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하

덤프버전 :


박태하의 역임 직책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클럽
파일:옌볜 푸더 로고.svg

13대







박태하의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K리그1 로고.svg






박태하의 기타 정보

[ 펼치기 · 접기 ]




파일:K리그 로고(흰색).svg 한국프로축구연맹 기술위원장

이름
박태하
朴泰夏|Park Tae-Ha

출생
1968년 5월 29일 (55세)
경상북도 영덕군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신장 177cm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 윙어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소속
선수
포항제철 축구단/포항 스틸러스 (1991~2001)
상무 축구단 (1993~1995 / 군 복무)
코치
포항 스틸러스 (2005~2007)
대한민국 대표팀 (2007~2010)
대한민국 대표팀 (2010~2011 / 수석 코치)
FC 서울 (2012 / 수석 코치)
감독
옌볜 푸더 (2015~2018)
중국 여자 B 대표팀 (2018~2019)
행정
한국프로축구연맹 (2020~ / 기술위원장)
국가대표
11경기 7골 (대한민국 / 1994~2000)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학력
강구초등학교
강구중학교
경주종합고등학교
대구대학교
번호
포항 스틸러스 - 17번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프로 이전
2.3. 기록
3. 지도자 경력
3.1.1. 2015 시즌
3.1.2. 2016 시즌
3.1.3. 2017 시즌
3.1.4. 2018 시즌
3.2. 중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B팀 감독
4. 행정가 경력
4.1. 한국프로축구연맹 기술위원장



1. 개요[편집]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행정가. 現 한국프로축구연맹 기술위원장.


2. 선수 경력[편집]



2.1. 프로 이전[편집]


경북 영덕 어촌에서 태어나 축구부가 있는 강구초에 입학하며 축구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강구중 진학 후 부모님의 반대로 2년 간 축구를 그만뒀다가 3학년에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경주종고를 거쳐 대구대학교로 진학하는 동안 그 흔한 청소년 대표 경력도 없는 평범한 선수였다. 심지어 당시 대구대는 축구부 창단 2년 차일 정도로 약팀이었다. 그런 약팀 대구대가 전국대회에서 어느 정도 성적을 내자, 졸업을 앞둔 박태하에겐 여러 은행권 팀에서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4학년 막판 드래프트를 약 두 달 앞둔 시점에 실업 팀으로 진로를 결정하려던 찰나, 당시 인접 지역이어서 자주 연습 경기를 갖던 포항 스틸러스이회택 감독이 박태하에게 손을 내밀며 극적으로 프로 선수가 됐다.

2.2. 포항 스틸러스[편집]


1991 K리그 드래프트에서 포항제철 아톰즈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한 '무명' 박태하는 당시 최순호, 이흥실, 이기근, 조긍연, 박경훈, 김상호, 최문식, 윤성효 등 스타 선수들이 즐비한 포항제철에서 주전급 선수로 발돋움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군 격인 백호팀에 선발되는 영광을 얻었다.

2년 차인 1992년, 등번호를 17번으로 바꿨다. 35경기 5골 7도움을 기록하며 포철의 4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커리어 첫 K리그 베스트 11에 뽑히는 등, 90년대 초반 포철의 세대교체의 핵심 일원으로 중용받았다. 그러나, 3년 차인 1993년 동계 훈련에서 무릎 인대 부상을 당한 뒤 상무에 입대했다. 1994년 2월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돼 A매치에 데뷔했지만, 결국 1994 FIFA 월드컵에 참가하는 대표팀엔 선발되지 못했다.

1995년말, 전역과 동시에 팀에 복귀하자마자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챔피언결정전에서 복귀했다. 3차전까지 치러진 결정전 모든 경기에 출전했지만, 팀은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정식으로 팀에 복귀한 1996년 36경기 9골 4도움, 1997년 18경기 6골 4도움을 기록하는 등, 포항의 우측면을 지배했다. 1996년에는 등번호의 수혜를 받아 축구공 0과 등번호 17이 017이라는 컨셉으로 017광고를 찍어서 축구에 관심이 적은 국민에게도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8년이 되고 박태하는 새로운 분기점을 맞이한다. 제대 후 그와 함께 팀의 세대교체 주역으로 함께한, 라데, 홍명보, 황선홍이 모두 팀을 떠난 것이다. 그 상황에서 안익수에 이어 팀의 주장을 맡게 된다. 38경기 9골 10도움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고, 플레이오프까지 팀을 이끌었다. 그러나, 동해안더비로 펼쳐진 플레이오프에선 김병지그 골이 터지며 결승으로 가지 못했다. 여담으로, 김병지와 헤딩 경합을 한 선수가 바로 박태하

1998 시즌이 끝나고 안익수와 공문배가 은퇴하고, 서효원이 중국으로 진출하며 팀의 최고참이 됐다. 그럼에도 매시즌 30경기 이상을 출전하며 주장 완장을 달고 팀을 이끌었다. 이후 2001년이 끝나고 최순호 감독 아래서 세대교체를 단행하는 팀에게 은퇴 권유를 받았고, 다른 팀에서 뛸 바엔 원클럽맨으로 남으며 은퇴를 선언했다.

