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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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s9.postimg.org/238e9479bef4e83bb8eaefc32ae8554c_1.jpg하드코어 뉴스깨기 출연자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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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 (구).png 대한민국 국회 사무총장
제28대
정진석

제29대
박형준


제30대
우윤근

파일:국회휘장 (구).png 대한민국 국회의원 (부산 수영구)
제15~16대
유흥수

제17대
박형준


제18~20대
유재중




파일:박형준교수프로필.png

이름
박형준(朴亨埈)
본관
밀양 박씨
출생
1960년 1월 19일 (64세)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가족
배우자 조현, 슬하 1남 1녀
종교
무종교
학력
대일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회학 / 학사)
고려대학교 (사회학 / 석사)
고려대학교 (사회학 / 박사)
병역
면제(부등시)
소속 정당

[[미래통합당|
파일:미래통합당 흰색 로고타입.svg
]]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7
현직
동아대학교 사회학과, 국제전문대학원 교수
플랫폼 자유와 공화 공동의장
미래통합당 혁신통합추진위원장
경력
중앙일보 기자
제17대 국회의원(부산 수영)
한나라당 대변인
대통령실 홍보기획관
대통령실 정무수석비서관
대통령실 사회특별보좌관
동아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국회사무총장
새한국의 비전 원장
유튜브 채널
박형준의 생각TV

1. 개요
2. 생애
2.1. 정계 입문 이후
2.2. 사실상 정계은퇴 이후
2.3. MB수사 관련
2.4. 2020년 범중도보수 통합
3. 방송출연
4. 저서
5. 선거 이력
7. 기타



파일:박형준 교수.jpg
△ 박형준 교수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정치인. 現 동아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자, 보수를 대표하는 논객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960년 경상남도 부산시(현 부산광역시) 망미동에서 태어났다. 서울 숭덕초등학교, 동국대사대부중, 대일고등학교 졸업.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문인이나 기자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1978년에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79년 10ㆍ26사건과 80년 광주를 거치면서 사회과학 이론에 빠져들기 시작해 좌파이론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 졸업하고 잠시 중앙일보 기자 생활을 하다가, 모교로 돌아가 사회학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군복무는 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정권 수립 이후 민주화 학생운동에 참여해 시위를 하다 눈을 다쳐 근시, 부동시로 면제받았다.[1]

80년대 후반 「창작과 비평」, 「현실과 과학」 등 진보적 학술지를 통해 일어났던 여러 사회과학 논쟁에 참여해 비교적 일찍 소장 논객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이 당시를 가리켜 박형준 본인은 "굳이 노선을 이야기하자면 사상적으로 온건계열의 PD(정파)에 가까운 시기"였다고 술회한다.

1991년 동아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무렵 정태인과 함께 진보언론의 종가였던 월간 <>지의 편집위원을 잠깐 지내기도 했다.[2]

2.1. 정계 입문 이후[편집]


1990년대 초반 민중당 소속으로 이재오, 김문수, 차명진 등과 같이 정치활동을 시작했지만 민중당이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고 해산되면서 말 그대로 물을 먹었다.

이후 정치노선을 바꿔서 김영삼 대통령의 정책자문기획위원으로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이때 김문수, 이재오를 중심으로 민중당 지도부급 인사들 상당수가 "문민정부의 개혁을 지원하겠다"면서 김영삼 정부의 신한국당에 가담하였다. 김영삼 정부가 전두환, 노태우를 전격적으로 잡아넣는 등 과거 청산에 적극 나선 것도 이들의 선택에 명분이 되어주었다.

