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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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인
朴定仁

파일:c994785c-77cd-41e7-a7fa-8a2348f70a12.jpg

출생
1928년
함경남도 신흥군 상원천면 중흥리[1]
(현 함경남도 신흥군 서곡리)
사망
2016년 2월 3일 (향년 88세)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8년 7월 28일 ~ 1973년
임관
조선경비사관학교 (6기)
최종계급
준장
최종보직
제3보병사단

1. 개요
2. 초기 경력
3. 1973년 3.7 완전작전
4. 이후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육군 장성.


2. 초기 경력[편집]


1928년 함경남도 신흥군 상원천면 중흥리에서 태어났다. 상원천면사무소가 있던 원풍리의 동상소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3월 함흥중학교에 입학했다. 8.15 광복 이후 소련군의 약탈과 만행을 목격하고 분노하며 반소, 반공 의식이 생겼고, 이는 1946년 3월 23일 함흥반공학생 의거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격발되었다. 직후에 휴학령이 선포되고 시위 참여자에 대한 수색 및 체포, 구금이 이어지자 월남을 결심했고,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뵌 뒤 1947년 친구인 이시묵과 이시묵의 동생 등 2명과 함께 한탄강을 통해 월남하였다.

월남 직후에는 광복 이전에 출가해 미리 서울특별시 종로구 적선동에 살고 있던 누나 집에 기거하면서 서북청년회에 입단해 활동했다. 그 뒤 서북청년회 활동에 대해 회의와 한계를 느끼고,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사병하사관 생활을 거쳤다. 하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함흥중학교 선배인 김완용 대위와 한신 중위의 추천을 받아 1948년 5월 5일, 조선경비사관학교에 6기 사관후보생으로 입교해 그해 7월 28일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10월 19일 여수·순천 10.19 사건 당시에는 영등포구에 있던 육군 특별사령부에 소대장으로 복무했으며, 중위 진급 후 육군본부 작전국 작전장교에 보임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본부 작전국 상황실로 복귀해 근무했다. 이때 앞서 작전장교 시절 직접 선발한 정훈장교 1, 2기와 생도 2기생들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의 독단적인 결정으로[2] 포천 전투에 투입되어야 했고, 결국 많은 희생자를 내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이 때문에 박정인 장군은 채병덕 장군을 몹시 싫어한다.

이후 제6보병사단 19연대 작전주임 등으로 활약하면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다.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2번의 탈출끝에 원대 복귀에 성공하기도 했다. 1967년 거의 막차로 준장으로 진급을 하게 된다. 이후 1968년 울산경비사령부 초대 사령관을 역임[3]한 뒤, 1971년에는 제33보병사단장으로 부임했다.


3. 1973년 3.7 완전작전[편집]




1973년 3월 7일 제3보병사단장으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었다. 진백골 18연대 전방대대에서 군사분계선 표지판 작업 도중 북한군의 사격도발로 부상자가 생기자 당시 사단장이었던 박정인은 직접 마이크를 통해 북한측에 사격중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측은 한국측의 경고를 끝내 무시했고, 결국 포병연대에 사격명령을 내렸다. 직후 105mm 견인곡사포에서 발사된 백린연막탄이 북한군 GP의 외벽을 관통하고 내부에서 폭발하여 건물이 그대로 불지옥이 되었고, 후일 밝혀지길 그 안에 있던 상주인원 36명까지 사살되었다고 한다. 이후 부상당한 장병이 무사히 구출되어 후송되면서 포격은 끝났다. 이른바 3.7 완전작전. 이 작전은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의 미루나무 절단 작전(일명 '폴 버니언' 작전), 1999년 6월의 제1연평해전, 2009년 11월의 대청해전, 그리고 2015년 8월의 서부전선 포격 사건 등과 더불어, 휴전 이후 한국군이 북한의 도발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대표적인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 이후 북한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사단이 통째로 교체된 건 물론이고 남쪽 3사단에 대응하기 위해 2개사단을 배치했는데 북한 장교와 사관들이 가장 꺼리는 곳이라고 한다. 한 예로 1975년 김부성(소좌급 대우)과 같이 귀순한 인민군 유대윤 소위의 증언을 통해 그날의 공격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밝혀졌다. 유 소위는 “그날 백골 포병이 GP 막사에 명중시킨 포탄에 인민군 36명이 사망했다”며 지금도 백골부대는 북한군이 가장 겁내는 부대”라고 증언했다.[4]