2.3. 기록[편집]




3. 지도자 경력[편집]


이후 지도자로 전향해, 포항 스틸러스에서 스카우트로 시작해 코치로 승격, 2007년 세르지오 파리아스와 기적을 연출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포항의 리그 우승을 이끈 뒤엔, 과거 스승인 허정무 감독을 따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았다. 이후 조광래호에서 수석코치를 맡았으나, 조광래 감독의 경질 이후 잠시 쉬다가 후배인 최용수 감독이 있는 FC 서울에서 수석코치를 맡으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3.1. 옌볜 푸더[편집]



3.1.1. 2015 시즌[편집]


이후 감독직을 희망했고, 2015년부터 중국 2부 리그인 중국 갑급 리그옌볜 푸더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1] 전년도에 꼴찌를 하여 3부 리그인 을급 리그로 강등 위기에 처해 있던 (그러나 갑급리그 한 팀이 임금체불 문제로 프로리그 자격을 박탈당하는 바람에 연변은 그대로 갑급리그에 잔류하게 된다) 옌볜을 갑급리그 우승으로 이끌고 중국 슈퍼 리그로 승격시켰다.

그래서 연변지역에서는 1997년 당시 갑A(1부)리그에서 연변오동을 이끌고 시즌 4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둔 최은택 교수(전 한국 국가대표 감독, 한양대 교수)를 상기시키는 팬이 많다.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 널리 존경을 받아온 최은택 교수를 기리고, 박태하의 업적과 공덕을 칭송하는 의미로 연변 팬들은 최감독을 잇는 ‘연변축구의 대부(教父)’라고 부르고 있다. 특별기획: 시간여행] 박태하 이전에 '큰별' 최은택 교수가 있었다


3.1.2. 2016 시즌[편집]


승격 후 푸더생명의 지원을 받아 옌볜 푸더로 개칭한 후, K리그로부터 공격수 김승대윤빛가람을 수혈받아 슈퍼리그에 참가하였다. 감독 본인의 연봉도 껑충 튀어서 갑급리그 시절 10만불이던 연봉이 슈퍼리그 1년차에는 100만불, 2년차인 2017년부터는 130만불까지 올랐다고 알려져 있다. 슈퍼리그 참가 초반에는 하위스플릿을 전전했으나, 7월부터 3연승을 거두는 등, 선전하면서 중위권 (상위스플릿)으로 발돋움하였다.

중국 현지에서는 옌볜을 가장 한국식 축구를 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옌볜의 조직력도 상당히 뛰어난데, 이는 중국인 멤버조차 조선족이기 때문에 박태하 감독이 통역을 통하지 않고도 바로 작전 지시를 할 수 있기 때문인 듯.

결국 9위의 성적으로 옌볜 푸더의 슈퍼 리그 잔류에 성공시킨다.


3.1.3. 2017 시즌[편집]


중국 슈퍼 리그의 갑작스러운 외국인 선수 제도 변경으로 아시아 쿼터가 폐지되어 계약이 되었던 하태균을 해지하고 바오딩으로 방출했다. 하지만 성적은 바닥을 기고 있으며 2무 4패로 15위를 마크하여, 최용수가 맡고 있는 15위 장쑤 쑤닝과 함께 강등권에 놓여 있다. 장쑤는 5월 최용수를 해고하고 카펠로를 선임한 후 강등권에서 벗어났지만, 연변은 계속 죽을 쑤고 있으며, 톈진 터다가 강등권으로 들어오면서, 톈진의 감독을 맡던 이임생이 해고되었다. 하지만 박태하는 계속 팀을 맡고 있다.

이렇게 강등권을 전전함에도 옌볜의 조선족 서포터즈의 커뮤니티나 현지 언론을 보면 박태하에 대한 반감은 그다지 높지 않은 편. 일단 을급리그로 강등될 암담한 처지에서 오히려 슈퍼리그로 승급시켜준 준 것은 분명히 박태하의 공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돈을 풀지 않은 푸더생명이나 프런트를 욕하는 팬들이 많다. # 사실 연변팬들은 부진끝에 포항으로 돌려보낸 김승대 대체선수로 유럽이나 남미의 수준급 선수를 원했으나, 연변 프런트가 데려온 선수는 제주의 황일수였다. 황일수는 이적후 맹활약하고 있지만, 정작 연변은 부진한 성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10월 13일 광저우 헝다와의 원정경기에서 4-3으로 아쉽게 패했는데, 강등경쟁을 벌이던 톈진 터다가 상하이 선화를 2-1로 꺾음으로서 강등이 확정되었다. 이때 박태하 감독은 판정에 불만을 품고 강하게 항의하다가 3게임 출장정지를 먹었는데,(광저우의 스콜라리 감독도 마찬가지로 3게임 출장정지) 결과적으로 이날이 당분간 현장에서 마지막으로 지휘한 슈퍼리그 경기가 된 것 같다.

