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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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건설 테크노크라트.

2. 생애[편집]


1922년 3월 24일에 함경남도 북청군 부동리에서 태어났다.

1936년 4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사립학교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4월, 서울로 상경하여 서울직업학교 건축과를 3년간 고학을 하면서 다녔다. 이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서울과 만주를 전전하다가 만주에서 일본군에 징용당할 위기에 처하자 1945년 1월, 고향으로 도주했다.

해방 이후 흥남비교공장에서 일하다가 조선공산당에 입당, 함경남도 상업관리소 처장을 거쳐, 함경북도 건설총국장을 거쳐 1953년 9월, 평양 제2백화점 복구공사, 1968년 함경북도의 대규모 공사들을 훌륭히 수행하여 중앙으로 발탁,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정무원 건설부장에 임명되었다. 1974년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정무원 건설부장에 유임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으나 1982년 3월, 건설부장에서 퇴임하여 1983년 4월, 8기 정무원에서 국토 및 건설관리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은퇴하여 도시관리부 고문으로 지내다가 1985년 11월 6일 3시 40분에 63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당중앙위원회와 정무원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다년간 건설부문과 국토 및 도시관리부문의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우리 당의 경제정책을 관철하기 위하여 모든 정력을 다 바쳐 사업하였으며 경제건설과 인민생활향상에 공헌하였다. 박임태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도시관리부 고문 직함으로 안치되었다.

3. 참고문헌[편집]


  • 조선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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