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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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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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png 대한민국 국회의원 (부산 수영구)
제15-16대
유흥수

제17대
박형준


제18-20대
유재중



제28대 국회사무총장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박형준
朴亨埈 | Park Hyungjoon


파일:박형준 2021년 재보궐선거.jpg

본관
밀양 박씨
출생
1960년 1월 19일 (64세)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학력
대일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회학 / 학사 · 석사 · 박사)
병역
면제 (부등시)
가족
배우자 조현, 슬하 1남 1녀
신체
181cm
종교
무종교
소속 정당

파일: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svg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7
현직
동아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 국제학과 교수
플랫폼 자유와 공화 공동의장
새한국의 비전 원장
경력
중앙일보 기자
동아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부산경제정의실천연대 기획위원장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지방분권부산운동본부 집행위원장
제17대 국회의원(부산 수영)
한나라당 대변인
대통령실 홍보기획관
대통령실 정무수석비서관
대통령실 사회특별보좌관
제28대 국회사무총장
미래통합당 혁신통합추진위원장
미래통합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2.1. 정계 입문 이후
2.2. 야인생활
2.3. 이명박 수사 관련
2.4. 정계 복귀 이후
2.4.1. 자유한국당 혁신통합추진위원장
2.4.2. 21대 총선 미래통합당 공동선대위원장
4. 정치 성향
5. 방송 출연
6. 저서
7. 기타
8. 소속 정당
9. 선거 이력
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정치인. 現 동아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자, 보수를 대표하는 논객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대학생 때에는 학생운동을 했고 대학교 졸업 후에 기자가 되었다가 공부를 더 해서 사회학 교수가 되었다.

1990년대부터 교수로 일하면서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1994년 민주자유당에 입당 후 정부위원회에서 활동하였으며 2004년 17대 국회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명박 정부 때는 청와대에서 보좌관으로 일했고 박근혜정부 시기에 JTBC 정치토론프로그램 썰전을 통해 보수 논객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국회사무총장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문재인 정부 시기에는 썰전 고정 패널이 되었다.

2020년 12월 8일에 국민의힘 소속 부산시장 예비후보로 등록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2. 생애[편집]


1960년, 경상남도 부산시(현 부산광역시)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서울 숭덕초등학교, 동국대사대부중을 거쳐 대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8년에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79년 10.26 사건과 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사회과학 이론에 빠져들기 시작해 좌파이론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 # 군복무는 민주화 학생운동에 참여해 시위를 하다 최루탄에 눈을 다쳐 근시, 부동시로 면제받았다.[1] 1982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중앙일보 기자 생활을 했다가 모교로 돌아가 1985년 사회학 석사 , 1992년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80년대 후반 「창작과 비평」, 「현실과 과학」 등 진보적 학술지를 통해 일어났던 여러 사회과학 논쟁에 참여해 비교적 일찍 소장 논객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이 당시를 가리켜 박형준 본인은 "굳이 노선을 이야기하자면 사상적으로 온건계열의 민중민주파에 가까운 시기"였다고 술회한다.

1991년 동아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무렵 정태인과 함께 진보언론의 종가였던 월간 <>지의 편집위원을 잠깐 지내기도 했다.[2]


2.1. 정계 입문 이후[편집]


정치활동은 민중당에서 시작했다. 창당 당시 강령 기초 작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1991년 부산 경실련 기획위원장으로 시민단체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후 이재오, 김문수등 민중당 지도부급 인사들 상당수가 "문민정부의 개혁을 지원하겠다"면서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자 그도 정치 노선을 바꾸어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정책자문기획위원으로 합류하였다. 김영삼 정부전두환, 노태우를 전격적으로 잡아넣는 등 과거 청산에 적극 나선 것도 이들의 선택에 명분이 되어주었다.

