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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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길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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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1.svg
KBO 리그
우승코치

1985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2082501002031700175051.jpg
이름
박영길(朴永吉)
생년월일
1940년 11월 5일 (83세)[1]
국적
[[일본 제국|

일본 제국
display: none; display: 일본 제국"
행정구
]]
1940~1945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1948~
출신지
부산광역시
학력
경남고 - 동아대
포지션
외야수(중견수, 우익수)
투타
좌투좌타
소속팀
남선전기
육군 경리단
한국전력
지도자
롯데 자이언츠 감독 (1982~1983)
삼성 라이온즈 타격코치 (1984~1986)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87~1988)
태평양 돌핀스 감독 (1991)
해설위원
PSB (1995~2003)

1. 소개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4. 기타



1. 소개[편집]


대한민국의 야구인이자 타격이론가.[2] 그리고 외야수 출신 감독 중 KBO 리그에서 성공한 감독 중 한 명이다.[3]


2. 선수 시절[편집]


1960년대 한국실업야구 최고의 강타자였던 김응용에 비견되어, '좌영길 우응용'이라 불리며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명성을 떨쳤다. 김응용과는 당시 국가대표 룸메이트로 십수년을 같이 보낸 인연으로 현재도 서로 막말을 하며 지낼 정도로 친한 사이.[4]

김응용 못지않은 슬러거였지만 정교함까지 갖춘 타자로, 이승엽 이전까지는 올드 야구 팬들에게 국내 최고의 좌타자로 인정받았다. 참고로 실업야구 통산 100홈런 이상을 기록한 네 명의 타자 중 한 명이다. 나머지 3명은 박현식 옹(前 삼미 감독), 김응용, 김우열(前 OB-빙그레).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야구 선수권대회에서는 8게임에서 5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대한민국이 우승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실업야구 통산 타격왕 6회, 타점왕 3회, MVP 4회를 수상했으며 철저한 체력 관리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37세까지 현역으로 활약했다.

3. 지도자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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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의 롯데 입단식에서. 오른쪽이 박영길.

은퇴 후 김동엽의 뒤를 이어 실업리그 롯데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프로야구 출범 직전 해인 1981년 우승을 거머쥐었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때 부산 야구의 대부로서 롯데 자이언츠의 창단을 주도했으며, 초대 롯데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성적 부진으로[5] 1983년에 중도 사퇴하고 타격코치였던 38세의 강병철에게 지휘봉을 넘겼다.[6] 하필 최동원이 아마시절 내내 당한 혹사 후유증으로 부진하자 최동원을 쉬게 해주던 중 성적 부진으로 사퇴했는데, 1년만 더 버텼다면 우승 감독으로 남았을 것이다.[7]

최동원 투수는 20년이나 30년만에 하나 나오는 투수다. 두고 보시라고. 30년 후에 롯데에 최동원 투수가 나오겠냐고.

ㅡ1983년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재직 당시.


1984년삼성 라이온즈의 타격코치로 부임한다.[8] 타격에 있어서는 김응용과 더불어 국내에서 쌍벽을 이룬다는 평을 받았기에 삼성 구단 수뇌부와 때마침 삼성으로 부임한 김영덕 감독이 그를 타격코치로 영입한 것.[9] 그러나 그의 타격이론이 맞지 않다면서 삼성 타자들이 불만이 가지면서 선수단과 갈등이 비화되어 김영덕 감독까지 심기가 불편하게 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선수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삼성은 그해 팀타율 1위를 달성했다. 이후 선수들은 박영길 코치를 신뢰하게 되었고 선수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박영길은 삼성에서 감독으로 승진하게 된다.

