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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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 내용
3. 그 후
4. 여담
5. 관련 자료
6. 유사 사건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90년대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유괴 살인 사건 중 무척 유명한 사건이다. 피해자 아동의 길고 독특한 이름과 특히 범인이 임산부라는 점으로 사회에 깊은 충격을 준 사건이다. 언론에서는 거의 '박빛나리' 내지는 '박나리[1]'라는 약칭으로 통용되었는데, 가끔 '빛나리', '박초롱'이라고 할 때도 있었다. 7년 전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과 같이 낯선 여성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다.



2. 사건 내용[편집]


1997년 8월 30일, 범인 전현주(당시 28세, 여성, 1969년생)는 서울 잠원동 뉴코아백화점(현 뉴코아아울렛) 버거킹에서 콜라 한 잔을 구입해 마시며 서성이던 도중 영어 학원의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귀가하던 피해자 박초롱초롱빛나리(사망 당시 초등학교 2학년, 만 7세, 1989년 9월 8일(음력 8월 8일) 생)를 목격하고 구슬려서 소품 제작실 겸 창고로 사용하던 사당동의 지하 창고로 유인해 유괴하였다.

그리고 당일 저녁 총 3차례에 걸쳐 피해자의 부모에게 공중전화를 통해 2천만 원의 몸값을 요구하였다. 전현주는 첫 번째 협박 전화를 한 뒤 피해자인 나리 양에게 사탕이라고 속여서 수면제를 먹였으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나 울면서 집에 보내 줄 것을 애원하는 피해자를 목 졸라 살해했다.[2] 이후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로 나리 양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긴 후 시신을 등산용 배낭에 담아 창고의 출입구 쪽 계단 밑에 방치했다.

유괴 다음 날, 전현주는 명동의 한 커피숍에서 피해자의 부모에게 전화상에서 말한 액수의 금액을 준비하고 오라는 내용의 전화를 하던 중 발신지 추적으로 들이닥친 경찰의 검문에 걸렸다. 경찰은 전화가 걸려온 지 9분만에 신속하게 전현주를 포위했지만, 커피숍에 있던 13명의 사람(여자 12명, 남자 1명)을 검문하다 임신 8개월 상태인 전현주가 설마 범인이겠느냐며 놓아 버리게 되었다.[3] 심지어 엉터리 몽타주까지 만들어내 전국에 뿌려댄 탓에 10만 장의 종이가 휴지조각이 됐다.

하태신 서장 (서초 경찰서): 임산부라는 말도 듣지 못했고 또, 같이 동행한 사람들이 신원을 확인하면서 항의를 하고 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전부 다 돌려보냈습니다.


현장에서의 체포는 결국 실패했으나 대신 차선책으로 상기된 카페에 있던 13명 모두에게 형사들을 미행으로 붙여 조사했고, 전현주가 용의선상에 있었기에 경찰은 이미 집 주변을 수사 중이었는데 이를 지켜보며 의아해한 전현주의 아버지 전모 씨가 9월 11일 경찰에 자신의 딸(전현주)이 범행 직후인 9월 1일부터 가출 상태임을 알렸다. 또 경찰에게 협박범의 목소리가 자기 딸의 목소리라고 증언했다. 결국 통화 내역으로 꼬리를 잡힌 전현주는 9월 12일 신림동의 한 여관에서 검거되었다. 결국 전현주의 부모가 신고했는데 자신의 딸이지만 어린이 유괴 살해는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였기에 부모들도 결국 등을 돌리고 만 것이었다.

참으로 애절하고 비통한 심정입니다. 살아서 부모품에 안기길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박나리 양은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늘 확인됐습니다. 천금 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 심정으로 지금부터 이 박나리 양 유괴 사건 속보 전해드립니다.

- 박나리 시신 발견 당일 KBS 뉴스 9 류근찬 앵커의 오프닝 멘트 중에서


검거 당시 전현주는 임신 상태였으며, 그 해 2월에 결혼식을 올린 상태였다. 내무부 산하기관에 근무하던 고위 공무원 출신 아버지를 둔 전현주는 유복하게 자랐으며, 본래 의사나 작가를 지망하고 있었으나 본인의 의지와 달리 협성대학교 무역학과를 거쳐 응급구조학으로 전공을 바꾼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사건 2년 전인 25세 당시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해서 총학생회 간부를 맡기도 했다. 커피숍에서 검문에 걸린 상태에서 전현주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서울예대 후배들이 경찰에게 임산부를 거칠게 대하지 말라며 항의하는 통에 경찰이 풀어준 것도 이 때문인데, 전현주가 범인으로 밝혀지자 서울예대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는데 비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사건과 아무 관계 없는 서울예대생들이 학교를 못 다니고 휴학을 해야 했을 정도였다.[4]

전현주는 사치와 낭비벽이 심한 터라 결혼 후 3천만 원의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유괴를 계획했다.

