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택/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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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2009년 타격왕 획득 논란



1. 개요[편집]


박용택의 사건사고 및 구설수, 논란을 다루는 문서.


2. 2009년 타격왕 획득 논란[편집]


파일:Q2H203Y.jpg

"타이틀만 따면 장땡?"…LG '치사한' 타율관리 기사에 나온 장면이다. 사실 LG, '타격왕 만들기' 추악한 타율관리라는 기사도 있었으나 졸렬이라는 단어에 묻혔다. SK, 두산 꺾고 '19연승'…'아시아 신기록' 세워 - 타격왕 확정 당시 뉴스

당시 경기 영상, 경기 풀영상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있는 박용택의 대표적인 흑역사. 2009년 타격왕 타이틀을 두고 롯데 홍성흔과 경쟁 과정에서 비난을 받았다. 당시 홍성흔보다 2리 차이로 앞서있던 박용택이었고[1], 롯데 vs LG 경기에서 박용택 본인은 출전하지 않았다.[2]

그런데 문제는 경기 시작 후, 타격왕 경쟁자인 홍성흔이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LG 투수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너나할 것 없이 스트라이크 존과 한참 벗어난 공만 계속 던졌다는 것이다. 당연히 결과는 4연속 볼넷으로, 홍성흔은 이날 배트 한번 휘두르지 못한 채 경기를 치렀다. 이후 홍성흔이 안타를 쳐도 뒤집기가 불가능한 5번째 타석이 되자 그제서야 제대로 승부를 했다.

여기서 박용택의 태도도 문제가 되었는데, 홍성흔이 4번째 타석에서 볼넷으로 나가자 덕아웃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강호동의 밥심이란 프로그램에서 밝히길 카메라가 전부 자기한테 집중하니깐 부담스러워 하는 도중에 옆에 있던 이진영이 형만 찍는다고 놀려 순간 피식 웃은 그 장면이 캡쳐되어 나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데다 이 논란으로 인해 졸렬택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워낙 인상깊은 헤드라인이었던지라 야구 외의 언중에게도 '졸렬'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당시 김재박 감독도 경쟁 선수에게 고의사구를 지시한 것에 대해 비난을 받았다.

스포츠 선수는 보통 해당 종목 내에서 제한적인 영향력을 갖는 편이라 연예인, 정치인 등에 비해 셀럽으로서 급수(?)는 한급 떨어지는 편인데 그런 운동선수가 스포츠종목을 넘어선 전국구 유명인으로서의 인지도를 가지려면 국가대표 혹은 해외 상위리그에서의 활약이나 세계적 신기록 등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해, 운동 선수가 유명해지려면 스포츠면이 아닌 일반사회면에서도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박용택은 그런 종목을 넘어설 정도의 유명세는 가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종목을 넘어서 본인의 인지도 이상의 영향을 끼쳤던 사례.

당연한 이야기지만 워낙 유명해져서 박용택 본인도 이 졸렬한 타율관리라는 용어를 알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졸렬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기까지 했다고.

그리고 이는 본인이 여러 차례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술할 2020년 은퇴 투어가 무산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박용택의 커리어에서 대한민국 사회에 가장 파급을 일으킨 사건은 야구 종목내의 기록이나 국가대표 등에서의 활약이 아닌 바로 이 졸렬사건이었음을 생각하면 은퇴투어 무산에 이 사건의 지분은 상당했다. 비난은 한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지만 비난 또한 결국 10년이란 세월을 지나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LG를 자주 까는 것으로 유명한 스포츠 웹툰 작가 바운스킴은 이번 은퇴투어에 대해 이 사건을 카툰으로 그려 박용택을 에둘러 비판했다. 문제의 그 화

1984년 이만수트리플 크라운을 쟁취하고도 김영덕 감독이 홍문종을 9연속 고의사구를 내줘서 얻은 타이틀이라 기자들의 외면해버려 시즌 MVP를 최동원에게 넘겨줘야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비난은 한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는 김영덕 감독의 말이 얼마나 무색한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언론에서는 주로 ‘꼴불견’ 타격왕 경쟁, 고의 사구 남발, LG ‘타격왕 탐욕’, 잠실벌엔 팬 야유만, LG ‘타격왕 밀어주기’ 추태, LG 박용택 타격왕 과거에도 추태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했다.

