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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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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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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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파일:체육훈장.png
연도
1998년
이름
박찬호
분야
스포츠
사유
국위선양
체육훈장맹호장(2등급)

파일: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로고.svg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1998

파일:2001 MLB 올스타전 로고.svg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2001







박찬호의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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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 기록
단일 시즌 최다 만루홈런 허용
4개
1999년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2000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최저 H/9
케빈 밀우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6.632

박찬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6.889

랜디 존슨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6.525


박찬호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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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61번
얼 로빈슨
(1958)

박찬호
(1994~2001)


결번
텍사스 레인저스 등번호 61번
제임스 허스트
(1994)

박찬호
(2002~2005)


케빈 리차드슨
(2009)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등번호 61번
결번

박찬호
(2005~2006)


닉 헌들리
(2008)
뉴욕 메츠 등번호 61번
제프 던컨
(2003)

박찬호
(2007)


리반 에르난데스
(2009)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61번
결번

박찬호
(2008)


조시 베켓
(2012~2014)
필라델피아 필리스 등번호 61번
케인 데이비스
(2007)

박찬호
(2009)


션 오설리반
(2014)
뉴욕 양키스 등번호 61번
빌리 트레이버
(2008)

박찬호
(2010)


로이스 링
(2010)
피츠버그 파이리츠 등번호 61번
앤서니 클라겟
(2009)

박찬호
(2010)


제프 로크
(2011)
오릭스 버팔로즈 등번호 61번
이토 히카루
(2008~2010)

박찬호
(2011)


이하라 마사키
(2012)
한화 이글스 등번호 61번
김경태
(2011)

박찬호
(2012)


김주
(2013)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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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61PARK.jpg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특별 고문
박찬호
朴贊浩 | Park Chan-ho

출생
1973년 7월 28일[1] (50세)
충청남도 공주군 공주읍
(現 충청남도 공주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공주중동초 - 공주중 - 공주고 - 한양대[2]
신체
185cm, 95kg, O형[3]
포지션
투수(선발 투수, 중간계투)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4년 국제 아마추어 자유계약 (LAD)
소속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94~2001)
텍사스 레인저스 (2002~2005)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5~2006)
뉴욕 메츠 (2007)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8)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9)
뉴욕 양키스 (2010)
피츠버그 파이리츠 (2010)
오릭스 버팔로즈 (2011)
한화 이글스 (201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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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트
키움 히어로즈 스프링캠프 투수 인스트럭터 (2019, 2023~)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특별 고문 (2019~)
해설위원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해설위원 (JTBC)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특별해설위원 (SBS)
2020 도쿄 올림픽 특별해설위원 (KBS)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특별해설위원 (KBS)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특별해설위원 (KBS)
병역
예술체육요원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부문)
상훈
체육훈장 맹호장
SNS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MLB 로고.svg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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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배우자
박리혜(1975년생)[1] (2005년-현재)[2]
자녀
장녀 박애린 (2006년생)
차녀 박세린 (2008년생)
삼녀 박혜린 (2014년생)[3]
부모
아버지 박제근, 어머니 정동순
형제자매
3남 1녀 중 셋째[4]
친척
사촌 누나 박현순[5], 매형 김만섭[6], 조카 김윤하[7]
응원가
지누션 - A Yo[8]
서진필 - 사나이 순정[9]
종교
불교
본관
충주 박씨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3. 은퇴 이후
4. 방송 활동
4.1. 광고(CF)
4.2. 해설
5. 박찬호에 관련된 이야기
5.1.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
5.2. 역대 연봉
5.3. 가족
5.4. 작품 속 선수 박찬호
5.5. 자서전
8. 여담
9. 주요 기록
9.1. 좋은 기록들
9.2. 좋지 않은 기록들
9.3. 기타 기록
10. 어록
11. 관련 문서
12.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저 녀석을 앞으로 10년 동안 상대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마크 그레이스[4]

대한민국의 前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야구 선수이자 KBO 국제홍보위원이다.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불 같은 강속구[5]와 낙차 큰 커브로 '코리안 특급'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100승을 달성한 투수. 메이저리그 아시아인 최다 승(124승)을[6] 기록한 투수이며, 2001년에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개막전 선발이었다.[7] 또한 한국인 야구선수로서 최초로 메이저 리그에서 홈런을 기록한 타자이기도 하다.[8]

다저스 소속으로 활약할 당시 1997년 외환위기로 어려웠던 국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었던 것으로 유명하며[9][10] 이러한 인기를 반영하듯이 박찬호 경기 중계의 시청률은 낮방송이 25% 이상이 나왔었다. “IMF시절 박찬호 중계 시청률 25%↑, 류현진 6배”(MBC에빠지다)

메이저리거 생활을 마무리한 뒤 일본프로야구를 거쳐 KBO 리그에선 고향팀 한화 이글스에서 한 시즌을 뛰고 은퇴했다. 은퇴 이후에도 여러 TV 프로그램, 강연, 행사에 나와 인간적인 박찬호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파일:/image/295/2013/01/07/154800410_untitled-5_dhp1225.jpg

1973년 7월 28일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전파사[11]를 운영하던 가정의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신경이 뛰어났는지 교사의 추천으로 공주중동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2013년 출연한 무릎팍도사에서 한 발언에 따르면 그 당시 야구부는 라면을 먹을 수 있어 그 라면이 먹고 싶어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가 82년도인데, 80년대면 경제도 어느 정도 커질 만큼 커졌고 라면이 그때 기준으로도 비싼 음식은 아니었으나, 초등학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돈이 없고 학교에 매점도 없으니 학교에서 간식을 사먹을 수 없다. 박찬호의 회고에 의하면 박찬호의 집은 부잣집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운동하는 아들을 위해 가끔씩 통닭을 사 줄 정도의 여력 정도는 있었다고 하니. 집이 가난해서 라면을 못 먹은 건 아니고 그냥 100원짜리 하나 가지고 다니지 않는 초등학생이라서 못 먹은 것.

어릴 적부터 야구선수로 성공하겠다는 다짐으로 타석에 들어섰을 때 공에 대한 공포를 견디기 위해 스스로 공동묘지에 가서 담력 훈련 겸 스윙 훈련을 했다는 얘기는 요즘도 종종 회자되곤 한다. 또한 하체 단련을 위해 공산성을 토끼 뜀을 하며 오르내렸다는 트레이닝 일화가 유명하다. 그 때문인지, 도로명주소 개편 당시 박찬호가 살았던 공주산성 근처 있는 작은 길에 자신의 이름을 딴 산성찬호길이 생기기도 했다.

5~6살 때부터 매일 팔굽혀펴기 했었고,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부터 매일 턱걸이 10~20개, 6학년 때부터는 매일 턱걸이 30개 이상, 팔굽혀펴기 100개 이상 했다. 선수 시절에 어깨, 팔꿈치 부상 없었던 비결이라고 한다. 실제로 맨몸 운동, 닫힌 사슬 운동(CKC)은 관절, 인대 부상 확률 낮으면서도, 근력 향상 효과 높은 좋은 운동이다.

한양대학교 입학 후, 기저귀 고무줄 30개 사서, 다양한 각도로 수 백 번 당기는 튜빙 운동도 매일 했다. 기구 운동, 맨몸 운동과는 다른 각도, 장력 사용하는 운동이라 구속 150km/h 돌파에 큰 역할했다고.

공주중학교 3학년 시절 당시 감독이었던 오영세[12]의 권유로 투수로 포지션을 바꿨다. 투수 전업 전까지 박찬호는 3루수였는데, 얼마나 잘했는지 오죽했으면 당시 야구부 감독이 학부모들에게 왜 전향시키냐고 욕을 먹고 경질까지 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박찬호의 반대급부로 3루수 전업을 했던 홍원기는 당시 공주중 야구부의 에이스였다. 그 이후 공주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동기로 홍원기손혁이 있었고, 이 셋은 당시 공주고등학교 야구부의 주축이었다. 특히 홍원기는 나중에 자신의 결혼식에 초대한 유일한 한국 야구인일 정도로 각별한 사이. 여담으로 박찬호가 지금의 부인을 처음 만날 때 3명의 지인을 데리고 왔는데, , 한양대 2년 선배 류지현, 그리고 홍원기였다고 한다.


2.2. 선수 경력[편집]



2.3. 은퇴 이후[편집]


  • 단편 영화 서울서칭에 출연한다. 그러나 결국 최종 편집본에선 등장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신 Special thanks to 에 이름을 올려서 제작에 참여했음이 밝혀졌다. 본 영화의 주연이 차인표인데 차인표와 박찬호는 박찬호가 부인 박리혜를 소개받아 처음 만나러 갈 때 같이 가서 옆 테이블에서 지켜보았다고 할 만큼 대단히 각별한 사이다. 그 인연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하게 된 듯하다.


  • 2013년, 친한 사이인 배우 차인표의 권유로 SBS의 땡큐라는 토크 프로그램에 공동 MC가 되었다. 추석 특집으로 파일럿으로 혜민스님 편이 반응이 좋아서 정규 프로그램으로 승격이 되었다. 매주 한국 사회의 저명한 인사들을 캠프로 초청하여 하나의 테마를 바탕으로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힐링 프로그램 성격의 토크 프로(투 머치 토커)로, 워낙 굴곡진 선수 생활을 많이 겪고 이겨낸 박찬호의 인생 경험과 철학이 그대로 토크에 녹아 있어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었다. 첫 회 게스트로 만화가 이현세와 사진 작가 김중만이 나와서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제는 매주 금요일 방송했으며 반 고정으로 출연했다. 해당 프로는 2013년 3월 1일부터 동년 8월 9일까지 방영되고, 이후 개편 때 시청률 저조로 폐지되었다.

  •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송재우 해설위원과 함께 JTBC의 한국전 중계 해설을 맡았다. 최고의 투수답게 매 상황마다 선수의 상태나 개인적인 경험 등을 살려 좋은 해설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한 번은 투수가 어떤 구질로 승부할지 예측했는데 그게 그대로 이루어져 역시 박찬호라는 찬사도 받으면서 성공적으로 해설가의 길로도 안착했다. 중간 중간 소강 상태 때마다 해주는 메이저리그 뒷얘기[13]는 덤이다.

  • 2012년에 유한양행 삐콤씨와 한화생명[14] 광고에 출연. 삐콤씨의 "궁금해 박찬호", "하루 두 알"이라는 구호와 대한생명 광고에서 "(아내: 야구 관두면 뭐하고 살까?) 아내의 말에 콕콕! (감독: 어째 공이 예전과 다르다?) 감독의 말에 콕콕! 대충대충 인생 살게? 콕콕짚어 인생설계!"라는 랩을 구사하며 프로야구 광고 때마다 등장하여 깨알 같은 웃음을 주고 있다. 이 광고가 나가던 시기 한화 성적현시창이었기에 한화 경기를 보며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을 대비한 고단수 보험 마케팅이라는 드립이 성행했었다. 워낙 건강하고 믿음직한 성실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광고에서 그를 계속 볼 수 있을 것 같다.


  • 2014년 5월 27일(미국시각 기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구단에서 개최된 한국의 밤 행사 기념으로 나타나서 경기 전에 1시간 정도 팬들과 싸인회를 가졌고 시구를 했다. 포수는 류현진.시구영상 이날은 관람객들에게 류현진 바블헤드를 주는 날이기도 했는데 묘하게도 바블헤드는 류현진을 별로 닮지 않았고, 오히려 얼굴에 펜으로 수염을 그리면 오히려 박찬호와 많이 닮는다.

