주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이러한 이유들이 묻지마 투표로 이어져 박근혜가 선거의 여왕이 되고 대통령이 된 것이다.

물론 좋은 쪽으로 보자면 직접적으로 비교하긴 무리겠으나 박정희의 딸인 박근령을 비롯해 대통령 2세들의 정치 참여가 적지 않은데 모두 박근혜만 한 입지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는 것을 볼 때 부모의 후광을 이용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으로 볼 수 있다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사실상 박근혜는 오래 전부터 박정희의 곁에서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하며 정치 쪽에 몸을 담그고 있었던 만큼, 애초에 다른 형제들과는 차별화될 정도로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소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다. 애초에 박근령이나 박지만의 경우에 언론에 노출 되는 경우는 상당히 적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정치인에게 선거 승리는 아주 중요한 문제지만, 원론적으로는 정책을 펼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당선이 된 다음에 어떤 정책을 펼치느냐가 제일 중요한데, 당선만 잘 되고 정책적으로는 좋은 평을 못 받았다. 오랫동안 당대표로서 당을 이끌면서도 사실상 유의미한 법안 하나 제출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며, 대통령에 당선된 후 국정을 지휘하면서도 인사실패,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등 여러차례 행정 미숙을 보여줬고, 중요한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도 끊임없이 불통 논란에 휩싸였던 걸 생각하면, 선거의 여왕으로서 선거를 이끈 이후에 대체 뭘 했냐는 소리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이명은 진실이나, 그 이명이 성립한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박근혜의 이 능력은 끽해야 새누리당과 지지자들의 입장에서만 좋은 일일 뿐 사실상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는 아무런 이득이 없는 허울이라는 것. 한 나라의 정치인으로서의 장점이란 그가 내세운 '정책'이 미친 긍정적인 효과를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특정 정당의 승리에 기여함을 말하는 게 아니다.

거기에 대통령이 된 이후로도 모든 선거(재보궐선거 포함)를 새누리당이 승리 했었으나 이후 거의 개입 논란이 일 정도로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의 후방 지휘 하에 선거를 치렀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정부심판론에 힘입어 여당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기록하며 완패하기도 했다.


[1] 물론 광우병 파동 자체가 과장되었다는 여론도 상당하다 보니 당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무리한 비판도 금물이다.[2] 육영수 전 여사의 고향이 충청권인 것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3] 12~16이라고 한 것은 친박계가 확실한 사람과 굳이 계파 분류를 하자면 친박계로 분류되는 사람을 포함한 표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