10월 22일 옌지 홈경기에서 허난 젠예에 2-1로 패하여 강등이 확정되었다. 이날 박태하 감독은 경기 중에는 출장하지 못했고, 경기가 끝난 후 팬들에게 인사를 하러 나왔지만, 팬들은 욕보다는 박수로 답례했다고. 그만큼 그의 노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리그 종료후 조선족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시즌 부진의 원인을 부상선수의 대거 발생으로 들었다.[2] 다만 사퇴 여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연변구단의 우장룡 총경리(단장)은 박태하와 계속 간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12월 정도가 되어야 박태하의 거취여부가 판가름날듯. [3]


3.1.4. 2018 시즌[편집]


갑급 리그로 강등된 2018년에도 팀을 맡는 듯, 12월 동계훈련을 지도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옌볜은 초반에는 상위권에서 선전했으나 결국 리그를 10위로 마치는 저조한 성적을 냈고, 박태하 감독은 2018년을 끝으로 팀을 떠난다고 발표했다. #

하지만 박태하 감독이 10월 20일 저장 뤼청과의 원정에서 페널티 킥을 준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중도에 선수들을 철수시켜 파장을 부르자, 구단은 10월 27일 박감독을 전격 해임했다. 임시 감독은 조종화 수석코치. 하지만 11월 3일의 신장 톈산과의 원정에서 박감독이 관중석에서 지휘하는 것을 감안하면, 구단이 중국축협의 눈치를 봐서 형식상 해임하고 실제 지휘는 박감독에게 맡긴듯. 어쨌든 박태하는 관중석에서 지휘한 중국 리그 고별전에서 승리하여 한 때 카펠로, 스콜라리, 빌라스보아스등과 같은 세계적 명장과 경쟁한 시절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한 채, 옌볜을 을급리그로 강등시키지 않으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3.2. 중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B팀 감독[편집]


2018년 3월부터 중국 축협으로부터 제의가 들어왔으며 같은 해 12월 12일 중국 여자부 B팀 감독 선임이 확정되었다. B팀은 2군 선수들의 육성에 집중하는 팀이다.# U-19 청소년대표팀의 감독도 겸하고 있는데 U-19 아시아 챔피언쉽에서 조국인 대한민국, 일본, 미얀마와 같은조에 편성이 됐는데 허정재 감독이 이끄는 조국 한국대표팀과의 첫경기에서 2-1로 패하며 2020 나이지리아 U-20 여자월드컵 출전에 빨간불이 켜졌다. 미얀마에게 5-1로 대승했지만 마지막 일본과의 경기에서 2-1로 패하고 대한민국이 미얀마에게 1-0으로 승리하며 조3위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며 2020 나이지리아 U-20 여자월드컵 출전귄을 얻지못했다. 그때문인지 박태하감독은 너무 구시대적인 방법으로 선수들을 지도해 이러한 결과를 얻은게 아니냐며 중국언론들의 맹비난을 당하는 수모를 받았다.


4. 행정가 경력[편집]



4.1. 한국프로축구연맹 기술위원장[편집]


한국프로축구연맹이 2020년 K리그 기술위원회 내 기술연구그룹(TSG)를 신설해 운영하게 되면서 기술위원장으로 부임하였다.#

조원희 KBS 해설 위원이 2020 도쿄 올림픽 축구 중계로 잠시 skySports의 K리그 프로그램인 DYNAMIC PITCH에서 빠지면서 2021년 7월 22일부터 8월 5일까지 DYNAMIC PITCH에 참여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9 23:42:37에 나무위키 박태하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처음 연변에서 전화왔을 때는 보이스피싱을 의심했다고 한다.[2] 본인 인터뷰에서 본인책임을 거론하는 것은 좀 어려운일이다. 이렇게 어느정도의 면피성 발언이 나와도 너그러이 넘어가야 할 듯.[3] 중국에서 성공을 거둔 이장수장외룡 감독들조차도 한국에서 그다지 높이 평가되지 않았던 전례에서 보듯이 박태하가 한국에 돌아온다고 해도 사실 K리그 클래식과 같은 곳에서 자리를 얻기란 힘들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K리그 챌린지의 여러 시민구단에 가봤자, 시민구단 사정상 연변보다 더 사정이 열악하기 때문에 차라리 같은 2부라면 중국이 낫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