  • 2014년 시즌 중반부터서 은퇴식이 열린다는 소리가 돌았는데 결국 선수협에서 박찬호의 은퇴식이 없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2014년 올스타전에서 은퇴식이 열리는 걸로 확정이 되었다. 대체로 프로야구와는 인연이 깊진 않았지만 한 때 한국 야구인으로서 대단한 업적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여론. 다만 올스타전이 아니라 연고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올스타전이 열리는 경기장이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인지라, 광주광역시KIA 타이거즈와 연고가 없는 박찬호가 이 곳에서 은퇴식을 여는 것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15] 올스타전에 비가 오고 있었지만 은퇴식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면서 박찬호는 공식적으로 야구를 은퇴하게 됐다.

  • 2014년 8월 미국에서 열린 리틀 야구 월드 시리즈에서 한국 대표팀 대 푸에르토리코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시구를 하고, 대표팀 선수단을 격려했다.

  • 2014년, 은퇴 기념 300체 한정으로 1/4스케일의 피규어가 제작, 발매되었다. 발매당시로서는 상당한 고가인 120만원에 발매되었지만, 피규어 조형이 좋고 그립별로 손 부품이 따로 있는 등 구성이 알찬 편이어서 가격만큼의 퀄리티를 보여준다는 평을 받는다. 피규어 구입 후기 해당 피규어는 2023년 현재 중고거래 사이트 등에서 원래 판매가격의 두배가 넘는 가격에 찾는 사람이 있을만큼 프리미엄이 붙은 상태.

  • 2015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의 최종 성화 점화자인데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개막지인 광주광역시 출신인 양학선 선수와 함께 하게 되었다. 1993년 버팔로 유니버시아드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것이 큰 이유일 듯.[16]

  • 2015년 프리미어 12 한일전 경기에서 시구를 했다. 프리미어 12의 글로벌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활동했던 것이 주된 이유인 듯. 구속은 101km를 기록했다.

  • 2016년 MBC 진짜사나이 동반입대 특집 편에 출연했다. 여담으로 박찬호는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금메달로 병역특례를 받아 예술체육요원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동갑내기 특집에 이어 남녀동반 해군부사관 특집에도 출연 고생을 하고 있는 중이다. 계속 예능에 출연하는 것으로 봐선 안정환의 성공 사례처럼 방송인으로서 변모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측이 있다.

  • 2018년부터 키움 히어로즈의 스프링캠프에서 임시 투수 인스트럭터를 하고 있는데 친구인 홍원기 코치의 요청이라고 한다. 밥 두 끼에 제안을 수락했다고 한다.

  •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자유한국당의 영입 리스트에 있었으나, 본인은 "정치에 관심이 없으며,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다만 본인의 부정과는 달리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박찬호가 갓 은퇴한 4~5년 전, 새누리당 시절에 박찬호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으로 정가와 지역사회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었다. 새누리당은 박찬호의 몇십 년 간 쌓아온 좋은 이미지를 통해 당의 홍보를 꾀했고 박찬호 본인도 정치에 아예 관심이 없지는 않았는지라 서로 이해타산이 맞는 거래였다. 하지만 박찬호가 정확히 원한 것은 고향 공주의 지역구였고 새누리당이 제안한 것은 조훈현과 같은 비례대표 공천 자리였다. 새누리당으로서는 인지도는 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초짜인 박찬호에게 결과에 따라 낙선 가능성이 있는 지역구를 내주는 것은 시기상조라 생각해서 결국 결렬되었고, 이 사실이 입이 싼 사람들로부터 정가에 퍼질 대로 퍼졌던 것. 조훈현의 바둑 진흥법 경우처럼 정치계에 진지하게 뛰어들 마음이 있었다면 지역구든 비례대표든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을 테지만 박찬호는 딱히 정치적인 야심이나 특정 정당에 뜻이 있다기보단 그저 지역민의 최고 명예인 고향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발언은 거짓이 아니다. 염불보다 잿밥에 마음이 있다는 얘기 여튼 2020년 총선을 앞둔 현재는 박찬호 본인도 방송인으로서, 구단 경영진으로서 바쁜 삶을 보내고 있기에 정치계 입문설은 자연스레 사장되었다. 결국 사실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현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은 맞고 새누리당이 아닌 자유한국당으로부터 영입 의사가 없었던 것도 맞기에 박찬호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조문을 했다. 그러나 기독교 장 예절을 몰랐던 듯하다. 김영삼은 개신교 신자로 장례도 당연히 개신교식[17]이었으나 박찬호는 특별히 종교를 갖지 않았던 관계로 영정을 향해 절을 했다. 이걸 가지고 까기는 뭣한 게, 김영삼은 공인을 넘어 대통령까지 한 인물이었던 만큼 국민 일반의 추모 방법을 특정 종교 방식으로 막 엄격히 제한할 위치가 아니었다.



  • 은퇴 후에 가장 좋아하는 취미 생활이 골프일 정도로 상당한 골프 매니아다. 본인 스스로도 골프를 상당히 좋아하고 조예가 깊으며 싱글 스코어는 물론 가끔 언더파 스코어를 기록할 정도로 아마추어 골퍼 중에서는 상당한 실력자로 알려져 있다.[18] 프로 테스트에도 응시해보는가 하면 2부 투어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결국 2021년 4월 전라북도 군산시 군산 CC에서 열린 KPGA 1부 코리안투어 군산 CC 오픈 골프대회에 선수로 참가했다. 물론 아직 프로 자격을 못 땄기 때문에 투어 시드를 출전한 것은 아니고 초청선수 자격으로 출전했다. 그러나 프로의 벽은 높아서 참가 선수 중 최하위권으로 밀렸다. 애초에 우승이나 컷오프 통과를 바라고 출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다. 본인 스스로 평가하기에 "내 골프 실력을 야구 평균자책점으로 비유하자면 4점대 후반 수준"이라고 말했다.
또한 박찬호 가족 자체도 골프와 은근 연관이 있는데, 한 살 위 사촌누나인 박현순이 1990년대 중반~2000년대 KLPGA에서 활약했고, 박찬호의 큰딸 애린 양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현재 주니어 골프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이 됐건 KBO 리그가 됐건 간에 야구 현장 지도자를 한 번쯤은 꼭 하고 싶다는 의중을 드러내고 있다. 다만 현역 은퇴 이후 제대로 된 지도자 수업을 받은 적은 없으며 KBS 객원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현장과의 접근을 꾀한 바 있다.

  • 상기한 대로 본인이 지도자 자리에 대한 의중을 드러낸 바 있는 와중에, 2023년 10월 SSG 랜더스김원형 감독을 전격 경질한 당일에 뜬금없이 SSG 랜더스의 차기 감독으로 유력하다는 단독 기사가 올라왔다.[19] 평소에도 정용진 구단주와 남다른 친분이 있는 것으로[20] 알려져 있기에 정말로 지도자 데뷔를 KBO 1군 감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후 SSG 구단 측에서는 단독 기사가 나온지 한 시간 만에 해당 기사에 대해 사실 무근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박찬호 또한 "아직은 프로구단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며 박찬호 장학재단을 통한 유소년 육성에 더 집중할 것임을 밝히며 사실상 고사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파일:박찬호 플레이스타일.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찬호/플레이 스타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방송 활동[편집]


경인지역 민영방송의 밥줄이었다. iTV 때도 그랬고 OBSMLB중계를 시작했다. 그러나 돈이 안 돼서 결국 2010시즌의 중계권은 포기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 다시 중계를 시작했다. 2010시즌 중계권을 소리소문 없이 구매해서 잘 방영했다. 다만 추신수 위주의 중계방송을 시도하는지라 박찬호의 비중은 많이 줄었다.

2009년 초 1박 2일에 출연해 적극적으로 촬영에 참여[21]하여 여전히 많이 남아 있던 박까들을 팬으로 전향시키는 기적을 실현하기도 했다. 한겨울에 계곡의 얼음을 깨고 멤버들과 계곡물에 입수한 장면은 당시 최고 시청률을 찍었다. 멤버들과 돈독한 우정이 쌓였는지 녹화가 끝난 뒤에도 장문의 문자를 멤버들에게 일일이 보내고 일상적인 통화도 했다고 한다. 그해 KBS 연예대상에도 1박 2일 멤버들과 함께 참석했으며, 이로부터 2년 뒤에 혹한기 특집에도 다시 찾아와 멤버들을 한 번 더 계곡에 입수시키기도 했다.[22] 탁구대 위에서 플라스틱 병뚜껑치기를 해서 만약에 반대쪽 끝 흰선에 병뚜껑이 정확히 멈추면 전원 실내취침한다는 사실상 불가능한 미션에 도전, 거짓말처럼 병뚜껑을 탁구대 맨 끝선에 세워 무수한 짤을 생산해 낸 이력도 있다. 2010년 시청자 투어 때는 치킨을 보내줬으며, 2011년에는 이승기 - 이수근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박찬호의 집에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특히 2009년 국가대표 은퇴 기자회견 이후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강호동, 이수근, 김C와 자리를 가졌었는데, 강호동의 말로는 "국가대표가 아니라 야구 자체를 그만두는 기분이 들어서 눈물이 났다"라고 한다.


이때 나영석 PD와 협상하면서 탁구대 맨 끝 선에 걸치면 얻는 혜택이 걸친 사람 1명 빼고 나머지 야외 취침, 혹은 다 밖에서 취침이었다가 전원 구제로 바뀐 것인데, 안 바꿨으면 박찬호를 제외한 나머지 7명이 밖에서 잘 뻔했다. 참고로 1명 빼고 야외 취침을 제안했던 사람은 은지원, 나영석 PD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자 얼빠진 상태로 전원 실내 취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23] 그래도 1박 2일 역사에 손꼽히는 명장면을 건졌으니 야외 취침으로 재미를 뽑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득은 봤다. 조작 논란이 생길까봐[24] 앞 타자 이수근이 치는 장면부터 노 컷으로 한 앵글로만 내보냈고, 직후에 이승기도 조작 논란을 의식해서 일부러 입바람을 불어 병뚜껑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이 정도면 조작하려 해도 밤새 해야 하는 만큼 애초에 아침해가 떠 버려서 조작 못 한다 조작이라고 하더라도 봐줘야 하는 수준이라며 치켜세웠다.

2011년 12월 1일, 주병진 토크 콘서트 첫 방송의 게스트로 초대되었다.

2013년 7월 18일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다.

2015년에 냉장고를 부탁해신승훈과 함께 출연했다. 그런데 훗날 2016년 9월 12일에 그의 아내 박리혜 셰프가 여성 셰프 최초로 냉장고를 부탁해스페셜 셰프로 참여하게 되었다.

배우 정준호[25]와의 오랫동안 친분을 계기로 그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달콤살벌 패밀리에 특별출연했다. 영어 쓰는 충청도 학부모 역.

2017년에는 JTBC 예능 프로그램 잡스(JTBC)에서 송재우와 함께 게스트로 출연했다.

2018년에는 SBS에서 방영한 빅픽처패밀리에도 출연하였다.

2019년 10월에는 집사부일체에 출연했다.

2020년 정글의 법칙IMF 금융위기 시절 국민 영웅으로 같이 불린 박세리와 함께 출연했다.

2020년 축구선수 이영표, 오마이걸 승희와 함께 축구 야구 말구에 출연했다.

2021년 2월 14일부터 박세리, 박지성과 함께 쓰리박에 출연한다.

방송 사고급 기타영상
https://www.youtube.com/shorts/ft8PqIYYmjw

4.1. 광고(CF)[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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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였던 90년대 후반에는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었고, 그 시절 대한민국 광고계의 블루칩이었다.