KBO리그 역대 최다안타 기록에 LG의 10년 암흑기를 함께한 프랜차이즈이자 FA협상도 구단과의 큰 마찰없이 체결하였고 미담만 쏟아지는 팬서비스만 보아도 충분히 훌륭한 타자이자 야구선수이지만 타격왕 논란으로 망친 이미지가 모든 장점을 잡아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은퇴뒤에 홍성흔과 같이 이 사건을 언급했다. 이진영이 웃겼어요 사실 홍성흔은 2009년 당시에도 박용택은 잘해서 타이틀을 가져갔다고 언급했다. '쿨가이' 홍성흔 "타격 당당한 2위 만족"

이 이후로 2020년 박용택 은퇴투어 논란, 2021년 KBO 퓨처스리그 타격왕 밀어주기 의혹으로 인해 이 사건이 재조명되었다.


현역 은퇴 후 강호동의 밥심 9편에 사건의 당사자였던 홍성흔과 함께 출연했는데, 이 자리에서 박용택은 이 때를 야구 인생 중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은퇴식 당일에 공개된 은퇴식 특집 영상에서도 이 때가 자신의 야구 인생 중 가장 아쉬운 선택이었으며 이것을 굉장히 후회한다고 밝혔다.

사건 이후 공개적인 자리에서 지속적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심지어는 저 당시에 붙은 별명인 졸렬택조차도 박용택 본인이 은퇴식에서 써먹는 것까지 고려했을 정도. 은퇴식 당일 LG 선수들이 박용택의 별명을 택해 유니폼에 새겨 나오는 이벤트를 진행했는데, 정우영이 졸렬택을 택했지만 마음 여린 LG 팬들의 반발로 흐믓택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당사자 박용택은 졸렬택을 써도 상관없다고 말했다.[3] 항상 회피하지 않고 잘못을 받아들이며 당사자인 홍성흔을 비롯한 롯데 팬들도 박용택을 용서해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3. 2011년 LG 트윈스 청문회 사건[편집]


아는 사람만 아는 2011년 8월 8일 청문회에서 썩소를 짓고 팬들 좀 힘들게 하지 말라는 말에 "당신 나이 몇 살이야?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거야, 아니면 당신이 날 힘들게 하는 거야?"라며 응수, 이후에 버스에 타지 않고 마지막까지 청문회단을 바라보았다고 후기에 나와있는데, 막상 증거 자료로 올라온 영상엔 잘려있다.[4]

그런데 2차 청문회에서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차를 주차장에 버린 채 다른 비상 출입구로 분노한 팬들을 피해 도망갔고 원정 버스를 타야되는 관계로 어쩔 수 없다시피 나온 3차 청문회에서 팬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얼마나 응원을 많이 하는지 알겠다는 이야기를 하더니 갑자기 "솔직히... 저희 선수들... 많이 부담스럽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문제는 더 커졌다. 저 장면은 1차 때와 달리 당시 아이폰으로 촬영하던 유저가 아프리카 플레이어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로 생중계하던 터라 확실하게 들린 상황.

웃긴 건 주장이란 사람이 깔끔하게 사과만 해도 문제가 없는 상황에 그동안 열심히 자신들에게 응원해준 팬들에게 한다는 소리가 고작 '많이 부담스럽다'[5]였다. 당시 8월 18일 3차 청문회에서 저 이야기를 한 이후 20일간 LG는 홈경기 승리가 없다가 두산전에서 정성훈의 홈런으로 진땀승을 거뒀다. 벤치 클리어링 때도 전혀 나서질 않는 태도 때문에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4. 은퇴 투어 논란[편집]




