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훈(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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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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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2.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2000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83 KBO 리그 신인왕







{{{#fff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1번}}}
이광환
(1982)

박종훈
(1983~1989)


홍길남
(1990~1992)
LG 트윈스 등번호 75번
미즈타니
(1986~1987)

박종훈
(1994~1996)


민경삼
(1997~2000)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76번
오대석
(1992~1996)

박종훈
(1997~2002)


결번
SK 와이번스 등번호 80번
양승관
(2001~2002)

박종훈
(2003~2004)


가토
(2005)
두산 베어스 등번호 87번
결번

박종훈
(2007~2009)


김현수
(2010)
LG 트윈스 등번호 75번
정진호
(2007~2009)

박종훈
(2010~2011)


박준태
(2012~2014)




파일:external/file.osen.co.kr/201611171303775656_582d2eb869ef6.jpg

KBO 경기운영위원
박종훈
朴鍾勳

출생
1959년 6월 12일 (64세)
제주도 제주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석화초 - 신일중 - 신일고 - 고려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3년 1차 지명 (OB)
소속팀
상업은행 야구단 (1982)
OB 베어스 (1983~1989)
지도자
보스턴 레드삭스 연수코치 (1993)
LG 트윈스 2군 타격코치 (1994~1995)
LG 트윈스 1군 타격코치 (1996)[1]
LG 트윈스 루키군 코치 (1996)[2]
현대 유니콘스 2군 타격코치 (1997~1998)
현대 유니콘스 1군 타격코치 (1999)
현대 유니콘스 1군 수비코치 (2000~2002)
SK 와이번스 2군 감독 (2003)[3]
SK 와이번스 1군 수석코치 (2003~2006)[4]
두산 베어스 2군 감독 (2007~2009)
LG 트윈스 감독 (2010~2011)
프런트
NC 다이노스 육성이사 (2013~2015)
NC 다이노스 고양본부장 (2016)
한화 이글스 단장 (2017~2019)
경력
KBO 기술위원 (2012)
KBO 경기운영위원 (2020~ )
병역
예술체육요원[5]
종교
개신교
가족
아들 박윤

1. 개요
2. 선수 경력
5. KBO 임원
6. 기타
7. 연도별 주요 성적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OB 베어스 박종훈_C.jpg
OB 베어스의 외야수, LG 트윈스의 감독, NC 다이노스의 고양본부장, 한화 이글스의 단장이었다.

선수 시절에 성적뿐만 아니라 미남으로서도 팬들에게 인기가 상당했다.


2. 선수 경력[편집]


제주도에서 태어났으나, 당시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역을 오가며 자랐다고 한다. 대학교 2학년 때인 1979년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대학 시절 내내 국가대표로 뽑혔으며 대표팀 합숙시에는 선수들 중 가장 먼저 일어나 개인훈련을 하고 야간에도 열심히 스윙 연습을 하는 성실함을 보여서 대표팀 김응용 감독의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파일:OB 베어스 박종훈_A.jpg


파일:OB 베어스 박종훈_B.jpg


파일:김경문 & 박종훈.jpg
김경문과 함께
히스토리 11 '최초로 빛난 샛별' 초대 신인왕 박종훈
실업 야구 팀인 상업은행 야구단을 거쳐[6] 1983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OB 베어스의 1차 지명 2순위로 입단하였다.
파일:1983년 신인왕 박종훈.jpg
신인왕을 수상한 박종훈
1983년 1군 97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0.306, 117개의 안타를 기록하여 최다안타 1위를 기록했고,[7] 신인왕과 KBO 골든글러브 상(외야수 부문)을 수상하였다. 한국프로야구 초대 신인왕을 차지한 것인데,[8] 장효조가 박종훈보다 나은 성적을 기록했으나 장효조는 프로야구 출범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4년간 활약하며 한국 최고의 교타자로 유명했으므로 신인같지 않은 신인이라는 이유로 기자단 투표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었다.[9] 박종훈도 실업야구에서 1년간 뛰었지만 1982년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 참가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일뿐이므로, 야구기자단은 박종훈은 대졸 신인과 다름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1985년에는 타율 0.342와 119개의 안타로 개인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두번째 KBO 골든글러브 상(외야수 부문)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이듬해부터는 오영일의 사구로 기량이 하락하였다. 1986시즌엔 타율 1할이 사라졌다. 1987시즌엔 박종훈의 명성엔 걸맞지 않는 타율 0.284, 6홈런으로 실망스런 성적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해 OB는 중장거리형 교타자가 많아서 홈런 6개 치고 팀내 홈런 1등이었다. 2위는 신경식, 이복근, 김형석, 김호근의 홈런 3개... 이는 KBO역사상 가장 홈런을 적게 치고 팀내홈런 1등을 기록한 기록이다.

