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옥(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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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소련 시절
2.2. 북한 파견, 김일성의 측근이 되다
2.3. 김일성과의 파행
2.4. 몰락
3. 여담
4.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소련계 정치인. 북한 초기의 핵심 테크노크라트로 소련계의 주요 인물이었다.

한때 김일성의 정적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 김일성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그러나 김일성과 관계가 틀어지면서 끝내 숙청되었다.


2. 생애[편집]



2.1. 소련 시절[편집]


1911년 러시아 제국령 연해주 크라스키노에서 태어났다. 1935년 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한 이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에 휘말려 카자흐스탄으로 쫓겨났다. 크즐오르다에서 1939년 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어문학 교원으로 일하다가 1940년부터 1942년까지 크즐오르다 주 칠리 구역 군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으로 부임했다.

독소전쟁 발발 이후 1942년 8월, 소련군에 징집되어 모스크바 나리마노프 정찰학교에서 1년간 훈련을 받았다. 1943년, 만주 국경으로 파견되어 일본군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매우 열성적인 임무 수행으로 1945년 5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이때 죽기 직전까지 가서 삶을 포기하려 했으나 나중에 105탱크사단장을 하게 되는 동료 림철이 그를 어떻게든 구해내었다. 이후 대조국전쟁 영예 훈장 1급과 2급을 받았다.

2.2. 북한 파견, 김일성의 측근이 되다[편집]


소련군이 북한을 장악한 이후 북한으로 파견되었으며, 선전문제를 놓고 선전부장 김창만과 충돌을 빚었다. 이때 박창옥이 승리함에 따라 선전부장 김창만은 정치간부학교 교장으로 좌천된다. 이후 1948년 조선로동당 2차 당대회에서 선전선동부장, 중앙위원회 위원, 조직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박창옥은 선전선동부장으로 연안계 최창익, 윤공흠 등과 함께 매우 적극적인 김일성 우상화에 앞장섰다. 박창옥은 김일성 전기를 집필하여 김일성을 민족영웅, 민주개혁의 지휘자로 선전하였고 나중에 소련 대사를 지내는 리상조는 박창옥이 김일성 우상화에 가장 앞장선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박창옥은 정치적으로도 김일성을 도왔는데, 1951년, 허가이와 김일성이 충돌하자 허가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박창옥은 허가이를 맹렬히 공격함으로 그를 실각시켰고 이로인해 김일성의 더욱 큰 신임을 받게 되었다.[1] 김일성은 그 공으로 박창옥을 박정애와 함께 비서로 승진시켰으며 박영빈은 조직지도부장에 임명되었다. 박창옥은 앞서 말한 박정애, 박영빈에다가 갑산파 박금철을 합쳐 김일성을 보위하는 4명의 박가라는 뜻의 '사바카'라고 불렸는데 이는 러시아어로 개라는 뜻이었다. 1953년 박창옥은 남로당과 박헌영 숙청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이 때문에 연안계 리필규는 그가 자신의 잘못을 만회해야 하는 인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며 고려인인 유성철은 박창옥은 김일성의 사랑을 톡톡이 받았었다고 회고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전쟁 내내 선전을 담당하다가 1952년 12월 전원회의에서 선전비서로만 남고 선전선동부장을 최철환에게 넘겨주었다.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전원회의에서 비서제가 폐지되고 위원장 제도가 실시되면서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는 한편 정치위원에 선출되었다. 전쟁 때의 공을 인정받아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이후 전후복구사업이 시작되면서 박창옥은 더욱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흔히 박창옥과 소련계를 경공업 노선을 지지하며 김일성의 중공업 노선에 맞섰다는 것이 기존의 통설이었는데 사실 이건 김일성이 나중에 연안계, 소련계 할 것 없이 모조리 다 조지고 나서 지어낸 말이었고 소련계는 중앙은행장 김찬 정도를 빼면은 오히려 중공업 노선의 지지자였다. 박창옥은 1953년 소련 대리대사 라자레프가 그를 병문안와서 소련의 신노선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북한도 소비재를 더 중시해야지 않겠냐고 떠보자 북한에는 공업이 더 필요하다고 대들며 김일성을 옹호할 정도였다. 김일성 역시 박창옥을 대단히 신뢰하였다. 연안계와 빨치산파들은 박창옥을 미워하여 그를 계속 비난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묵살하고 오히려 박창옥을 모두가 본받아야할 인물로 칭찬하는 한편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박창옥을 부위원장에서 물러나게 하는 대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으로 승진시켰다. 박창옥의 국가계획위원장 임명은 소련의 압력이었다는 것이 기존의 설명이었으나 해금된 소련 문서들을 보면 사실과 전혀 다르다.