"YS정권 때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을 하면서 청와대 프로젝트를 많이 했는데 그때, 아 시민운동의 시각에서 보는 사회와 국정의 시각, 통치의 맥락에서 보는 사회라는 게 상당히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꼈죠. 그 과정에서 제일 많이 배운 것은 YS개혁이 의도와 결과가 왜 달라지는가를 보면서였습니다. 다원화된 사회, 다원화된 이익갈등을 통제·조종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개혁을 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걸 본 겁니다. 그래서 정말 국가경영능력이 중요한 거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고….민주주의는 다수의 논리이긴 하지만 리더십이 굉장히 중요하죠. 리더는 비전도 있어야 하지만 실제 운영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이 선량한 마키아벨리스트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국가경영이란 복합적이고 다양한 능력이 요구되는 그런 분야는 착한 사람이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선의만 가진 사람이어도 안되고, 지사형도 바람직하지 않고, 이데올로기스트도 바람직한 게 아닙니다. 의지는 선량하게 갖되 풀어가는 방식은 상당히 실용주의로 풀어가는 선량한 마키아벨리스트가 필요합니다."2007년8월14일 오마이뉴스 인터뷰 중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수영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이명박 진영에 가담하여 친이계의 브레인으로 활약하면서, 친이계 내에서도 이재오계에 속하게 된다. 당시 이해찬 등 노무현 정권의 386인사를 강력 비판하며 친이계의 브레인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진보진영에서는 변절자로, 조갑제 등 극우보수진영에서는 좌경세력으로 동시에 욕을 많이 먹었다. 자신의 전향 이유에 대해서 '주사파의 교조주의, 전체주의적 사고에 염증을 느꼈다', '사회는 선의만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국정을 사회운동 하듯이 하면 망한다' 등의 발언을 하였다. 아무래도 진보 이념과 이상주의의 한계를 느끼고 마키아벨리적 현실주의 노선을 택했다고 봐야할 듯. 출처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박 무소속을 표방한 유재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낙선 후 이명박 정권의 청와대에서 홍보기획관, 정무수석비서관, 대통령 사회특별보좌관을 지냈다. 친박계가 공천권을 장악한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2.2. 사실상 정계은퇴 이후[편집]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제29대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이때 자신의 지역구였던 부산 수영구에 다시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 후로 제3지대론, 빅텐트론 등을 주장하며 반기문 전 총장의 출마를 물밑에서 돕기도 하다가 결국 흐지부지되면서, 정계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썰전 202화에서 야인특집으로 정청래와 함께 출연했다. 17대 국회의원 시절 한나라당 언론발전특위 간사일 때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타협해서 참여정부의 4대 개혁 입법 중 하나인 신문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는데, 이로 인해 박근혜 당시 비상대책위원장과 친박에게 엄청나게 찍혀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했다고 밝혔다.

유시민 작가가 JTBC 인터뷰에서 좋은 토론상대였던 사람은 누구였냐는 질문에 유승민과 박형준을 꼽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2017년 6월 29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썰전에서 하차한 전원책 변호사의 후임으로, 새로운 보수 패널로서 출연이 확정되었다.

이후 박형준의 생각tv라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정치현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푸는 형식의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2.3. MB수사 관련 [편집]


문재인 정부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후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드러나고,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어버이연합 게이트가 다시 재조명되어 검찰의 칼끝이 이명박을 조준하는 상황이다.

썰전 237회에서 MC인 김구라가 그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고 유시민 또한 들어가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박형준이 청와대 사회특별보좌관으로 있는 동안 저 블랙리스트와 관여되었을 거라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썰전 231회에서 '국정원 민간인 댓글부대 파문'이 다루어졌을때, "제가 MB 시절 비리에 연루되었음이 드러난다면, 제가 단두대로 가겠습니다." 라고 하며 확실히 관여되지 않았음을 주장하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안전판을 목표로 청와대에서 총선 지원하려 한 문건이 공개되기도 했다. 다만 이 문건은 별 의미를 갖지 못하는데, 의미를 갖는다면 민주당에서도 언론장악을 시도했으니 집권여당에서 물러나야한다. 문건이 있다는 것은 해당 조직 내에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썰전 시청자 게시판에는 친문성향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박형준의 하차를 요구하는 게시글이 빗발치고 있다.출처[3] 박형준 교수 입장에서는 억울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MB로 인해 피해를 당한 사람도 있으므로 당선에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서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일 것이다.