타자 삼종훈 삼총사 중 첫번째 주자이기도 하며(박종훈은 1959년생, 장종훈은 1968년생, 김종훈은 1972년생) 데뷔년도도 빠른 편이다.(박종훈 - 1983년, 장종훈 - 1986년(연습생), 김종훈 - 1994년) 또한 삼종훈 삼형제 중 유일하게 좌투좌타 포지션.

다만 삼종훈 삼총사 중 선수시절에 가을야구(KBO 포스트시즌)에 나온 것은 2시즌뿐이며(1986년, 1987년)[10] 유일하게 우승한 적은 없다. 이후 선수 시절에 경험 못했던 우승을 코치로서(1994(LG), 1998/2000(현대)) 3차례 경험한 것으로 작게나마 위안 삼았을 뿐.

프로 데뷔때부터 호타준족으로 이름을 날렸고, 입단 3년째인 1985년에는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다가 MBC 청룡 투수 오영일의 직구에 허리뼈를 직격당해 큰 부상을 당했고, 당시에는 부상 후 재활에 대한 인식이나 관리 체계가 없다시피 하던 시절이어서 그냥 참으면서 경기 출장을 이어나갔다. 그 때문인지 이후의 성적은 내리막을 이어갔고, 결국 1989년 시즌을 끝으로 불과 30세로 은퇴했다. 신인왕 출신으로 화려하게 프로에 입문했지만, 불행히도 선수생활은 짧게 마감하였다.


3.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종훈(1959)/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프런트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종훈(1959)/프런트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KBO 임원[편집]


한화와의 단장직 계약이 만료된 뒤인 2020년, 신임 경기운영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6. 기타[편집]





  • 얼굴이 상당히 잘 생긴 편이다. 특히 배우 황정민과 많이 닮았고, 강석우하고도 좀 닮았다. 최불암불암콩콩코믹스에서 이를 이용해 달콤한 인생 드립을 쳤다. "인생은 고통이야." 덧붙이자면, 황정민은 박종훈의 친정 팀인 OB - 두산 팬이다. 선수 시절 별명은 소설 뿌리, 정확히는 미드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 온 쿤타 킨테. 환갑을 넘은 지금도 미중년에 이어 미노년의 길을 착실히 걷는 중.


  • 두산 베어스 2군 감독 시절에 말한 주박백정[11] 발언이 두산 팬들 사이에서 재평가 되고 있다.


  • 위 썰과 더불어 똑같이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한 오상민의 썰에 따르면 LG 감독 시절 시즌 막바지에 FA 등 구단과 인센티브 옵션 계약을 맺은 고참 선수들을 불러모아 옵션을 채워주지 못한다고 대놓고 사전통보를 한 뒤 잔여 경기에 출전을 시키지 않았다고 했다. 오상민 역시 홀드 두개를 남겨놓고 옵션 달성에 실패했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낮술을 하고 구단 사무실에 찾아가 항의하니 옵션 5천만원 중 40%인 2천만원을 보상해주었다고 한다.

  • 이에 박명환도 썰을 새로 하나 풀었는데, 부산 원정 경기를 마치고 버스로 장시간을 이동한 뒤 새벽 2시 반에 홈 구장에 도착했는데,[12] 박종훈 감독이 당시 투수조 조장이었던 박명환을 불러 피로에 지쳐있는 선수들에게 야간 훈련을 통보했다는 후일담을 공개했다. 옆에 있던 오상민도 말도 안되는 지시에 크게 분노해 자기가 그냥 선수들을 들여보냈던걸 떠올리면서 훈련을 더 시킬거면 다음 날에 일찍 나오라고 하면 되는데 왜 굳이 새벽에 시키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다. 이러니 선수들이 이러한 감독을 신뢰하고 따랐을 리 만무한데 2011시즌 LG의 DTD는 선수와 구단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선수들에게 민심을 전혀 얻지 못하고 팀을 뭉치는 데 실패한 박종훈 본인의 책임도 만만치 않다는 뜻이 된다. 즉 애초부터 박종훈 자체가 능력과 별개로 "절대 조직의 수장을 맡겨서는 안되는" 유형의 인물이었음을 알려주는 일화들이라 할 수 있겠다.[13]

