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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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태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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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75~1992).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4
1992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6번
결번

박영태
(1983~1983.6.26.)


정영기
(1983.6.27.~1988)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9번
차동열
(1983~1983.6.26.)

박영태
(1983.6.27.~1983)


이석규
(1984)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6번
권두조
(1982~1983)

박영태
(1984~1992)


박정태
(1993~2004)
{{{#ffffff [[롯데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86번}}}
결번

박영태
(1993~2010)


권두조
(2012~2014)
NC 다이노스 등번호 86번
팀 창단

박영태
(2012)


구천서
(2013~2018)
한화 이글스 등번호 97번
김강래
(2013~2014)

박영태
(2015~2017)


이승관
(2018)



파일:attachment/parkyoungtae.jpg [1]
박영태
朴榮泰 | Yeong-Tae Park
출생
1959년 8월 25일
경상남도 마산시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완월초 - 마산동중 - 마산상고 - 동아대
포지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3년 1차 지명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83~1992)
지도자
롯데 자이언츠 1군 수비코치 (1993~1998)
롯데 자이언츠 2군 수비코치 (1999)
롯데 자이언츠 1군 수비코치 (2000)[2]
롯데 자이언츠 2군 수비코치 (2000)[3]
롯데 자이언츠 1군 수비코치 (2001)[4]
롯데 자이언츠 2군 수비코치 (2001)[5]
롯데 자이언츠 1군 수비코치 (2002~2003)[6]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대행 (2003)[7]
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04~2005)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2006)[8]
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06~2010)[9]
NC 다이노스 수비코치 (2011~2012)
한화 이글스 육성군 작전·수비코치 (2015)[10]
한화 이글스 1군 작전·수비코치 (2015)[11]
한화 이글스 1군 수비코치 (2016)
한화 이글스 육성군 수비코치 (2017)
강릉영동대학교 야구부 코치 (2019~)
병역
예술체육요원[12]
가족
아들 박기민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연도별 성적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롯데 자이언츠의 내야수이자 1군 수석코치, NC 다이노스 수비코치, 한화 이글스 3군 수비 및 작전코치. 등번호는 16번(선수) - 86번(코치).

마산상고, 동아대학교를 거쳐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이후 1992년까지 선수로 생활하다 1993년부터 코치가 되었다.


2. 선수 경력[편집]


포지션은 2루수유격수 그리고 우익수(?)[13]

통산 기록은 10시즌 동안 총 677경기에 나와서 타율 0.227, 홈런 2, 타점 106, OPS 0.567 을 기록. 프로 3년째였던 1985 시즌에 타율 0.269, 2홈런, 24타점, OPS 0.685를 기록한 것이 시즌 최고기록.

2루수 기준으로 경기당 통산 실책율 0.121을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진기록의 소유자다. 김주찬손아섭의 수비를 보면 이해가 간다. [14][15]

선수 시절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공/수/주 모두 평균 이하의 성적을 낸 선수였다. 주전보다는 백업 요원에 더 가까웠던 인물. 그럼에도 롯데가 차지했던 2번의 우승(1984, 1992)을 모두 해 보는 등 좋게 보면 나름 롯데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1992년 우승 후 바로 은퇴.

이와 별개로 프로 데뷔 전에는 한국야구 역사에 빛나는 명승부인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출장,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된 9회초 내야플라이를 포구해 우승을 확정짓는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선수로서 개인 성적은 평범했지만, 우승 경험은 나름 있었던 셈.


3. 지도자 경력[편집]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곧바로 롯데 구단의 지도자 제안을 받아들이고 은퇴한 뒤 이듬해인 1993년부터 수비코치를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2010년까지 수비코치, 주루코치, 수석코치, 2군 감독 등 다양한 보직을 거쳤다.

하지만 롯데 자이언츠 팬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무척 나쁘다. '꼴무원', '철밥통'이라는 멸칭도 모자라 양상문과 함께 팬들에게 악의 축 취급을 받고 있는 코치로 1993년부터 2010년까지 무려 17년간 한 팀에서 코치로 재직하는 동안 성과가 전혀 없는데다 롯데 자이언츠8888577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여러번 코치진이 교체되는 중에도 뛰어난 코칭스킬 없이 굳건히 자리를 지킨 진정한 철밥통의 귀감이다. 오오 꼴무원 심지어 2010 시즌 들어서 죽어라 까이다 못해 분해되는 양상문 투수코치도 중간에 두 번 나갔다가 왔지만[16] 그런데 박영태의 경우 1983년에 입단해 은퇴 후 코치로 전업한 1993년부터 2010년까지 코치를 맡으며 롯데 한 팀에서만 무려 27년을 있었다.바다 건너 모 구단감독 선임 기준에 따지자면 이미 1군 감독감이다 1982년에 입단했으면 KBO 리그 시작부터 롯데랑 함께한 건데 OTL[17] 참고로 그가 코치를 하면서 모셨던 감독들만 해도 강병철, 김용희, 김명성, 우용득, 백인천, 김용철(대행), 양상문, 제리 로이스터 총 8명이나 된다.[18]

