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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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우측 마이크 앞에 있는 이가 박선호. 좌측의 하얀 수의를 입은 이는 김재규며 우측으로 박흥주김계원의 모습도 보인다.
1. 개요
2. 이력
3. 김재규와의 인연
6. 미디어에서의 박선호

朴善浩
1934년 2월 3일 ~ 1980년 5월 24일 (향년 46세)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직 군인, 공무원. 10.26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었다. 부장 수행비서였던 박흥주 대령과 함께 상관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박정희 암살을 도왔다.


2. 이력[편집]


1934년 2월 3일 경상북도 청도군 태생. 대구대륜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해병대 간부후보생 16기로 임관하여 파월 청룡부대 대대장, 해병대 서울보안부대 부대장, 해병대사령부 인사처장 등을 역임하였다.[1]

1973년 10월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자 해군 보병대령[2]으로 예편한 후 이듬해인 1974년 4월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던 김재규의 추천으로 중정 총무과장에 임명되면서 중정과 인연을 맺었다. 김재규가 건설부 장관으로 영전한 후 박선호는 중정 부산지부 정보과장으로 발령되었으나 1976년 초에 밀수사건 수사차 서울에서 내려온 검찰 수사팀의 동정을 도청한 사실이 발각되어 면직당했다.

박선호는 부산지부 정보과장이었을 때 조갑제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조갑제는 국제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포항 석유 발견 사건의 실상을 폭로하였고 중앙정보부가 그를 소환하여 조사했는데 이때 조사관이 바로 박선호였다. 조갑제의 회고에 따르면 의외로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고 하며 박선호에 대해서도 신사적인 인물이라고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이후 약 1년간 실업자로 지내던 박선호는 중정부장 김재규[3]의 주선으로 1977년 4월에 현대건설 안전차장[4]으로 취직해 주베일 항만 건설현장에서 근무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뼛속까지 군대 체질이었던 그에게 민간기업의 문화가 너무 맞지 않았다고 한다. -군대문화가 녹아든 우리나라 기업문화가 안맞을 정도였다니 군생활을 얼마나 빡세게 했는지 짐작이 안된다- 한국으로 돌아온 박선호는 유류수입 업체를 운영하기도 했으나 석유 파동 등의 여파로 고전하던 중 1978년 8월에 다시 김재규의 부름을 받고 중앙정보부로 복귀했다. 그때 맡은 보직은 중앙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 그때까지는 그가 맡았던 임무가 차후 얼마나 큰 풍파를 몰고 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여담으로 전 동아일보 기자 김충식의 저서인 <남산의 부장들>에 따르면 박선호가 중정에 복귀한 배경에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특혜분양 사건에 연루된 전임 의전과장 김모씨가 사직하고 그 자리에 박선호가 들어온 것이라고. 그런데 전임 김과장은 중정에서 나온 후 부동산 사업으로 성공을 거둔 반면 후임 과장 박선호는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인생이 아예 풀릴 수 없게 꼬여 버렸으니...


3. 김재규와의 인연[편집]


김재규는 육사 2기로 임관하여 복무하던 중 1947년경 민관 체육대회에서 미군과 충돌을 일으키는 바람에 면직당해 고향에 내려와 대륜중학교의 체육교사로 잠시 교편을 잡은 적이 있었다. 이때 제자로 만난 이가 대륜중학교 2학년이었던 박선호였다. 후일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지낸 이만섭도 김재규의 제자였다.

박선호는 김재규가 복직되어 군으로 돌아간 후에도 인연을 끊지 않고 연락을 유지했으며 김재규가 제3군단 군단장에 재임하고 있을 때 중학 동기들과 같이 찾아가 스승님께 종종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고. 이후 박선호가 해병대를 나온 이후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공직에 있던 김재규가 취직자리를 알선해 주는 등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그 외에 김재규는 박선호에게 평소 "거만하게 행동하지 말라", "책을 많이 읽어라", "검소하게 생활하라" 등등 따뜻한 조언을 자주 해 주었으며 이런 김재규를 박선호는 상사이자 스승으로서 무척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4. 10.26 사건[편집]


김재규의 도움으로 다시 일자리를 찾은 박선호였지만 막상 중정 의전과장이란 자리는 박정희의 술 시중 돕는 여성들을 섭외하는 이른바 채홍사나 다름없었고 평소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박선호는 상당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자신의 일에 회의를 갖고 있었다. 참다 못해 몇 번이고 사의를 표했지만 그때마다 김재규는 "자네가 없으면 궁정동 일을 어떻게 하라는 건가" 라면서 물리쳤고 스승이자 상사인 김재규의 간곡한 요청에 박선호는 꾹 참으며 계속 근무해 왔다.