박나리 양의 어머니 한영희씨는 범인의 검거 소식에 딸을 찾을 수 있으리라 굳게 믿으며 경찰서로 달려가 취재진들 앞에서 감사 기도까지 하였지만, 머지 않아 딸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충격에 빠지고 사당동 어디냐고 외치며 넋을 잃은 그 모습이 지상파로 전국에 방영되었다. 당시 박나리 양은 서울원촌초등학교[5] 2학년 5반에 재학 중이었는데,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원촌초등학교의 학생들은 분노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전현주의 자백에 따라 창고를 수색한 경찰은 등산용 가방에서 심하게 부패한 박 양의 시체를 발견했다.

유괴 소식에 PC통신을 중심으로 박초롱초롱빛나리 찾기 운동이 벌어졌고 지상파 뉴스에서도 범인의 육성을 들려주며 캠페인에 동참했다.

단독 범죄로 결론났으나 남편은 물론 박나리 양의 유족들까지도 전현주의 체포 직후부터 전현주의 단독 범행을 믿지 않았으며 의문을 제기했다. 전현주가 체포될 때 남편은 망연자실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고 한다. 이후 사건 현장인 사당동의 지하 창고에서 그가 범행 당시의 상황을 재연할 때[6] "현주야 사실대로 말 해! 너 아니잖아, 임마! 시키는 대로 했잖아!" 라고 울부짖는 남편의 절규가 지상파에서 방영되었다.

3. 그 후[편집]


검거 후 범인은 자술서에 검찰에 검거되기 전 부모가 자신에게 5번이나 자살을 권유했다고 썼다. 부모는 "네가 속죄하는 길은 자살뿐이며, 우리도 곧 따라갈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며 약국에서 살충제까지 구입해 줬다고 한다. 그래서 검거 당시 여관 내부를 촬영한 뉴스 영상을 보면 테이블에 살충제 병이 그대로 나온다. 딸이 홑몸도 아니고 임신까지 했는데도 자살을 권했다는 점에서 부모가 얼마나 자포자기 심정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경찰 조사 도중 전현주는 그런 부모가 걱정되었는지 동생에게 "부모님을 잘 보살펴 드리고, 자살하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당부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범인은 전문가들에 의해 연극성 성격장애로 진단받았다.[7] 진술 도중에도 증언을 번복하고 성폭행을 당했다거나 공범의 존재를 주장하는 등 동정심에 호소하고 자신의 죄질을 낮추고자 온갖 이유를 동원해 변명하려 애썼다. 이때 공범이 있다는 진술이 언론을 타면서 뉴스에서 공범에 의한 2차 피해를 경고하기도 했으며, 끔찍한 범죄를 도와준 공범들의 존재를 믿었으나 얼마 후 임산부의 단독 범행이라는 게 다시 밝혀지며 사회는 더욱 충격에 빠졌다.

서울지검은 진술조차 거짓을 반복하는 전현주의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고 판단해 사형을 구형했고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결국 항소심에서 감형되어 무기징역이 확정되며 55세인 현재까지 교도소에 복역 중. 2000년대 초반 무렵까지 이런 극단적인 사회적 쇼크를 준 사건에 있어서 판사가 피고인을 유죄로 보고 양형에 하는 때에는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에서 당시에 상당히 이례적인 판결이라고 평가받았다고 한다.[8] 범인인 전현주가 임산부 상태였기 때문에 사형을 집행하게 될 경우 태아까지 같이 처형시키는 꼴이 되기 때문에 이제 태어날 아기를 살게 해 주기 위해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형수가 임신한 경우 출산 후까지 기다렸다가 집행한다는 법조항[9]이 이미 있기에 잘못된 주장이다.