이후 9월 29일 tbs의 한 라디오 방송에서 총선 지원 의혹에 대해 해명했는데, 의문의 1패를 당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본인이 말하길 19대 총선[4]에서 선거 지원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공천 탄압을 받았다고 하는데, 경선 이틀 앞두고 경선 선거인단 여론조사에서 자기가 앞선다는 결과가 나오니까 당시 친박 중심의 공천심사위원회에서 경선을 무효로 만들어 낙천시켰다고 한다. 당적을 버리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도 그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며, 이 당시 여권과 결연 상태라 지원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또 한 가지 이유로는 이 문건이 공직비서관실 감찰팀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들었는데, 공직비서관실은 공직자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곳이며 그 중에서도 감찰팀은 경찰 등으로부터 파견 온 인력이 모여있는 곳인데, 자기네 업무도 아닌 총선 지원 문건을 왜 만들었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출처

검찰에서 국정원 • 군 • 경찰에서 공동으로 이명박 정부 집권 시절에 벌인 사이버 여론조작 댓글 공작의 실체가 드러나며 수사한 결과 2017년 10월 25일 박형준이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매일 업무를 보고하는 정황을 포착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출처 다만 이런 보고를 했다고 해서 여론조작에 가담했다고 보긴 어려운 것이, 대통령이 여론의 분위기를 살피는 것대통령이 직접 지시를 내려 여론을 조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위 기사에도 나왔듯 여론 조작을 지시한 것이 아닌 여론의 분위기를 보고한 것에 지나지 않기에 직접적으로 여론을 조작하도록 지시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으면 정치조작 전황이라 볼 수 없다.

이전 문단에서 정치공작 전횡, 직접 지휘 등의 글들이 있는데, 기사에서도 명확히 증거를 잡은 것이 아니라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문서의 문단 중에 대응방안이 있는 것을 보고 보고하면서 여론 조작도 지시하지 않겠냐는 논리를 따른거지만, 대응방안이 여론 조작이 아닌 여론의 동향에 따른 행동일 수도 있고 이는 자연스러운 정치 활동이다. 이명박 여론 조작 사태는 지금도 진행 중이고 검찰의 조사 그리고 법원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기에 섣부르게 전황 지휘 등의 서술을 언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2.4. 2020년 범중도보수 통합[편집]


통합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범중도보수를 비롯해 야권의 통합에 힘쓰고 있다.

2020년 1월 21일 반나절 일정으로 제주특별자치도를 방문하였고 원희룡 지사에게 범중도보수신당 합류 동참을 요청하였고 결국 원 지사는 범중도보수신당 합류를 선언하였다.

2월 6일 중도·보수 야권 통합을 추진 하며 본인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혁신통합추진위원회(통추위)가 6일 통합신당준비위원회(통준위)를 출범하고 공동위원장 중 한명이 되었다.

3. 방송출연[편집]



연도
방송사
제목
2013~2019
JTBC
썰전
2013
SBS
최후의 권력
2014~2018
MBC
시사토크 이슈를 말한다
2019~
KBS
정치합시다
2019~
TV조선
강적들

4. 저서[편집]



연도
출판사
제목
1990
학문사
현대 사회와 윤리
1991
백산 서당
현대 노동 과정론
1992
동아대학교 출판부
현대 사회와 이데올로기
1994
길벗
21세기 프론티어
1996
박영률 출판사
정보화의 문명사적 의미와 국가 전략의 방향
1997
동아대학교 출판부
21세기의 이해
2001
의암 출판 문화사
성찰적 시민 사회와 시민 운동
2007
한국 행정 연구원
규제 협상의 적용 방안에 관한 연구
2019
메디치 미디어
보수의 재구성 (공저)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수영구)
한나라당
50,803 (58.80%)
당선 (1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수영구)
한나라당
27,940 (41.96%)
낙선 (2위)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수영구)
무소속
24,630 (29.59%)
낙선 (2위)



6. 비판 및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형준(교수)/비판 및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기타[편집]


  • 이동관, 임태희와 더불어 그야말로 이명박 대통령 시절, MB키즈라고 불리며 대통령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그보다 더 사랑을 받았다고 평가되는 사람은 이명박의 정치입문 이전부터 가신[5]으로 활동한, 진정한 이명박의 집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김백준[6]밖에 없다.[7]

  • 남경필과 사적인 친분이 있다.[8] 썰전 238화에서 말하길 남경필의 장남이 마약 투약으로 체포된 후 속상한 마음에 문자 메시지로 "형, 가슴에 비가 내려요"라는 말을 했다고. 2017년 광역서울도 토론회에서 서로 옆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찍히기도 했다.