  • '익사이팅'이라는 본격(?) 스포츠 껌: 광고가 '찬호형! 나에게 힘을 줘! 라는 어느 유망주의 기도에 응답, 익사이팅 껌을 건네준다. 꼬꼬마가 껌을 씹는 게 아니라 코에 갖다대고 냄새를 흡~맡자 갑자기 에이스 투수의 기운이 빙의한다는 스토리.
  • 게토레이: 근래의 영상에선 찾기 어려운 메이저리그 초창기시절의 하이키킹 동작을 확인해볼 수 있다. 해당 동작이 음료 캔에 직접 인쇄되어 있었을 정도.
  • 삼보컴퓨터 체인지업: 박찬호의 인지도에 더불어 2년 후에 무료로 업그레이드를 해준다는 제품 컨셉트 자체도 충격적이었기에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광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유니폼을 본딴 선수복을 입고 등장, "쳬인졉으로 업그뤠이드"하는 버터 발음을 보여주었다.
  • 롯데삼강 찬호박 아이스크림: 취소선이 들어간 이유는, 광고에 그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광고 내용은 이창명이 "찬호박 어디있어요?"라며 박찬호를 찾아 수소문하다가 마지막에 찾은 건 야구선수 박찬호가 아니라 이 찬호박 아이스크림이었다는 내용. 즉, 언어유희로 그의 인지도만 이용한 것. 사실 진짜 호박맛이 나고, 아이스크림이라 차갑기 때문에 딱히 태클 걸기도 어렵다. 그래도 CF에 야구선수들이 등장하는데다, 이창명의 명대사인 "이걸 미국으로 보내버려?" 덕분에 인지도를 이용했다는 것 자체는 확실.
  • 이외에 오리온 썬칩, 나이키등 광속구를 구사하는 개척자, 정복자 이미지로 수많은 광고에 출연하였으며, 무려 화장품 광고를 하기도 했다.

2010년대에도 LG패션 타운젠트, 플렉스파워 등을 통해 여전히 활발한 CF 활동을 하고 있다.


나이키의 전속모델로도 활동했다. 위의 광고는 미국과 한국 모두 방영됐었다.


2002년에 모델을 맡았던 국민카드 광고. "같이 쓰실래요?" 라는 멘트로 유명하며 당시 박찬호가 수염을 많이 기르고 나와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참고로 박찬호의 부인인 박리해 씨가 이 광고를 보고 한 때 한국에서 박찬호가 신랑감 1등으로 뽑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


건축자재회사 KCC의 광고에 출연하였다. 투머치토커의 컨셉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나와 큰 웃음을 선사하였다.


4.2. 해설[편집]




투머치토커라는 친화적인 별명과 이미지와는 달리 해설위원으로서의 평가는 좋지 않고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2020 도쿄 올림픽 KBS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발탁되며 처음으로 올림픽을 경험하게 되었다. 캐스터인 이광용과의 호흡이 좋은 편.[26] 가끔 말을 버벅이고 발음이 어눌한 단점은 있지만 피칭에 대한 디테일한 해설이[27] 강점이다. 특히 투수의 초구 스트라이크를 매우매우매우 강조하는 편. 또한 대표팀 주장 김현수의 타석에서 “캡틴큐”라는 유행어를 줄기차게 밀고 있는데[28], 은근히 적중률이 높아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고 있다. 한편으로 방송상에서 투 머치 토커를 직접 인용하는 유머도 꽤 나왔다.

선수 시절 국가대표가 어떤 의미인지 정말로 잘 알고 있던 사람이다 보니, 도미니카와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강백호가 8회 10:6으로 역전당한 상황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껌을 씹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자 저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해설로 도쿄 올림픽 대표팀 내에서 성적이 좋았던 강백호를 고로시했다는 논란도 불러일으켰다. 혹자는 김경문 감독의 학교 후배였으니, 운용을 잘못한 김경문 감독을 일부러 감싸고, 애꿎은 강백호를 희생양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박찬호가 도쿄 올림픽 폐막 이후 개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강백호는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면서, 정작 올림픽에서의 졸전에 대해 비판 받아야 할 김경문 감독을 "힘든 위치에 있는 리더다"라며 감싸는 모습을 보여준 것.

올림픽 해설 당시 평이 나쁘지 않았고, 시청률도 괜찮았던지라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KBS 해설위원으로 활약했다. 조별 예선 호주전과 일본전에서 대표팀 선수들이 극도의 부진을 보이자 말이 없어지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외야수'인 '박'건우를 '3루수' '김'건우라고 이야기를 하는 등 대표팀 선수들에 대한 최소한의 파악도 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서 비판을 받았다. 특유의 줄줄 새는 말투에 억양은 덤. 전술한 강백호 논란까지 겹쳐 박찬호의 해설을 듣기 싫어하는 야구팬들이 급격히 늘었으나, KBS는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도 박찬호를 해설로 기용했다. 그리고 조별리그 1차전 홍콩전에서도 여전히 철지난 정신력과 투지 타령만 하고 KBO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해설을 하며 코리안 특급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이제는 그 이순철과 동등한 수준의 비호감 해설위원으로 등극하고야 말았다.[29]

슈퍼라운드 2차전 중국과의 경기에서 강백호가 부진을 씻어내는 솔로홈런을 때려내자, 강백호가 돌아왔다며 칭찬했지만 팬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2년 전 강백호에 대한 마녀사냥의 시발점이 누구였는지 잊어버린 거냐는 비판은 덤.[30]

현재 야구 팬들에게 받는 주요 비판 원인은 다음과 같다.

  • 오랜 해외 생활로 인해 떨어지는 언어 구사력[31]
  • KBO 리그에 한해서 전문성이 떨어지는 해설[32]
  • 현 야구 트랜드와는 맞지 않는 구시대적 마인드[33]
  • 본인의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은 무신경한 발언[34]

특히, 강백호 관련 건에선 명백한 박찬호의 잘못이 되었다. 2020 도쿄 올림픽 강백호 사건의 경우 강백호가 껌을 씹던 모습은 투수교체 때 찍은 장면을 현장 중계진들이 경기 도중에 송출한 것으로 실제 경기가 진행되는 상황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박찬호는 중계석과 야구팀 덕아웃 사이에 거리가 있었기에 녹화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고 축 쳐져있는 덕아웃 분위기를 지적했는데 하필 이 때 강백호의 단독샷이 화면이 나오면서 박찬호는 강백호를 직접적으로 거론했고 언론과 커뮤니티에서는 앞뒤문맥을 짜르고 화제성을 위해 "강백호를 저격한 박찬호"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에 네티즌들은 사실관계 확인 없이 동조되어 강백호를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건 이후 박찬호는 의도와 다른 뉘양스로 퍼진 논란이 맞다며 일부 몰상식한 야구팬들이 이 사건을 악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전했으나 이 일로 강백호는 국수주의 성향이 짙은 중장년층 야구팬들에게 단단히 찍혔고 강백호와 관련된 기사와 유튜브 영상들에는 악플과 싫어요 테러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35]

5. 박찬호에 관련된 이야기[편집]



5.1.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편집]


전성기 시절 새가슴이라는 일부 비난이 있었던 데다,[36] 한만두처럼 잘 던지다 한 번에 무너지는 모습을 자주 보여 '멘탈이 약한 선수가 아닌가' 하는 이미지가 강했으며, 의외로 이 이미지는 아직도 많은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홈페이지에 남기는 글이나 인터뷰[37] 등을 보면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사실 박찬호는 국가대표급 멘탈이다. 메이저리그 자체가 치열한 정글이다. 제 아무리 최고의 선수라도 잠시 부진하면 가차없이 팬들에게 질타를 당하고 마이너리그로 내려갈 수 있기에 정신적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다. 게다가 박찬호는 선발 때마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엄청난 한국기자들이 항시 쫓아다녀서 심적 부담도 훨씬 컸을 것이다. 김병현은 기자와 싸움까지 벌여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김병현의 고백을 보면 가뜩이나 스트레스 받고 있는데 기자들이 자꾸 옆에 와서 사진 찍고 이런 것 자체만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 또한 박찬호는 IMF 당시 우상급이었기에 유혹도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 헌데 10년 이상 큰 기복 없는 꾸준한 성적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았고 딱히 사생활적인 측면이나 언론과의 마찰 등 별다른 트러블 없이 묵묵히 야구에 정진했다는 점에서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멘탈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축구 등 다른 분야에서 어린 나이에 과도한 관심과 집중을 받아서 부담감에 무너지거나 혹은 유혹에 넘어가 술이나 유흥에 빠져 막장 테크 탄 선수들과 비교해보자.

부상과 부진에 시달리면서도 PED에 손대지 않았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박찬호가 풀 타임 메이저리거로 뛰던 시기는 스테로이드 시대 중에서도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고, 메이저리거들 상당수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PED를 사용했지만, 박찬호는 그러지 않았다.

새가슴이란 비난을 받았던 건 볼넷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면 승부하지 못하고 도망가는 피칭을 하다 보니 겁이 많다고 안티들이 조롱했던 것인데, 그렇게 도망가는 피칭을 했어도 박찬호의 피홈런수는 꽤 많았다. 다저 스타디움은 투수 친화적인 구장이라 점수가 잘 나지 않는 구장이다 보니 홈런 맞고 점수를 내주면 치명적인지라 굳이 무리하게 정면 승부를 하지 않고 안되면 내보냈던 것인데, 박찬호는 삼진도 많이 잡던 투수였다. 오히려 주자를 내보내면 부담스러워서 무리하게 스트라이크를 잡으려다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헌데 박찬호는 주자를 내보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며 주자 내보내도 다음 타자 잡으면 그만이란 전략으로 무리하지 않았으며, 실제 볼넷 위기 상황에서도 볼넷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유인구를 던져 삼진도 많이 잡은 것을 보면 여유가 느껴지기도 하고 굳이 무리하게 승부하지 않았을 뿐이다.

올림픽 유도 김재범은 유도는 3초 만에 결정된다는 명언을 남겼는데, 한번 상대를 맞잡아보면 '어 오늘 할 만하다'라든지, '오늘은 좀 느낌이 안 좋은데' 이런 식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이는 다른 스포츠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박찬호도 일단 첫 타자 상대해보면 '오늘 제구와 구위가 괜찮다'라든지, '컨디션이 안 좋다'라든지 느껴질 텐데, 박찬호도 삘 받았을 때는 상대를 윽박지르며 압도하는 강속구 투수로 변신한다. 완봉승을 거둔 날이라든지 컨디션이 최고조에 달한 날에는 메이저리그 강타자를 상대로 과감한 정면승부로 많은 삼진을 뽑아내는 등,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한국 야구에선 타자를 압도했던 류현진도 떡대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에선 기교파 투수에 가까워졌고, 박찬호 전성기 때는 약물러들 전성기였는데 그때 동양인 박찬호가 힘 좋은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상대로 강속구로 압도하는 피칭을 했었다. 다만 박찬호가 제구가 안 되는 날에는 여지없이 가운데로 몰리면 홈런을 맞았기에 이럴 때는 무리하지 않고 볼넷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가급적 유인구로 승부하는 전략을 취했을 뿐이다.

잘 던지다 한 번에 무너지는 모습을 종종 보여서 멘탈이 약하다는 오해도 받았는데, 이는 멘탈에 과도한 환상을 갖는 한국인들의 잘못된 인식이다. UFC 김동현은 국내에 '멘탈전도사'로 유명했고 연승 중에 드디어 강자와의 대결이 잡히자 언론에서는 김동현이 구름을 넘어선 경지라는 둥 극찬했고 실제 경기 시작하자마자 백스핀 엘보우를 날리며 '멘탈지존'의 모습을 보여줬으나, 상대가 가볍게 피하고 카운터 날리니까 한 방에 뻗어버렸다. 멘탈은 신기루 같은 것이다. 흔히 '전사의 심장' 운운하는데, 그것도 맷집이 받쳐주니까 한 대 맞고 두 대 치는 전략으로 그렇게 나온 것일 뿐이다. UFC에서 K-1챔피언 출신 타격가 마크 헌트와 5라운드 내내 전율의 타격전을 벌이며 '전사의 심장', '최고의 멘탈'로 찬양받았던 안토니오 실바는 약물 적발 뒤 맷집이 급격히 저하된 모습을 보이며 KO 패를 당했고, 마크 헌트와 재대결 때는 헌트의 주먹에 심하게 움찔거리며 심지어 뒷통수를 보이며 도망가는 모습까지 나오고 결국 무기력하게 KO 패당했다. 결국 멘탈도 실력에서 파생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먹을 맞아도 맞을 만하다고 느껴지면 '오 더 때려봐' 이렇게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고, 내가 한 번 휘둘렀더니 상대가 데미지를 받고 휘청이는 모습을 보면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내가 한대 때렸는데 상대가 반응이 없으면 멘탈붕괴가 일어날 수 있고, 실제 멘탈지존 코너 맥그리거는 좀비 파이터 네이트 디아즈에게 패했는데, 자신의 필살 펀치를 맞고서도 끄떡도 안 하고 덤벼드는 모습에 멘탈붕괴됐다고 한다.