부산고, 경남고와 함께 롯데 구단 내에서 막강한 파벌을 구성하고 있는 마산용마고 라인의 핵심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같은 마산용마고 출신이자 박영태 못지않게 역시 무능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롯무원 공필성이 암흑기 동안 쫓겨나지 않고 수비코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사람의 자기 라인 지키기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박영태 수석 코치가 걸어온 길은 다음과 같다.
  • 1993 ~ 2000 - 수비코치[19]
  • 2001 ~ 2003 - 1군 수비코치
  • 2004 ~ 2005 - 1군 수석코치
  • 2006 - 2군 감독
  • 2007 ~ 2010 - 1군 수석코치

경력을 보면 알겠지만 롯데 자이언츠의 암흑기였던 8888577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최강의 코치다. 2010 시즌 야구 관련 사이트에 뜬 인터뷰에 보면 자기도 능력이 없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나갈 생각은 없다고...인터뷰 전문.

그리고 2011년 박영태의 친아들인 경성대학교 3루수 박기민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롯데에서 방출된 후 이듬해 NC 다이노스로 아버지를 따라갔다.[20] 박기민과 부산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한 손아섭은 예전에 박기민의 싸이에 차기 감독 아들이라고 남겼을 정도. 대를 이어 충성하라우야

실제로 몇 차례 롯데 감독 후보에 오른 적은 있었다. 2005년 시즌 후 롯데가 양상문과 재계약하지 않을 때도 후임 감독 후보로 거론된 바 있고, 2007년 강병철의 후임 감독을 정할 때도 박영태 감독 승격설이 돌기도 했다. 이후 제리 로이스터 감독 부임 후에도 수석코치 자리를 유지했다.

그런데 2010년 시즌 후 드디어 잘렸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과 롯데가 재계약하지 않는 게 확정되면서 동시에 양상문 투수코치, 한문연 배터리코치 등과 함께 우수수 썰려나간 것. 이것으로 박영태의 시대는 과연 종언을 고할 것인가? 이후 양승호 감독 체제로 바뀌면서 후임 수석코치 자리에는 윤학길이 오게 되었는데, 이 당시 롯데 팬들 사이에서는 "박영태가 수석코치 자리에 없다고 하니 뭔가 어색하면서도 행복하다"라는 말까지 돌았다.

그래도 롯데를 떠날 때 때의 인터뷰는 제법 좋은 평가를 받았다. 후회는 없고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이 롯데 자이언츠에서 경험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며 담담하게 소회를 밝히고 깔끔하게 떠났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징징거리는 양상문 코치보다는 나은 모습이였다.

롯데 자이언츠에 있었을 때에는 정말 그 기나긴 비밀번호 속에서도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무능하다며 제리 로이스터 감독과의 불화설도 있었으나 이후 밝혀지기로는 오히려 로이스터와 함께했고 그러다가 코치진 정리 때 썰려나갔다고 한다. 심지어 3년 연속 4강 진출에 박영태 코치의 공도 있다는 로이스터 감독의 말도 있었던 걸 보면 뭔가 능력이 있기는 있는 듯.[21][22] 실제로 손아섭이 1할대 타율로 빌빌대다 2군으로 강등되어 장기간 숙성되고 있었을 때도 박영태는 손아섭이 언젠가 롯데의 핵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이는 그대로 적중했다.

2011년부터 KNN TV의 해설위원을 맡고 있다가 같은 해 6월 29일 신생팀 NC 다이노스의 창단 코칭스태프로 영입되었다. 보직은 확정되지 않았으나 선수 선발을 위한 2군 선수 파악 업무에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오옷 불사조! 이후 코치진이 개편되면서 수비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하지만 2012년 종료 후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NC의 1군 진입을 함께하지 못하고 팀을 떠났다.

2013년부터는 MBC경남NC 다이노스 프로야구 중계에 해설자로 출연하였다.

2015 시즌을 앞두고 한화 이글스의 3군 수비 및 작전코치로 영입되며 오래간만에 현장으로 되돌아왔다. 롯데 팬들은 정민태에 박영태라니 한화가 어떻게 된거냐며 어리둥절(…). 다들 양상문처럼 롯데 떠나면 성공할 줄 아는 건가

그러다가 8월 16일, 임수민 1군 수비, 작전코치와 보직을 맞트레이드하며 1군으로 올라왔다. 롯데 수석코치였던 2010년 이후 5년만에 1군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게 됐다.