2.3. 김일성과의 파행[편집]


김일성은 박창옥과 내각의 인선 문제로 긴밀히 연락하면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박정애와 김두봉이 박창옥의 부수상 임명을 반대했음에도 이를 강행했다. 오히려 자신의 부수상 승진에 반대한 것은 박창옥이었으나 김일성은 박창옥 말고는 할 사람이 없다고 그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그가 전후복구 3개년 계획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박창옥과 김일성은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되었고 박창옥은 김일성의 요구에 따라 경공업과 농업에 상당한 비중을 둔 3개년계획에서 공업 목표를 무리하게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가 되어 1954년과 1955년에 북한에 대기근이 오게 되는데 절대 자신이 잘못했다고 할리가 없는 김일성은 1955년 4월 전원회의에서 이걸 박창옥과 역시 부수상 겸 농업상인 김일의 잘못으로 뒤집어씌웠으며 1955년 10월 21일과 11월 21일에 박창옥에게 맹렬한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김일성이 까라는대로 깠다가 잘못을 덤터기 맞은 박창옥의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고 그와 소련계 내부에서 김일성에 대한 비판적인 분위기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마침 소련의 영향력에 대해서 불쾌하게 여기고 있던 김일성은 이를 놓치지 않고 1955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박창옥과 더불어 선전선동부장 박영빈을 가족주의자, 권위주의자, 관료주의자라고 맹비난하고 남조선 출신의 반동 작가들을 옹호하며 한설야, 리기영 등 혁명작가들은 공격했다고 마구 비판했다. 김일성은 회의가 끝난 후 짐짓 박창옥에게 뒤끝이 없는 것처럼 비판을 받았으니 계속 일을 해도 된다고 했으나 뒤로는 박창옥 비판문건을 당 전체에 회람시켰다. 이어 박창옥은 기석복, 정률, 전동혁 등 소련계와 함께 지도부를 비방했다는 혐의로 신고를 당했다. 이에 김일성은 1955년 12월 27일과 28일 이틀간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개최하여 다시 박창옥을 조리돌렸는데 이때 그 유명한 주체연설[2]이 나왔다. 박창옥을 한참 조리돌린 후 김일성은 박창옥에게는 박헌영을 조진 공이 있으므로 정치위원회에서는 내보내되 부수상 자리는 유지하게 하여 잘못을 시정하게 하자고 제안하였다.

1956년 1월 4일, 박창옥은 국가계획위원장에서 해임되어 그 자리를 리종옥에게 빼앗겼고 1956년 1월 18일, 당 상무위원회 11차 확대회의는 김일성의 제안을 받아들여 박창옥과 박영빈을 정치위원에서 해임하였다. 박영빈은 더욱 가혹한 처벌을 받아 중앙위원회에서도 쫓겨났다. 남일은 박창옥이 잘못을 빌면서 공장에 보내달라고 데꿀멍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구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정말로 박창옥이 설설 기었다면 12월 전원회의에서 결론이 났을 일이 1956년 1월에 굳이 상무위원회 확대회의까지 끌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박창옥은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냐고 김일성에게 바락바락 덤벼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일성은 박창옥에 대한 비판을 더욱 강화하여 그가 몰라서 실수한게 아니라 부르주아 사상에서 나온 개인영웅주의, 출세주의에 환장한 인물로 사실상 종파주의자라고 비판했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걸 깨달은 박창옥은 마침내 항복하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해달라고 gg를 친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다짜고짜 씨를 말리는 양반은 아니라서 짐짓 관대한척 박창옥에게 모든 걸 잊고 다시 일을 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앞으로 박창옥 비판을 중단하라고 중앙위원회에 교시했다. 하지만 소련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이중국적을 유지하는 소련계들을 박살내기 위한 소련계 비판 운동은 계속 진행되었다. 소련계의 문화적 오만함에 불만이 많고 소련계가 차지하고 있던 경제적, 권력적 특권을 노리고 있던 연안계가 특히 앞장서서 이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이에 소련계들은 무슨 대숙청이 조선땅에서 벌어지고 있냐면서 공포에 질려 앞을 다투어 북한에서 달아나기에 이른다.

2.4. 몰락[편집]


1956년 3월의 3차 당대회에서 박창옥은 중앙위원회 위원으론 당선되었으나 소련과의 연락책 역할을 박탈당했다. 5월 11일에 제1차 5개년 계획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신설된 기계공업상에 임명되긴 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불안을 느낀 박창옥은 소련 대표단장으로 온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한편 김일성은 소련계를 너무 조졌다고 판단하고 이번에는 연안계가 동지들을 너무 괴롭힌다고 역으로 연안계를 숙청한다. 하지만 이것이 김일성이 생각치못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냈는데, 김일성의 사냥개 노릇을 하다가 토사구팽을 당했다고 여긴 연안계와 소련계가 묵은 원한을 털고 연합한 것이다. 박창옥은 매우 공개적인 활동에 나서 외무상 남일에게 자신이 김일성을 8월 전원회의에서 비판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하지만 남일은 소련계지만 여전히 김일성에게 충성했다. 하지만 박창옥 역시 리필규 등 쿠데타를 운운하면서 김일성을 몰아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던 강경파와는 달리 최용건, 박금철, 김영주, 박정애 등 김일성 곁의 '간신'들을 지목했다.