전현주는 그 뒤에 경찰병원에서 딸[10]을 낳았으며, 남편이 곧바로 아이를 데려갔고 이후 미국으로 입양을 보냈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범죄자가 임산부일 경우 인근 병원에서 출산 후 바로 주변 가족에게 인계한다. 가족이 없을 경우 어쩔 수 없이 교도소에서 아이를 키우게 되며 18개월 후에 보육원으로 보내진다.[11]

죄질도 불량하고 국민적 공분을 샀던 탓에 형집행정지를 2주만 받았다고 한다. 통상 임산부 수형자들이 출산을 하면 한 달 동안 형집행정지를 해 주는 것을 감안하면 기간을 절반 이상 줄였다.#

4. 여담[편집]


  • 어찌보면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과 비슷한 사건인데 두 사건의 범인들인 전현주와 홍순영 둘 다 금수저였고 낭비벽이 심한 인물인 데다가 키마저 150cm대 후반의 왜소한 체격이라는 것까지 닮았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홍순영은 사형당했고 전현주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현재까지도 복역하고 있다는 것.

  • 박초롱초롱빛나리 양의 이름은 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박 양의 아버지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아기의 점을 보러 갔는데 무당이 단명한다고 말해서 이름을 길게 지으면 지을수록 장수한단 말이 있어서 이름을 길게 지었다는 설도 있다.

  • 몇 번의 유산 끝에 간신히 얻은 첫 딸이었기에 정말 귀하게 키웠다고 한다.[12] 박 양은 부친이 지어준 이름에 걸맞게 연예인이 장래 희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참혹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어 세상을 떠나면서 영영 그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 피해자는 유괴 9일 후인 1997년 9월 8일이 만 8세를 맞이하는 생일이었는데, 이 당시 아이의 행방이나 생사 여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어느 때보다도 슬픈 생일을 맞이해야 했다. 가족들은 주인 없는 생일상을 차리고 무사 귀환을 기원했지만 나흘 후 범인이 검거되며 피해자가 생일을 맞지도 못하고 유괴 직후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결국 화장되어 대천해수욕장에 유해가 뿌려졌다.

  • 이 사건 이후로 길거나 눈에 잘 띄게 아이의 이름을 짓는 사람들이 줄었다고 알려졌으나, 이 사건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93년에 이미 성을 제외한 이름을 5글자 이내로 제한하는 규정[13]이 실시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 게다가 이름이 너무 길 경우 해외여행 때 여권을 만드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 서양권의 경우 한국어 음독이 길더라도 로마자 자체로는 적당한 선에서 유지되는 경우가 많은데, 박초롱초롱빛나리의 경우 지나치게 길어서 여권 만드는 데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초롱초롱빛나리를 로마자로 풀어서 쓸 경우 대개 chorongchorongbitnari가 된다. 물론 여권 첫 번째 줄의 신상 정보란에는 초롱초롱빛나리를 로마자로 풀어서 쓸 경우 들어갈 공간은 있으나[14] 언젠가 주민등록증에 MRZ가 들어가고 파일:전자여권 검은색 로고.svg(Chip-inside-Symbol 마크)까지 장착된다면, 혹은 그 사람이 이민을 가서 MRZ를 사용하는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을 경우 아무리 카드형 신분증의 MRZ가 3줄이 된다고 해도 박초롱초롱빛나리를 로마자로 풀어서 들어갈 공간은 없을 가능성이 크다.

  • 정 이름을 길게 짓고 싶다면 호적에 등재하기 위해 짓는 5글자 이내 이름과 집안 혹은 친한 이들끼리만 통용하는 긴 이름을 둘 다 사용한다. 그리고 한때 이름이 길면 단명한다는 속설이 돌기도 했다.[15]

  • 전술한 대로 범인이 임산부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입견 그대로의 '낯선 사람'(예: 무섭게 생긴 남자)이 아니었던 터라 아동 교육학계에선 '낯선 사람 조심'식 어린이 유괴 방지 교육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했다.[16] 이미 서구 선진국들은 1980년대부터 '낯선 사람 조심' 교육을 포기하고 '안전한 행동(protective behavior)'으로 교육 방식을 변경했지만[17], 한국은 당시 이러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지 않아 해당 사건 후 이와 유사한 어린이 범죄 사건이 빈번해졌다.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새로운 '안전생활 교육' 열풍이 퍼졌다.