  • 훗날 박명환은 은퇴 후 한화가 김성근 감독을 경질했을 당시 단장이 무슨 권한으로 감독을 막느냐며 박종훈을 강하게 비판하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김성근과 무슨 특별한 친분이 있어서 옹호하기보다 박종훈 개인에 대한 반감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던 모양. 그런데 그 후 박종훈 측에서 당장 글을 내리고 다시는 칼럼 쓰지 말라며 본인과 언론사 측에 외압을 가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게스트로 나온 정수근도 '그런 사람은 오래 못 간다.'며 동조했다.

  • 한화 이글스 단장 재임 시절이던 2018년 배영수에게 은퇴를 권유했는데 기준이 뭐냐고 묻자 "내가 봤을 때"(…)라고 답했다는 황당한 일화가 있다.[14] 사실 황당하다기보단 그동안 선수들을 지켜 본 그의 눈에 비춰봤을때 배영수가 나이 먹고 더 기대할 만한 실링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쪽이 정확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단장이란 사람이 저런식으로 말 하면서 은퇴를 종용하는건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 역시 박종훈 단장 재임 시절 한화 이글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심수창이 은퇴 후 개인 유튜브에서도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심수창은 2이닝 던지고 2군행을 통보 받았다. 2군 세이브왕을 했지만 콜업되지 않았고, 그래서 1년이라도 다른 팀에서 기회를 받을 수 있게 한 번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 말을 들은 박종훈은 선수보고 직접 트레이드 카드를 맞추어 오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꺼냈다고 한다. 심수창도 이에 따라 5개 팀 감독에게 요청하여 트레이드 카드를 끝끝내 맞추어 왔지만[15], 정작 박종훈 단장은 뒤에서 해당 팀들에 전화를 걸어 심수창 받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뒤통수를 쳤고, 결국 심수창은 웨이버 공시된다. 뒤이어 조인성 사례를 꺼내며 방출 통보하는 당일에 왜 2군서 운동 안하냐고 따졌다고 한다.[16] 게스트로 출연한 안영명 역시 FA 계약을 맺으러 단장실에 갔는데, 대뜸 서류를 집어 던지면서, "우리 계약하지 말자"고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 나름 팀의 프랜차이즈 선수이고, 선배들의 조언을 듣고 원만한 분위기를 기대한 안영명은 큰 충격을 받아 생전 안 먹은 술도 마셨다고 전했다. 그래서 당시에 한화에 소속되어 있었던 베테랑들도 박종훈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이따금씩 한화에 대한 디스를 종종 하던터라 한화팬들에게는 먹튀 혹은 칰무원 주제에 아가리 턴다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까였지만 이러한 뒷이야기가 풀리고 이어서 심수창은 한화는 좋아한다며 자길 싸잡아 욕하던 이들을 감싸주는 대인배적 행보를 보였다. 물론 이어지는 말에서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간접 디스를 하기도 하였다.

  • 2023년 초 허도환스톡킹에 출연해 2007년에 있었던 두산 2군 시절 썰을 풀었는데, 5월에 한번 1군에 콜업되어 올라갔다가 1경기만 뛰고 다시 2군으로 내려왔는데 하필 팔꿈치 통증이 심해지는 바람에 병원에서 MRI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두산 2군 감독이던 박종훈에게[17] MRI를 찍는다고 보고했더니 "너는 1군에서 내려오더니 건방지게 선배들 하는거 배워가지고 아프다고 하면서 2군 경기 안 뛰려고 하냐?" 라면서 사실상 수술을 못하게 했다고 밝혔다. 이후 어찌어찌 부상을 참고 8월이 다 되어서야 MRI를 찍을 수 있었는데 내측 측부인대(MCL)가 아예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시즌이 끝나가던 9월 즈음 허도환을 따로 불러 "재활해서 내가 기회를 더 줄테니 내년에 열심히 해 보자" 라고 해놓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방출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18] 이에 팬들 사이에서는 도대체 박종훈은 어떤 사람이길래 야구계에서 파도 파도 괴담만 나오냐는 의견이 나오면서 더더욱 까였다.

