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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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청소년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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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부장관 (1982~1987)

초대
노태우
제2대
이원경
제3대
이영호
제4대
박세직
제5대
이세기

제6대
조상호
제7대
김집
제8대
정동성

체육청소년부장관 (1990~1993)

제9대
박철언
제10대
이진삼
1993년 문화부와 통합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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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대구 수성구 갑)
선거구 분리
이치호

제14대
박철언
[1]

제14대
현경자[2]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대구 수성구 갑)
제14대
현경자

제15대
박철언


제16대
김만제



대한민국 제10대 정무 제1장관
대한민국 제9대 체육청소년부 장관
박철언
朴哲彦 | Park Chul-eon


파일:박철언 전 장관.jpg

출생
1942년 8월 5일 (81세)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거주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본관
밀양 박씨

청민(靑民)
현직
변호사박철언법률사무소 변호사
재단법인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
사단법인 대구경북발전포럼 이사장
재단법인 보통사람들의시대 노태우센터 고문
재임기간
제10대 정무 제1장관
1989년 7월 19일 ~ 1990년 4월 18일
제9대 체육청소년부 장관
1990년 12월 27일 ~ 1991년 12월 18일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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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박태형, 어머니 김당한
형제자매
6형제 중 둘째
배우자
현경자
자녀
1남 2녀
학력
대구국민학교 (졸업)
경복중학교 (졸업)
경북고등학교 (졸업 / 41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1]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
조지 워싱턴 대학교 (법학 / 석사)
조지타운 대학교 (법학 / 석사)
한양대학교 (법학 / 박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대위 전역 (군법무관)
종교
불교
신체
174cm, 71kg, AB형
소속 정당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3, 14, 15
경력
부산지방검찰청 검사
법무부 검사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법제사법위원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
대통령비서실 법무비서관
서울지방검찰청 특수부장검사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
국가안전기획부장[2] 특별보좌관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법무연수원 연구위원 (검사장급)
대통령비서실 정책보좌관
제13대 국회의원 (전국구 17번 / 민주정의당)
제10대 정무 제1장관 (노태우 정부)
초대 체육청소년부장관 (노태우 정부)
제14대 국회의원 (대구 수성구 갑 /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부총재
제15대 국회의원 (대구 수성구 갑 /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 전임고문
별명
6공의 황태자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5. 선거 이력
6. 소속 정당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정치인, 법조인, 시인.

김익동, 김복동, 김옥숙 남매의 고종사촌 동생[1]. 즉, 노태우에게는 고종사촌 처남이 된다. 탁구선수 현정화의 사촌형부이기도 하다.

노태우 정부 당시 "6공의 황태자" 라고 불리면서 권세를 누렸다.


2. 생애[편집]


1942년 8월 5일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에서 아버지 박태형(朴泰亨)[2]과 어머니 김당한(金棠漢, 1917.1.8~2016.5.15)[3] 사이의 6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41회)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수석 졸업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시절 전혜린이 지도한 독우회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하였다.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검사로 근무하다가 신군부의 등장 이후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법사위원으로 파견 근무하면서 5공화국 헌법의 기초 작업에 참여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대통령비서실 소속 정무비서관과 법무비서관으로 활동하면서 청와대 밖에 있던 노태우의 청와대 내부 소식통 역할도 했다. 당시 선배 검사 김기춘이 1977년의 국군보안사령부 조직 축소에 관여한 것 때문에 하나회 출신 정권 수뇌부들에게 밉보여서 검찰에서 짤릴 위기에 처하자 허화평 대통령비서실 수석보좌관에게 충성 편지를 쓰도록 조언하였다[4]. 당연히 김기춘은 이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1985년 초 장세동국가안전기획부장이 되자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이 되었으며 이 때 북한 정권의 요인들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남북 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1987년 13대 대선에서 사조직인 '월계수회'를 조직하여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노태우 정부 내내 권력의 핵심부에서 승승장구하면서 6공의 황태자로 불렸다.