여하튼 박찬호가 종종 무너졌던 건 멘탈이 약한 게 아니고 그게 실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무너졌어도 18승을 거두기도 하고, 방어율 3점대 초반을 기록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무너진 경기들이 없었다면 메이저리그 사이 영 상급 투수가 된다. 원래 야구에선 투수들이 유리하다. 메이저리그 강타자들이라고 해봐야 3할인데, 즉 강타자들 상대해도 10번 중 7번은 투수들이 잡아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못하는 투수들을 보면 계속 안타 맞는 게 아니고 잘 던지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등의 패턴을 보이는데, 그게 바로 정상급 투수냐, 아니냐를 가르는 요소인 것이다. 오히려 박찬호가 한계에 부딪힌 것은 피지컬 문제에 가깝다. 박찬호가 가장 빛나던 시절은 00~01년 전반기까지인데, 특히 올스타에 뽑혔던 01년 전반기에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허리 문제로 후반기에 무너졌다. 박찬호의 피칭 스타일은 신체에 상당히 무리가 가는 스타일이고, 타고난 피지컬이 (메이저리그치곤)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그의 스타일상 이를 악물고 한계까지 쥐어짜는 스타일이었다. 실제로 박찬호는 90년대 후반~00년대에 활동한 메이저리그 파워피처치곤 체격이 큰 편이 아니다. 게다가 그가 활약하던 시기는 악명 높은 스테로이드 시대로, 타자들이 전대미문의 파워를 자랑하던 시절이었다.[38] 이 시절에 파워로 타자들을 윽박지르던 로저 클레멘스가 193cm/107kg의 거구인 데다 약의 힘까지 빌렸던 걸 생각해보자. 즉, 메이저리그 투수치고 평범한 체구인 박찬호가 역사상 타자들의 파워가 가장 강한 시대에 저렇게까지 버틸 수 있던 것도 피지컬의 한계를 정신력으로 버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계에 부딪히는 걸 이를 악물고 버텼으니 힘이 떨어지면 무너지는 건 당연한 게 아니겠는가? 실제로 그는 FA 전 부상을 참고 뛰었고, 이렇게 무리한 것은 나중에 심각한 기량 저하로 돌아왔다.

사실 박찬호는 큰 기복이 없는 투수인데, 대표적인 예로 전성기에 퀄리티 스타트(6이닝 3실점 이하)를 많이 기록했다. 한창때는 랜디 존슨보다도 많이 기록해본 적이 있다. 퀄리티 스타트의 가치가 큰 기복 없이 안정적으로 던질 수 있느냐를 측정하는 잣대이고, 특급 투수들을 보면 한 시즌에 퀄리티 스타트를 많이 기록하고 무너지는 경기가 거의 없기에 평균자책점이 낮은 것이다. 종종 무너졌다고 해도 방어율 3점대 초반도 기록한 적이 있는데, 그 시즌에 부진한 경기를 제외한 경기들에서 안정적인 피칭을 했다고 가정하면 평균자책점을 2점대를 기록할 것이고 20승도 기록할 수 있게 된다면 결국 특급 투수가 되는데 아쉽게도 박찬호 커리어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전성기가 길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따름.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인 클레이튼 커쇼라도 컨디션이 안 좋거나 부상이 있을 때는 제구가 안 돼서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처음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 자기 소개밖에 할 줄 몰랐던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구단에서 붙여준 통역을 과감히 사양했다든지[39], 첫 차를 사기 전에 교통비를 아끼려고 경기장에서 숙소까지 뛰어갔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보면 고생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자세가 엿보인다. 또한 메이저리그에서 생존하기 위해 프로 초창기 때 던졌던 슬라이더를 봉인한 대신 빠른 공과 궁합이 맞는 커브를 장착한 이야기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시절 장출혈이나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 신종플루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자기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 프로정신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인 중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생업에 정착할 가능성은 쉽지 않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의 특별한 프로 정신 덕분에 아메리칸 드림 하면 먼저 떠오르는 한국인이 되었다. 물론 은퇴 후에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고 있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사람에겐 최고의 롤모델로 손색 없는 사람이 바로 박찬호. 미국 문화를 이해하면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던 모습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어떤 업계에 진출하더라도 저런 근성 없이 성공을 바라면 안 될 것이다.

5.2. 역대 연봉[편집]


연도
액수
소속팀
소속리그
1994년
10만 9,000 달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1995년
11만 4,000 달러
1996년
12만 4,000 달러
1997년
27만 달러
1998년
70만 달러
1999년
230만 달러
2000년
395만 달러
2001년
990만 달러
2002년
688만 4,803달러
텍사스 레인저스
2003년
1,300만 달러
2004년
1400만 달러
2005년
1,500만 달러
텍사스 레인저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6년
1,550만 5,142달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7년
60만 달러
뉴욕 메츠
휴스턴 애스트로스(마이너)
2008년
50만 달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9년
250만 달러
필라델피아 필리스
2010년
120만 달러
뉴욕 양키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2011년
2억 5,000만엔
오릭스 버팔로스
일본프로야구
2012년
2,400만 원[40]
한화 이글스
한국프로야구

박찬호가 여태껏 벌어들인 돈[41][42]
리그
금액
원화로 환전 시
메이저리그에서 번돈
8,665만 6,945달러
1,019억 856만 7,320 원
일본프로야구에서 번 돈
2억 5천만 엔
25억 8,315만 원
KBO 리그에서 번 돈
2,400만 원[43]
총액
1,045억 1,571만 7,320원

원래 94년경 첫 출국 당시 당당히 100억 벌어오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약 10배를 벌어 온 것이다!


5.3. 가족[편집]



2019년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 소개된 박찬호 가족
부인인 박리혜는 일본 명문 대학인 조치대학[44]과, 미국의 명문 요리학교인 CIA 요리학교[45]를 졸업하였고, 프랑스의 미슐랭 레스토랑인 '피에르 오르시(Pierre Orsi)'에서 근무한 요리사이다. 일본 이름은 '가츠다 리에'. 한때 일본 이름 때문에, 박찬호의 아내는 일본인 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교포 한국인 이다.

CJ의 요리 전문 케이블 채널 O'live에서 홈메이드 쿡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부인이 요리사라는 사실을 두고 DC인사이드 야구갤러들은 박찬호 선발 경기에서 특별한 활약을 보이는 선수(박찬호의 선발승을 위해 적시타나 홈런을 치거나 호수비 등을 하는 팀원이나, 결정적 에러로 상대방 팀 분위기를 일순에 꺾는 상대 팀원)를 '박사장 회식 초청자 명단'에 추가하기도.

부인이 재일교포 이기 때문에 한국어 실력이 영 좋지 않다고 한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일본어로 된 라벨링이 많이 나왔으며, 잘못 적은 한국어 라벨링도 보였다.[46] 맵고 짠 음식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듯하며, 박찬호도 현 시점에선 그 입맛에 길들여진 듯. 아내가 풀코스로 요리하는 걸 선호하는지라 러시아워인 아침밥 시간에는 싸움도 벌어진다고. 박찬호의 냉부 출연 이후 부인을 냉부의 스페셜 셰프로 등판시키기도 했다.

부인 박리혜씨의 아버지이자 박찬호의 장인은 일본 부동산 재벌 박충서다.[47] 이와 관련 거짓 소문으로는, 그가 박찬호에 대해서 "우리 사위가 야구하느라 돈은 별로(!) 못 벌었지만 사람은 좋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스즈키 이치로의 WBC 당시 발언이나, 2002 월드컵 당시 프란체스코 토티의 발언이 의도와 다르게 변질되어 한국 사회에 퍼진 것을 보면, 이 발언도 비슷한 기레기의 소행이 아닐까 싶을 정도. 이미 스포츠 신문이나 가십거리를 다루는 케이블 프로그램 등에 저런 말을 인터뷰에서 했다고 나오는데 해당 인터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박찬호가 장인이랑 비슷하게 벌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건 아니고 실제로 박찬호보다 장인이 부자는 맞다. 국내 기사에 따르면 장인도 야구를 좋아했다고 하니, 최소한 박찬호가 번 돈의 규모를 모를 리 없으며 일본 사회에서 프로야구 선수가 가지는 위상은 한국 사회에서보다 훨씬 대단하다. 그들보다 더 대단한 大리그(일본에선 메이저리그를 이렇게 부른다)에서 장기간 활약한 박찬호를 장인이 폄훼할 이유는 없다. '돈보다는 야구를 열심히 한 그 인품을 보았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을 가능성은 있으며 해당 언급이 장인의 막대한 재산 규모로 인해 와전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진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참고로 박찬호는 연봉으로 번 돈도 많지만 여기저기 산 건물들도 있는데 그 건물의 시세도 오르고, 임대료로 알차게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다만 이 소문 자체는 워낙 많이 퍼지다 보니, 이게 거짓 소문이라는 걸 잘 아는 박찬호의 팬들조차 농담 삼아 말하기도 할 정도다.

여담으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KLPGA에서 활약하던 프로 골퍼 박현순이 박찬호의 사촌누나다. 박현순의 아들들도 야구를 하는 중.#

KBS2 '축구 야구 말구'에 그의 사촌 동생인 박현용 씨가 출연하였다. 고깃집을 운영 중이며 단골. 한의사 경력자다.

배우자가 재일교포 2세(특별영주자)이므로, 박찬호는 일본의 특별영주자의 배우자로서 일본에 거주 및 일본 영주권 신청도 이론상 가능하다.

자녀로는 딸만 3명 있으며 세 딸은 모두 대한민국과 미국의 복수국적이다. 3자녀 모두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영어와 한국말이 매우 유창하다.

차녀 세린양에 의하면 장녀 애린양이 아버지를 닮아 똑같이 말이 많다고 한다.# 박찬호는 이에 대해 흐뭇한듯.

5.4. 작품 속 선수 박찬호[편집]


  • 1990년대 당시 아시아 선수가 드물었던 메이저리그에서 노모 히데오와 함께 아시아 선수를 대표했으며 더불어 두 자리 승수의 실력까지 겸비해서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만화 메이저에서는 본명이 아닌 '안종권'이라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한국팀 에이스의 모티브로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는 비열한 악역 캐릭터로 묘사되는 바람에 국내에서는 많은 안티가 양산되기도 했다. 굳이 따지면 한국 팀과 이승엽을 모티브로 한 선수가 비열하게 나오는 건 사실이지만 박찬호를 모티브로 한 선수는 비열한 건 아니다. 얼굴이 완전 엑스트라 악역 1 수준인 게 문제지만 작중 취급은 일본 팀에게도 크게 인정받는 모습. 경기 내용도 사기캐 토시야에게 허용한 솔로 홈런을 제외하면 실점이 없었고(7이닝 1실점은 확정이나 이후 이닝까지 던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승엽과 달리 비겁한 수를 쓰는 묘사도 없다. 애니에서는 6기에서 한 번 더 등장, 고로와 맞대결을 펼치는 화가 있다.