  • 유시민과 매우 가까운 사이인 걸로 알려져있다. 서로 국회의 같은 축구팀에서 뛴 적도 있고 같은 나이에 동세대를 지낸 정치인이기도 하고. 유시민은 JTBC 뉴스현장에서 토론 상대로 누가 좋냐는 사회자의 질문을 들었을 때 유승민과 함께 박형준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곧 박형준을 합리적인 보수로서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 최근 박형준이 썰전에서 자신의 하차요청글이 빗발치고 있다며 하소연할 때 적극적으로 위로해 준 것도 유시민이었다.[9][10] 참고로 말하자면 박형준을 제작진에게 적극추천한 것도 유시민이라고.

  • 토론 능력에서 그 유시민도 몇 안 되게 인정한 인물이 박형준 본인과 유승민이고, 본인도 뛰어난 토론 능력으로 유명하나, 100분 토론 당시 故 노회찬의 공격에는 잠시 쩔쩔맨 적이 있었다.

  • 썰전 226화에서 유시민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박형준: 미국의 재협상 요구를 보면 한미FTA가 미국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한국에게 유리한 협정이었다는 반증이죠. 물론 한미FTA는 참여정부에서 시작했던 거지만 얼마나 반대가 심했습니까? (현장에서 웃음터짐) 제가 정무수석할 때인데, 나라팔아먹는다고 그렇게 결사반대하던 사람들 지금 다 어디에서 뭐하고 있냐고요.

유시민: 원래 하던 대로 했으면 더 잘되었지, 귀하 정부에서 물러섰잖아요.

박형준: 물러서긴 뭘 물러서?[11] 오함마를 휘두르고 국회에서 최루탄을 터뜨리고 정의화 국회의장은 아직도 기관지에 장애가...[12]

유시민: 70점 받을 수 있었는데 60점짜리 협정으로 바뀌었잖아요.

박형준: 솔직히 그런 문제 때문에 반대한 게 아니잖아.[13]

유시민: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네.
김구라도 유시민더러 한 방 먹었다며 엄청 웃었다. 227화에서 김구라가 유시민에게 주변 반응이 어땠냐고 묻자 유시민이 말하길 그동안 매너리즘에 빠졌던 걸 반성하는 계기로 삼길 바란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 썰전 244화에서 밝히길 국민의당에 합류할까 라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제3지대론'을 추진할 당시 우리 정치가 양극화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봐서 중도에서 합리적 진보와 보수가 만나는 틀을 구상해서 실행하려고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잘 안됐다고 밝혔다. 이를 듣고 게스트로 온 박지원 의원이 그때 그 선택(국민의당에 안 온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말해 빵 터트렸다.

  • 2006년 보좌관이 사행성 게임 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았다가 구속된 사건이 있었다. 박형준은 검찰 조사가 시작된 후 해당 보좌관을 해임했으며, 이후 검찰은 박형준과는 관련성이 없다고 발표했다.

  • 현재 보수의 주류인 자유한국당과 괴리가 있는 주장을 많이 하며 자유한국당에 비판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 탓에 보수에서 박형준의 평가는 상당히 악화된 상태. 때문에 과거 보수의 선두였지만 이후 보수와 간극이 발생한 전여옥[14]과 비슷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15]

  • 진보진영의 정치인들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많은데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정청래다. 정청래의 정치성향을 보자면 어색해 보이는 조합이지만 정청래가 박형준과 함께 썰전에 출연했을 당시 말한 바에 의하면 함께 일했을 때 헤매고 어려웠던 부분을 박형준이 많이 도와주었고 자신이 의견을 다소 과격하게 피력할 때에도 매우 합리적인 의논을 할 수 있었다고. 둘 다 성향이 성향이다보니 부딪힐 때도 많지만 정청래는 늘 박형준을 얘기할 때 존경스럽다며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빼먹지 않는다.