1988년 2월 대통령비서실 소속 정책보좌관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4월에 치러진 13대 총선에서는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북방정책을 추진하면서 구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을 비밀리에 수 차례 방문하여 수교를 맺는 일에 물꼬를 텄으며 북한에도 비밀리에 방문하여 남북 관계 개선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한때 노태우의 후계자로까지 거론되었으나, 박철언이 구상하고 주도했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한 이후 김영삼과 끊임없이 부딪혔다. 당시 북방외교의 과정에서도 김영삼과 치열한 여론 경쟁을 하였는데, 이 때 벌어진 일이 그 유명한 '김영삼-고르비 면담 사건'이다. 한국은 소련과의 수교에 앞서 정부간 교섭을 위해 1990년 모스크바에 고위직을 파견했는데, 이때 박철언과 김영삼이 함께 소련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소련으로의 출발을 앞두고 김영삼 측에서 "소련 방문에 박철언 정무장관이 수행한다"고 발표하였고, 박철언이 "정부 각료가 정치인의 외국 방문에 수행한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반박하면서 처음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현지에서 김영삼이 사진기자들만 대동한 채 고르바초프의 접견실로 들어가서 먼저 만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영삼이 의도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까지 들고 간 박철언을 호텔에 혼자 두고, 단독 행동을 벌였던 것. 어쨌든 다음날 언론에서는 김영삼과 고르바초프가 포옹하는 사진이 대서특필됐고, 그에 반해 박철언은 아무런 정치적 이익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 때문에 박철언은 귀국 후 "김영삼은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이미지 관리만 하고 왔다", "내가 입을 열면 김영삼은 끝난다"고 폭탄선언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김영삼도 이에 질세라 "내게 공작정치가 행해지고 있다. 공작정치하다가 망하지 않은 정권이 없다. 노태우 대통령이 주변 사람들을 잘못 쓰고 있는 것에 실망했다"며 폭탄 발언을 했고, 부담을 느낀 노태우가 박철언을 정무장관 직에서 경질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후에도 당내 권력투쟁이 계속 이어졌다. 박철언은 김종필, 박태준 등 민정계 의원들과 함께 의원내각제 개헌을 주장하며 맞섰으나, 결국 일련의 과정 끝에 김영삼과의 당내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권력의 핵심에서 서서히 밀려났다[5]. 다만 14대 대선 직전을 제외하고는 노태우 정부 말까지 외사촌 형 김복동, 금진호 전 상공부장관[6]과 함께 청와대 가족회의에 참여했다.

1990년 말 체육청소년부(現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임명되어 내각에 복귀했으며, 장관 재임 시절 농림부(現 농림축산식품부) 산하였던 한국마사회를 체육청소년부 산하로 가져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7] 그 후 총선 출마를 위해 1991년 12월 이진삼육군참모총장에게 장관직을 넘기고 물러났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민자당 소속으로 대구 수성구 갑에 출마하여[8] 당선되었으나,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이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자 외사촌 형 김복동과 함께 민자당을 탈당하여 통일국민당으로 이적해 정주영의 선거 운동을 지원하였다.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슬롯머신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수감 생활을 하였다[9][10]. 박철언의 국회의원직 상실로 치러진 1994년 재보궐선거에서는 박철언의 부인인 현경자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1995년 광복절 특사로 피선거권이 회복되자* 1996년 15대 총선에서 자민련 후보로 자신의 본래 지역구인 대구 수성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이후 김대중김종필DJP연합 성사에 기여하였다. 박철언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시기 치러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김대중에게 대구광역시장 출마를 권유받기도 했다고 한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자민련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김만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고, 이후 2001년 6월에 자유민주연합 탈당을 선언하며 정계를 은퇴하였다.

2005년 회고록《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출간했다.