2017년 시즌을 앞두고 육성군 수비코치로 자리를 옮겼다가, 시즌 종료 후 구단으로부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팀을 떠났다. 이후 1년간 야인으로 있다가 강릉영동대 코치로 부임했다.


4.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1983
롯데
61
117
.145
17
0
1
0
2
6
2
7
.194
.162
1984
69
157
.248
39
6
0
0
10
19
3
13
.304
.287
1985
96
275
.269
74
12
3
2
24
40
6
26
.329
.356
1986
92
198
.202
40
4
3
0
13
19
9
22
.282
.253
1987
24
47
.213
10
2
0
0
2
6
1
7
.315
.255
1988
67
131
.221
29
8
1
0
10
17
7
11
.282
.298
1989
36
31
.194
6
0
0
0
1
9
1
1
.219
.194
1990
93
211
.251
53
4
0
0
24
23
16
18
.306
.270
1991
65
112
.179
20
2
1
0
12
12
2
9
.240
.214
1992
74
66
.258
17
2
2
0
8
19
3
7
.329
.348
KBO 통산
(10시즌)
677
1345
.227
305
40
11
2
106
170
50
121
.289
.277


5. 관련 문서[편집]



[1] 롯데 자이언츠 선수 시절. 오른쪽은 해태 김무종.[2] ~ 5월 8일[3] 5월 9일~[4] ~6월 9일[5] 6월 10일~[6] ~8월 9일[7] 8월 10일~[8] ~5월 21일[9] 5월 22일~[10] ~8월 15일[11] 8월 16일~[12]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13] 사실 박영태가 외야수로 활동했다는 기록은 없다. 1984, 1985년 연감을 참고해도 박영태는 외야수로 한 경기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구마구에서는 한 장의 카드를 제외하고는 모두 우익수로 나와 있다. 마구마구 은 포지션 오류가 많아서 믿을게 못된다. 스탯티즈도 정확히 나와있지 않다.[14] 물론 중간에 2루수도 몇 경기 출장했지만 2루수로 출장했을 때도 절대 좋은 수비를 보여주지 못했다.[15] 2010 시즌 롯데 외야수 중 수비가 불안하다는 손아섭의 경기당 통산 실책율도 0.027밖엔 안 된다. 그보다 역대 경기당 통산 실책율 100위 안에 드는 선수 중 유일한 외야수다. 나머지는 3루수 아니면 유격수.[16] 양상문은 2001~2002 시즌은 김성근 감독의 부름으로 LG 1군 투수코치를 맡았었다. 2004~2005 시즌은 롯데 감독을 맡았으며, 2006년 MBC ESPN 해설, 2007~2008 시즌은 LG 1군 투수코치를 다시 맡았다. 그러다가 LG가 꼴찌를 하자 LG에서 잘려서 롯데로 돌아왔다.[17] 어떤 의미로 보자면 현역 시절부터 롯데를 지켰던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삼성 라이온즈의 외야수 장태수와 유격수 류중일을 생각하면 이해할 듯 싶다. 하지만 장태수류중일은 박영태에 비해 코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으며, 그 시기에 팀을 우승시켰지만 박영태는...[18] 도중에 강병철이 롯데 감독으로 재부임한 적(2006~2007)이 있고, 김용희가 2002년 시즌 도중 잠시 감독 대행을 맡은 것까지 포함하면 실질적으로 그가 코치를 하면서 무려 감독이 10번이나 바뀐 셈이다.[19] 1군, 2군 구분은 표기가 되어있지 않음.[20] 2012 시즌이 끝난 뒤 경찰 야구단에 입대. 그러나 같이 입대했던 박세웅, 황윤호와 달리 전역하자마자 NC에서 방출당했다. 이후 두산에 입단해 다시 기회를 얻는 듯 했으나 2016년 시즌 종료 후 방출된 뒤 야구를 접었다.[21] 다만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인터뷰 재주가 워낙에 모두에게 립서비스를 해주는 스타일이라서, 같이 일했던 코치에게 나쁜 소리할 위인이 못된다. 모르긴 해도 양상문의 능력에 대해서 물어봤어도 싫은 소리 한 마디 안했을 것이다.[22] 그런데 의외로 김성근도 은근히 박영태를 높이 평가했는지 LG 감독 시절 박영태를 코치로 영입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한다. 실제로 김성근이 한화 감독을 맡은 2015년부터 박영태는 한화의 코치로 취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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