  • 2020년 4월 24일, 부친상을 당했다.

  • 2011년 시즌 중 프로야구 8개 구단 감독들에게 역대 최고의 대통령을 물어보는 설문에서 유일하게 당시 현직 대통령이던 이명박을 최고의 대통령이라고 뽑았다.[19]


7.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3
OB
97
375
.312
(4위)
117
(1위)
19
6
(1위)
3
24
53
(4위)
7
41
.419
.380
(5위)
1984
99
271
.306
83
11
2
7
37
35
9
31
.439
.377
1985
101
348
.342
(2위)
119
(3위)
19
4
6
51
48
17
33
.471
.399
(4위)
1986
92
320
.259
83
11
2
6
28
47
12
40
.363
.341
1987
80
264
.284
75
10
1
6
34
33
5
22
.398
.336
1988
103
336
.262
88
11
1
3
36
34
11
34
.327
.328
1989
107
295
.254
75
13
1
1
21
31
10
33
.315
.328
KBO 통산
(7시즌)
679
2209
.290
640
94
17
32
231
281
71
234
.391
.355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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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월 23일[2] 7월 24일~[3] ~8월 13일[4] 8월 14일~[5]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준우승#[6] 대학 졸업 후 프로 원년 멤버로 입단할 수 있었으나 세계선수권 대회 출전을 위해 프로 진출을 1년 미뤘다. 그러나 정작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탈락했다.[7] 장효조와 공동 1위였는데, 당시에는 최다안타 부문에 별도의 시상을 하지 않았다. 최다안타에 상을 주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시즌부터다.[8] 당시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도에는 왜 신인왕 수상을 안했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시 프로야구 출범때는 전원 신인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원년 MVP였던 OB 박철순이 신인왕이나 다름 없었다.[9] 마찬가지로 17승을 거둔 김시진도 같은 이유로 배제 되었다.[10] 하필이면 상대가 크보 최강팀이었던 해태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였다![11] 주전감은 박건우, 백업은 정수빈.[12] 참고로 사직 야구장잠실 야구장 간 거리는 대략 380km, 자동차로는 약 4시간 30분~5시간 정도 소요된다.[13] 실제로 1군 감독, 단장이었던 LG와 한화 시절에 유독 잡음이 많았던 인물이다. 반면 2군 감독, 육성이사였던 두산과 NC 시절에는 김명제 한정 저승사자 등등 별다른 잡음이 없었던 편. 팀이 잘 나가면 뭘 하든 안 예뻐보이겠나[14] 알다시피 배영수는 한화의 은퇴 제의를 거부하고 방출된 뒤 두산 베어스에서 1년 더 뛰었고, 201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확정짓는 마지막 투수로 등판한 뒤 우승반지를 하나 더 끼고 명예롭게 은퇴한다.[15] 사실 이건 심수창이 저니맨에 그래도 쓸만한 자원이었기에 가능한 소리이다. 원클럽맨 프랜차이즈 스타라면 절대 불가능할 소리.[16] 이건 다시말해 해고당한 사람한테 업무 왜 안하냐는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다.[17] 비록 허도환이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고 스톡킹을 진행하던 심수창을 향해 "누군지는 말 안할게요. 이 하도 많이 하셔가지고...그 분이..." 라고 했는데, 허도환이 두산에서 뛰던 2007년 당시 두산 2군 감독이 박종훈이었다.[18] 방출된 후 허도환은 자비로 팔꿈치 수술을 받은 뒤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했고, 소집해제된 후 넥센 히어로즈에 신고선수로 입단한다. 허도환 본인에 의하면 이 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였다고 밝혔다.[19] 한대화 한화 감독은 답변 곤란, 이만수 SK 감독대행은 노무현, 그 외 조범현 KIA 감독, 류중일 삼성 감독, 양승호 롯데 감독, 김광수 두산 감독대행, 김시진 넥센 감독은 모두 박정희를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