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예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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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덕왕 6년 중시를 시중으로 고쳐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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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추존 국왕
선성왕 | 宣聖王

출생
(음력)

연대 미상
신라
사망
(음력)

912년 이전 추정
신라
능묘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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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밀양 박씨

예겸(乂兼 / 銳謙)
양자
박경휘
종교
불교
시호
선성대왕(宣聖大王)
골품
진골(真骨)


1. 개요
2. 생애
3. 그 외



1. 개요[편집]


朴乂兼/朴銳謙

신라 후기 왕족이자 추존 국왕. 시호는 선성대왕(宣聖大王).

본인은 생전에 왕에 오른 적이 없었고, 선성대왕이란 시호는 양아들인 신라 제53대 신덕왕 박경휘에 의해서 왕으로 추존된 것이다.

통일신라경문왕 일가 대에 몰락하면서 후삼국시대가 개막할 때 김효종[1]과 함께 차기 대권을 두고 경쟁했고, 결국 수백년간 신라 왕위를 차지한 김씨 세력 대신 그가 이끌던 박씨 세력이 신라의 마지막 운명을 책임지게 된다.


2. 생애[편집]


신라 하대는 제48대 경문왕 이후로 경문왕 일가가 왕위를 돌아가며 계속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예겸은 박씨로 대표되는 주요 정치세력을 이끌고 있는 실력자였고, 헌강왕 즉위 후 시중에 임명되어 상대등에 임명된 위홍과 함께 헌강왕 전반기 국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헌강왕 6년인 880년 예겸은 시중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는 이찬 민공(敏恭)이 대신한다. 이는 위홍을 비롯한 경문왕계의 국정 장악으로 해석되지만[2] 박예겸은 정강왕 시기에 대아찬 작위가 복권되고, 이후 경문왕의 딸인 진성여왕 시기에 이르러 각 지방의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호족들이 사실상 독립해버리고 후삼국시대에 이르는 파국을 맞았고, 게다가 경문왕계의 큰어른과 같았던 위홍까지 사망한다.

제51대 진성여왕은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 부호부인과 그의 남편 위홍 잡간 등 서너 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정사를 어지럽히니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근심하여 다라니(陀羅尼) 은어를 지어 길 위에 던져두었다.

삼국유사 제2기이 진성여대왕


이미 진성여왕 재위 하반기에는 왕실 측근을 비방하는 다라니 유포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왕경 서라벌 사람들(國人)의 여론도 진성여왕과 경문왕계를 거세게 비판할 정도로 민심이 악화돼 있었다. 신라 지방에서 불만이 폭발하는데 중앙에서도 당연히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경문왕계 및 경문왕계와 밀접한 효종 대신 대안으로서 예겸의 박씨 세력이 일선에 다시 등장한다.

899년경[3] 양아들 박경휘와 헌강왕의 딸 김의성이 혼인해, 김효종과 마찬가지로 왕의 사위로서 신라 법도상 왕위를 계승할 자격을 충족했다. 이는 양아버지 예겸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진성여왕이 책임을 져 자진 퇴위하고 그 대신 서자라는 혈통적 약점이 있는 효공왕이 즉위한다. 899년 예겸은 딸을 효공왕의 왕비로 들여 차기 대권의 명분을 쌓았다. 효공왕은 10살 정도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니 정치를 주도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므로 사실상 예겸이 효공왕 시기 후삼국시대 신라의 실권을 쥐었을 것이다.

예겸은 효공왕이 사망하는 912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양아들 박경휘가 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예겸을 선성대왕으로 추존하였다.

3. 그 외[편집]


신덕왕의 박씨 성은 모계인 정화부인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마찬가지로 부계가 아닌 모계가 아달라 이사금의 후손이다. 신라 시대나 고려 초기에는 부계가 아닌 모계 성을 따른 사례도 종종 발견되며, 이에 해당되는 사람으로는 혜충태자의 딸인 선의태후 박씨, 김충공의 딸인 헌목태후 박씨, 신무왕의 딸인 광의왕태후 박씨 등이 있으며 이외에 궁예 역시 신라로부터 독립하면서 외가의 성을 따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서의 표제어는 예겸으로 되어있지만 실제 이 사람이 박씨인지, 김씨인지, 또는 아예 성씨가 없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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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헌강왕의 사위이자, 이후 경순왕의 아버지이다.[2] 삼국사기에서 김민공이 헌강왕의 국정운영을 찬양하는 일화가 남아있다. 이 시기 신라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3] 효공왕과 박예겸의 딸이 혼인한 시점인데, 김의성은 효공왕의 누이이고 박경휘는 박예겸의 아들이므로 이 둘의 혼인 시점 또한 이로부터 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