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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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박목월(朴木月)
본명
박영종(朴泳鍾)
아호
소국(素國)
본관
경주 박씨
출생
1915년[1] 1월 6일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수남리
사망
1978년 3월 24일 (향년 63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4가 자택
학력
건천공립보통학교 (졸업)
계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종교
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2]
신체
혈액형 A형

1. 개요
2. 생애
3. 주요 시
4. 그 외



1. 개요[편집]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 만하다.

정지용, 《문장》(1940)


대한민국시인, 대학교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박동규는 그의 장남이다.


2. 생애[편집]


1915년 1월 6일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현 고성군 고성읍) 수남리에서 아버지 박준필(朴準弼)과 어머니 박인재(朴仁哉)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준필은 1908년 대한제국 내각에서 문서과원(課員, 주사主事)로 근무하다가 경술국치 이후 1911년부터 1913년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과 기수(技手), 1914년부터 1917년까지는 임시토지조사국 측지과 기수로 근무했다. 뒤에는 경주군 수리조합 이사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919년 경상북도 경주군 서면 모량리(현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571번지로 이주하였다. 그 뒤 1929년 건천공립보통학교, 1935년 대구 계성고등보통학교를 각각 졸업하고 경주군 동부금융조합에 취직했다가 일본에 갔다. 8.15 광복 이후 귀국하여 동부금융조합에 부이사로 승진했으나 사임하고, 교직에 종사하여 모교인 대구 계성중학교를 비롯해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연세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 등에 출강했다. 1956년에는 홍익대학교 전임강사가 되었다가 이후 조교수로 승진했으며, 1959년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로 영전하여 1978년 3월 24일 사망할 때까지 부교수, 교수, 문리과대학 학장서리 및 학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육영수의 시 선생 노릇을 한 적도 있었고, 육영수 전기를 지었으며, 대통령 찬가를 작사하여 권력에 아첨하는 어용시인이라는 비판도 듣고 있는 상태. 개인사적으로 박목월은 슬하에 다섯 자녀를 둘 정도로 다복하지만 가난했는데, 어느 날 집 앞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목월을 보고 장남이 "힘드시죠?"라고 물었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이호철은 그의 이런 행적에 대해 '가난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옹호하긴 했다.[3]

처음에는 동시로 출발했으며 1933년 어린이지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특선되었다. 그러다가 1939년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1946년 조지훈, 박두진 등과 청록파(靑鹿派)를 결성하고 청록집(靑鹿集)이라는 시집을 발간하였다. 청록집에 실린 그의 시로는 임, 윤사월, 청노루, 나그네 등이 있다. 참고로 청록집이라는 시집은 그의 시 청노루에서 따 온 것이다. 이 시집에 실린 그의 시는 한국적인 서정과 극히 간결하고도 리듬감있는 시어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기타 유명한 시로는 하관(下棺), '내 신발은 십구문 반'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가정> 등이 있다. 군가인 <전우>, 포스코 사가, 한국일보 사가, MBC 사가, 신정고등학교의 교가 등의 작사도 했다. <가정> 은 예전 7차 교육과정 중학교 2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었다.

개인적인 성품으로는 언제 어디든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 호인이었다고 한다. 다정다감하고 목소리는 약간 가냘픈 듯하며, 조용조용한 성품에 원고 청탁을 거절해본 적이 없고, 모든 원고는 꼬박꼬박 본인이 직접 가져다 주었다.

1978년 3월 24일 새벽에 산책하고 집으로 가다가 지병고혈압으로 쓰러졌고,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4가 5번지 자택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8시에 결국 63세 나이로 사망했다.

유익순(劉益順)과 결혼하여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박동규가 바로 그의 장남이다.[4] 박동규 교수의 회고에 의하면 풍족하지 않은 가정형편에도 자녀들을 위해 애쓰는 아버지였다. 가령 만화책을 보고 싶다는 아들의 말에 하루 종일 동네를 돌아다니며 만화책을 한 자루 쓸어담아왔다거나, 서커스가 마을에 오자 몰래 개구멍으로 아들을 들여보내고 자기는 그 개구멍을 들키지않게 서커스가 끝날 때까지 가로막으며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아들이 장성해 대학에 진학할 때 "같이 책을 쓸 수도 있구..."하며 은근히 국어국문학과 진학을 권했는데, 나중에 교수가 된 아들이 자신의 논문을 보여드리자 며칠 후 빨간 펜으로 문법과 용어 사용을 일일이 교정해 방문 앞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아버지 이전에 시인인 박목월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다. 유안진(柳岸津) 시인[5]은 목월의 추천으로 등단했는데, 나중에 시인을 추천해서 등단시키는 것에 대해 엄격했던 목월의 면모를 회고했다. 11년 만에 추천받은 사람, 다시는 이 집에 발길 안 한다고 치를 떨며 나간 사람, 박목월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유안진에게도 처음엔 "유군은 국문과 영문과도 아닌데, 시 몇 편 좋다고 시인으로 추천했다가 사는 게 힘들어지고 바빠서 시 안 쓰면 추천한 나는 뭐가 되노?"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3. 주요 시[편집]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그네


