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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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박정희
그분의 과보다도 공이 훨씬 더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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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부패의 원조
지지 여부를 떠나 우리나라가 6·25의 폐허에서 허덕일 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국민들에게 불러일으켰다. 정치를 하면서 우리가 최대 정적이었지만 국민들에게 강한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평가할 만하다.
생전에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가장 극심하게 엇갈리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4] 대한민국 대통령들뿐만 아니라 정치인 중에 호평만 듣는 인물이 어디 있겠냐마는, 박정희는 낙후되어 있던 한국이 급격히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에 20년 가까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 공과가 더욱 뚜렷하다.
공을 꼽는다면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며 심각하게 피폐해져 빈곤한 상황이던[5] 한국의 재건에 주력하여 4차에 걸친 경제 개발 계획[6] , 각종 산업 육성과 대기업 성장 지원 등으로 연간 경제 성장률이 9회에 걸쳐 10%를 넘길 정도로 매우 빠른 속도로 국가 경제와 인프라를 재건하고 미래 산업에 대한 식견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화학공업 육성 등을 강행하며 18년 동안 한국의 GDP를 약 18배로 상승시키고 절대 빈곤율을 기존의 1/6 수준으로 낮추며 식량의 자급자족을 가능케 하여 식량난을 없앤 점이 대표적인 성과였다.
과를 꼽자면 정치적으로는 긴급조치, 김대중 납치 사건, 인혁당 사건을 위시한 정적 탄압과 10월 유신을 기점으로 사실상의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하는 등의 권위주의 독재로의 회귀가 대표적인 과로 꼽히며,[7] 사회 전반적으로는 징병률의 급격한 상승 및 병사 사실상 동결[8] 등 징병제 개악, 대중가요 금지곡 지정을 위시한 문화 검열, 선감원과 서산개척단 등 부랑아 가혹 행위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방면에서의 인권·기본권 침해가 꼽히고, 경제적으로도 양극화 및 부정부패, 노동 착취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대한민국 현대사는 박정희라는 인물을 빼놓고 논할 수 없으며, 특히 경제 및 산업 구조에 그 영향을 크게 드리운 인물이다. 정치인이지만 동시에 경제학자이기도 한 유승민은 저서에서 박정희의 경제적 공과와 명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지만, 경제에 관한 분명한 철학, 전략과 용인술을 갖춘 지도자였다. 포항제철(현 포스코), 울산·구미·창원·여수의 중화학공업, 경부고속도로, 새마을운동과 농어촌 근대화, 복지제도 도입 등 1960~1970년대의 수많은 업적들은 박정희 대통령과 우수한 경제관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성실하고 근면한 국민들이 만들어놓은 합작품이다.
유승민, 『야수의 본능으로 부딪쳐라』 377쪽
초기의 한국경제는 자유시장경제,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했지만 그와 동시에 관치경제, 계획경제의 성격이 강했다. 특히 1960~1970년대의 박정희 모델은 다분히 국가주도형이었고 박정희 모델이 큰 성공을 거둠에 따라 1980년대 이후 수십년 동안 그 성공신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박정희 모델 이후에 우리 경제가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경제제도의 선진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의 선진화가 필요했으나 둘 다 미흡한 상태에서 IMF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1960년대 이후 30년 동안 고속성장을 가능케 했던 제도는 1990년 이후 더 이상 성장에 플러스로 작동하지 않고 오히려 장애물이 되었다. ... 박정희 모델로 성공한 경제가 박정희 모델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정체된 것이다.
유승민,『야수의 본능으로 부딪쳐라』 347쪽
2. 긍정적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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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정적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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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논란이 있는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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