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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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박영준
朴永俊 | Park Young-June


파일:Park860507.jpg

출생
1960년 7월 20일 (63세)
경상북도 칠곡군
배우자
김용림

자녀
슬하 1남 1녀

본관
밀양 박씨
학력
대구남산초등학교 (졸업)
대구영남중학교 (졸업)
오성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경제정책학 / 석사[1])
한양대학교 (정치외교학 / 박사[2])
경력
대우그룹 입사
이상득 국회의원 보좌관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정무보좌역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 총괄조정팀장
대통령실 기획조정비서관 (이명박 정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이명박 정부)
지식경제부 제2차관 (이명박 정부)

1. 개요
2. 생애
2.1. 대우그룹 근무 시절
2.2.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2.3. 이명박과의 인연
2.4. 청와대 공무원으로
2.5. 이후의 행보와 비리로 수감생활
3. 주요 사건 및 논란
3.1. CNK 주가 조작 사건
4.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기업인 출신 공무원이자, 정치인이다.

대우그룹에 입사해 9년 간의 대기업 직장생활을 하다가 이상득 前 국회의원의 비서관으로 국회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탁월한 기획력과 추진력으로 이명박 당시 대통령후보자의 부름을 받아 청와대와 중앙부처의 요직을 거치게 된다. 이후 이명박의 '왕(王)비서관', '왕(王)차관'이라 불리며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을 역임하고, 지식경제부(現산업통상자원부) 제2차관까지 오르게 된다.

2. 생애[편집]


1960년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에서 태어나 대구 연화초등학교에 입학한다. # 이후 대구남산초등학교로 전학을 가 영남중학교와 오성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대구에서 보내게 된다.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며 상경한다.


2.1. 대우그룹 근무 시절[편집]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후 86년 1월 대우그룹 계열사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6년 후인 91년 대우그룹 기획조정실 전략팀으로 이동, 김우중 회장이 주창한 ‘세계경영’ 관련 해외 투자 업무를 진행하며 탁월한 역량을 가진 인재로 인정받는다. [3] 박영준이 9년 간 대우그룹에서 주로 수행한 업무는 국내·외 투자사업의 인·허가 승인을 받아내는 업무였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박영준은 당시 공직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특히 벤처기업 투자에 전무한 국가 실정을 안타까워하며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법과 제도, 정부지원정책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2.2. 국회의원 보좌진으로[편집]


박영준이 근무했던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과 이상득 전 국회의원은 막역한 사이였는데, 이상득은 당시 대우경제연구소 대표이사였던던 이한구 전 국회의원에게 능력 있는 보좌진을 찾고 있으니 추천해달라고 한다. 이 때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당시 대우그룹 기획실에 있던 박영준을 추천하면서 박영준은 국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된다. [4]

박영준은 94년 대우그룹을 퇴사하고 재선 국회의원이었던 이상득 국회의원의 비서관으로 국회업무를 시작해 11년간 일하며 여-야 정책위원회 업무를 보좌하며 많은 정책 실무 경험을 쌓는다. [5]


2.3. 이명박과의 인연[편집]


1995년 당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자유당 서울특별시장 후보 경선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었던 이명박은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정원식과 맞붙게 되는데, 당시 민주자유당은 정원식을 서울시장 후보로 밀어붙이며 일방적인 몰표를 준다. 이 때 YS정부의 이명박 견제가 얼마나 심했냐면, 이명박을 지지했던 서울시 대의원들을 경선 전날 관광버스에 태워 1박2일 합숙을 보내버린다. 이는 이명박이 서울시장이 되면 대권주자로 급부상 하기 때문에 대권 욕심이 있던 YS계 정치인들이 이명박 견제를 위해 똘돌 뭉친 것.

당시 이명박의 형이었던 이상득은 당 경제담당 정책조정위원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의 서울시장 경선을 대놓고 도울 수가 없었다. 이에 대신 박영준을 서울시장 경선캠프로 파견 보내는데, 이 때부터 이명박과 박영준의 인연이 시작된다. 결국 정원식이 민주자유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되어 민주당 조순 후보와 대결하게 되는데, 당시 집권당 후보로는 전무후무한 20.67%의 득표를 받고 참패하며 실질적으로 정치계에서 은퇴한다.

1996년 이명박은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정치신인임에도 불구하고 11~14대 종로구 국회의원 이종찬, 그리고 노무현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며 차기 대권주자급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후 이명박은 1998년 2월에는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도전하기 위해 의원직을 사퇴하는데, 이후 YS계들이 이명박의 선거법위반을 걸고 넘어지며 이명박은 결국 서울시장 경선을 포기하고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객원연구원으로 떠나버리게 된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명박은 서울시장의 출마를 결심하게 되고 준비하는데 이 때 당 내에서는 홍사덕 전 국회의원이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로 점쳐지고 있었다.