  • 짐 캐리의 영화 라이어 라이어(1997)에는 극 초반에 아빠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주인공 아들이 야구 장비를 들고 나오며 하는 대사중에 "나는 노모 할게요. 아빠는 칸세코 해요."[48]라는 것이 있었는데, 당시 한국 극장 개봉판 자막(번역)에서는 노모가 뜬금없이 박찬호로 둔갑한 바 있다. 노모를 모르는 대다수의 관객들을 위하여 박찬호로 번역 처리하였다.

  • 2015년 다큐멘터리 영화인 '웰컴 투 다저타운'에서도 등장한다. #


5.5. 자서전[편집]


  • “나의 꿈 나의 도전 박찬호”
초판 인쇄일이 1996년 12월 15일이다. 그의 나이 겨우 만 23세때. 원제는 "Hey dude" 였으나 추후에 상기와 같이 변경 되었다. 박찬호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끈 요인이 IMF로 한참 힘든 한국인에게 희망을 줬다는 것인데, 1996년은 IMF는커녕 박찬호가 마이너리그에서 2년간 고생하고 막 메이저리그로 올라온 시점이다. 책 내용도 1996년 4월 7일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첫 승을 거둔 부분에서 끝난다. 즉, 이 책의 내용은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성공기가 아니라,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기인 것이다. 때문에 박찬호가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 어린 시절, 공주고와 한양대학교 시절, 마이너리그 때 힘들었던 일 등이 집중적으로 실려 있다. 특히 박찬호의 마이너리그 경험담과 메이저리그 도전이 당시 국내에는 워낙 생소했기 때문에 잘 팔린 편이다. 요즘에야 워낙 메이저리거가 늘어났고 인터넷이 발달하여 마이너리그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PC통신 시대였던 만큼 마이너리그에 대해서 개인 팬이 정보를 얻기는 정말 힘들었다. 당장 현업인인 자신도 마이너리그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던 상황에서 강등된 박찬호는 엄청난 문화 충격을 받았고, 책에서 이 경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게 된다.
박찬호는 대망의 메이저리그 1승을 달성하고 나서 이 책의 초고를 완성했지만, 탈고를 마친 시점에서는 이미 10경기 출전에 5승이라는 전적을 올리고 더 많은 경험을 쌓은 채 시즌을 마무리한 상황이었다. 메이저리그 투수로서 올라서기 위한 중요한 기점들을 다 거치고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이쯤 되면 책 한권 써도 되겠다 싶었을 것이다. 아직 리즈 시절이 오기 전 도전정신에 가득차 있던 시기의 박찬호를 알기 가장 좋은 책이다.
그리고 선구자, 개척자의 이미지와 국민적인 영웅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져 뭔가 '위인 박찬호'라는 느낌에 종종 '투수'라는 것을 잊게 되는데 이 책의 내용을 읽고 있으면 박찬호도 빼박 투수구나라는 어쩌면 당연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즉, 그 정도로 투수라는 포지션에서 어떤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가, 투수는 어떤 플레이를 해야 하는가 등의 본인의 투수론이 잘 드러나 있어 투수 박찬호를 느낄 수 있다.

  •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
2013년 6월 17일 초판 인쇄.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 박찬호가 은퇴 이후 선수 생활을 돌이켜보며 쓴 자서전이다. 첫 번째 자서전 '나의 꿈 나의 도전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의 문턱에 처음 안착한 젊은 투수로서의 패기를 보여준 책이라면,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라는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 노장의 깊은 소회를 느낄 수 있다. 처음 메이저리그의 문턱에 진출한 순간부터 아시아 최다 승인 124승을 달성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책으로서, 실패와 좌절을 이겨내고 재기에 성공하기까지의 경험담을 진솔하게 풀어내고 있다.


5.6. 투 머치 토커[편집]


선수 시절부터 은퇴 후 지금까지 박찬호의 적극적인 팬 서비스로 사람들이 붙여준 애칭. 시간이 지난 지금은 말 많은 사람에게 붙이는 말이기도 하다. 현재는 프로야구 선수의 팬 서비스가 안 좋은 사례가 나올 때마다 거듭해서 재평가를 받는 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투 머치 토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찬호/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미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찬호/미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여담[편집]


  • 미국 진출 첫 해 마이너에서 고생할 때, 팀 동료들이 마늘 냄새가 난다며 피하기에 처음에는 인종차별인 줄 알았다고 한다. 노이로제가 걸려서 하루에 5~6번씩 샤워를 했을 정도라고. 그러던 어느날 한 선수가 먼저 시비를 걸어 싸움이 붙고 감독에게 불려갔는데 영어를 하지 못해 오히려 원인 제공자로 몰려 벌금까지 물었다고 한다. 너무 분해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으나 한국의 흔한 아들들이 그렇듯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원래 하려던 말은 다 집어넣고는 결국 잘 지낸다 거짓말을 하고 끊었고, 그 다음날부터 한국 음식을 완전히 끊고 냄새 나는 치즈를 억지로 먹었다고 한다. 막상 본인은 다른 선수들에게서 나는 치즈 냄새가 더 역겨웠기에 너희들도 니네 몸에서 나는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당해보라는 의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냄새가 난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고, 실제로 외국인들에겐 마늘 냄새가 견디기 힘들었던 거지 자신을 따돌리는 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49][50]

  • 매일 아침마다 공복에 흑염소 진액을 챙겨먹는 루틴이 있다.

  • 10년차 베테랑 선수가 된 FA 계약을 맺고 나서의 2000년대 시절에도 비슷하게 음식에 관한 사안들로 서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선수단 비행기에서 어머니가 싸준 김밥을 초고추장에 찍어먹으려고 열었는데 옆에서 냄새를 맡은 선수들이 누가 방귀 뀌었냐고 소리를 질렀다고 전해진다. 상한 것이 아니고 좋은 냄새라고 해명했으나 전부 버리라고 난리를 쳤고, 버릴 수가 없어서 결국 비행기 화장실에 가서 앉아서 먹었다고 한다.

  • 선수 시절 일본 출신인 노모 히데오와 라이벌 기믹이 잠깐 있었고, 한국 언론에서는 유독 박찬호와 노모 히데오를 비교하면서 깎아 내리는 경우가 많았었다.[51] 하지만 실제로는 노모가 박찬호의 비공개 결혼식에 참석할 정도로 개인적인 관계가 상당히 좋았다. 박찬호는 결혼식 하객을 약 30명만 초대했고 야구인은 두 명뿐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노모였던 것. 야구팬들은 알겠지만 노모는 야구에 대한 구도자적 자세와 훌륭한 인품으로 유명하며, 박찬호보다 먼저 다저스에 적응한 아시아인 선배였다. 한일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라이벌이라 불렸을 뿐 실제로는 좋은 동료에 박찬호가 따라잡고 싶어하는 선배였다. 박찬호가 124승을 기록하며 노모의 123승 기록을 깨자 축하 메시지를 보냈으며, 박찬호 기념관 건립행사에도 참여했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 현재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프런트로 한솥밥을 먹고 있다.

  • 국가대표로서의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52] 국가대표, 말 그대로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로서 경기에 나선다는 것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이 있고, 책임감까지 강하다. 현역 시절 한국 야구계가 참가하는 각종 국제 대회에 빠진 적이 없고, 빠질 경우에도 큰 아쉬움을 토로하는 등 한국 야구가 세계 수준에서 활약하는 데에 기여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아무래도 한국인으로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첫 투수였고, "자신의 행동 = 한국에 대한 이미지" 공식처럼 지금 기준으로는 조금 고지식한 태도를 가질 만한 시기(90년대 초반)였기에 국가 대표 자리에 더 집착한 듯하다. 여러모로 야구뿐만 아니라 야구 외적으로도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소유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나이로 인해 국대 선수를 은퇴하게 되었을 때 기자회견장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53] 한국 스포츠계에 영원한 전설로 남을 만한 자격이 있는 인물. 박찬호가 국대에 보여줬던 진심 때문인지 IMF 시절의 박찬호를 지켜본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기록으로만 박찬호를 접하는 젊은 세대에도 인기가 좋은 편이다.

  • 전담포수였던 채드 크루터를 사기혐의로 고소한 적이 있다. 사유는 빌려준 돈을 안 갚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엔 소송을 취하한 것을 보면 나중에 늦게나마 돈을 갚은 듯 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선의의 라이벌 겸 절친 노모 히데오도 똑같은 이유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시절 팀 동료 사노 시게키를 고소한 적이 있다. 다만, 이쪽은 아직 제대로 해결되진 않은 듯.

  • 인천 자유공원 인근에 있는 야구 배팅장에는 투구 자세로 타격을 하는 괴랄한 모습의 그림이 있다. 이 의뢰를 받은 화백[54]은 본래 박찬호의 투구 자세를 그렸으나 타격을 연습하는 시설인 만큼 배팅장 사장님이 타자의 그림으로 다시 그려달라고 요청, 귀찮아진 화백이 어깨 너머로 방망이만 하나 덜렁 그려서 마무리했다는 설이 있다. 불암콩콩코믹스에서 패러디되기도... 자유공원 박찬호 웹툰 생활의 참견에서 작가 김양수는 자신의 선배 얘기라며 본 에피소드를 연재한 적이 있었다.

  •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활약하던 시절, 엑스포츠 개국 초기 딱히 광고수입이 없던 당시 박찬호의 등판 경기 때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엑스포츠에서 우릴대로 우린 조여정의 송월타월 광고에서 본따 타월을 선물하자는 얘기도 있었다. 벅 쇼월터 감독을 '벅 송월터' 감독으로 불렀던 그 시절이었다. 송월타월 광고를 보며 허벅지를 꼬집던 네티즌들은 박찬호가 삼진을 하나 잡으면 타월이 1cm 내려간다는 드립을 쳤다나. 이때 조여정과 송월타올 광고를 지긋지긋하게 본 탓에 메이저리그 통산 100승을 올릴 당시 국내 메이저리그 팬덤에서는 박찬호와 조여정을 맺어주자고 하는 여론까지 생겼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박찬호는 지금의 부인이 여자친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2009년 월드시리즈 때 독감에 걸린 채로 등판되었다고 보도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신종플루였다는 것이 본인 입에서 밝혀졌다.

  • 희한하게도 그가 공을 잘 던지면 나라가 곤경에 빠진 증거라는 설이 있다. 그냥 웃으면서 넘기기에는 참 미묘한 시기에만 잘 던지는 것이 또 나름의 아이러니.

  • 특이하게도 박찬호는 선수 시절 내내 미국 영주권이 없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구단의 협조까지 받아가면서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메이저리거라는 신분이 보장되는 확실한 직업이 있어서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금방 딸 수 있다. 그런데 박찬호는 어차피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끝낼 것이기 때문에 영주권을 따지 않았다는 식의 기사가 나온 적이 있었지만 정말인지 불분명했으나 어쨌든 이 때문에 계약이 새로 갱신될 때마다 노동 비자를 새로 발급받는 불편함을 감수했다.

  • 뉴욕 양키스의 투수 조바 체임벌린이 위에 나온 박찬호의 폭풍설사 인터뷰를 듣고 폭소했다. 사실 당시 양키스 선수치고 이 영상을 안 본 선수가 없고 안 웃은 선수가 없는 지경이니 조바 체임벌린은 "박찬호는 오랜 시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난 투수였다. 어렸을 때 나는 박찬호의 투구를 자주 봤다. 그의 팬으로 나는 성장했다. 그런데 이제 같은 팀 불펜에서 선수 생활을 한다는 것이 기쁘다"라고 말했다.