1984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있었던 져주기 게임 당시, 삼성의 코칭스태프 중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상대로 롯데를 고르는 것에 대해 반대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실업 롯데 감독으로 있을 당시 이미 최동원의 실업야구 한국시리즈 활약상을 소속 팀 감독으로서 직접 본 인물이다. 당시 최동원의 시리즈 성적은 시리즈 6경기에 모두 출전해 2승 1무 2패 1세이브 42⅓이닝 투구. 그러나 삼성은 84 시즌 당시 최동원과의 대결에서 성적이 괜찮았다는 점[10]을 근거로 박영길의 주장을 기각했고, 결국 1984년 한국시리즈는 그의 우려가 현실화되고 말았다.[11][12]

타격코치 시절 계속 팀타율 1위를 달성하자 그 공을 인정받았고 김영덕 감독이 재계약을 하지 않고 팀을 떠나자, 1987년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승진했다. 그 해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팀 타율 3할을 달성하며 타격부문에서는 최고의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는 플레이오프에서 천신만고 끝에 OB 베어스를 간신히 꺾고 올라온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1승도 못 건지고 준우승에 그치는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13][14] 이듬해인 1988년에는 창단 3년차의 신흥 강호 빙그레 이글스와 플레이오프에서 붙어 3연패로 탈락했다. 선동열을 앞세운 해태는 몰라도, 창단 3년째에 불과했던 빙그레에 패배한 충격은 무척컸고 결국 해임되었다.

삼성 감독에서 물러난 뒤에는 해설가로 일하면서 야인으로 지내다가 1991년 시즌을 앞두고 김성근 감독이 물러난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이 당시 태평양은 막강한 투수진과 달리 사상 최악이라 할 만큼 형편없는 타선으로 유명했는데, 집요할 정도의 번트, 단타와 작전 위주의 스몰볼에 최적화된 김성근[15]의 타격 이론과 정반대의 빅볼 성향이었던 박영길은 번트와 컨택 위주의 타격에 길들여진 팀 타선에 체질 개선을 가하여 장타력을 키우기 위해 선수들의 타격 폼을 전면적으로 교정하려고 했다. 김성근이 7.5m로 높혀놓은 도원구장의 펜스를 5m로 내리도록 지시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그러나 김동기김경기를 제외하고 박영길 식의 타격 이론을 소화할 만한 선수가 태평양에는 없었고, 투수진 역시 김성근 시절의 혹사로 태평양 주력 투수 3인방(정명원, 최창호, 박정현)이 동시에 부상과 부진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구단의 지원도 비상식적이어서 1991년 스프링캠프는 롯데 2군 홈구장인 부산 구덕야구장에서 더부살이하며 소화해야 했고, 코칭스태프는 본인의 의중에 따라 선발한 코치 하나 없이 잔존 김성근 사단 일색이었다.

결국 그해 팀 성적 5위라는 그저 그런 성적과 에이스 박정현이 김성근 시절 혹사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채 프런트와의 불화로 1년 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나 정동진에게 감독직을 넘겼다.[16] 성적 5위면 태평양 신화를 썼다는 김성근 감독 2년차 성적과 동일한 것이고, 5-8-8을 기록한 김용희선동열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는 건 없었지만, 그해 그 짧은 인천 도원구장에서 두 자릿수 홈런을 친 선수가 아무도 없었다.[17]

이후에는 사실상 현역 지도자로서는 은퇴했으며, 1995년부터 2003년까지 8년간 PSB TV 야구 해설위원[18]을 맡기도 했으며, 2011년에는 실업야구연맹 및 일본 독립리그 서울 해치의 회장직 및 스포츠서울 객원기자를 맡기도 했었다.

감독으로서의 능력은 그저 그랬지만, 1987년의 삼성 타선에서 볼 수 있듯 타격 이론에서는 국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지도자이며[19] 대한민국 야구에서 최초로 작전을 최소화하고 장타율출루율을 중요시하는 빅 볼 스타일의 야구를 지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20] 최근에도 단기 인스트럭터 자격으로 여러 팀에서 타격 지도를 했으며 2009년 시즌을 앞두고는 최희섭의 단기 인스트럭터를 맡아 최희섭이 슬러거로 부활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런데 2009 시즌 종료 후 가르친 2명의 롯데 타자 장성우오장훈의 경우에는 2010 시즌 기준 타격이 오히려 떨어지기도... #당시 기사

그 와중 2016 시즌 전 스프링캠프에 두산 베어스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초빙되어 오재일김재환을 전담마크해 가르쳤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두 선수 다 2016 시즌에 데뷔 첫 규정타석 시즌을 치뤘는데 둘 다 OPS 1을 넘겼고, 둘이 합쳐 64홈런을 쳐내면서 두산의 새로운 클린업으로 거듭났다.

