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근(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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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9년 2월 1일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정산리
사망
1920년 5월 24일
대구형무소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생애[편집]


박춘근은 1889년 2월 1일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정산리에서 태어낫다. 그는 1919년 3월 15일 박재식, 유교희, 유동수, 유연성, 이강욱(李康郁), 홍명성(洪明聖), 유곡란(柳谷蘭) 등이 에안면 편항 장터 동편에 잇는 공동 타작장에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는 일을 논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적극 찬성했다. 이들은 3월 21일 편항 장날에 거사하기로 결의했다.

3월 21이 오후 2시, 박춘근은 편항 장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이곳 주재소에서 2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주동자인 유연성과 배태근(裵太根)을 체포하려 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경들에게 달려들어 주재소로 쫓아버렸다.

이후 시위군중과 함께 편항 주재소로 달려가 시위를 전개할 때,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경찰 내전(內田)이 공포를 발사하자, 그는 분노가 폭발한 군중과 함께 주재소의 유리창·책상·의자를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또 일본 경찰로부터 빼앗은 대검과 소내에 비치되어 있던 장총·칼·탄환·제복 등을 거두어 그곳 우물안에 버렸다.

이때 2명의 일본 경찰이 신덕리(新德里) 방향으로 도망하자, 이를 추격하여 1명을 도중에서 붙잡아 구타하였다. 신덕리로 도망한 일본 경찰은 그곳 주재소에 이르러 위급한 상황을 전하고 안동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그후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관의 사택도 습격하여 완전히 파괴하였는데, 경찰 가족들은 모두 피신하고 없었다.

오후 5시, 그는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류를 파기하였다. 자정부터는 파괴해 버린 주재소의 판자로 모닥불을 피워가며 이튿날 새벽 3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안동경찰서는 순사부장 1명과 일본군 하사 이하 8명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펼쳤다. 결국 박춘근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8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검사 측이 항소했고, 1919년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옥고를 치르다 1920년 5월 24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춘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