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화(1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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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치화2.jpg
출생
1880년 7월 11일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1]
사망
1947년 7월 5일
전라북도 김제시 청하면 대청리
본관
밀양 박씨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유공자 박문화의 형이다.

2. 생애[편집]


박치화는 1880년 7월 11일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남 하동군 하동군 적량면장을 맡고 있었으나 1919년 3월 14일 사직했고, 독자적으로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뒤 3월 18일 하동장날 장터에서 12인이 함께 선포, 영호남 지역민 1500여 명과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했다. 이후 하동 일대에서 만세시위가 총 17회 일어났으며, 연인원 1만 2000∼1만 4000명이 참여하고 17명 사망, 95명 부상, 50명이 투옥됐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2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이에 검사 측이 형량이 낮다며 공소했고, 1919년 5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으며, 고등법원에서 1919년 7월 3일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7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서리 겸 법무총장 이동녕으로부터 ‘법무원 법률판리사(法律辦理事) 겸 경상남도찰리사(慶尙南道察理使)’와 임정 재무모집기주원(財務募集記主員) 등의 직책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신임장과 통지서를 받았다.

8.15 광복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으나, 1947년 7월 5일 전북 김제시 청하면 대청리에서 괴한의 총탄을 맞고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박치화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문화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