이윽고 일어난 것이 바로 8월 종파사건이다. 1956년 8월 30일의 전원회의에서 박창옥 역시 최창익과 함께 뭔가 말을 해보려 했으나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 발언을 마치지도 못했다. 눈치 빠른 연안계 일부는 중국으로 도주했으나 박창옥은 묵묵히 남아있다가 8월 31일에 「최창익, 윤공흠, 서휘, 리필규, 박창옥 동무들의 종파적 음모 행위에 대하여」라는 결정서가 채택되면서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고 출당되었다. 한편 소련에 있던 북한대사 리상조가 소련에 도움을 청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강 4인이 마오쩌둥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1956년 9월,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펑더화이가 이끄는 공동대표단이 방북하여 조선로동당 1956년 9월 전원회의를 열게 하고 이들의 당적을 회복하게 하였다. 박창옥은 부수상 직위는 돌려받지 못했으나 중앙위원회 위원 자리는 돌려받았다.

하지만 이후 중소분쟁이 시작되면서 중국과 소련은 서로 물어뜯느라 별로 개입도 못하게 되었고 김일성은 마음놓고 이들을 다시 조질 수 있게 되었다. 박창옥은 8월 전원회의 이후 마동 시멘트 공장으로 하방되어 노동을 했는데, 1957년 9월에는 거기서조차 해고되어 체포되었다. 소식통으로는 이때 전쟁 중에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죽은 것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투옥된 것으로 1958년 1차 당대표자회에서 김두봉, 최창익, 박의완 등과 함께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당하고 출당되었다. 1960년 1월, 박창옥은 최창익, 고봉기 등 19명의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리송운, 김익선, 김경석, 서철이 주도한 비밀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북한은 이를 비밀리에 소련에 통보하였다. 그가 죽은 직후인 1961년의 4차 당대회에서 박창옥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선전선동부장 김창만은 박창옥을 수박 껍질만 핥는 선전자라고 맹비난하였다. 하지만 그 역시 얼마 가지 않아서 숙청된다.


3. 여담[편집]


그의 가족들은 모두 행방불명되었다. 다만 운 좋게도 소련 유학 중이던 그의 아들과 딸만이 생존하여 이후 모스크바에서 거주하였다.


4. 참고문헌[편집]


  • 김규범 (2019). 1956년 “8월전원회의 사건” 재론 : 김일성의 인사정책과 ‘이이제이’식 용인술. 현대북한연구, 22(3)
  • 김보미, 김일성과 중소분쟁 -북한 자주외교의 기원과 형성(1953~1966)(서울: 서강대학교출판부, 2019)
  • 박종철 (2009). 북한의 종파사건과 중국. 민주주의와 인권, 9(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션즈화, 최후의 천조: 모택동 김일성 시대의 중국과 북한(서울: 도서출판선인, 2017).
  •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서울: 경인문화사, 2006).
  • 조수룡 (2017). 전후 북한에서의 소련계 숙청과 국적 문제(1954~1958). 동북아역사논총 (56).
  • 조수룡 (2018), 북한의 전후 복구 3개년계획 수립과 소련의 개입: 말렌코프 '신노선(New Course)'의 영향에 대한 재검토를 중심으로, 현대북한연구, 21(3).
  • 조수룡 (2018) 북한의 전후 복구 3개년계획(1954~56) 수정과 1955년 봄 식량 위기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97
  • 조수룡 (2019). 북한 역사상 제1대 사건, 1956년 8월전원회의. 내일을 여는 역사, 74.
  • Balazs Szalontai,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 Soviet–DPRK Relations and the Roots of North Korean Despotism, 1953–1964(Stanford,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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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박창옥은 허가이에게 김일성을 오글거리게 찬양하는 원고를 제출하였는데, 허가이가 이걸 보고 지나치다고 하자 박창옥은 허가이에게 그러면 직접 수정하지 그러냐고 했고, 허가이가 아무 것도 모른체 과한 찬양문구를 빨간 줄을 그어 지워 돌려주자, 박창옥은 그걸 그대로 김일성에게 갖다바쳤다고 한다. 그리고 김일성이 허가이가 자기 사무실에 왔을때 그 빨간줄 그어진 원고를 보이며 얼굴을 붉혔다고.[2]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 김일성이 공식자리에서 '주체노선'을 언급한 최초의 연설이다. 이 내용을 나중에 황장엽이 이끄는 당 이론가 그룹이 '인간중심철학'으로 다듬고, 여기에 김정일이 수령론을 덧붙이면서 주체사상으로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