4. 기타[편집]


  • 충무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최동원의 할아버지 때문에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최동원롯데 자이언트로 데려온 이가 바로 박영길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21] 영상 10분 20초 부터

  • 오랜 시간 야구인생을 보낸 덕에 야구계의 원로로서 야구 다큐에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그런데 비슷한 나이대인 김응용, 김인식 등의 인물들보다 패션감각이 꽤 뛰어난 편이다. 체형도 호리호리해서 핏이 좋다.

  • 프로야구 원년 감독 중 백인천(MBC)과 함께 생존해있는 둘뿐인 감독이다. 김동엽(해태), 서영무(삼성), 박현식(삼미), 김영덕(OB) 감독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백인천도 뇌경색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 상황이다. 6개 구단 체제의 마지막 해였던 1985년까지 범위를 넓혀도 생존한 사람은 김응용, 박영길, 김성근, 강병철 뿐이다.[22] 물론 박영길 감독도 직장암 수술과 교통사고 후유증[23]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일상 생활에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니라서 현 시점에서 사실상 프로야구 원년을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원년 감독인 셈이다.

[1] 인터뷰에서 본인의 실제 생년은 1940년생이고 1941년생은 호적상 생년이라고 밝혔다.[2] 삼성 타격코치 시절 84-86년 삼성은 내내 타격의 팀이었고, 감독 재직시절인 87년에는 프로팀 최초 팀타율 3할을 찍었다.물론 그게 태평양에서는 통하지 않았다는게 함정[3] 한 차례 한국시리즈 준우승(1987년)을 했으며, 32년 후인 2019년에 같은 외야수 출신이었던 장정석이 준우승을 올렸다. 그러나 나머지 외야수 출신 감독들의 성적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예를 들면 LG 팬들에게 금지어로 찍힌 이 양반이나 좌우놀이에 중독된 돌덩이라던가 아니면 맨날 입만 주구장창 털던 이런 놈이라던가...1990년에 LG 트윈스를 우승으로 이끈 백골퍼도 외야수로 분류할 수 있지만, 백인천은 본래 포수였고 일본프로야구 시절 포수로 데뷔해서 활약하다 외야수로 뛰는 일이 많아진 케이스. 이순철도 데뷔 당시 포지션은 내야수였다가 외야수로 전향했다. 그리고 30년 뒤 2017년 조원우가 외야수 출신 감독으로써 포스트 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단 준플레이오프에서 NC에 패함으로써 2020년 기준으로는 여전히 장정석과 박영길이 외야수 출신 감독 중에서는 최고 성적.[4] 선수시절 둘다 코끼리처럼 체격이 크다고 해서 코코 브라더스로 불리었다고 한다.[5] 당시 프로 롯데는 투타 균형이 안좋던 상태였다. 타격이 터지면 투수들이 불을 지르고, 투수들이 기껏 잘던지면 타선이 침묵하여 지는 경기가 많았다.사실 지금도 그렇긴 하다 83년에는 국가대표 투수 최동원, 포수 심재원이라는 거물급 스타들을 야심차게 데려왔으나, 막상 시즌에 들어가니 둘은 첫 해 부진하면서 성적은 바닥을 찍었다.[6] 롯데는 이듬해인 1984년 불세출의 대투수 최동원을 앞세워 우승. 지금도 깨지지 않은 한국시리즈 진기록인 4승이라는 기록도 혼자 가지고 있다.[7] 말하자면 박영길은 선수 보호 등을 통해 팀 전력의 재건, 보전을 성사시켰지만, 본인의 재임 중에는 성적을 못내고, 후임대에 그 결실을 본 사례였다. 이후 태평양 감독을 지낸 정동진도 비슷한 사례.[8] 이는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감독 출신 코치이다. 처음에는 박영길 본인도 감독을 한 경험도 있다보니 아래 직책인 코치로 가는게 영 내키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인연이 있던 김영덕 감독이 자신을 직접 타격코치로 추천했다는 말에 승낙했다고.