  • 젊은 임산부가 유괴범이었다는 사실은 친절한 금자씨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회자된다. 실제 전현주는 재판 과정에서 공범이 있으며 성폭행을 당해서 범행을 저지르게 됐다고 거짓 진술을 하여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하였다.

  • 80-90년대 횡행했던 금품 요구를 목적으로 한 어린이 유괴살인사건이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사실 이미 93년부터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서 유괴범죄의 필수품이었던 가명 통장개설이 불가능하게 되자 어린이 유괴범죄가 주춤하기 시작했고 97년만 해도 은행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공공장소에서 본격적으로 CCTV가 설치된 상황이었으며 정보통신 추적 기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범죄의 성공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지면서 당시에도 거의 사라져 가는 상황이었다. 1978년 정효주 유괴 사건을 시작으로, 82년 이윤상군, 91년 이형호군 유괴사건 등 피해 아동의 실명을 딴 수많은 OOO 유괴사건도 97년 박나리 양이 마지막이었다. 물론 그 뒤로 이런 범죄가 100%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할 만큼 매우 드문 범죄가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18]

  • 2011년 MBC LIFE 채널에서 히스토리 후 41화 중에 박초롱초롱빛나리 사건 이야기가 나왔다.

  • 2021년 8월 25일에 KBS의 표리부동에서 <친근한 접근 아동 유괴 범죄>라는 부제로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과 함께 이 사건도 같이 다루어졌다. 다만, 이름은 신원 보호를 위해 박 양으로 익명 처리되었다. 영상


  • 훗날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새정치민주연합 소속 경기도의원을 지낸 장전형[19][20]이 범인 전현주를 호텔에서 목격했다는 인터뷰를 했다. 1997년 9월 13일자 KBS 뉴스 9 영상 참고.


  • 범인인 전현주는 청주여자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노인이 다 되었을 정도로 폭삭 늙었으며 거기서 부르는 별명이 초롱이이다. 물론 당사자에게 초롱이라고 불렀다간 살기등등하게 쳐다본다고 한다.[21]

5. 관련 자료[편집]



