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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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22년 11월 30일
황해도 서흥군 소사면 방곡리
(現 황해북도 연탄군 장운리)
사망
1962년 5월 21일[1] (향년 39세)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324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4. 참고자료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한국광복군 출신의 군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편집]


1922년 11월 30일 황해도 서흥군 출생. 국립대전현충원 공훈록에는 1917년 생으로 되어있다. 소사심상소학교를 졸업한 뒤 황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관공서 및 치과병원 등지에서 근무하다가 1936년 중화민국으로 건너갔다.

1940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했고, 박영진, 문응국, 선우기, 장철 등과 함께 중국 중앙군 전시간부훈련단 제4단 한청반에 입단해 정치교육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서안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에 정식으로 입대했다.

1941년 최철, 박재화[2]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제7분교(서안군관학교) 보병 8기로 입학 1944년 졸업하고 임정근과 광복군 제2지대 제2구대에서 활동했다. 1945년 OSS 훈련에 참가, 장재민과 함께 국내 정진군 충청도반에 배속되어 훈련 받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육군사관학교 7기를 졸업하고 임관하였고, 6.25 전쟁 당시 8사단 21연대 2대대장을 맡아 단양전투 등에 참가하였고, 부상으로 인해 장애를 얻었다. 단양전투 당시 21연대 1대대가 무단철수하는 바람에 2대대도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다급히 후퇴해야만 했다. 당시 1대대장은 윤태현 소령으로 해당 사건으로 즉결처분을 당했다.[3] 전쟁 후 백마부대 예하 연대장을 맡았다. 6.25 전쟁 당시 장애로 인해 1961년 예비역 준장으로 전역하였다. 1962년 5월 21일 서울특별시에서 사망했다.[4]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1991년 11월 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부인 김숙영 여사는 광복군 제2지대에서 활동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아들 박근은 육군사관학교 31기를 졸업하였고, 국내 최초 LPG 차량 개조 회사인 (주)NGVI사의 대표를 역임하였다.


4. 참고자료[편집]


독립운동가 공훈록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국립대전현충원 공훈록
단양군, 단양군지, 제3편 정치,행정, 54쪽
조선일보, 교사를 증축 통일부대서, 1956년 8월 30일자, 2면
경향신문, 상이대령 7명 진급전역키로, 1960년 12월 31일자,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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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5월 22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2] 광복군 제2지대에서 활동, 6.25 전쟁 발발 시 제1보병사단 13연대에서 복무 중 전사.[3] 윤태현 소령은 광복군 출신이며 청년전지공작대에서 부터 함께한 동지이다. 단양전투 당시 북한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반격을 주저하면서 오히려 무단 후퇴했는데 이 바람에 2대대가 노출되고 갑작스럽게 공격받은 것이다.윤태현 소령의 즉결처분은 부적합하다는 평이 있으나 이와 무관하게 광복군 창설 전부터 함께한 동지에게 큰 민폐를 끼쳤다.[4] 국립대전현충원 공훈록에서는 1961년 사망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