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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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해양부장관 (2008~2013)

초대
정종환
2대
권도엽

국토교통부장관 (2013~현재)


초대
서승환
2대
유일호
3대
강호인
4대
김현미
5대
변창흠

6대
노형욱








대한민국 제11대 교통부 장관
박해정
朴海楨 | Park Hae-jung


파일:GetIma.jpg

출생
1916년 7월 21일
경상북도 경산군 진량면 다문동
(現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다문리)[1]
사망
1966년 2월 6일 (향년 49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본관
밀양 박씨[2]

홍지(洪之)

청소(靑蘇)
재임기간
제11대 교통부 장관
1960년 9월 12일 ~ 1961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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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졸업)
대구사범학교 (강습과 / 졸업)
주오대학 전문부 (법학 / 졸업)
주오대학 (법학 / 학사)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 3, 4, 5
약력
경북경찰국 총무과장
경찰청 경찰학교 부교장
안동경찰서장
순천지방경찰서장
민주당 중앙위원 겸 정책위원
4선 국회의원
제11대 교통부장관

1. 개요
2. 생애
4. 선거 이력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경찰공무원, 정치인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홍지(洪之)이며, 호는 청소(靑蘇)이다.


2. 생애[편집]


1916년 경상북도 경산군 진량면 다문동(현 경산시 진량읍 다문리)에서 진량면장을 지낸 아버지 박순국(朴淳局)[3]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4], 대구사범학교 강습과, 일본 주오대학 전문부 법학과를 거쳐 주오대학 본과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1937년~1938년 영천 북안보통학교 훈도로 재직하는 등 잠시 교원생활을 하다가#, 이후 일본에 유학하였으며, 졸업 후 귀국하여 경상북도청과 달성군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 경찰에 투신하여 미군정기 치안국 경찰학교 부교장, 안동경찰서장, 순천지방경찰서장을 지냈다. 대구 10월 사건 당시에 안동경찰서장으로 있었는데, 사전에 항쟁 파급에 대한 준비를 해두어 무사할 수 있었다. 이런 공이 참작되어 이후 경상북도 경찰국(현 경상북도지방경찰청) 총무과장으로 전보되기도 했다. 이후 총경으로 퇴임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경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방만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5년 통합야당 민주당 창당에 참여한 데 이어 민주당에서 중앙위원 겸 정책위원, 경산군당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계보상으로 구파에 속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역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이 출범한 이후 구파 대표로서 1960년 9월부터 교통부 장관이 되었다. 입각 후에는 소속해 있던 구파보다는 신파 쪽으로 정치적 입장을 바꾸어서 민주당 구파가 분당한 신민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1961년 5월 초 경질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도피하다가 1963년 자수하였다. 이후 민정당에 입당하였고 민중당 등에 속하였다.

1966년 2월 6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자택에서 뇌일혈별세하였다.


3. 제헌 국회 활동[편집]


  • 1948년 7월 1일 '신문기사에관한보고'를 하였다.
  • 1948년 9월 28일 국회법 제12조 3항[5]을 예로 들며 국회사무총장이 직접 임명한 사람이 대행을 해야 한다 주장하였다.[6]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19선거구[7])

[[무소속|
무소속
]]

17,599표 (38.7%)
당선
초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21선거구[8])
9,785표 (20.59%)
낙선 (2위)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21선거구[9])
21,091표 (40.57%)
당선
재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25선거구[10])


22,848표 (41.24%)
당선
3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25선거구[11])
31,601표 (54.76%)
당선
4선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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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근의 속초리·대원리와 함께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2] 규정공파.[3] 1890.3.22 ~ 1957. 자는 사중(士仲), 호는 낙원(樂園). 현 경산시 진량읍 다문리에서 충간공 박눌생(朴訥生)의 13세손인 한의사 박성호(朴星鎬)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성호는 1908년 12월 대한협회 자인(慈仁)지회 회원으로 있는 등# 지방 유지로서 애국계몽운동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박순국은 1919년부터 1932년까지 경산군 진량면장을 지냈다#. 그 동안 1922년과 1926년 하양금융조합(河陽金融組合) 감사에 선출되기도 했고##2, 면장 퇴직 후인 1939년에는 하양물산(河陽物産)주식회사 이사에 취임해 있었다#. 1939년경 극심한 흉년이 들자 양식과 재물을 나눠 주어 다문리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1951년 또 흉년이 들자 부기리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주어 구제하는 등 자선가로서도 명망이 높았다#. 이러한 공덕으로 민선 면장이 되기도 했으며, 1941년과 1954년에 각각 시문리 부제지 옆 도로변과 부기1리에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졌다#.[4] 경북고 동문회에서는 17회 졸업생으로 대우하고 있다.[5] 「사무총장이 사고가 있을때에는 사무총장이 지정하는 이사가 그 직무를행한다」[6] 당시 국회사무총장 대행은 국회의원들이 임의로 정하였다.[7] 경산군[8] 경산군[9] 경산군[10] 경산군[11] 경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