본래 의전과장 직은 중정 내에서 제법 잘 나가는 요직에 속했고 승진도 빨랐다. 특히 박선호는 거사 전만 해도 중정 내의 대소사 처리라던가 안가와 같은 여러 보안 시설들을 꼼꼼하게 총괄 관리하며 김재규의 신임을 사고 있었다.[5] 또한 청와대 쪽과 자주 안면을 트다 보면 저절로 인맥도 쌓이기 마련이었다. 그런데도 안가에서 나가려 했던 것을 보면 채홍사 업무가 정말 질색이었던 모양이다. 실제 재판에서 박선호는 박정희의 치부에 대하여 "지금 내가 입을 열면 서울 장안이 떠들썩해질 것이다" 라며 모두 폭로하려 했지만 김재규가 "이봐, 그건 말하지마" 라고 제지하자 재판장이 모두 솔직히 털어놓아 보라는 종용에도 "모든 것은 여러분들 상상에 맡기겠다" 면서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오후 4시 10분경 궁정동 안가 비서실에 있던 박선호가 해병 간부후보생 동기이자 둘도 없는 막역지우였던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날 저녁 6시에 대행사, 즉 대통령비서실장, 정보부장, 경호실장 등이 참석하는 만찬이 열리니 준비를 해달라는 연락이었다. 곧바로 박선호는 안가 주방에 만찬 준비를 하라 지시하고 이날 시중을 들 여성을 섭외하였다. 연락을 마친 박선호는 모델로 활동중이던 여대생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을 자신의 승용차로 궁정동 안가에 데려왔고 이 둘에게 사전에 박정희를 단독으로 모시는 방법을 알려준 후 당일 안가에서 있었던 일은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보안 서약서를 작성시켰다.

그리고 저녁 6시경 박정희 일행이 궁정동 안가에 도착하여 연회가 시작되었고, 박선호는 안가 경호원 대기실에서 정인형과 해병대 후배인 경호처 부처장 안재송과 담소를 나누던 중 저녁 7시쯤 안가 직원으로부터 부장이 연회장에서 나갔다는 연락을 받고 안가 마당으로 나와 김재규를 뒤따랐다. 이때 중정부장 수행비서인 박흥주 대령도 합류하였고 김재규는 이 둘을 불러 "오늘 저녁 각하와 차지철을 해치우겠다. 너희는 똑똑한 놈 세 명을 골라 나를 지원하고 경호원들을 처치하라"는 엄청난 지시를 거사 40분 전에 일방적으로 내렸다. 이에 박선호는 "오늘은 경호원이 일곱명이나 와 있어 상황이 좋지 않으니 다음에 기회를 보자" 고 거짓말[6]로 회유하려 했지만 김재규는 "오늘 해치우지 못하면 보안이 누설된다"며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박선호는 박흥주와 같이 김재규의 지시에 따랐고 해병대 부사관 출신으로 평소 신임하던 부하인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인 유성옥을 암살조에 합류시켜 준비를 마쳤다. 유성옥이 암살조에 포함된 계기도 어찌보면 단순한데 이기주와 함께 무장하던 중 자신의 운전사인 유성옥이 평소 성격이 괄괄하고 복종심이 강하다는 것을 떠올린 박선호는 대뜸 이기주에게 "유성옥이 총 쏠 줄 아나?" 라고 묻자 이기주는 "유성옥은 육군 중사 출신입니다" 라고 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중사로 제대했으면 총을 못 다루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였고 실제로 유성옥은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실전 경력도 있었다. 당일 오후 동대문시장에서 만찬에 내놓을 요리 재료를 사온 후 휴게실에서 바둑을 두고 있던 유성옥은 그렇게 엉겹결에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7]

무장을 완료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은 안가 나동 식당 앞에 의전과장 전용 승용차를 세웠는데 대통령 비서실장도 함부로 못 들어오는 이곳에 자동차가 들어온 것을 본 나동 관리책임자 남효주가 "여기 어떻게 들어왔느냐?" 라고 묻자 유성옥이 "(박선호)과장님이 여기다 차를 대라고 했다" 라며 답했고 남효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그만큼 안가 내에서 박선호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시사하는 얘기이다. 그리고 식당 바깥에서 식당 차량 운전사 김용남과 잡담하고 있던 박상범 등 청와대 경호원들은 승용차가 나동 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봤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다.