2020년 시즌을 진행하면서 은퇴 투어를 하기로 했는데[6] 야구팬들 사이에선 박용택이 은퇴 투어를 받을 만한 선수인지에 관해 설전이 오가고 있다. 옹호측은 박용택이 훌륭한 선수고, 야구장 안팎에서 팬에게 친절한 선수였으니 자격이 있다고 하며, 비판측의 의견은 해외 리그 진출, 한국시리즈 우승, 국가대표 활약이 없으며 역대 WAR도 최정, 김태균, 최형우보다 낮고, 개인타이틀도 3번밖에 못 얻었음에도 그 중 하나가 논란이 되는 타격왕 타이틀인데 과연 은퇴 투어 자격이 있느냐는 의견이다. 무엇보다 롯데 시절 홍성흔과의 타격왕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을 때 졸렬한 타율관리로 홍성흔을 제치고 타격왕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롯데팬들이 11년 전 그 기억을 잊지 않고 반대 의견에 가장 앞장서고 있다.[7]

게다가 언론의 흔들기성 보도도 박용택의 은퇴투어에 관한 이미지 폭락에 한술 더 떴는데, 연이은 은퇴투어 관련 이슈를 메인기사에 올려 안 그래도 댓글창이 불탔다. 당시 박용택 본인은 2군에 있어서인지 아무런 반문을 하지 않았다. 반대파들은 대부분 "고작(?) 국내 통산 최다안타 기록을 가지고 은퇴투어가 말이 되냐"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반론도 존재한다. 최다안타는 다른 부문의 기록들(예: 홈런)보다도 꾸준히 제몫을 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인데 과연 이 기록의 가치를 폄하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결국 이 문제로 네이버에서 설문조사를 진행하였고, 결과는 반대가 70% 가까이 반대여론이 많게 나왔으며 결국 8월 10일 은퇴투어를 사양한다는 본인 입장이 나왔다.

애초에 박용택의 의견 반영 없이, 각 팀 대표 선수들이 모인 선수협회에서 제안된 이벤트였다. 일주일 이상 쏟아진 어그로성 기사들과 악플로 박용택이 기자회견까지 여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연하겠지만, 상대팀 선수에게 자기 팀의 홈구장에서 은퇴 행사를 열어주고 선물을 준다는 것은 소속팀을 떠나서 프로야구 전체 차원에서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선수이고, 상대팀 팬조차 이 선수의 은퇴를 지켜보기 위해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는 정도의 선수라는 뜻이다. 이른바 '적이지만 존경할 만한', 매력적인 선수라는 것. 이런 선수의 매력에는 분명 단순히 숫자인 기록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선수가 쌓아올린 실적과 더불어 언행이 오랜 시간 겹쳐서 만들어진 평판, 스타성 등등 여러 가지 요인이 섞여 빚어내는 것이다.

영화 같은 것을 봐도 적의 강함과는 별개로 미워할 수 없는, 주인공보다 인기가 좋은 매력적인 악역 캐릭터도 있고 그냥 밉기만 한 악당도 있듯이, 단순히 실력만 뛰어나다고 이런 매력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 '매력' 을 리그를 지배하는 압도적인 실력에서 오는 카리스마로 쌓아올리든 혹은 호감 가는 캐릭터성으로 쌓아올리든 무엇으로 쌓아올리든 그것은 선수 개개인의 몫이다. 명백히 타이틀 몇 개, 누적 얼마 이상 하고 선을 딱 그을 수 있는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 선수라면 해줄만하지' 하는, 다수가 동의하는 암묵적인 기준은 분명 있다.

야구팬들 사이에서 은퇴투어감으로 꼽히는 선수들을 보면 대개 국가대표에서 인상깊은 활약을 보였거나, 해외리그에서 준수한 성적으로 활약하며 해외리그든 국대든 상대팀 선수가 아닌 '우리 선수'로서 온 KBO 팬이 한마음이 되어 응원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소위 말하는 타 팀 선수지만 한때나마 정을 준 적이 있는 선수가 주로 꼽힌다. 이 선수들은 이렇게 은퇴투어의 주체가 되는 타 팀 팬들에게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고 쌓아올린 것이다.