6. 유사 사건[편집]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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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범인인 전현주도 협박전화에서 나리라고 불렀다.[2] 대부분의 유괴 사건의 경우 범행 당일에 피해자가 살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사례로는 윗 문단에서 언급한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부터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 그리고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이 있는데 이 중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의 경우는 범인 정성현이 우예슬, 이혜진 양을 납치해 성폭행을 시도하려다가 저항하자 살해한 케이스다.[3] 물론 21세기의 기준으로 본다고 치더라도, 임산부가 어린이 유괴 사건을 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당연하겠지만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때에 생기는 충격이 현재보다 훨씬 심했다. 게다가 상황이 급박해진 전현주는 "아기가 배를 차서 몸이 좋지 않다"며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여주어 동정을 사려고 했고, 후술하듯 그녀의 후배들이 형사들에게 "임산부에게 이래도 되느냐"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비공개 수사 중이어서 자세한 설명을 할 수도 없던 경찰 입장에서는 무리해서 임산부를 수색하기보다는 그냥 놔 주자는 판단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혐의점을 증명할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만삭 임산부를 체포하거나 했다가는 인권침해 논란으로 비화될 수 있기도 했다.(이 당시는 문민정부 후반기 시절이어서 그 이전처럼 경찰이 용의자는 몽땅 잡아가서 취조하거나 할 수 없었다.) 후술되지만 경찰은 차선책으로 이 당시 주요 용의자들을 미행하며 수사하고 있었다.[4] 당시 서울예대 남산 캠퍼스는 명동역에서 직선거리로 200m에 위치해 있을 만큼 가까웠다. 연락만 된다면 몇 분 안에 도착 가능한 거리.[5] 반포자이 단지 내에 있다. 사건 당시에는 반포주공 3단지였으며, 재개발로 인해 휴교했다가 2009년 재개교했다. 단 박나리 양은 당시 반포주공3단지가 아니라 길건너 한신8차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한신8차 아파트도 사건 이후 재개발로 철거되었다.[6] 여담으로 이 날은 1997년 9월 17일로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7] 연극성 성격장애와 반사회성 성격장애는 같은 범주에 속한다. (B군 성격장애: 극적이고 감정적이며 변덕스러운 유형)[8] 그 이전 이 사건과 유사한 사건에서 관련 피의자들이 전원 예외 없이 이유불문하고 사형이 선고되었던 선례가 있었고(예를 들어 젊은 여성이 단독으로 이런 범행을 일으킨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홍순영의 경우 두 사건이 매우 유사함에도 전현주와 달리 홍순영은 사형을 선고받고 1991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직접적인 예시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피해자이자 존속살인범이 되어 버린 이은석 사건에서는 정상참작해서 무기징역이었던 반면 이 사건의 전 여인은 딱히 법원에서 그런 고려를 해 줄 만한 사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당시에 여러 뒷말이 있었던 듯하다. 다만 존속살인은 살인에 비해 형량 자체가 다르다. 법적으로 유교 사상이 적용되는 희소한 예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현재는 지속적인 아동학대의 피해자가 저지르는 존속살해는 정상참작이 들어가지만,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고 그냥 패륜아처럼 다루었기 때문.[9] 형사소송법 제469조, 사형집행의 정지. ① 사형의 선고를 받은 자가 심신의 장애로 의사능력이 없는 상태에 있거나 잉태 중에 있는 여자인 때에는 법무부장관의 명으로 집행을 정지한다. ② 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형의 집행을 정지한 경우에는 심신장애의 회복 또는 출산 후 법무부장관의 명령에 의하여 형을 집행한다.[10] 1997년 10월 15일생.[11] 18개월 후부터는 서서히 인지능력이 생긴다고 보기도 하고, 교도소라는 환경 자체가 아이에게는 성장환경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무런 죄가 없는 아이를 교도소에 계속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12] 슬하 2녀가 있었는데 둘 다 늦둥이었고, 첫째인 박초롱초롱빛나리 양은 1989년생이고 여동생은 1991년생으로 알려져 있음.[13] 1993년 2월 25일 제정된 호적예규 제485호 이름의 기재문자와 관련된 호적 사무처리 지침[14] 일반 복수여권 MRZ 기준으로 PMKORPARK<[15] 나는 남자다에서도 김형대한현우일출이라는 긴 이름이 있다. 결국 이 사람도 2019년 3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여담으로 김형대한현우일출과 박초롱초롱빛나리의 출생년도가 1989년으로 같은데 앞서 말했듯이 그들이 출생 당시에는 이름 5글자 제한이 없었다. 다만 그의 로마자 이름은 성을 제외하면 17 ~ 18자리 선에서 될 가능성이 높아 21자리 내외인 박초롱초롱빛나리보다는 짧다.[16] 어린이 안전교육 교재는 대부분 낯선 아저씨를 조심하고 경계하라고 서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학교 교사, 학원 강사, 방과후 교사, 지역아동센터 복지사 등도 대다수가 여성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낯선 할아버지, 아저씨, 형, 오빠는 극도로 경계하지만 낯선 할머니, 아주머니, 언니, 누나는 그렇게까지 경계하지 않는다.[17] 서구 선진국의 경우, 저학년 학생들은 부모가 유치원이나 학교로 데려올 때까지 담당 교사가 지키고 있으며 필요한 경우엔 아동들이 반드시 부모가 맞는지 확인하고 난 후 탑승시키든가 타인일 경우 아동과 혈연 관계가 있는지 확인하거나 부모에게 연락해서 승락 여부를 확인한 후 귀가시킨다. 이걸 지키지 않아서 일어난 비극이 바로 아래 유사 사건 문단에 나온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이다.[18]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금품 요구를 목적으로 한 유괴사건에 대한 이야기이고, 성(性)적인 목적으로 아이를 유괴하는 사건 같은 것은 그 이후에도 자주 일어나곤 했다.(대표적으로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이 있다.) 이러한 범죄는 금품 요구를 목적으로 한 유괴가 지속적으로 피해 아동의 부모와 접촉해야 해서 추적 기술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과는 다르게 한 번 아이를 유괴하고 이후 잠수 타는 식으로 범행의 양상이 훨씬 단순하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첨단 추적기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19] 1997년 9월 당시에는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실 전문위원.[20] 씁쓸하게도 장전형 본인도 비리로 인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21] 애초에 옛날처럼 오랜 기간 동안 꾸미지 않는다면 50대에도 할머니라 봐도 무방하다. 전현주도 계속 감옥에 있으니 2023년 기준으로 54세인데 할머니로 보일 정도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