여하튼 박흥주 일행은 의전과장 차량 안에서 대기하며 김재규의 첫 총성이 울리면 주방의 경호원을 해치우기로 했고 박선호는 경호원 대기실에서 휴식 중이던 정인형과 부처장 안재송을 감시하는 것으로 임무를 나누었다. 사실 박선호는 친형제보다도 절친한 정인형과 해병대 후배인 안재송을 죽이지 않고 잘 설득해 보려 했지만 사람 일이 그리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기실에서 둘의 동태를 살피던 박선호는 드디어 저녁 7시 40분경 연회장에서 첫 총소리가 울리자 행동을 개시하였다. 정인형과 안재송이 연회장 쪽으로 뛰어나가려 하자 박선호는 입구를 막고 리볼버를 꺼내어 둘의 행동을 제지시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황당해 하던 둘에게 박선호는 거의 우는 소리로 "총 뽑지마, 움직이면 쏜다. 야! 우리 제발 같이 살자!"며 애원하였고 정인형은 거의 체념하는 듯 했지만 안재송이 갑자기 품에서 총을 뽑으려 하자 어쩔 수 없이 박선호는 안재송에게 흉부 관통상을 입히며 그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8] 이에 정인형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자 박선호는 반사적으로 총을 발사해 정인형은 목에 관통상을 입고 숨을 거두었다.[9][10] 둘을 살해하고 방을 빠져나온 박선호는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총상을 입힌 후 이 고장나 연회장을 뛰쳐나온 김재규와 마주쳤고, 김재규는 박선호가 갖고 있던 리볼버를 빼앗아 연회장으로 복귀, 화장실에서 뛰쳐나와 경호원을 찾던 차지철에게 복부에 총을 발사하여 치명상을 입혔고, 우측 흉부 관통상을 입고 신음하던 박정희의 후두부에 총을 발사하여 사망케 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안가에서 저녁식사 중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차에 태워 용산의 대한민국 육군본부로 갔고 박정희의 시신은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수습되어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옮겨졌다. 박선호는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남은 피해자들을 확인사살하라고 지시한 후[11] 경비원들을 소집해 안가 경비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한 후 경호원 대기실에 숨어 공포에 떨고 있던 신재순과 심수봉에게 수고비 조로 20만원 씩 건네고 "오늘 있었던 일은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뒤 안가 나동 관리책임자 남효주를 불러 차로 내자호텔[12]까지 데려다 주라고 지시하였다.[13]

그리고 박선호는 궁정동 사무실에서 김재규의 후속 지시를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날이 밝은 후에도 아무 소식이 없었고 라디오 아침 뉴스에서 박정희의 사망 소식이 들리자 박선호는 다 틀렸다고 체념한 채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던 서울 방배동의 처가로 가서 "사람을 죽였다. 나는 이제 자결해야 겠다"고 털어놓았다. 가족들이 갑자기 무슨 일이냐며 울부짖자 박선호는 뉴스를 들으면 다 알거라고 한 후 오전 11시경 정보부 감찰실의 연락을 받고 남산 중앙정보부로 복귀하여 감찰실장 김학호 소장으로부터 "계엄사에서 당신을 찾고 있다"는 통보를 받은 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오후 2시경 출동한 합동수사본부 수사관에게 체포당했다. 사건에 동조했던 박흥주도 같은 날 오후 3시에 체포되었고 사건 관련자 모두 보안사 분실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5. 사형[편집]


이후 박선호는 김재규와 박흥주를 비롯한 사건 당사자들과 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았고 1980년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김재규와 함께 교수형이 집행되어 세상을 떠났다. 향년 46세.

재판 중 최후진술에서 박선호는 다음과 같이 밝히며 김재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다는 것을 털어 놓았다.

김(재규) 부장님을 모셨다는 것을 첫째 영광으로 생각하고, 저로 하여금 항상 인간으로 일깨워 주시고, 국가의 앞날을 버러지[14]

의 눈이 아니라 창공을 나는 새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똑바른 눈이 될 수 있도록 길러 주신 데 항상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또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도 저는 그 길 밖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김재규는 2.26 사건을 언급하며 "이들은 나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 관대한 처분이 있기를 바란다"고 했으나 법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선호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6. 미디어에서의 박선호[편집]


야인시대에서 젊은 이정재 역과 벡터맨 베어를 맡았던 그 분이다.
정확히는 '모델'이 된 것으로 작중에선 '주 과장'이라고 나온다.
극중에선 실명 언급 없이 의전과장이라고만 나온다.