혹은 양준혁 급으로 야구팬 전체의 존경을 받을만한 압도적인 커리어를 쌓아서 강함에서 오는 카리스마로 이 매력을 쌓아올리는 선수도 있고, 여튼 이 '매력' 혹은 '호감'이라고 할 만한 요소를 쌓아올리는 방법은 수많은 방법이 있다. 윤성환이나 임창용, 강정호 같은 선수들은 실력은 뛰어날지언정 이 선수들이 일으킨 사회적 물의가 선수의 '매력'을 깎아먹는 요소가 되어 반대 의견이 많은 것이다.

한 보기로 이승엽은 박용택에 비하면 팬들에게 훨씬 불친절한 선수였고, 다년간의 해외리그 경력으로 안타수나 출장경기수 등 몇몇 누적기록은 박용택에 비하면 밀리나, 한때 리그를 지배한 압도적인 실력과 해외리그와 국가대표 성적으로 야구팬들이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선수는 아니라도 전 국민적인 응원을 받던 활약으로 폭넓은 존중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사상 첫 은퇴 투어의 주인공이 되었다.

박찬호는 MLB에서 리그를 지배하는 특급 선수도 아니었고 KBO 경력은 단 1년뿐이지만 야구를 넘어 어렵던 시기 모국에 희망을 주어 전 국민적 사랑을 받았기에 올스타전에서 전 구단 팬들의 축복을 받으며 은퇴식을 치를 수 있었다. 물론 이는 명백하게 수치화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논란이 된 것이나, 결과적으로 전 구단 팬을 상대로 한 투표에서 반대의견이 많았다는 것은, 박용택은 LG 트윈스의 대선수임은 분명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타 팀 팬들에게는 적이었지만 은퇴를 축하하고 싶을 정도로 리스펙트할 만한 선수까지는 아니었다는 말이 되겠다.

결국 흐지부지되나 싶었으나 2020년 9월 8일 광주 KIA전[8]에서 KIA 주장 양현종의 제안으로 소소하게 은퇴 기념 꽃다발을 건네고 양팀 선수단이 단체사진을 찍으면서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처음에 은퇴투어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자연스레 이승엽의 사례를 떠올려 대부분 그 정도까지 해줘야 하냐는 반응이었으나 타팀 팬들도 이 정도라면 괜찮다는 반응들이 많이 보였고, 이걸 시작으로 9월 16일 한화전을 비롯해 각 구단들이 비슷한 이벤트를 열었다.[9]

팬들 사이에서는 이 이벤트가 영향력이 꽤 컸는데 당장 전날까지 심심하면 싸우던 LG 트윈스 갤러리와 KIA 타이거즈 갤러리가 이 이벤트 하나로 분위기가 바뀔 정도였다.[10] 그동안 박용택을 조롱하던 KIA 갤에서도 졸렬택 사건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이미지가 안좋진 않았을 거라며 꽃다발을 든 표정을 보고 짠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타팀 팬들 입장에선 박용택이 LG 팬들에게 어느 정도의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일화. 이 이후로 박용택에 대한 KIA 팬들의 여론도 확실하게 호의적으로 바뀌었고 은퇴 이후엔 KBSN 해설위원이 되었는데 KIA 관련해서는 항상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줄 때가 많아 KIA 팬들 사이에서는 호감해설로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 그리고 이 스타트를 끊은 게 양현종의 제안이다 보니 MLB파크 등지에서 양현종의 은퇴 투어에 대한 떡밥이 터질 때마다 LG팬들은 다른 팀들이 안해줘도 LG는 해준다는 반응을 보일 때가 많은 편.

이후 9월 16일 마지막 대전 원정경기 2연전 첫날에 최원호 한화 감독대행과 이용규 한화 주장으로부터[11] 격려의 꽃다발을 받는 고별 이벤트가 진행됐고 9월 20일 마지막 두산 정규시즌 원정경기에서도 같은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이웃이라는 특성상 주장, 감독, 선수단들이 단합하여 그의 은퇴 관련 이벤트를 만들어주었다. 그의 전성기 포지션이었던 좌익수 방향으로 사진 촬영이 이뤄진 것이 포인트. 또 10월 2일 마지막 수원 원정경기 3연전 첫날에 KT 주장 유한준[12] LG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박경수가 꽃다발을 전달해주는 고별식을 진행했다. 삼성도 10월 8일 잠실 최종전에 앞서 삼성 주장 박해민[13]과 LG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우규민이 꽃다발을 전달해주는 고별식을 진행했다. NC와의 마지막 원정경기가 있었던 10월 24일에는 NC 감독 이동욱과 주장 양의지와 함께 촬영식을 가졌고, NC 구단 차원에서 꽃다발과 기념 액자를 선물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LG의 정규시즌 최종전인 10월 30일 SK 또한 LG에서 뛰었던 정의윤이진영 코치의 꽃다발 증정식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14]