산은

구강산

보랏빛 석산

산도화

두어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산도화 1」


한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하게 살아가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난」


(중략)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가정」


머언 산(山)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청(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청노루」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두 귀가 얼룩귀 엄마 닮았네

-「송아지」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이별가



4. 그 외[편집]



  • 일반적으로 알려진 시들 중에서 토속적 정서가 강한 시가 많은 사랑을 받다보니[6]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시 세계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박목월의 시상에는 개신교적 정서가 상당히 깊게 흐르고 있는데, 의외로 이런 부분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다. 그의 어머니가 독실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그 덕분에 남편(시인의 부친)도 전도했고, 당연히 자녀들은 신앙인으로 자라게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교회를 설립할 정도였다고 하니 개신교 명문가에 속하는 집안이다. 이 덕분에 생전에 개신교 잡지인 "신앙계"[7]에 가끔 축하시를 싣기도 했다. 시인의 사후, 부인이 그의 유고 중에서 기독교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시들을 따로 모아서 "크고 아름다운 손"이라는 유고시집을 내면서 이런 사실이 일반인들에게도 조금 알려졌다. 박동규 교수가 기독교 잡지 "빛과 소금"의 인터뷰에서 소개한 내용이다.

  • 1952년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피난지인 대구의 교회에서 박목월을 따르던 두 자매가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장녀가 깊은 감정으로 다가오자 목월은 거절한 후 서울로 상경하게 되고, 그녀는 결국 단념하고 결혼을 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명문여대를 다니던 동생은 박목월을 포기하지 못해 다시 만난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했고, 박목월은 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한양대 국문과 교수 자리도, 가정도, 명예도 모두 내던지고 연인과 함께 종적을 감췄다. 얼마 뒤 시간이 지나고 박목월의 아내 유익순은 그가 제주도에서 연인과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남편을 찾아나섰다. 막상 두 사람을 마주하게 되자 아내는 “힘들고 어렵지 않느냐”며 돈 봉투와 추운 겨울을 지내라고 두 사람의 겨울 옷을 내밀고 서울로 사라졌다. 당시 여자는 가족의 설득으로 동거생활을 끝냈고 , 목월은 가정으로 돌아왔다. 그의 시인 『이별의 노래』에는 두 사람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한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별의 노래」


  • 박목월이 제주에서 지낼 당시 제주 도내에 거주한 문인들과 자주 교류하였다. 박목월이 묵었던 동화여관에서 종종 시낭송회를 가지기도 했다. 박목월과 같이 머물던 연인이 떠날 적에 도내 문인들과 박목월이 같이 배웅하였는데 당시 모습을 본 시인 양중해[8]가 당시의 모습을 시로 남겼는데, 제주제일중학교 동료 교사이자 가곡 명태의 작곡가인 변훈[9]이 이 시를 작곡하여 가곡 『떠나가는 배』를 발표하였다. 발표 당시에는 고인을 배려해 당시 상황을 얘기하지 않고 제주를 떠나가는 문인들을 보면서 작사했다고 하지만 후일 증언들이 나옴에 따라 박목월 시인의 제주 생활과 시를 쓰게 된 사연이 재조명 되었다.

  • 어느 날 밤에 나무에 걸린 달의 모습이 너무 고와 필명을 목월(木月)로 지었다고 한다.

  • 1965년 유안진을 천거해 시인으로 등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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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적부 등 호적 관계 서류, 한양대학교 인사기록부, 주민등록 등에 모두 1915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2] 용산구에 위치한 효동교회의 장로였다. 박목월 시인의 어머니께서 설립하셨다고 하며, 시인의 아들 박동규 교수도 이 교회의 원로장로로 재직중이다.[3] 이호철이 박목월과 같은 출판사에 몸 담은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일 때문에 필요해서 물어물어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티는 안 내려고 하지만 너무 가난해서 딱하더란다. 그래서 이호철은 박목월의 지조 없다 싶은 행태를 비난하지 않았다.[4] 1996년에는 EBS 중2국어 강의를 녹화하기도 했다. 강의 중 선친의 시가 나오자 "이 시는 이해하기 쉽지요?"라 말하며 미소짓기도 했다.[5]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아동가족학과 명예교수이다.[6] 이를테면, 이별가불국사 등의 시...[7] 여의도순복음교회 계열에서 발간하는 잡지이다. 1990년대까지는 개신교계에서 제법 위상이 높았던 잡지였다.[8] 제주대학교 교수, 제주문화원장 역임[9] 가곡 명태의 초연 실패 후 외무고시에 합격해 포르투갈 대리대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