"YS정권 때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을 하면서 청와대 프로젝트를 많이 했는데 그때, 아 시민운동의 시각에서 보는 사회와 국정의 시각, 통치의 맥락에서 보는 사회라는 게 상당히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꼈죠. 그 과정에서 제일 많이 배운 것은 YS개혁이 의도와 결과가 왜 달라지는가를 보면서였습니다. 다원화된 사회, 다원화된 이익갈등을 통제·조종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개혁을 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걸 본 겁니다. 그래서 정말 국가경영능력이 중요한 거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고….민주주의는 다수의 논리이긴 하지만 리더십이 굉장히 중요하죠. 리더는 비전도 있어야 하지만 실제 운영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이 선량한 마키아벨리스트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국가경영이란 복합적이고 다양한 능력이 요구되는 그런 분야는 착한 사람이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선의만 가진 사람이어도 안되고, 지사형도 바람직하지 않고, 이데올로기스트도 바람직한 게 아닙니다. 의지는 선량하게 갖되 풀어가는 방식은 상당히 실용주의로 풀어가는 선량한 마키아벨리스트가 필요합니다." 2007년 8월 14일 오마이뉴스 인터뷰 중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수영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이명박 진영에 가담하여 친이계의 브레인으로 활약하면서, 친이계 내에서도 이재오계에 속하게 된다. 당시 이해찬 등 노무현 정권의 386인사를 강력 비판하며 친이계의 브레인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진보진영에서는 변절자로, 조갑제 등 극우보수진영에서는 좌경세력으로 동시에 욕을 많이 먹었다. 자신의 전향 이유에 대해서 '주사파의 교조주의, 전체주의적 사고에 염증을 느꼈다', '사회는 선의만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국정을 사회운동 하듯이 하면 망한다' 등의 발언을 하였다. 이는 탈냉전과 소비에트 붕괴 후 운동가들이 흔히 겪었던 일로, 박형준의 경우엔 진보 이념과 이상주의의 한계를 느끼고 마키아벨리적 현실주의 노선을 택했다고 봐야 할 듯.출처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박 무소속을 표방한 유재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에서 홍보기획관, 정무수석비서관, 대통령 사회특별보좌관을 지냈다. 친박계가 공천권을 장악한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역시나 낙선하였다.


2.2. 야인생활[편집]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제28대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2017년 1월 썰전 202화에서 야인특집으로 정청래와 함께 출연했다. 17대 국회의원 시절 한나라당 언론발전특위 간사일 때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타협해서 참여정부의 4대 개혁 입법 중 하나인 신문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는데, 이로 인해 박근혜 당시 비상대책위원장과 친박에게 엄청나게 찍혀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했다고 밝혔다.

유시민 작가가 JTBC 인터뷰에서 좋은 토론상대였던 사람은 누구였냐는 질문에 유승민과 박형준을 꼽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2017년 6월 29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썰전에서 하차한 전원책 변호사의 후임으로, 새로운 보수 패널로서 출연이 확정되었다.

썰전에 나와 말하길 "보수의 이념은 '자유'로 대표된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은 단기간에 급격한 민주주의를 겪어 현재 대중들의 생각은 '보수=박정희 시대의 이념' 과 같은 낡은 구시대적 발상을 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대한민국에서 '보수'라는 이념을 다시 재확립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발언했다. 상당히 의미 있는 발언.

당시 이해찬 대표가 한 방송 패널로 출연해서 말하길 '진보당은 정의당. 민주당은 중도개혁성향의 우파정당' 이라고 발언한 것에 비추어 보면 박형준이 생각하는 보수당은 '중도온건성향의 우파정당'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해석될 여지도 있다.

이후 박형준의 생각tv라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정치 현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푸는 형식의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2.3. 이명박 수사 관련 [편집]


문재인 정부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후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드러나고,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어버이연합 게이트가 다시 재조명되어 검찰의 칼끝이 이명박을 조준하는 상황이다.

썰전 237회에서 MC인 김구라가 그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고 유시민 또한 들어가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박형준이 청와대 사회특별보좌관으로 있는 동안 저 블랙리스트와 관여되었을 거라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썰전 231회에서 '국정원 민간인 댓글부대 파문'이 다루어졌을때, "제가 MB 시절 비리에 연루되었음이 드러난다면, 제가 단두대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며 확실히 관여되지 않았음을 주장하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안전판을 목표로 청와대에서 총선 지원하려 한 문건이 공개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썰전 시청자 게시판에는 친문성향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박형준의 하차를 요구하는 게시글이 빗발치고 있다. 출처[3] 박형준 본인 입장에서는 억울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MB로 인해 피해를 당한 사람도 있으므로 당선에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서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일 것이다.

이후 9월 29일 tbs의 한 라디오 방송에서 총선 지원 의혹에 대해 해명했는데, 의문의 1패를 당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본인이 말하길 19대 총선[4]에서 선거 지원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공천 탄압을 받았다고 하는데, 경선 이틀 앞두고 경선 선거인단 여론조사에서 자기가 앞선다는 결과가 나오니까 당시 친박 중심의 공천심사위원회에서 경선을 무효로 만들어 낙천시켰다고 한다. 당적을 버리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도 그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며, 이 당시 여권과 결연 상태라 지원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또 한 가지 이유로는 이 문건이 공직비서관실 감찰팀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들었는데, 공직비서관실은 공직자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곳이며 그 중에서도 감찰팀은 경찰 등으로부터 파견 온 인력이 모여있는 곳인데, 자기네 업무도 아닌 총선 지원 문건을 왜 만들었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출처.