이 때 박영준은 다시 한 번 이명박의 서울시장 선거를 돕는데 당시 박영준이 맡은 역할은 후보 비서실 차장이었다.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정두언이 지역구 등으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았기에 박영준은 실질적으로 비서실장 역할을 맡는다. 이 때 이명박 캠프의 면면을 보면 대변인은 오세훈, 유세본부장이 홍준표, 선대본부장이 이재오 등 거물급 정치인들이 여럿 속해있었다. 결국 홍사덕은 서울시장경선 후보에서 중도사퇴하게 되고 이명박은 여당의 떠오르는 청년 정치인이었던 김민석 후보과의 선거에서 승리해 서울시장에 당선된다. 이후 박영준은 서울시장 직무인수위원회 위원을 맡게 되는데, 보좌관으로는 유일했다. 이명박은 서울시 조직을 구성하면서 박영준에게 서울시에서 같이 일할 것을 제안하지만 박영준은 이상득 국회의원의 4선을 위한 총선이 남았기에 이를 도와야 한다며 거절한다.

이명박은 박영준과의 마지막 면담에서 서울시 정무부시장 자리에 누구를 임명하면 좋을지 묻는다. 당시 서울시 정무부시장 자리는 유력한 정치인으로 부상할 수 있는 중책으로, 오세훈원희룡 등이 경쟁하고 있었다. 이 때 박영준은 정두언을 추천하는데 그 이유로 4가지를 들게 된다. 첫째 이명박은 영남사람, 정두언은 호남사람인 것, 둘째 이명박은 고려대 출신, 정두언을 서울대 출신이라는 점, 셋째, 이명박은 기업인 이지만, 정두언은 공무원 관료 출신이라는 것, 넷째, 당협위원장 중 처음으로 이명박을 돕겠다고 나서준 정두언을 임명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을 따르게 만들 것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정두언은 정무부시장이 되고 이후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하게 된다.


2.4. 청와대 공무원으로[편집]


이후 2005년, 이상득 국회의원의 동생인 당시 이명박 서울특별시장의 부름을 받아 서울시에서 정무보좌역으로 근무하게 된다. 2007년 대선까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실질적 오른팔 역할을 하며 2007년 이명박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제17대 당선인비서실 총괄팀장을 맡게 된다. 이 때 류우익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박영준이 구성한 인사들이 당시 MB정부의 초기멤버이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청와대 대통령실 기획조정비서관으로 임명되나 정두언 전 국회의원의 견제를 받으며 100여일만에 사임하게 된다. 이후 야인생활을 하던 중 2009년 다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를 부르며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차관급)으로 취임하게 된다.


2.5. 이후의 행보와 비리로 수감생활[편집]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 중구·남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4위로 낙선하였다. 이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불법사찰과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 사건으로 징역 2년, 추징금 1억 6,400만원의 유죄 판결을 받는다. 이 외에도 그가 CNK 주가조작, 원전 비리, 포스코 인사 개입 등에 연루된 정황이 드러난다.

이후 2014년 11월에 출소했고, 2018년 3월이명박의 구속 전에 측근들도 조사하는 과정에서 본인도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3. 주요 사건 및 논란[편집]


박영준은 2008년 2월 MB정부가 출범하고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에 임명된 이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지식경제부 제2차관까지 약 3년 간의 재임기간 동안 크고 작은 사건에 중심에 있었다. 당시 중앙일보에서 이명박 정부 4년의 고위직인사 944명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그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 바로 박영준이다. [6]정치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박영준 또한 여러 가지 평가가 공존하는데 각각의 사건들을 사실 위주로 보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파일:이명박박영준류우익.jpg
왼쪽부터 박영준 전 차관, 이명박 대통령, 류우익 대통령실장

3.1. CNK 주가 조작 사건[편집]


2009년 1월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에 취임한 박영준은 아프리카와의 자원외교를 주요 국정과제로 삼고 아프리카 순방 일정을 잡는다. [7] 이 순방 일정에 카메룬이라는 중앙아프리카 국가가 포함되었는데, 박영준이 카메룬을 방문국가로 선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카메룬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대비해서도 자원개발의 초기단계 였기에 미개발 광물이 많았다는 점, 둘째, 아프리카에 대규모 진출 중이었던 중국이 아직 진출하지 못한 몇 안되는 국가였다는 점이었다.

박영준은 카메룬에서 문제의 CNK라는 회사를 만나게 된다. CNK는 광물자원개발을 주 업무로 영위하는 코스닥 상장사였다. 이 회사는 아프리카를 주 타겟으로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김은석 당시 에너지자원 대사는 CNK와의 미팅을 박영준의 아프리카 순회일정에 포함시킨다. [8] 김은석 대사는 외교안보 정책관을 지냈던 인물로 카메룬에 3년을 근무했던 아프리카 전문가였으며 카메룬 방문을 추천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박영준은 카메룬 대통령을 포함한 카메룬 정부와의 미팅 및 컨벤션 등에서 한국 기업들의 자원개발에 힘을 실어주기를 당부한다.

문제는 박영준 일행이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 벌어진다. 2010년 12월 중소기업인 CNK가 카메룬으로부터 4억 2천만캐럿에 달하는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 허가를 받게되었다는 소식이 외교부 보도자료를 통해 알려지게 되고 이에 따라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시장에 몰린 것이다. 이에 따라 CNK의 주가는 한 달만에 5배가 오르게 되는데, 이후 CNK가 MB정부 실세와 연결되어 있으며 4억 2천만캐럿의 광맥이 거짓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에 금감원, 감사원, 검찰을 비롯한 주요 국가기관들이 CNK를 고발 및 압수수색하며 이에 대한 의혹이 불거진다.