  •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시절 정청래의 보좌관과 함께 게임산업 관련 협회 비용으로 지난해 9월 미국에서 열린 게임 행사에 다녀와서 논란이 되었다. 문제는 해당 9월에 게임산업개발원의 상품권업체 인증제 취소 후 재지정이 논의되고 있었기에 의혹이 제기된 것. 이에 본인은 "1억원 협찬은 대행사가 전적으로 담당했다"면서 "본인은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 자신도 과거엔 좌파였다고 밝혔다.## 5공 때 엄청난 탄압 속에 젊은 지식인들은 쉽게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모택동주의에 빠져들었고, 박형준 본인 또한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갔다고 한다. 다만 애초부터 박형준 본인은 교조주의적 태도와는 거리를 두었고, 88년 유럽에 체류하며 동유럽체제 문제점을 보면서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희망의 원리가 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16] 이후 해당 과거가 재조명되면서 과거 주사파였던 하태경과 비슷하게 자유한국당을 비난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실제로 하태경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

  •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캠프 대변인이었기 때문에 당시 박근혜 캠프 단장이었던 유승민과는 한때 정치적 대립 관계였다. 하지만 썰전에서 말하길 창과 방패 같은 관계(유승민이 창, 박형준이 방패)였다고 하며, 유세가 끝나고 서로 회식 자리에 함께해서 덕담을 건넬 정도로 개인적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박형준이 친박 때문에 정계에서 은퇴하고 유승민도 비박계가 된 지금은 서로 협력하며 원만하게 지내는 듯. 다만 박형준은 자신이 국회사무총장 시절 많이 도와줬는데 유승민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살짝 디스(?) 하기도 했다. 유승민이 2017년 바른정당에서 개강한 지방선거학교 강연에 박형준을 초청하기도 했다.

  • 263화에서 박형준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이 정치보복이라고 비판하며, 언제까지 이런 방식을 계속 할 수 있겠느냐, '덕이 미움을 이긴다.' 라고 국민통합으로 '미움의 정치'를 넘어서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이에 유시민은 동의하면서도 통합이라는 미명하에 과거의 불의를 덮으면 과연 통합이 될 지라는 딜레마가 있다고 반박했다. 박형준은 덮자는게 아니라고 했는데 이와 관련해서 논란이 일어났다.

  • 썰전 255화에서 MB정부의 노무현 수사에 대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 과정에 정치보복적 성격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당시 MB 청와대 내에서도 신중한 수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MB도 구속 기소에는 부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관련해서 같인 친이계 출신이지만 정두언의 주장은 맥락이 조금 다른데 이명박이 구속 기소에 부정적이었지만 어차피 재판에서 실형인데 구속시키면 이명박 본인이 구속을 주도한 것으로 돼 정치적 부담을 느낀 것이라고 한다.### 이 두 주장은 다른 맥락이지만 양립도 가능하다. 당시 청와대가 노 전 대통령 구속 건에 대해 신중론과 정치적 부담 등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구속수사에 회의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17]

  • 2009년 행정구역 개편 논의가 무르익을 당시(청와대 정무수석 재직)에 광명시, 구리시의 서울편입 논의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력하기도 했다. 기사

  • 동아대 대학원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강의의 충실도와 깊이가 남다르다고 한다. '동아대 교수로 계시기엔 아깝다'라는 다소 셀프디스스런 코멘트를 하는 동아대 학생들도 있다.

