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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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가운데 인물.
박녹주
朴綠珠

본명
박명이(朴命伊)

춘미(春眉)
출생
1905년 2월 28일
경상북도 선산(善山)
사망
1979년 5월 26일 (향년 74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면목동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직업
판소리, 소리꾼

1. 개요
2. 상세
3. 참고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이자 소리꾼. 중요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 제5호 판소리(흥보가) 예능보유자다.[1]


2. 상세[편집]


가난한 집안에서 3남 2녀중 맏딸로 태어난 그녀는 송만갑과 그 제자 김정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그녀가 주장한 예술적인 기반 자체가 동편제였기 때문에 계보상으로 동편제 명창에 속하며, 20세기에 들어서 송만갑제 판소리의 전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1964년에 처음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될 때 남긴 녹음 자료에도 송만갑제의 더늠[2]을 중심으로 하는 대목을 맡아서 소리를 하기도 했다.[3] 그러나 실제로는 송만갑이나 김정문 이외에도 서편제의 김창환, 정정렬에게서도 소리를 배우는 등 사승 자체는 동편제나 서편제를 가리지 않고 배웠으며, 동편제 흥보가를 부르면서도 제비노정기만큼은 서편제인 김창환의 소릿제로 부르고 있는 등, 동 시대 여러 명창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유파를 겸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듯 하다. 다만 송만갑이나 정정렬 이외에도 동편제 명창인 박기홍, 유성준에게서도 배웠던 만큼 동편제의 소리 지향에 가까운 소릿제를 부르긴 하였다.

23세인 1928년부터 음반을 취입[4]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성악연구회에도 참여하여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숙영낭자전, 배비장전 등 창극의 여주인공으로 자주 무대에 서기도 하였다. 44세가 되던 1948년에는 여성국악동호회를 만들어 당시 창극 활동을 했던 여성 명창의 처우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고, 국극의 연출에도 참여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사생활은 매우 불행했는데 알콜 중독과 노름꾼인 아버지 박재보에게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어릴때부터 소리를 배우러 다닌, 딸 박녹주가 그렇게 배운 소리로 푼돈이라도 벌면 모두 가로채갔으며, 박녹주가 14세가 되었을때 200원을 받고 그녀를 기생으로 팔아넘기고 그녀가 소리꾼으로 대성한 이후에도 그녀의 아버지는 친부라는 이유로 1937년에 사망할때까지 그녀를 끈질기게 착취했을 정도로 막장이었다. 이 때문에 박녹주는 신세를 비관해 자살 시도를 한 적도 있다. 박녹주는 유약한 성품 탓에 차마 아버지와 의절하지 못했단다. 특히 박녹주의 형제들은 하나같이 아버지를 증오하며 그를 부모 취급도 하지 않고 돈도 주지 않았기에 아버지가 만만한 박녹주에게 가서 갈취한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박녹주는 1948년에 눈병을 앓아 한쪽눈의 시력을 잃었고[5] 해방 이전부터 접했던 아편 중독 증세로 인해 병고와 옥고를 겪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순천의 거부인 김종익과 결혼했다. 결혼 이전부터 김종익과 교류를 했었으며 김종익은 이 인연으로 국악계에도 지원을 많이 하였다. 김종익과의 사이에서 자식은 없다.

1960년대부터는 본인이 보유하고 있었던 바탕소리 녹음을 많이 남겼다. 1963년 기독교방송에서 춘향가를 녹음하고, 1972년 자택에서 기록보존용으로 심청가를 녹음하였다. 흥부가는 총 4차례나 전판을 녹음하였는데, 이 가운데 1967년 녹음(고수 : 정권진)과 1973년 녹음(고수 : 김동준)은 음반화 되었다. 전자는 지구레코드에서 출반되었으며, 이후 CD로도 복각되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문화재보호협회 소장 녹음으로 여러 차례 음반으로 제작되었으나 CD로는 제작되지 않아 지금은 듣기 어렵다. 그 외에 출반되지 않은 녹음으로는 1976년 문예진흥원 판소리 조사 사업 당시에 녹음한 것(고수 미상)과 녹음 시기 미상의 기독교 방송 소장의 녹음(고수 : 정철호)이 있다.

제자로는 박송희, 조순애, 장영찬, 박초선, 성창순, 성우향, 한농선, 이일주, 조상현, 이옥천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박송희와 한농선이 그의 뒤를 이어 흥부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성창순, 성우향, 조상현 등은 중요무형문화재 심청가의 예능보유자로, 이일주, 이옥천 등은 각기 시도지정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는 등 굵직한 명창들을 길러냈다.

이처럼 판소리, 그 가운데에도 흥부가 전승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자 당대의 슈퍼스타였는데, 일반 대중들에게는 김유정의 스토킹 상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시대가 시대였고 김유정이 훗날 소설가로 유명해지는 바람에 한동안 짝사랑으로 포장되었으나, 사실 김유정의 행동거지는 악질 스토커의 그것이었다. 김유정은 박녹주가 자신의 마음을 안 받아준단 이유로 그녀에게 혈서를 보내는가 하면, 박녹주가 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노려 사람을 납치하려고도 들었다.[6] 그러다 보니 박녹주는 김유정이라면 질색을 했다. 특히 김유정 때문에 박녹주가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그가 한 행동은 사랑을 핑계로 극심한 민폐를 끼쳤을 뿐이다. 그래도 결국 김유정에게 동정심이 없진 않았는지, 김유정의 친구인 안회남이 김유정이 죽고 난 뒤 오히려 자신더러 김유정을 죽인 살인자라며 매도하는데, 그때 손 한 번 잡아주기만 했더라면 그렇게 죽지 않았을 거라고 동정했다고 한다. 스토커에 시달리다 못해 그의 친구마저 되려 자신을 매도하려 했음에도 이런 말을 했다는 건 어찌 보면 정말 대인배다. 하지만 그 당시는 물론, 1970년대만 하더라도 성폭행범과 피해자를 판사가 앞장서 결혼시키는 시대 분위기가 있었던 만큼, 안회남의 매도에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는 동정을 보였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일수도 있다. 이후 박녹주 말년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김유정을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보듬어주지 못하고 매몰차게 대해 여러 번의 결혼에도 자식이 없었던 게 아닌가, 벌을 받은 것인가 자조적인 말을 남기지만, 이는 제대로 된 판단에서 나온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 김유정과 안회남의 가스라이팅과 불운한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한이 쌓인 상태에서 한 말이기에 어디까지가 진심일지는 알 수 없다. 설령 진정으로 용서했더라고 하더라도 김유정의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후일 김유정 문학관이 개관하자 초청받아 기념식에 참석한 대인배의 면모를 보였다.

3. 참고[편집]


구한말 기생 이야기-명장 박녹주의 예술과 비운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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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0년 '흥보가'의 예능보유자로 변경, 지정되었다.[2] 일종의 '마스터피스'와 같은 의미로 명창들이 새로 짜거나 과거의 것을 이어받아 방창한 대목을 말한다.[3] 이에 대해서는 송미경, 「판소리 춘향가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배경 및 지정자료 <춘향가>(1964)의 성격」, 『구비문학연구』 41, 2015 참조.[4] 콜럼비아에서 취입한 것으로 단가 대관강산과 심청가 중 선인 따라가는 대목을 취입하였다.[5] 본 문서의 사진처럼 박녹주는 색안경을 쓴 모습이 자주 나오는데 이 시력 문제 탓이다.[6] 심지어 명목상이지만 박녹주는 그때 유부녀였다. 임자가 있는 몸인데도 저랬다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