[9] 이외에도 롯데 자이언트 감독 시절 장충고 감독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김영덕 감독이 자신이 롯데의 코치로 합류할 수 없냐는 요청을 한 적이 있는데 비록 불발되었지만 선배임에도 자신 밑에서 롯데 코치를 하겠다고 한 것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삼성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10] 이 당시 최동원의 삼성전적은 3승 4패 3세이브. 그중 1승은 져주기 게임으로 얻은 승리였다.[11] 정규시즌에서 박영길은 최동원이 공을 많이 던지면서 몸을 푸는 스타일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고 삼성 타자들이 3회까지는 최대한 공을 보고 커트를 하면서 최동원의 투구 수를 늘리는 전략을 세웠다. 그렇게 되면 투수진이 빈약했던 롯데 사정상 다른 경기에도 최동원이 나가야 하니 감독은 마운드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년을 내다보며 페이스 조절을 해야 하는 페넌트레이스와 달리, 한국시리즈는 열흘 안팎에 갈리는 7판의 승부다. 그 중 단 4경기에만 집중하는 거라면 최동원에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12] 사실 삼성이 롯데를 한국시리즈 멤버로 고른 것은 OB와 김영덕 감독 간에 악연도 있었다. 논란의 감독선임으로 84시즌 내내 OB와 난투극이 일상화된 만큼 김영덕 감독은 도저히 OB를 한국시리즈 상대로 맞닥뜨리기 싫었던 것이다.[13] 이 시리즈 1차전에서 당시 좌익수였던 장효조는 어이없는 실책으로 1차전 패배와 시리즈 완패의 주범으로 몰렸고, 결국 1988년 시즌 후 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되고 만다.[14] 이 우승이 무등야구장에서 해태(KIA 포함)가 차지한 유일한 우승이다.[15] 박영길의 삼성 전임 감독이었던 김영덕과 마찬가지로 번트 작전을 자주 구사했다[16] 원래 정동진은 미국 연수 중에 태평양 수석코치로 제의를 받았는데, 본인이 감독 출신임에도 박영길 밑이라면 코치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들어와보니 난데없이 박영길이 사퇴해서 감독직에 올랐다. 나중에 미안했다고 한다.[17] 1992년 쌍방울의 형편없는 투수진이 140피홈런을 기록했는데, 거기에 비교적 준수했던 태평양의 투수진이 125피홈런을 기록한 것을 보면 인천이 얼마나 타자친화적인 구장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 거기다 지금도 깨지지 않는 SK창단년도 195피홈런도 이 도원구장에서 나왔다 홈경기 115/원정 80으로 이거 빼도박도 못한다 한경기에 2개씩 맞은 셈[18] 라디오 해설은 자갈치 김민호, 이성득이 맡았다.[19] 김성근 감독도 타격에 관해서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당시 야인으로 지내던 박영길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20] 박영길 이후로는 김용희, 김인식 감독이 이쪽 계열로 꼽힌다.[21] 본인도 이 사실을 몰랐다가 최동원과 계약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22] 박현식의 뒤를 이어 1983년부터 삼미와 청보 감독을 지낸 김진영 감독도 2020년 미국에서 작고했다.[23] 친구들과 강원도로 놀러갔다 돌아오는 길에 터널 안에서 뒷차가 그대로 들이받았다. 당시 그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는데 당시 사고로 인해 왼쪽 다리가 앞 의자 밑으로 말려들어가면서 아킬레스건이 파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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