2008년, 박철언과 부인 현경자가 관리하던 비자금 수백억원이[11] 세상에 드러나 떠들썩 해진 일이 있었다. 강미선 한국체대 무용학과 교수와 박철언의 178억원대 소송 과정에서 드러난 것인데,[12] 과거 노태우 정권 시절의 정치 자금이 차명계좌 형태로 박철언과 현경자에 의해 관리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뇌물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지나서 처벌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박철언의 오랜 수행비서 김현탁의 폭로와 언론의 추적 기사 등으로 떠들썩 했던 사건이지만, 검찰에서 추적이 불가능한 자금이라는 판단이 내려진 채 결국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고 말았다.# 관련 분석 기사

2015년 12월 4일 오전 3시 45분 경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박철언은 당시 어머니 간호를 위해 대구에 있어 사고를 피했지만 평소 천식 증세가 있던 아들 박씨가 연기를 들이마셔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2016년 5월에 모친상을 당했다. #

2021년 노태우 국가장허화평, 허삼수등과 함께 장례위원 명단에 포함되었다.#

현재는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13]

3. 기타[편집]


  • 노태우의 대선 승리를 위해 박철언이 직접 이끌었던 사조직으로 '월계수회'가 유명하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월계관을 쓰자는 뜻에서 만들어졌다고 알려졌는데 이 때문에 노태우 정부 내내 각종 이권 사업 개입으로 시끄러웠으며 동시에 박철언의 대권 후보 경쟁자였던 김영삼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월계수회 출신 유명 정치인으로는 강재섭이 있다.


  • 무소속과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수성구 일대에서 5번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한 남칠우가 박철언의 비서관 출신이다.


  • "6공의 황태자"라는 수식어에 대해, 본인은 6공의 황태자는 자신이 아니라 YS라고 발언한 적 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닌 게 노태우는 후계자로 김영삼을 꾸준히 밀어주었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민주자유당 총재였던 김영삼과 상의하고 결정했다. 이 때문에 노태우와 박철언은 일시적으로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박철언 역시 민주정의당계의 좌장 격인 인물이였고 중요한 직책을 맡으면서 북방정책를 강력히 추진하는 등 제6공화국의 실세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 홍준표와의 악연이 깊은데 1993년 '슬롯머신 사건'으로 자신을 수사했던 검사가 바로 홍준표였기 때문이다. 1995년 SBS 드라마 모래시계에서는 원래 제목이 '이카루스의 날개'였고 이는 홍준표의 제안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박철언이 불편해했던 나머지 모래시계로 바꿨다고 한다. 파일 참조

  • 박철언의 부친인 박태형은 검사 시절인 1980년에 별세했고, 모친인 김당한 여사는 2016년에 10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슬하에 1남 2녀를 뒀는데, 장녀는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 석사를 취득한 뒤 현재는 일반인으로 살고 있다. 차녀는 성악가 박상영이다. 아들은 직장인으로 일하고 있다.

  • 맏사위는 이상원 변호사(연수원 23기. 전 판사. 전 LG석유화학 대표 이정호(2015년 사망)의 아들)이다.

  • 수성구 갑 국회의원 재임 당시 지역구 자택은 범어동의 가든하이츠 아파트였다. 정계를 은퇴한 지금은 서울 강남구 논현동 단독주택에서 아내 현경자 여사 및 아들 내외와 거주하고 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이승형이 연기했다.[14] 노태우의 옆에서 조언을 하는 참모 포지션이다. 전두환 정권 7년이 끝나갈수록 노태우의 비중이 증가하면서 박철언도 출연 비중이 높아졌다. 박철언은 드라마 후반부에 나온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에 본인이 관여하였다고 묘사된 내용에 대해서 MBC에 소송을 걸었고 일부 승소하였다. 그래서 해당 회차가 재방송이 될 시 박철언과 관련된 부분 대사가 묵음처리, 박철언은 모자이크 처리 되어서 나온다. 역시 유튜브 요약본으로 나오는 제5공화국 편에서도 해당 부분은 편집됐다.

  •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 나오는 박 의원이[15] 이 사람으로 추정된다. 다만 영화상 시점으로는 6.10 민주 항쟁 전에[16] 등장하는데, 박철언이 '의원'이 된 것은 1988년 13대 총선 이후이므로 역사적 사실관계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며[17], 이러한 차이는 여러모로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6,670,494 (33.96%)
당선 (17번)
초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수성 갑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51,756 (58.81%)
당선 (1위)
재선[18]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49,735 (53.34%)
3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22,487 (24.03%)
낙선 (2위)



6.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무소속
]]

1980 - 1988
정계 입문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1988 - 1990
입당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 - 1992
합당[19]

[[무소속|
무소속
]]