  • 굿 플레이스 마이클 역을 맡은 배우 테드 댄슨과 닮은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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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썰전 269회에서 학생운동 당시 최루탄의 영향으로 오른쪽 눈이 약시가 되었다고 말했다.[2] 나중에 오마이뉴스를 창립하는 오연호 기자 등을 지도하였다고 한다.[3] 다만 유시민이 박형준에게 본인도 그런 소리를 듣고 있다며 위로를 해 주기는 했다.[4] 방송 내용을 들어보면 초반부에 박형준이 19대 총선에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무소속으로 출마한 시점은 19대가 맞다. 숫자를 착각한 듯.[5] 이명박 현대 시절, 그 역시 현대 직원이었다.[6] BBK 주요 관계자 중 한명으로, 특별한 정치 경력은 없으나, 이명박 서울시장 때는 서울 메트로 감사를 맡았고, 대통령이 되자 청와대 총무비서관 및 총무기획관, 즉 총무실 한 자리로 4년 내내 있었다. 그 이후 그 자리를 맡은 사람은 이명박의 형 이상득의 비서실장이었던, 이상득의 오른팔 장다사로였다. 2010년 당시 자원외교 논란의 중심이던 메릴린치(뱅크 오브 아메리카 계열사)에 김백준의 아들 김형찬(피터김)이 상무로 들어갔었고, 훗날 메릴린치 한국지점장에 투자은행부문 대표까지 되고 승승장구하다가 2016년에 그만둔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2010년 당시 메릴린치는 자원외교 자문비에 힘입어 무려 저 유명한 골드만삭스를 제치고 외국계 자문회사 중 자문 쪽 1년 수입으로 1위를 찍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당시 그냥 메릴린치가 잘 나간다는 기사만 수없이 나오다가, 그가 김백준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이명박 정부 다 끝나고 나서야 알려진다. [7] 2017년 11월 20일 MBN에서 방영된 판도라에서, 주진우 기자는 박형준은 MB 정권 당시 이명박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라고 지목했다. 이에 정두언 전 의원은 자신이 알기로는 그렇지 않다며 일을 잘해서 그럴 수는 있겠지만 확실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박형준 본인 또한 방송에서 그건 아니라고 주장했다.[8] 남경필은 유시민과도 사적인 친분이 있어, 서로 농담을 나누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다.[9] 썰전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박형준 교수가 새 패널로 들어서면서 너무 친정부 성향으로 되어간다라는 비판을 많이 받고 있다. 진보 어용 지식인을 자처한 유시민이 박형준에게 논리로 밀리는 장면이 여럿 나오자 이에 썰전이 아예 자막이나 자료를 띄워서 지원사격하거나 유시민이 북핵을 인정하자는 도덕주의에 기반한 지나치게 이상적인 발언을 하는 등 여러모로 유시민도 비판을 많이 받고 있다. 유시민이 '자신도 그 소리 듣고 있다.' 라고 말한 것은 이런 의미다. 역으로 친문 진영에서는 유시민도 적폐, 한경오라 하며 유시민을 비판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유시민이 박성진, 강경화 등의 문제나 살충제 달걀, 교육 정책에 대해 비판을 가하며 결국 적폐라고 욕하는 추세다. 극성 친문이 친문을 적폐라고 까는 걸 보면 진박 친박 논란이 연상되는 부분이다.[10] 사실 위로라기보다는 속된말로 쉴드를 쳐주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유시민이 그렇게 조목조목 이러저러하니 그러시면 곤란하다 말했는데도 시청자 게시판엔 아직도 하차요청글이 올라온다...[11] 재협상으로 바뀐 건 유예 세 개 정도인데, 이 유예들 중 한국이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는 자동차 관련이 한국에게 불리하게, 미국이 강한 축산물과 의약품은 한국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12] 김선동이 최류탄을 터뜨릴 때에 가루를 고스란히 마신 사람이 당시 회의를 진행하던 정의화 국회부의장이었다.[13]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에 진영논리로 무분별하게 반대했다는 뜻. 유시민도 일정부분 인정했다.[14] 2018년 지선 이후 문재인 정부를 강하게 디스하면서 예전 포지션이었던 보수우파로 돌아섰다.[15] 이건 애초에 현 자유한국당 자체가 보수라는 말이 무색한 비정상적인 행태를 많이 벌여왔기에 이런 태도를 취하는 상황이라 크게 이상한 것까지도 아니다. 박형준의 전임자였던 전원책도 자유한국당을 비판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16] 인물과 사상’ 12월호에 기고한 글.[17] 실제로 당시 여권에서도 갑론을박이 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전직 대통령인데 다 준비해놓고 한번에 깔끔하게 끝내야지 뒤로 언플하면서 모욕 주면 되냐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왔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