덧붙이자면 박선호는 박흥주보다 5세 연상이자 군 선배인데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박선호 역할의 배우는 박흥주 역을 맡은 배우보다 연하인 배우만 캐스팅되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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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훗날 살해할 정인형 경호처장과 동기였다.[2] 해병대사령부 해체 이후 해병대원들은 전부 서류상 해군 인원으로 변경되었다.[3] 김재규는 1976년 12월 신직수의 후임으로 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4] 이는 표면적인 직책이고 실상은 중동 건설현장의 노사분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정보부에서 파견한 조정관이었다.[5] 관련 영상에서도 박선호는 안가의 왕이나 다름없었다는 증언이 대부분이다.[6] 이날 안가에 온 경호원은 정인형, 안재송, 박상범, 김용섭으로 총 4명이었다. 실장 차지철과 수행기사 김용태를 포함하면 6명으로 박선호가 말한 7명에 근접하긴 하지만 운전수인 김용태는 그렇다 치더라도 경호실장인 차지철 마저 총을 갖고 있지 않았다(...).[7] 당시 유성옥은 혼인신고를 올리지 못한 채 동거하던 아내와 다음 달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고 이날 청첩장을 가져와서 안가 동료들에게 돌렸다고 한다.[8] 안재송은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이었고 총을 뽑아 25미터 밖의 박카스 병을 명중시키는 데 0.7초밖에 안 걸리는 특등 사수였지만 박선호에게 기선을 제압당하는 바람에 능력 발휘도 못 한 채 희생당하고 말았다.[9] 이후 재판에서 박선호는 '안재송이 총을 빼들지 않았으면 그 두 명을 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는데 실은 정당방위를 주장하기 위한 전형적인 수법이다. 게다가 애초에 위에 나온 정인형, 안재송 살인 과정은 박선호 개인의 진술로서 해당 장소에 박선호 본인과 살해된 2명만 있었다는 점에서 박선호가 진술을 본인에게 유리하게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10] 예를 들어 김재규의 총성이 울리자마자 그냥 바로 총을 쏴 둘 다 살해했다던가. 하지만 10.26을 다룬 매체에서는 보통 이 진술을 바탕으로 재현한다. 진술을 뒤집을 증거가 딱히 없고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갈등 끝에 친구를 죽이는 비극성이 더 극적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둘이 박선호 말대로 가만히 있어줬다면 그건 그것대로 김재규에게 총을 넘겨줄 수가 없게 되는데...?[11] 이미 직접 살인을 한 상황에서 살인 교사까지 했다. 설령 앞서 2명을 살해한 건에 대해서 정당방위가 인정되었더라도 이후에 살인 교사를 했다는 점은 명백했기에 어차피 중형을 피할 수 없었다. 박선호의 명령에 따라 피해자들에게 확인 사살을 가한 김태원은 결국 이 일로 사형에 처해졌다. 더욱 억울한 사실은 이날 김태원은 비번이라 출근하지 않는 날이었지만 안가 대행사로 인한 경비 강화 때문에 비상 출근했다가 사건에 휘말린 것이었다.[12] 현재 서울지방경찰청 자리[13] 유성옥은 대통령 차량으로 박정희의 시신을 싣고 국군서울지구병원에 갔고 중정부장 운전사 유석문은 김재규, 정승화 등과 육군본부로 떠난 데다가 안가 식당차 운전사인 김용남은 주방에서 총상을 입은 상태라 안가에 차량을 운행할 수 있는 운전사가 없어 박선호는 운전면허가 있는 남효주에게 지시한 것이다.[14]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했다는 말이다.[15] 박선호, 박흥주 역 배우 순서로 이동신 1957년생, 노영국 1948년생(제4공화국) / 천호진 1960년생, 황범식 1946년생(코리아게이트) / 김혁 1974년생, 김진근 1967년생(제5공화국). 게다가 영화 그때 그 사람들 에서도 주과장 역의 한석규(1964년생)가 민대령 역할인 김응수(1961년생)보다 연하이고 남산의 부장들 또한 의전과장을 연기한 이도국(1973년생) 또한 부장 수행비서 강창수 역의 박성근(1971년)보다 연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