1992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파일:새한국당 글자.svg

1992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92
통일국민당 합류를 위한 탈당

[[통일국민당|
파일:통일국민당 글자.svg
]]

1992 - 1993
입당[20]

[[무소속|
무소속
]]

1993 - 1995
제명
의원직 상실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2001
입당
정계 복귀

[[무소속|
무소속
]]

2001 - 현재
탈당
정계 은퇴

7. 둘러보기[편집]






파일:민주정의당 심볼.svg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제13대 국회 전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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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환[B]
이상하
김장숙
양경자
이상회
홍세기
김길홍
강재섭
김정길
조남욱
이재황
이민규
신영순
도영심
심기섭 [C]
안찬희 [C]
최상진[C]
[B] A B C 임기 중 사퇴.[C] A B C 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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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히는 이 둘의 작은고모인 김당한의 차남이다. 옆은 출처 사진. 파일:김당한 족보 내용.png[2] 아버지(박철언의 친할아버지)는 박대윤(朴大允)이다.[3] 김선진(金璇鎭)의 딸이다.[4] 김기춘은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법무부장관이 되었다.[5] 김영삼이 만약 자기를 대선 후보로 세우지 않으면 당을 탈당해서 반정부 운동을 하겠다고 노태우를 협박했다. 다만 김영삼의 협박이라고 하기는 우스운 것이 애초에 '3당 야합'이라고까지 불리는 3당 합당이 가능했던 것 자체가 <여소야대 국면에서 심각한 정국 장악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노태우(민주정의당)>과 <차기 대권을 위해 보수층을 향한 지지 기반 확대가 절실했던 김영삼(통일민주당)>의 이해 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3당 합당을 통해 김영삼과 통일민주당을 끌어들여 다수 여당의 정국 장악력을 확보했으니 그 대가를 지불할 차례가 되었던 것.[6] 박철언과 정반대로 김영삼을 적극적으로 밀었다.[7] 문화관광부 산하였던 한국마사회는 2001년부터 다시 농림부 산하로 환원되었다.[8] 당시 수성구의 현역 국회의원 이치호와 지역구를 두고 갈등이 있었지만 수성구가 갑·을로 분구되며 해결됐다.[9] 이 때 박철언을 수사한 검사가 홍준표 대구광역시장. 홍준표가 15대 총선에서 수성구 출마를 생각하다가 송파구 갑으로 선회한 이유는 자신이 수사한 박철언과의 맞대결이 이뤄졌을 경우의 후폭풍을 염두에 두었음을 밝히기도 했다.[10] 박철언은 자신의 홈페이지는 물론 자서전에서 이를 정치 탄압이라고 주장한다.[11] 600억원 대라고 보도된 기사도 있고, 800억원 대라고 알려진 기사도 있었다.[12] 박철언 측에서 자신이 관리 차원에서 맡긴 돈 170여억원을 강씨가 횡령했다고 주장하면서 벌어진 송사였다. 결국 해당 교수는 징역 4년형이 확정되었다.[13] 1995년에 이미 등단한 시인이다[14] 본래는 변우민이 연기하려 했지만 변경되었다.[15] 사카즈키 의식 직후 최익현, 최형배, 가네야마가 불려간 자리에 있던 두 사람 중 하나이다. 나머지 한 사람으로서 가네야마에게 당시 대통령 명의의 감사패와 순금 호돌이를 전달한 '엄 실장'은 엄삼탁으로 추정된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홍준표가 수사하여 이름을 날린 슬롯머신 사건과 관련되어 구속기소된 바 있는데, 거기서 어느 정도 착안된 설정으로 보인다. 슬롯머신 사건의 주역인 정덕진의 이름이 정 사장과의 침실 장면에서 언급되기도 한다.[16] 노태우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1987년 6월 10일에 최형배가 김판호 측 자객으로부터 습격당한다.[17] 이는 엄 실장도 마찬가지인데, 엄삼탁이 안기부 기조실장이 되는 것 역시 6공화국 수립 이후이다.[18] 1992.10.14 탈당
1992.11.17 통일국민당 입당
1994.6.28 의원직 상실(슬롯머신 사건)
[19]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20] 정주영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