게다가 이후 박정인은 사단 내 모든 차량의 조명을 켜고 남방한계선까지 돌진하게 하는 무력 시위를 감행했다. 이에 당황한 북한은 김일성이 직접 전군에 비상 동원령을 내려 준전시태세에 돌입했고,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다.


4. 이후[편집]


이로 인해 작전 약 1달 뒤에 박정인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이임하여 육군본부에서 무보직으로 5개월 있다가 예편하였다. 1985년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원들이 평양에 방문했는데, 그중 함경남도도민회장이 머물고 있는 숙소 방에 북한 조선로동당 국가보위부의 한 고위 간부가 찾아왔다. 그는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의 박가 성을 가진 요란한 사단장 요즘 뭘 하오?"하고 원한 서린 말투로 질문했다. 함남도민회장은 "나는 군대 일은 모르오" 라고 대답했지만 박정인 장군이 그만큼 북한이 무서워하는 맹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5]

1998년 1월에 박정인의 아내가 신장투석으로 투병하다가 향년 68세로 별세했고, 2014년 11월에는 박정인 장군 본인이 뇌경색으로 투병을 하다 2016년 2월 3일에는 끝내 별세했다. 향년 89세. 3대가 육군 장교인 집안으로 장남 박홍건 예비역 대령(육사 31기)[6]과 쌍둥이 손자 중 장손 박선욱 현역 소령(육사 64기)[7]이 있고, 박 소령의 쌍둥이 동생도 현직 공인회계사지만 병역은 육군 장교로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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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0년 10월 28일자 중앙일보 기사에는 하원천면 중흥리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향토대백과에 따르면 하원천면에는 중흥리는 없었고 다만 송흥리(松興里)·부흥리(富興里)·대흥리(大興里)가 있었다. 1928년 당시에 중흥리(中興里)라는 지명이 있었던 면은 영고면, 상원천면, 동고천면, 서고천면 등이었다.[2] 작전국장이던 장창국 대령이 만류했음에도 막무가내였다고 한다.[3] 원래 월남에 가고 싶다고 김계원 육군참모총장에게 요청했으나, 울산에서 1년 정도 고생하면 보내주겠다는 말에 사령관직을 수락한다. 하지만 울산에서 3년이나 사령관을 역임했고, 끝내 월남에는 가지 못했다.[4] 제3사단은 지난 6.25 전쟁에서도 서울 수복이후 국군 부대로는 가장 먼저 38선을 돌파, 북진하여 명성을 떨치기도 했던 명문 부대다. 부대의 별칭인 '백골'도 이북 출신 실향민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던 18연대에서 유래했을 정도. 북한군 12사단 707GP 장교로 복무 하다가 1975년 3월 강원도 철원 금화지구 휴전선을 넘어 귀순한 유대윤 소위도 훗날 이 부대에 정훈교육차 방문하게 되었을때 악명높은 부대에 자신이 가게 될 줄은 몰랐다는 발언을 했다.[5] 여담으로 2010년 당시 노년의 모습이 담긴 뉴스 기사 링크가 있다. 뉴스 기사. 여기서 박정인 준장을 제지하고 미국 대사가 되었다는 여단장은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 미국 대사를 역임한 류병현(1924~2020, 재임기간 1981년 9월 21일~1985년 11월)이다.[6] 예편 후 철도청 비상계획관을 역임하였다. 현역시절 병과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똑같은 포병이었다.[7] 서라벌고등학교 졸업, 현재 육군사관학교 심리경영학과 복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