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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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 수석 코치를 맡아 월드컵 4강 진출에 공헌했다. 2017년부터 2023년까지는 5년 4개월간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으며 현재까지도 베트남 축구 대표팀 역사상 최장수 사령탑으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에서도 축구 약체로 분류되던 베트남 대표팀을 맡고 나서 2018 AFC U-23 아시안컵(준우승)에 이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4위)에서도 마찬가지로 대회마다 베트남의 성적을 올리는 등 베트남 남자 축구에서 역사에 남을 업적을 세웠다.
2018년 동남아 축구연맹 대회인 스즈키컵은 10년 만의 우승을 이끌었고 직후 2019 AFC 아시안컵에서는 8강에 올랐다. 2019년 동남아시안 게임(축구는 22세 이하 대회. 각국 올림픽 위원회 연합 주관)에서 60년 만의 우승을 달성했다.[5] 메인 전술은 5-4-1 카운터 어택으로 철저한 실리주의 축구를 추구한다. 2020년 4월 16일자 소식에 의하면 팀 전술의 변화를 시도하려고 한다. 변화 꾀하는 박항서 감독, "상대가 베트남 전술에 익숙해진 건 사실" 이후 동남아시아 국가에선 태국에 이어 두 번째로 월드컵 최종 예선에 진출했고 2023 미쓰비시 전기컵 준우승을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2. 선수 경력[편집]
일본 유학생 출신인 아버지는 경찰 간부로 재직하다 부상으로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었고 어머니는 명문 진주여고를 나왔다. 부모는 고향에서 약방을 운영해서 크게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랐다. 축구를 굉장히 늦게 시작했는데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장래희망이 군인이었고 축구는 논두렁에서 공차는 게 전부인 평범한 학생이었다.
부모의 높은 교육열에 상경했으나 처음 목표했던 배재고 진학에는 실패하고 경신고에 진학했다.[6] 배재고 낙방에 좌절하고 있을 때 교실에선 경신고 축구부원들이 공차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차범근이 이곳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이 운명을 갈랐다.
공부보다 축구에 대한 열망이 강해져 그들 사이에 들어가 함께 땀 흘리고 싶었지만 신장 166cm에 비쩍 마른 체격, 축구부 경력조차 없는 범생이를 받아줄 축구부는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축구를 하고 싶었기에 이경이 당시 경신고 축구부 감독과 절친한 사이였던 자형의 빽으로 겨우 축구부에 들어갔다. 이런 무경력자에게 기회가 올 리 없어 6개월간 후보 선수로 지냈고, 운동선수 학사 관리가 미흡했던 그 시절 관행을 따라 제때 졸업을 못하고 1년을 유급했다.
하지만 종일 축구공을 가지고 훈련하며 빠르게 실력을 키웠다. 1976년 고3 시기에 전국 청룡기 축구 대회에서 결승골을 넣어 경신고에 우승컵을 안겼다. 한양대 2학년이던 1978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청소년 대표팀 주장을 맡아 우승을 이끌었다.[7]
이러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많은 언론과 FC 코리아가 박항서 감독의 선수 시절을 비주류라고 평가하지만, 정작 박항서는 김용식, 채금석, 차범근을 배출한 축구 명문 경신고에서 6개월 만에 주전으로 발탁되었으며, 3대 축구 강호 중 하나인 한양대 축구부에 진학한 선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후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실업 구단인 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하며 실업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곧바로 육군 축구단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1984년 럭키금성 황소에 창단 멤버로 입단하며 프로 무대에 데뷔하였다. 등번호는 12번. 1985년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86년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어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리고 호적상 만 29살, 실제론 만 31살이던 1988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축구를 늦게 시작했고, 리그 태동기라 실업과 군 복무를 거쳤기 때문에 다른 역대 국가대표 감독에 비해 짧은 4년의 프로 선수 시절을 보냈다.[8]
참고로 국가대표로 뛴 A매치는 단 한 경기. 1981년 3월 한일 정기전에서 전반 17분 교체 투입돼 73분간 뛴 게 전부다. 이는 지금도 가장 아쉬워하는 선수 시절 경력이라고 한다.
2.1. 플레이 스타일[편집]
짧으면서도 빠른 패스를 상당히 중요시한 미드필더였다. 체력이 좋고 항상 전력을 다하는 근성이 있는 선수라는 의미에서 악바리와 밧데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자세한 내용은 박항서/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기록[편집]
4.1. 대회 기록[편집]
4.1.1. 선수[편집]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81)
- AFC U-20 아시안컵: 1978
- 전국축구선수권대회: 1988
4.1.2. 코치[편집]
-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7~2000)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02)
- FIFA 월드컵 4위: 2002
4.1.3. 감독[편집]
- 클럽 감독
- 창원시청 축구단 (2017)
- 내셔널축구선수권대회: 2017
- 국가대표 감독
-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2002)
- 아시안 게임 축구 동메달: 2002
- 베트남 U-23 축구 국가대표팀 (2017~2023)
- 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 2018
- 아시안 게임 축구 4위: 2018
- 동남아시안 게임: 2019, 2021
-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2017~2023)
- 동남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2018, 준우승: 2023
-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최종 예선 진출: 2022
4.2. 개인 수상 기록[편집]
4.2.1. 선수[편집]
- 1985년 K리그 베스트 11 선정
4.2.2. 감독[편집]
- 2013년 K리그2 올해의 감독상 수상
- 2017년 내셔널축구선수권대회 최고 감독상 수상
- 2019년 AFF 올해의 감독상 수상
4.2.3. 서훈[편집]
5. 여담[편집]
자세한 내용은 박항서/여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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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현대 인물이므로 베트남에서 Phác Hằng Tự(팍항뜨)라 적지는 않는다. 'Phác Hằng Tự'라고 적었다면 십중팔구는 경의가 담긴 표현.[입학유예] [2] 반남 박씨 집성촌이다. 기사[3] 고령으로 인해 더 줄었을 확률이 높다. 프로필 기준 164cm인 이수근보다 조금 더 작았다.[4] 선수 시절 62kg[5] 남베트남이 첫 우승을 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통일 베트남으로는 사상 최초.[6] 박항서 감독 때가 고교 입학 시험을 치른 마지막 세대로 이후에는 일명 '뺑뺑이'라 불리는 무시험 고교 배정이 시행한다.[7] 당시 4강에서 북한과 붙었고 승부차기 1번 키커로 나서 성공시키기도 했다.[8] 실업 시절과 육군 축구단까지 합하면 현역 시절은 7년이다.[9] 아디다스컵, 대한화재컵 2개 대회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