  • 해외야구 갤러리에선 박찬빈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정확하게는 찬빈님 혹은 챈빈님이라 불리며 숭배되고 있다.[55] 박찬호의 등판 때마다 갤은 페이지가 쉽게쉽게 넘어가며, 상대 팀에서 박찬호에게 좋은 타격을 한 선수나 삽질을 하는 한화 선수는 매국노 소리를 듣게 되고, 삽질을 하는 상대 선수는 애국자로 칭송받는다. 갤러리에서는 허구한 날 IMF 때의 채무 의식을 되새기라면서 찬빈님에 대한 존경을 강조한다. 그런데, 처음 찬빈 얘기가 나왔을 땐 정말로 박찬호한테 호의적인 분위기도 없진 않았으나, 은퇴한 뒤엔 찬빈이란 별명은 남았지만 원래 맹렬한 박찬호 까이던 해야갤의 특유한 분위기와 섞여 찬빈님이라 불리긴 하는데, 한만두, 볼질, 먹튀, 위의 설사 얘기 등을 갖고 허구한 날 놀림받는 신세가 됐다. 단, 대부분은 단순한 장난을 위한 글이며 실제로는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이 부진한다거나, 한국야구선수가 무언가 논란을 일으켰을 때 항상 언급되며 칭송받는 진정한 의미의 갤러리의 주인이다.#

  • 지누션의 두 멤버와 친구 사이다. 박찬호가 마이너메이저를 오가던 시절 LA로 가면 자주 만났던 친구들이라고 한다. 2001년에 박찬호는 등장 음악으로 지누션의 A-Yo!를 쓰기도 했다. 요즘은 서로 왕래가 뜸한 편이긴 하지만 예전에 지누션이 가지고 있던 의류 브랜드 MF(메이저 플레이버)의 모델로 나오기도 했다.

  • 2016년부터 MLB 명예의 전당 후보로 오를 수 있는 자격 요건을 충족했으나 심사에서 탈락 중이라 현재까지 정식 후보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


  • 팬 서비스를 매우 잘해준다. 선수 시절부터 은퇴후 지금까지 팬 서비스로 좋은 일화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사인을 잘 해주는 것은 물론 팬과 함께 신나게 만담까지 하는 걸로 유명해 "바쁜 팬의 시간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장난스러운 찬양까지 받는다. 다만 처음부터 잘해줬던 건 아니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에는 지금보다는 잘 안 해줬다. 본인 말로도 그땐 건방지다는 말을 꽤 들었다고. 사람이 바뀌기 시작한 건 텍사스 레인저스에서의 부진 때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후로는 대중들이 기억하는 과도한 팬 서비스의 시작.

  • 예능에서 이시영에게 운동으로 진 이후 경쟁심을 돋우는 글을 썼다가 여성혐오 문제로 공격받은 적이 있다. # 박찬호를 옹호하는 입장에선 박찬호가 정상급 스포츠 선수 출신이란 특성상 원래 승부욕이 엄청 강하다고 한다. 같은 프로에서 군함에서 다른 군함으로 로프 던지기를 하는 것도 사실 중요한 게 아닌데 한 번에 못하자 재도전을 반복하면서 결국 해냈고 어퍼컷 세리머니까지 하면서 좋아했으며, 다른 출연자에게 뒤지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정도로 운동에 관해서는 승부욕이 강하다. 따라서 이시영이 여성이라고 공격한 게 아니라 경쟁심을 발현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반면 비판하는 입장에서 문제 삼는 것은 역시 "여자가 아닐 겁니다!"라는 발언. 아무리 남녀간 신체 차이가 있다지만 이시영과 박찬호는 9살 가량 나이 차이도 있거니와, 박찬호는 2012년 은퇴했고 이시영은 2015년까지 운동하던 사람이다. 자신의 영역에서 노력하며 얼마 전까지 아마추어 운동 선수로 활동하던 사람에게 운동으로 졌다고 삿대질하는 사진을 올리며 "여자가 아닐 것이다, 다시 해보자"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따라서는 불쾌할 수 있다. 물론 상식적으로 이시영이 여자인 것을 모를 리가 없으니, 탈여성급 신체 능력이라는 칭찬 반, 승부욕 반인 발언이다. 그리고 아무리 여성 운동선수라도 일반인 남자보다 신체 능력이 떨어질 정도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남녀의 신체 능력 차이는 월등하다. 실제로 여성 상위 7%가 남성 하위 7%와 근력이 비슷한 수준. 20대 여성이 60대 남성보다 운동 능력이 떨어지는데 전 세계 운동 능력 상위 0.1%에 해당했던, 은퇴한 지 10년도 안 지난 박찬호에게는 이시영이 아니라 더한 사람이 와도 박찬호가 이기는 것이 정상인 것. 모든 스포츠 종목에서 남녀 사이에 넘사벽 차이가 있는 건 차별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테니스 여성 올타임 넘버원을 다툴 만한 레전드인 세레나 윌리엄스는 남자 세계 랭킹 200위 선수와 성 대결을 펼쳐 완패했고, 여자 농구에선 마이클 조던급 레전드인 셰릴 밀러가 남자 하부 리그에서 지명된 것만 해도 화제가 될 정도다. 한국 여자 국대 축구팀은 남자 고교 축구팀(청대가 아니라 그냥 한 고등학교 팀)과 연습 경기를 해도 이길 수가 없고, 여자 복싱 세계 챔피언은 남자 시 5위(세계 5위, 국내 5위가 아니라 한 도시의 5위)와 스파링을 해도 상대가 안 된다. 그나마 차이가 적은 골프에서조차 최강급 여자 선수가 남자 대회에선 컷오프 통과하냐 마냐를 따질 수준이다. 하다 못해 바둑이나 e스포츠도 오래 앉아 집중해야 하는 관계로 평균 체력이 떨어지는 여자는 남자보다 경기력이 더 부족한 편이다. 이렇다 보니 세계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여성 선수가 있다 해도 메이저리그는커녕 KBO, 아니 대만 리그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즉, 박찬호는 순수 운동 능력만으로 평가하고 있기에 저 말은 "저 녀석 왜 저렇게 잘해?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 아냐?" 수준으로 남녀 사이의 운동 능력 격차를 뛰어넘을 정도로 이시영이 뛰어나다는, 칭찬이 포함된 징징이다. 아마추어 상대로 저러는 박찬호의 승부욕이 과하다고 하면 모를까, 저걸 갖고 성차별 운운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래도 이로 인해 당사자 간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닌 듯하다. 이시영은 "박찬호가 못 다한 승부가 있으니 재입대를 하자고 하더라. 가끔 운동하고 있는 동영상을 보내기도 한다"#라며 웃어 넘겼고, 이후 박찬호는 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하며 이시영을 다음 주자로 지목하기도 했다.

  • 단월드 쪽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육체,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에 빠진 듯하다. 단월드 홍보물에도 박찬호 이름이 종종 들어가곤 했다. 박찬호의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신비주의에 빠진 박찬호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정확히는 메이저리거 재활 경험이 없는 한의사[56]와 '자칭 척추 전문가'를 언급하며, "허리 부상을 1류가 아닌 사람들에게 치료받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는데 아마도 후자가 단월드일 가능성이 높다. 2018년에도 도복 입고 절 체조니 명상이니 말하는 거 보면 아직도 빠져 있는 듯.

  • 1997~1998년 본격적으로 잘 나갈 때 한국에 귀국해서 휴가를 보내다 급전이 필요해[57] 은행에 대출신청을 하려다 은행서 담당자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구단에서 증명서류 다 떼오라는 등 너무 깐깐하게 굴어서 꽤 고생했던 적이 있다. 결국 어찌 처리하기는 했는데 그걸로 빡돈 박찬호가 그 은행과 거래를 다 끊고 다른 은행에 계좌를 뚫었다.

  • 어렸을 때 박찬호가 살았던 집은 지금 박찬호 기념관으로 남아 있다. 2021년 KBS2의 예능 프로그램인 '축구 야구 말구'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 은퇴한지 수 년이 넘었지만 선수 시절의 체형과 거의 변하지 않은 채로 몸을 유지하고 있는지라 2018년 노모 히데오와의 재회 당시 건강이 염려되는 수준으로 살이 붙으며 체형이 심하게 변했던 노모 히데오와 비교가 되어 화젯거리가 된 적이 있다.

  • 매우 뛰어난 외모의 미남이다. 선이 굵은 호남형 미남으로, 연예인 중 강타와 상당히 닮았다. 은퇴 이후에도 선수 시절 못지않게 몸매를 관리하다보니 오히려 중후하게 수트빨이 잘 받는다. 또한 삼국지 시리즈 게임에서 전위의 일러스트가 대대로 박찬호와 닮은 외모로 등장하였다.

  • 넷플릭스의 수리남에 나온 자신의 친필 사인볼을 보고는 "친필 사인볼 가격이 꽤 비쌀 텐데 영화의 소품이 되는 건가요"라며 궁금증을 드러냈다. 또 그는 "'수리남' 재밌게 봤네요"라면서도 "수리가 필요한 남자라서인가요"라고 덧붙였다. 박찬호 '수리남' 보다 깜짝 "내 친필 사인볼이 등장…꽤 비쌀텐데"[58]

  • 미국으로 건너간 뒤 구매한 첫 차로 SUV 차량인 미쓰비시 몬테로[59] 타고 다녔는데, 아직 마이너리거 시절이던 1995년 중고차로 구매했다고 한다. 나중에 메이저리그에서 자리잡은 뒤 박찬호가 일본차를 몰고 다닌다는 사실이 한국에 알려지자 한국차 놔두고 왜 일본차를 타냐며 팬들 사이에서 한동안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60] 본인에 의하면 차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마침 딱 괜찮은 중고차 매물이 나와서 구매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1999년 메르세데스 벤츠 LA 법인에서 광고모델 기용 조건으로 벤츠 SL 한 대를 무상으로 지급해주면서 몬테로를 처분했다.

  • 골프선수 박세리가 말하길 1998년도에 한국에서 아파서 입원한 적이 있는데 박찬호는 박세리와 초면임에도 병문안을 갔다고 한다. 박세리의 은퇴식에도 안불렀는데 왔다고 한다. #

9. 주요 기록[편집]



9.1. 좋은 기록들[편집]


  • 1994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입단, 그해 NL에서 두 번째로 어린 선수(만 21세)[61]
  • 1997년~2001년 5년 연속으로 13승 이상 기록
  •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드림팀 I) 소속으로 금메달(병역특례)
  • 2000년 18승 10패, 평균자책점 3.27, 226이닝 기록, 다승 NL 5위
  • 2000년 9이닝당 피안타 6.89개 - NL 1위(다만 피출루율은 NL 10위권 밖)
  • 2000년 삼진 217개 - NL 2위[62]
  • 2000~2001시즌에 걸쳐 34이닝 연속 무실점 피칭.[63]
  • 2001년 35경기 선발 출전 - NL 1위(15승 11패, 평균자책점 3.50, 234이닝)[64]
  • 2001년 올스타전 출전
  • 2001년 234이닝 & 삼진 218개 - NL 3위[65]
  • 통산 국제 대회 성적 2승 3세이브 26⅔이닝 2실점 2자책점 평균자책점 0.68[66]
  • 2009년 월드 시리즈에 4경기 3⅓이닝 등판해서 평균자책점 0 기록
  • 통산 홈런 총 3회 기록[67]
  • 2010년 9월 13일까지 메이저리그 통산 123승 97패, 노모와 더불어 아시아 최다 승 타이 기록.
  • 2010년 10월 2일 124승 98패로 아시아 최다 승 달성


9.2. 좋지 않은 기록들[편집]


  • 1999년 한 시즌 피만루홈런 4개 허용(한만두 포함). 단일 시즌 1위 기록이다.
    • 1999년 4월 23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홈 경기에서 페르난도 타티스에게 한 이닝 만루홈런 2회 허용.
    • 나머지 두 홈런은 1999년 4월 12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트래비스 리, 6월 5일 애너하임 에인절스와의 홈 경기에서 맷 월백 등에게 허용한 만루홈런.
      • 특히 1999년 6월 5일 애너하임과의 경기에서 상대 선발투수 팀 벨처에게 그 유명한 이단옆차기를 시전,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켜 퇴장당했다.[68] 웃긴 건 그 날 팀 벨처 역시 6회 데본 화이트에게 만루홈런을 맞았다. 공교롭게 박찬호, 팀 벨처 모두 만루포를 맞았다.

