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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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一禹)

파일:박일우.jpg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중국에서 활동한 일제시대의 공산주의자, 항일운동가. 북한군인, 정치가. 전선사령부 부사령관, 정치보위상, 체신상 등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1895년생, 1903년생 등이 떠돌아다니지만 해방 후 소련군정에서 작성한 평정서에 따르면 1911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길림성 연길현에 있는 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간도에서 국민학교 교사를 지내던 그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1928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 지방정부에서 활동하였고 당 간부양성기관이었던 중앙당학교를 졸업하였다. 1942년에는 조선독립동맹의 창립에 참여하였다.[1]

연안군정대학 교관을 역임한 그는, 같은 해 7월에는 조선의용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1945년 초에 세워진 조선혁명군정학교의 부교장 겸 당위원회 서기도 도맡았으며 독립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1월 입북한 뒤 북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였다.[2]

1946년 8월에 그는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7년 2월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 내무국장, 1948년 3월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으로 취임하였다. 1948년 8월에 열린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9월 9일 초대 내무상에 임명되었다.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50년부터 군사위원회위원, 전선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고 1951년에는 정치보위상을 맡았다. 하지만 김일성은 중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박일우를 크게 경계했으며, 1952년, 사회안전성과 내무성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내무상 자리를 방학세에게 내주고 내무상에서 경질되었다. 1953년 3월 23일, 1953년 1월에 사망한 김정주의 뒤를 이어 체신상을 맡았으며 1953년 8월 전원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에서 탈락하였다.

이처럼 박일우는 초기 북한에서 대표적 지성파 인물로 주목되는 존재로서 국내파 영수였던 오기섭을 자아비판에 회부하였을 때도 충분한 검토를 거쳐 엄정히 처리하자는 신중론을 내세워 김일성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다. 또한 1954~1955년 북한 대기근이 발생하자 박일우는 이 문제를 마오쩌둥에게 보고했고 김일성은 박일우가 중국인들과 결탁한다면서 격노를 금치 못하며 박일우를 마오쩌둥의 조선인 서기라고 맹비난했다. 1955년 11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창흡에게 체신상 자리를 내주고 해임당했는데, 섬뜩하게도 로동신문은 그를 동지라고 지칭하지 않았다.

마침내 6·25 전쟁에 대한 책임문제를 가지고서 김일성이 김무정, 방호산 등 연안파 지도자들을 숙청하는 것을 박일우가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불충고발에 의하여 박일우는 결국 박헌영의 남로당에 가담하였다는 반당종파혐의로 1955년 숙청되었다.[3] 박일우는 최창익, 윤공흠, 김두봉 등 대다수 연안파 지도자들과 유대관계는 커녕 오히려 적대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박일우의 숙청을 방관했으며 오히려 연안계 현정민 등은 박일우 숙청을 적극 돕기도 했다. 훗날 북한에서는 소련파, 연안파가 굳건한 '종파', '파벌'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김일성이 이들을 숙청하면서 내세운 구실에 가깝고 이들은 계파 자체는 어느정도 존재했으나 자신들이 일제강점기 때에 있었던 출신지역에 따라 묶였을 뿐 서로 단결력이 약했고 뚜렷한 지도자급 인사도 없었다. 나중에 연안파가 김일성에게 반기를 들면서도 연안계 박일우보다는 소련파 허가이를 숙청한 것을 문제삼을 정도였다. 김일성은 자신이 박일우의 소규모 군인 그루빠만을 조질 뿐이라면서 연안계 동무들이 박일우의 죄를 잘 고발해주었다고 이들을 오히려 칭찬했다.

박일우의 숙청은 소련과 중국, 특히 박일우와 관계가 밀접했던 중국의 분노를 샀다. 마오쩌둥은 1956년 9월, 중국공산당 8차 당대회에 참석한 최용건에게 박일우 숙청을 비판하면서 박일우가 필요없으면 방호산, 김웅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8월 전원회의의 결정을 번복하기 위해 북한에 파견된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펑더화이의 주도로 열린 조선로동당 1956년 9월 전원회의 협의 과정에서 김일성은 박일우를 조속히 석방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이후 운명은 불분명한데, 처형되었다는 설도 존재하지만 마오쩌둥의 강력한 요구로 중국으로 송환되었다는 내용이 적힌 소련 외교문서도 존재한다. 하지만 션즈화의 책에 따르면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박일우를 송환해주기로 약속해놓고 끝내 이를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에서 외무성 부상을 지낸 박길룡의 증언에 따르면, 8월 종파사건 이후 분위기가 살벌해지면서 박일우의 중국 송환이 취소되고 평안북도 국경지대의 산악으로 추방당해 협동농장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김강의 증언에 따르면 방호산과 함께 비밀리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3. 여담[편집]


  • 김학철의 증언에 따르면 1953년 7월에 그를 만났을때 박일우는 자신의 숙청을 예감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김일성이가 자신을 체신상에조차 오래 남겨두지 않을 것이라고 한탄하면서 동무라도 중국에 피신하라고 조언을 해줬다고.

  • 중공군 참전 초기 중국군에게 달걀을 주어 마오안잉이 그 달걀로 볶음밥을 만들어 먹으려다가 폭격에 맞아 죽은 원인을 제공했다는 설이 있다. 설이긴 하나 박일우가 펑더화이에게 계란을 준 건 사실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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