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창(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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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朴世昌


1. 개요[편집]


북한의 외교관, 정치인.

2. 생애[편집]


초기 이력은 알려진 것이 없다.

1954년 7월 30일, 주 알바니아 북한 공사로 임명되었다. 1955년 5월, 알바니아와 북한의 외교관계가 대사급으로 격상됨에 따라 5월 11일, 알바니아 주재 북한 대사로 승진했다. 1957년 5월 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림춘추에게 알바니아 대사 자리를 물려주었다. 1957년 5월 18일, 양영순의 뒤를 이어 신임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임명, 1957년 6월 24일,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안토닌 자포토츠키에게 신임장을 봉정하였다. 이후 불분명한 시점에 귀국, 1957년 9월 20일, 조성모의 뒤를 이어 신임 검사총장에 임명되었다. 민주법률가협회 부위원장을 거쳐 위원장을 겸임하였다. 후임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는 1957년 10월 22일, 한익수가 임명되었다. 남한 기록에 따르면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작 북한에서 발표된 대의원 목록에는 없다.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으며 1958년 9월 7일, 김응기, 김응상, 리병남, 박문규, 유철목, 정성언, 최재우, 최재하와 함께 북한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1960년 10월, 민주법률가협회 대표단장으로 불가리아를 다녀왔다.

1961년 5월, 조평통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으며 1962년 7월,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쿠바를 다녀왔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검사총장에 유임되었다. 1963년 4월, 민주법률가협회 대표단장으로 중국과 우간다를 다녀왔으며 우간다와의 수교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1964년 4월 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한익수의 뒤를 이어 주중 북한 대사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검사총장에서 해임되었다. 후임 검사총장으로는 5월 8일, 리국진이 임명되었다. 4월 28일, 중국 국가주석 류사오치에게 신임장을 봉정하고 대사로 부임하였다. 1964년 10월, 최용건의 중국 방문을 수행하였다.

1966년 11월 20일, 저우언라이와 고별 방문한 후 귀국하였다. 12월 21일, 현준극이 후임 중국대사로 부임하였으며 공백기간 동안 김재숙이 임시대리대사로 있었다. 그런데 귀국 이후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도 탈락했으며 1970년 11월, 5차 당대회 때도 소식이 없었다. 이후 애국렬사릉 안장자 목록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조선대백과사전에서도 언급이 없다. 뭔가 사고 쳐서 숙청된 것으로 추정.

3. 참고문헌[편집]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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