2006년 콜로라도전에서 1이닝 3루타 2개를 맞았다. 이는 메이저리그 역대 타이 기록이다.

  • 2000년 124 볼넷으로 NL 볼넷 2위. 그런데 볼넷 1위인 당시 샌디에이고의 맷 클레멘트와는 단 1개 차이다.




  • 2001년 올스타전에서 칼 립켄 주니어에게 홈런을 맞았다. 다만 칼 립켄 주니어에게 사실상 홈런을 헌납한 것이라고 후에 밝혔다. 영상으로 보면 92마일짜리 직구를 한복판에 던졌다. 레전드에 대한 예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이 당시 주니어는 자신의 마지막 시즌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한 상태였고 따라서 레전드 선수의 마지막 올스타전이 된 것이었다. 현지에서도 다들 박찬호가 이 홈런을 선물한 것으로 생각했고. 그런데 민훈기 기자의 저서 메이저리그 124승의 신화 박찬호에 따르면 박찬호는 올스타전 2일 전에도 모두가 큰 한 방을 노리고 있을 테니 변화구의 효과가 클 것이라는 얘기를 했고, 올스타전 이후 사석에서도 "변화구로 승부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분명히 직구를 노리고 있을 테니 커브를 던지면 헛스윙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물론 고의 홈런은 투수도 타자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어느 정도 쉬운 공을 던져줄 수는 있다. 아마 립켄을 맞이한 순간 노장에 대한 예우로 마음을 바꾼 것 같다.



참고로 양대 리그 연속 힛 바이 피치 기록 1위는 박찬호가 최초이고 심지어 2002년은 145.2이닝 소화로 규정 이닝 미달이었다.

여러모로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기록을 많이 세웠다. 좋은 기록이든 나쁜 기록이든 간에.


9.3. 기타 기록[편집]


  • ML 통산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 .228,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 .271

  • 우타자 상대 피홈런 99개, 좌타자 상대 피홈런 131개

  • 데뷔 첫 피홈런: 1994년 4월 14일 브라이언 조던(STL)

  • 마지막 피홈런: 2010년 8월 15일 크리스 존슨(HOU)



10. 어록[편집]


"저에게 있어서 야구장은 학교와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야구는 제가 선택한 인생 과목이었습니다."

ㅡ 박찬호. 2014년 7월 18일, 올스타전 은퇴식에서.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전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자기 자신을 믿으면 시행착오는 겪을지 모릅니다. (강한 어조로) 그러나 그걸 통해 분명히 성장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으세요. 제가 절 믿고 이 자리에 섰듯이요.

ㅡ 2015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야구의 정신-개척자 상을 수상한 후 인터뷰 中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며 살 겁니다. 그리고 목표를 세울 거에요. 전 목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봐요. 목표를 향해 오늘과 내일 똑같은 스텝을 밟아 걷는 것. 전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생 최고의 목표가 아닐까 싶어요. 어쩌면 현역 시절의 제 목표도 통산 124승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요. 제 가장 큰 목표는 오늘도 내일처럼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거였어요.

매거진S 인터뷰에서



11. 관련 문서[편집]




12. 둘러보기[편집]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2001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HBP 1위
제이미 라이트
(MIL)

박찬호
(LAD)

제이미 라이트
(MIL)

케리 우드
(CHC)
페드로 아스타치오
(NYM)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2002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HBP 1위
팀 웨이크필드
(BOS)

박찬호
(TEX)


빅터 잠브라노
(T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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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으로 1973년 6월 29일[2] 경영학과 92학번. 당시 한양대는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한 학생들도 체육대학이 아닌 일반 학과에 분산시켰다. 중퇴했지만 2000년 10월 명예 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3] #[4] 1997년 시카고 컵스전에서 완투승을 한 박찬호를 보고 당시 시카고 컵스의 1루수였던 그레이스가 한국인 기자에게 박찬호의 나이를 물어봤는데 기자가 24살이라고 답하자 한 말이라고 한다. 다만 그레이스는 당시 1964년생으로 만 33세의 중견급 선수였고, 2003년 은퇴해서 그가 실제로 10년 동안 박찬호를 상대하는 일은 없었다. 참고로 최희섭이 은퇴 당시 후배를 위해 길을 비켜주는 마크 그레이스처럼 되고 싶다고 회고한 바 있다.[5] 단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2000-2001 시즌에는 속구 구위가 상당 부분 감소한 상태였다.[6] 다만 순수 선발승이 아니라 계투로 등판하여 챙긴 승리가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선발승의 경우 노모 히데오가 123승으로 최다).[7] 21세기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 위에서 공을 뿌린 첫 번째 선수가 되는 것이다.[8] 최희섭이 아니다. 박찬호가 선수 초기부터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하기 전까지 뛰었던 내셔널 리그에는 투수도 타석에 들어서는 규정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돈트렐 윌리스잭 그레인키처럼 타격 실력을 뽐내는 투수도 곧잘 등장한다.[9] 당시 한국인들이 국제 정세에 어둡기도 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기로 인한 경제 성장, 1996년 OECD 가입으로 인해 국민들의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었다. 일각에서는 일본을 넘는다고 까지할 정도로 국민들의 자긍심이 높았었다. 그런 상황에서 외환위기로 나라가 폭삭 망하고 직장까지 잃으니 그 당시 사람들의 패배감과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박찬호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활약하는 것을 보며 국민들은 위로와 희망을 얻은 것이다. 당시 골프선수 박세리가 LPGA에서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가서 스윙을 하는 투혼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과 박찬호가 "코리안 특급"으로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국민들에게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10] 최전성기인 1996년부터 2001년까지 거의 스포츠계에서 박찬호의 인기는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초반까지 가요계 원탑 자리를 차례대로 차지했던 H.O.T., 조성모, god 급의 위상과 비슷할 정도의 인기였다.[11] 지금의 가전제품 판매 및 수리 점포. 전자기기 업체 노릇을 하던 전파사도 있었고, 웬만한 동네에는 개인이 직접 운영하는 전파사가 하나 둘 정도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 거의 사장된 점포 형태이다.[12] 공주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1977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포수 김경문과 배터리를 이루며 공주고등학교 야구부 창단 첫 우승 및 충청도 팀 최초로 전국 대회 정상을 이끌어 낸 투수 출신이었다. 기사 1, 후에 박찬호가 한화이글스 소속으로 국내 데뷔전을 가졌을 때 시구자로 초청되기도 했다.기사 2 [13] 변화구가 땅바닥에 튀자 "피아자는 블로킹을 못해서 항상 2스트라이크 잡고는 직구를 요구했었죠."라고 말했다.[14] 2002년 한화그룹에 인수된 뒤 2012년 10월 9일부로 사명이 바뀌었다.[15] 박찬호가 고향 팀인 한화 이글스에서 은퇴하고 싶다고 밝혀왔으며 대전에서 은퇴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대한민국 국가대표로서 한국 프로야구의 올스타들이 모이는 올스타전에 은퇴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전에서 올스타전을 하려면 6년 뒤. 대전에서 올스타전은 박찬호의 현역 시절인 2012년에 있었기 때문에 대전 올스타전 은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한화 이글스에서도 공식 은퇴식 외에도 홈구장인 한밭구장에서 박찬호의 은퇴와 관련된 컨텐츠를 박찬호와 조율하고 있다고 하니 한화 이글스 팬이라면 크게 실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16] 양학선 선수는 카잔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다.[17] 절을 하지 않고 묵념만 한다.[18] 야구선수들 중에는 유백만, 김재박, 방수원, 윤석민 등 골프에 재능이 있는 선수들이 꽤 많다. 앞뒤로 치는 야구의 스윙 궤적과 위아래로 치는 골프의 스윙 궤적은 다르지만 막대기를 휘둘러서 공을 앞으로 보내는 것은 원리가 같아서 스킬을 습득하는 능력이 매우 빠르다.[19] 해당 기사를 쓴 기자는 야구를 담당하는 스포츠매체 기자가 아니라 신세계그룹을 출입하는 경제매체 유통 담당기자다. 신세계그룹이나 이마트 홍보실에서 떠도는 얘기가 와전됐을 가능성이 있다.[20] 정용진 구단주와 종종 골프 라운딩을 같이 하기도 하고 SNS를 통해서도 대화를 자주 나눌 정도로 친분이 깊다. 정 구단주의 주방에도 초대돼 요리 대접을 받는가 하면 SSG 홈경기에서 시구를 한 적도 있다.[21] 박찬호의 고향인 공주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22]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던 은지원이 가장 먼저 입수를 함으로써 다른 멤버들은 빼도박도 못하고 전원 입수를 하게 되었다.[23] 정작 박찬호는 멤버들의 코골이 소리 때문에 차라리 밖에서 자는 게 나았겠다며 텐트로 가겠다고 했다. 다만 이미 텐트는 걷어버려서 안에서 잤다.[24] 당시 1박 2일은 조작논란에 항상 시달려왔다. 그 몸값 높은 스타들이 밖에서 자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결국엔 밤새 텐트를 촬영하고, 발자국도 남지 않게 그 주변으론 지나다니지도 않았다. #[25] 박찬호와 최용수의 결혼식때 사회를 봐주기도 했다. 양준혁, 홍명보랑도 친분이 있다.[26] 이광용 아나운서는 박찬호의 말이 길어질것 같은 상황이면 적당히 끊으면서 '토크 방지턱'이라는 칭호도 얻게 되었다.[27] 이런 상황에선 투수가 부담을 느낀다, 저런 모습은 투수가 타자를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공을 던진 직후 투수는 한 명의 내야수다 등등등.[28] 김현수가 타격에 나설 때 박찬호가 "캡틴… 큐!"라고 외치면 김현수가 큐 사인에 맞춰 실제로 의미 있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물론 박찬호의 큐 사인과 김현수의 타격 성공에 과학적인 연관관계는 없다.[29] 사실 동등한 수준이라는것도 그나마 후한 의견이고 박찬호가 부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본인의 인지도만으로 국제대회에서 해설을 맡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이순철보다 훨씬 심한 케이스다. 야구 커뮤니티에서 아예 내가 그 이순철을 다시보게 될 줄이야라고 말할 정도.[30] 추가로 항저우 아시안 게임 결승전 당시 "깡 있는 깡백호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하고 말했는데 정작 그 "깡"을 없앤 장본인이 그런 말을 하고 있으니 강백호의 소속팀인 kt팬들은 물론 많은 야구팬들의 비판과 지탄을 받고있다.[31] 해설을 하는 도중 문장의 끝맺음을 못하는 경우가 잦고 상단에도 서술했듯이 어눌한 말투와 말을 버벅이는 단점이 있다. 처음 해설을 잡을 당시에만 해도 큰 비판을 듣지는 않았으나 해설 경험이 꽤나 쌓이고 나서도 발전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 야구 팬들로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32] 최소한 대표팀으로 발탁된 선수들의 기본 정보 정도는 숙지하고 있는게 해설위원으로서의 자질이라고 볼 수 있는데 상단에 서술했듯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기도 했다.[33] 국가대표 선수로서 국가를 대표한다는 책임감과 정신력, 투지, 태도 등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박찬호의 경우 특정 상황에 대해 정확한 피드백을 제시하기보다는 무조건적으로 "열심히 해야한다", "이래서는 안된다", "정신력과 투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식의 구시대적 가치관을 들이미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34] 박찬호는 한국 야구인 중 가장 큰 영향력이 있다고 볼 정도로 아구계의 큰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방송에서의 발언 하나가 한 선수의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목이라는 점은, 박찬호도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야구 팬과 비 야구 팬 모두에게 유명해진 강백호 껌 사건 외에도 구설수가 생겼던 적이 있는데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야구 예선전 경기 도중 박찬호는 오재원이 타석이 들어서자 자신을 힘들게 했던 기억이 있는 선수라며 오재원에게 정정당당할 것을 주문한 바 있다.