고척에서 키움 선수들과는 결국 이 이벤트를 하지 못했다. 이유는 KIA 타이거즈가 이 이벤트의 스타트를 끊기 전에 이미 고척 키움전 8경기가 모두 끝나버렸기 때문. 포스트시즌에 고척에서 두 팀이 만났다면 진행했을 수도 있었지만 두 팀은 잠실 와일드카드전에서 만났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1] 박용택 타율 .374 홍성흔 .372[2] 롯데는 시즌 마지막 경기였고, LG는 다음 날 히어로즈와의 1경기가 남아있었다.[3] 애초에 이민호가 마킹했던 찬물택 역시 부정적인 별명이며 박용택은 긍정적, 부정적 별명을 모두 사용해도 된다고 하였다.[4] 이 부분에 대해 동영상 올리는 이는 애초에 영상 자체에 큰 내용이 담겨져 있진 않다고 언급되어 있다.[5] 사실 팬들이 부담스럽다는 말 때문에 먼저 욕먹은 이가 있는데 바로 롯데공필성 코치. 08~10시즌에 사직이나 마산에 좌석이 만원이 되면 롯데는 거의 져버리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었는데 공필성이 이를 두고 "팬들이 너무 많으면 부담스럽다."라고 둘러대서 팬들이 어이없어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팬들이 이렇게 많이 왔으니 더 잘해야 할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 하지만 그 심정을 팬들이 알아서 이해하게끔 한다면 몰라도 팬들앞에서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 건 확실히 옳지 못하다.[6] 처음부터 본인이 원해서 한 것은 아니었고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에서 제안했다고 한다.[7] 그래서 LG팬들이 이를 갈고 이대호 은퇴투어를 막자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실제로 일부 LG팬들이 거부감으로 반대의견도 나오긴했으나, 박용택 은퇴 투어와 달리 다른 8팀 팬들은 모두 찬성이었고 골수 LG팬들조차 한미일에서 전부뛰고 하락세 없이 전시즌 괄목한 성적을 거둔 선수의 은퇴투어를 막을 명분이 자팀 스타 보복 빼곤 없다면서 흐지부지되었다.[8] LG 트윈스의 마지막 광주 원정의 첫 날이었다.[9] 이승엽과 같은 해에 은퇴한 이호준도 규모가 훨씬 작았지만, 각 구단에서 소소하게 선물을 준비하는 정도로 치른 사례가 있다.[10] LG 트윈스 갤러리에서는 기아라는 단어를 쓰면 ㄴㄷㅎ이 돌아오며 기아가 아닌 홍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무조건 멸칭을 쓰지 않으면 말이 안통할 정도로 두 갤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은퇴투어 후에는 심심하면 홍어드립을 치던 디씨 고닉들조차 기아라고 부르던 기간이 있었다.[11] 공교롭게도 최원호 감독대행과 이용규 모두 LG 선수 출신이다. 특히 최원호 감독대행과는 2002년 한국시리즈를 같이 뛴 인연이 있다. 이용규와는 2004년 딱 한 해만 같이 뛰었는데 현재의 위치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미미했던 신인 대주자 요원이었다.[12] 박용택이 은퇴하면 그가 갖고 있던 KBO 리그 최고령 야수 타이틀은 유한준에게 넘어간다. 이택근도 있기는 하지만 2020년 그의 행보를 감안한다면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3] 공교롭게도 다음시즌이 끝난 2021년 FA때 LG로 이적한다.[14] 다만, 이 날은 또한 윤희상의 은퇴식이 있는 날이어서 약간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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