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양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 대한제국의 정치가. 온건 개화파의 대표 인물이며 조선 최초의 주미 대사.
2. 생애[편집]
본관은 반남 박씨. 정조 후궁인 수빈 박씨의 일족으로 박규수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유대치 문하에서 김윤식, 김홍집, 김옥균 등과 교우하였다. 1864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고 1866년 문과에서 급제하였으며 온건 개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관직에서 승승장구하여 성균관 대사성, 한성부 좌윤, 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냈다. 1887년 주미 특파 전권 대사가 되어 워싱턴 D.C.에 부임했다.
1889년 귀국하여 홍문관 제학, 호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지내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제1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고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자 회의원이 되었다. 11월 제2차 김홍집 내각 때는 학무대신이 되었고 1895년 삼국간섭 등으로 제2차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총리대신이 되어 과도 내각을 세웠다가 을미사변 때 수구파의 대대적인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다시금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자 내부대신이 되어 을미개혁을 진행하다가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이 살해당해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내부대신, 총리대신 서리, 궁내부대신 서리를 겸임하여 정국을 주도했다.
1897년 독립협회 설립을 주도하였고 만민공동회에 정부 측 인사로 참가하였다. 독립협회가 폭력적으로 탄압당하자 사직서를 올렸으나 반대로 고종에 의해 내무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9월 표훈원 총재가 되었고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으나 병이 악화되어 11월 사임 후 곧바로 사망하였다. 순종 때 문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여담[편집]
- 개화에 앞장섰으나 온건 개화파를 보호하는 역할을 자임해서 정쟁에 자주 휘말렸다. 김홍집의 3번의 내각에 모두 참가하였으면서도 제3차 김홍집 내각 전후로 총리대신 서리를 맡았다는 점에서 박정양의 정치 역경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당시 정치적 문제에 대한 수습은 거의 박정양이 맡았다는 것이다.
- 친일적인 측면이 엿보였다는 평도 있으나[1]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정부 측 인사로 계속 참가했다는 점과, 을사오적에 대한 처벌을 주장했다는 점, 그리고 이상재 등 젊은 개화파의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아는 친일파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 박정양보다 몇 년 앞서 미국에 갔던 민영익처럼, 박정양도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땅바닥에 몸을 엎드려 큰절을 했다.
- 미국 사교계 파티에 참석했다가 충격을 받기도 했다. 파티에 여자들도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저 여자들은 모두 기생인가?' 라고 물었다가[2] , '저 여자들은 미국 저명인사들의 아내이거나 딸이다'라는 대답을 듣고 놀랐다. 그런가 하면 파티에 참석한 여자들의 옷차림(가슴과 어깨를 많이 드러낸 드레스)과 남녀가 짝이 되어 서로의 몸을 잡고 춤을 추는 것에도 충격을 받았다.
- 박정양의 둘째 아들 박승철은 독립운동가로 아버지가 타계한 후 아버지의 문인이었던 이상재로부터 영어를 교육받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했으며, 1922년엔 해방 후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준연과 함께 독일 베를린 대학교로 다시 유학을 갔으며 막 독립한 폴란드를 포함해서 유럽권 일대를 순회하고 잡지에 기행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귀국 후엔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농촌 운동과 관련된 기독교계 항일 민족주의 단체에 참여해 옥고를 치뤘다. 해방이 될 때까진 고향인 연천군에서 계속 거주한 것으로 보이나 해방 후 38선이 그어져 연천이 북한에 속하게 되자 월남해 현재 한국전력의 전신이기도 한 남선전기의 사장을 지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면서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 수가 없는 상태다.
4. 관련 문서[편집]
5. 둘러보기[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9 20:49:23에 나무위키 박정양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