해설을 하던 박찬호는 과거 한화 이글스 시절 오재원과의 승부에서 몸 맞는 공에 대한 시비가 있었는데 박찬호는 당시 상황에 대해 "풀카운트 승부였는데 오재원이 땅볼을 쳤다. 그런데 발에 공이 맞았다고 우겨 파울로 인정됐다."라면서 "안 맞은 공이었다"고 덧붙혔다. 이를 들은 네티즌들이 팩트 체크도 없이 오재원을 비난하기 시작하자 오재원은 절대로 그런 적 없다며 오히려 억울함을 호소했고 이후 박찬호는 대만과의 결승전 중계에서 다시 오재원을 언급하며 "후배를 힘들게 한 것 같다, 팬들이 내 홈페이지에 당시 경기 장면을 캡쳐해 보내줬다"면서 오재원이 타구에 맞았음을 뒤늦게 인정했다.

이 때의 갈등으로 인해 피해자인 오재원이 2023년 덴 메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박찬호를 저격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박찬호/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의 6.2 문단 혹은 오재원/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의 4.2 문단 참고.
[35] 강백호가 소속된 KT 위즈는 팀 역사가 짧은 신생팀이다 보니, 중장년 팬층이 다른 팀보다 작다. 문제는 중장년 팬들은 갈매기 마당처럼 국수주의, 지역주의, 유교탈레반 기질이 워낙 강하다 보니 자기가 좋아하는 특정 선수를 기용해주지 않거나 여러 이유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야구를 잘하든 인성이 어떻든 신경도 안쓰고 무조건 찍어놓고 욕하는 성향이 강하다. 강성 팬 커뮤니티들이 좌우 가리지 않고 중장년층 커뮤니티를 강하게 탄압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36] 실제 박찬호는 고등학교 때 담력을 키우기 위해 야밤에 공동묘지에 혼자 가서 방망이질을 하거나(이 일화는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다.), 일부러 미팅에 나가는 등의 노력을 했다고 한다. 대학 1학년 때는 선배였던 구대성이 뻔뻔함을 길러주기 위해 지하철 잡상인을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잡상인은 불법이라 현 시점에서 한다면 바로 지하철보안관이 승차하여 제재한다.[37] 내가 원하는 것은 선발투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꿈 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때로는 현실을 이해하고, 그 현실 속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38] 배리 본즈가 73홈런을 때려낸 게 박찬호의 전성기인 2001년이다.[39] 이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메이저리그에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은 뒤에는 히스패닉 선수들과 제대로 소통을 하기 위해 스페인어를 추가로 공부했다고 한다.[40] KBO 리그 최저 연봉이다. 박찬호/2012년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사실상 연봉 0원이다. 한화는 박찬호를 영입하면서 적지 않은 연봉을 준비하였었는데, 박찬호가 오히려 연봉 0원으로 하겠다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규정상 선수에게는 최저 연봉은 줘야 하므로, 딱 그만큼만 받은 것. 대신, 한화는 박찬호에게 주려고 했던 6억 원 상당의 금액을 유소년 야구에 사용하라고 기부를 했다. 박찬호 역시 연봉 전액을 같이 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추가로 사비를 더 기부하였다고 한다. 사실상 박찬호는 자기 돈을 써가며 KBO에 봉사하면서 뛴 셈. 덤으로 박찬호는 KBO 리그 최저 연봉이 이렇게 적은 줄 몰랐다고 언급하였다. 메이저리그에서 대략 2,000이닝을 던지면서 969억을 벌었으며, 이닝당 4,800만 원 정도로 계산할 수 있다. 박찬호가 2,400만 원을 어떻게 보는지 대충 가늠할 수 있다. 참고로 메이저리그 최저 연봉은 5억이 넘는다. / 상식적으로 미국 프로야구 최저연봉을 보려면 마이너리그랑 비교해야지 메이저 최저연봉 5억 vs KBO 최저연봉 2천만원 비교하면 되나? 생각좀[41] 달러와 엔화는 모두 2021년 10월 23일 환율 기준으로, 해당 시절 가치가 반영되지 않았으니 참조만 하길 바란다. 광고 등의 추가 수익도 있으니 오차범위도 생각해야 한다.[42] '외화 벌이'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박찬호를 보기 위한 야구 팬들의 입장료, 한국에서 박찬호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들어간 돈 등등을 제외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메이저 당시 세금은 미국에 낸다. 물론 단순 외화 벌이로 국위 선양하는 선수들의 가치를 폄하할 순 없다.[43] 물론, 서류 상으로만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본인이 계약 후 전부 기부 했다.[44]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게이오기주쿠대학와세다대학을 잇는 일본 3위의 명문 사립대학이며 김수환 추기경이나 호소카와 모리히로 前 일본총리 같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대학이다. 일본 성우계에서 부자로 유명한 성우 우에사카 스미레도 이 대학 출신.[45] 정식 명칭은 '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 한국에서는 한국인 최초로 미슐랭 2스타를 획득한 임정식 쉐프나, 마스터 쉐프와 냉장고를 부탁해로 유명한 송훈 쉐프등을 배출한 명문 요리학교다.[46] 흑마늘을 훅마늘로 적어놨다.[47] 여담이지만 박충서의 아버지 박용구는 개혁 성향의 인물로 조용수의 민족일보 창간에 큰 기여를 한 결정적 후원자였다. 훗날 이와 관련해 시국 사건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박정희로부터 모종의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 이후 박정희가 박용구 대신 선택한 사람이 신격호라는 이야기가 있다. 박용구는 재능 있는 유학생들을 위한 재단을 설립했고 아들 박충서가 이 유지를 이어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혁 성향의 박용구가 세운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 인물 중 하나가 허문도. 이래저래 박찬호는 한국 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집안에 사위로 들어간 셈.[48] 'i'll be Nomo. You can be Jose Canseco.'[49] 마늘 문서에 나와있다시피, 알리신은 입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서 특유의 냄새를 발산한다. 그런데 마늘은 한국 음식의 아이덴티티로 여겨질 만큼 거의 모든 한국 음식에 들어가며, 한국인의 1인당 마늘 소비량은 외국인에 비해 넘사벽 수준이다. 보통 적응하여 느끼지 못하지만, 외국에서 오랜 기간 살다 입국한 사람이나 오신채를 먹지 않는 승려의 경우, 그냥 거리에서조차 약간의 마늘 향을 느낄 정도라고 한다.[50] 치즈 냄새도 그렇지만 특히 덩치가 크고 땀이 많이 나는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인들 입장에선 아주 심한 암내가 난다. 한국사람 입장에서는 이들과 땀 흘리면서 운동하는 건 여간 곤욕이 아니다. 근데 반대로 외국인 입장에서 마늘은 안 그래도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인데 마늘 좋아하는 사람도 한국 사람처럼 몸에 배어 있는 정도로 나면 엄청나게 괴롭다(치즈 좋아하는 외국인도 백인들 냄새는 괴롭듯이). 이걸 갖고 인종차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식습관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몸에 배어 있는 냄새는 진짜 견디기 힘들다.[51] 당시 이런 분위기와 언론을 비판했던 딴지일보의 기사 제목은 '박찬호가 노모를 줘패란 말이냐?'였다.[52] 국가대표의 자부심과 무거운 책임감을 잘 알고 있기에 2020 도쿄 올림픽 동메달전에서 대한민국이 10:6으로 역전을 당하는 상황에서 휑한 표정으로 껌을 씹는 강백호를 향해서 비록 질지언정 우리가 보여줘서는 안되는 모습은 보여줘서는 안된다, 계속해서 우리가 미친 듯이 훨씬 더 파이팅을 해야 된다며 그의 태도를 꼬집었으며, 경기가 끝난 후 공항에서 강백호와 만나 그를 혼냈다고 한다.#[53] 근데 컬투정찬우는 "왜 울지? 돈 많이 벌지 않나? 연봉이 얼만데 울어? 더 이상 태극마크를 달 수 없다는 게 슬프다니, 은퇴는 자기가 하는 거 아닌가? 나라에서 강제로 시킨 거 아니잖아. 자기가 은퇴해놓고 왜 울어? 그럼 그냥 계속 하면 되잖아"라는 말을 진심을 담은 말투로 해서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54] 당시 동인천 인근에는 미림극장, 애관극장 등 오래된 극장들이 많아 옛날식 영화 판넬을 그리는 화백들이 많았다.[55] 한때 박찬호가 부진했을 때 역술인이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했는데 바꾸면 좋은 이름 중 하나가 찬빈이었다.[56] 미국 한의사인 박찬호의 친동생인듯 하다.[57] 당시 자기 월급을 꼬박꼬박 한국 가족한테 송금한터라 박찬호 자신한테는 돈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58] 실제로 극 중에서 진짜 싸인볼이라는 언급이 있다.[59] 북미 수출명은 몬테로로, 한국에서는 현대 갤로퍼로 라이센스 생산된 차 맞다.[60] 여담이지만 이 당시 쌍용자동차는 박찬호에게 자사의 SUV 차량을 한 대 제공하려고 했지만 미국 내 수입실적이 없는 자동차 회사의 모델은 통관시킬수 없다는 규정으로 인해 불발됐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 쌍용차는 마라토너 황영조에게 자사 SUV인 쌍용 무쏘를 협찬해 준 바 있는데 정황상 박찬호에게도 무쏘를 협찬해주려고 했던 걸로 보인다.[61] 가장 어린 선수는 당시 다저스의 동갑내기 팀 동료 이스마엘 발데스였다.[62] 1위는 당시 애리조나 소속의 랜디 존슨. 무려 347개.[63]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전 8이닝,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전 17이닝, 밀워키 브루어스 전 7이닝,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회 실점까지 무실점 피칭을 펼쳤으며 당시 타고투저시대에 나온 값진 기록, 참고로 ML최고기록은 오렐 허샤이저의 59이닝 무실점[64] 당시 다저스 선발 최다이닝. 2013년 클레이튼 커쇼가 236이닝으로 경신한다.[65] 랜디 존슨은 이닝 2위, 삼진 1위였고 커트 실링은 이닝 1위, 삼진 2위였다.[66] 자책점 2점은 당시 알루미늄 배트가 허용된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허용한 실점이었고 이후 참가한 국제 대회에서 13이닝 무실점 3세이브 활약을 펼쳐 합법적 병역 브로커의 면모를 보여주었다.[67] 1호 2000년 8월 24일 몬트리올 엑스포스 홈 경기(허용 투수 하비에르 바스케스), 2호 2000년 9월 3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원정 경기(허용 투수 우디 윌리엄스), 3호 2009년 4월 25일 플로리다 말린스 원정 경기(허용 투수 크리스 볼스태드). 재미있게도 세 홈런 모두 투수에게 극도로 유리한 구장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홈런을 달성한 경기와 얽힌 사연도 있는데, 1호 홈런 경기가 있던 날 경기 전 행사로 당시 유학 중이던 가수 양파다저 스타디움에 공식 초청되어 미국 국가를 불렀고, 2호 홈런 경기는 박찬호의 프로 첫 완봉승 경기였다.[68] 사실 옆으로 안 차고 돌려차기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