박영준과 CNK 간의 관계에 대한 의혹의 핵심은 세 가지이다. 첫째, 아프리카를 방문했던 당시 박영준 국무차장을 비롯한 공직 관계자들이 CNK의 카메룬 다이아몬드 채굴권 취득을 밀어주었는지 여부, 둘째, 이 정보를 활용해 주식을 매입해 시세차익을 남겼는지의 여부, 셋째, CNK가 취득했다는 4억2천만 캐럿의 다이아몬드 광맥의 허위 존재 여부이다.

검찰수사 결과와 재판부의 판결을 토대로 박영준에 관한 의혹과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박영준은 CNK의 카메룬 다이아몬드 채굴권 취득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 CNK라는 회사를 먼저 언급한 것은 카메룬 정부인 것으로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박영준이 카메룬 정부에게 제안한 내용은 국내 중소기업의 해외 기업활동 지원요청으로 판단되어 순방 업무의 정상적 범위였음으로 결론 지어졌다. 둘째, 박영준을 포함한 공직자와 주변인들은 모두 CNK주식을 매입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박영준은 당시 출장에 대동했던 공직자들을 모아 출장 중에 한번, 출장을 마치고 한 번 더 CNK주식을 사지말라고 당부한 것으로 밝혀졌다. [9] 셋째, CNK가 취득했다는 다이아몬드 채굴권에 4억 2천만 캐럿의 광맥이 매장되어 있는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여기서 관련된 사건이 외교부의 'CNK 다이아몬드 채굴권 획득' 보도자료이다. 외교통상부가 공식 문건, 즉 보도자료 내용을 허위로 조작했고 관련자들이 CNK 주식을 사전에 매입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재판부는 △카메룬 다이아몬드 광산의 실체가 있고 △ 오덕균 CNK 대표가 카메룬 정부로부터 광산탐사권을 취득한 뒤 실제로 탐사를 진행했으며 △ 카메룬 정부로부터 광산채굴권을 취득한 사실이 있으므로 외교통상부의 보도자료를 허위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CNK의 다이아몬드 관련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돼서 박영준은 밝혀진 혐의가 없었으므로 기소 조차 되지 않았다.

다만 이 사건은 여전히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당시 CNK의 오덕균 대표는 결국 다이아몬드의 매장량을 부풀리고 주가를 조작해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혐의를 받고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주가조작 의도가 있었느냐의 문제이다. 당시 이 사건 이후 CNK주주 2만명은 오히려 다이아몬드 채굴권이 진실이라며 오덕균 대표를 옹호하고 나섰으며, 정치권의 권력 다툼에 희생된 기업이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고 까지 했다. 실제로 당시에 지식경제부 차관이었던 박영준을 상대로 의혹을 제기한 인물들은 정두언, 정태근 등으로 MB정부 집권 기간 내내 박 차관과 대립한 인물들이었다.

2021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카메룬의 다이아몬드 채굴권은 CNK가 보유하고 있는데, 결국 CNK가 주식시장에서 퇴출되면서 탐사장비, 채굴장비 등 투자금의 문제로 광맥에 손조차 못대고 있기 때문에 실제 카메룬에 다이아몬드가 존재하는지 여부는 현재로서는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다만 카메룬 정부는 국내의 CNK 사건에도 불구하고 해당 다이아몬드 채굴권을 연장해주었으며, CNK 또한 합법적 다이아몬드 채굴 인가 여부를 국제적으로 검증하는 킴벌리 프로세스에 가입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4. 관련 항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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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사 학위 논문 : 참여정부의 地域經濟均衡發展政策에 관한 硏究[2] 박사 학위 논문 : 평가지표 개선을 통한 한국 ODA 발전방안 연구 : 베트남을 중심으로[3] 당시 대우그룹은 국내 최고의 기업 중 하나로 컨트롤 타워인 기획조정실 근무자들은 다들 한가닥하는 업무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4]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국회의원 보좌진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경우이다.[5] 당시 이상득 의원이 그를 얼마나 신뢰했냐면, 국회의원들만 모이는 회의자리에 보좌관으로는 유일하게 동석하거나 심지어 대리인으로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6] 파일:중앙일보_MB인사 관계망 중심엔 박영준 있다_2012-02-20.jpg[7] 박영준은 대우그룹에서 해외 투자 관련 업무를 10년 가까이 하면서 해외 투자 관련 업무에 관심이 많았고, 전문가이기도 했다[8] 당시 카메룬에는 CNK 말고도 자원개발 회사가 하나 더 있었는데 이 회사도 함께 미팅을 진행했다[9] 예외로 김은석 전 에너지자원 대사의 동생 부부는 1억원 이상의 시세차익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는데, 김은석 대사는 직접 정보를 제공한 것이 아니고 동생이 별개의 루트를 통해 정보를 취득한 것이며 동생은 CNK 주식을 계속 보유하다가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됐다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