검찰에서 국정원 • 군 • 경찰에서 공동으로 이명박 정부 집권 시절에 벌인 사이버 여론조작 댓글 공작의 실체가 드러나며 수사한 결과 2017년 10월 25일 박형준이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매일 업무를 보고하는 정황을 포착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출처. 다만 이런 보고를 했다고 해서 여론조작에 가담했다고 보긴 어려운 것이, 대통령이 여론의 분위기를 살피는 것대통령이 직접 지시를 내려 여론을 조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위 기사에도 나왔듯 여론 조작을 지시한 것이 아닌 여론의 분위기를 보고한 것에 지나지 않기에 직접적으로 여론을 조작하도록 지시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으면 정치 조작 전황이라 볼 수 없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원장인 박지원조차 박형준의 사찰 관여 의혹에 대해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혀, 박형준 예비후보에 대한 근거 없는 정치공세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

박형준 본인 역시 "알지도 못하고 들은 적도 없다"며 "정무수석실과는 전혀 관계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국정원의 답변을 거론하면서, "국정원 고위관계자가 선거를 앞두고 일부 언론에 얘기를 흘려 이슈화하는 것 자체가 선거개입 또는 정치개입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충분하다"고 했다. #


2.4. 정계 복귀 이후[편집]



2.4.1. 자유한국당 혁신통합추진위원장[편집]


통합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범중도보수를 비롯해 야권의 통합에 나섰다.

2020년 1월 16일 새보수당의 요구 당대당 통합 논의는 부적절하다고 공개적 반대 의사를 표출한다. 이에 새보수당에서 박형준에게 시민단체가 참여한 혁통위는 자문기구일 뿐이며 당대당 통합 논의에 박형준이 끼어드는 것은 월권이라고 비판한다. “박형준 나가라” …보수 통합 방식 두고 갈등 고조

2020년 1월 20일 자유한국당에서 박형준의 혁신통합추진위원장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새보수당과 당대당 통합협의체 구성을 수용하며 논란을 일소했다.

2020년 1월 21일 반나절 일정으로 제주특별자치도를 방문하였고, 원희룡 지사에게 범중도보수신당 합류 동참을 요청하였고 결국 원 지사는 범중도보수신당 합류를 선언하였다.

1월 29일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21대 총선에서 통합 성공하면 과반까지 가능하고 주장하였다. 인터뷰 기사.

2월 6일 중도·보수 야권 통합을 추진 하며 본인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혁신통합추진위원회(통추위)가 6일 통합신당준비위원회(통준위)를 출범하고 공동위원장 중 한명이 되었다.

이후 미래통합당이 출범하면서 미래통합당 혁신통합추진위원장이 되었다. 2020년 3월 9일, 21대 총선 비례대표 출마를 선언하며 미래한국당으로 당적을 옮기는가 싶었지만, 거센 비판을 받으며 2시간 만에 공천 신청을 취소하였다. 이후 본인의 공천 신청으로 혼란을 초래한 것에 대해 본인이 직접 사과했다. 박형준, 미래한국당 공천 신청→철회 번복…“혼란 끼쳐 죄송”


2.4.2. 21대 총선 미래통합당 공동선대위원장[편집]


김종인 영입설이 파다하던 미래통합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 자리에 김종인 전 대표의 고사로 황교안 대표가 앉았고, 추가로 통합을 이끌었던 박형준 교수와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를 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하여 삼두체제에 돌입했다. 박 교수는 공천 신청 후 번복 해프닝을 겪자마자 다시 큰 자리에 앉게 되었다. 김종인 전 대표도 돌아와 4인 공동체제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차명진의 세월호 막말 사태 등 미래통합당에 악재가 연이어 터졌는데, 이후 인터뷰에서 개헌저지선도 위태롭다는 발언을 하였다. 보수 지지자들은 엄살작전이라고 생각했으나 미래통합당이 103석을 얻어 개헌저지선에 턱걸이하면서 박형준의 발언은 현실이 되었다. 당연히 이 반응이 나왔을때, 보수 지지자들은 당황했으며 당장 김종인 선대위원장이 그정도는 아니라면서 선을 긋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수 인사 중에는 거의 근접하게 총선 판세를 읽었던 셈이다. 선대위원장 김종인이 지나치게 현실과 동떨어진[5] 예측으로 괜히 김종인이 선거의 구세주라고 굳게 믿고 과반을 기대하던 선거날 통합당 지지자들의 충격과 공포만 일으킨 것을 생각하면...[6]


2.5. 부산광역시장 보궐선거 출마[편집]


총선에서 완패한 이후로는 잠시 정치계 일선에서 물러나고 다시 보수 논객으로 돌아가 TV조선강적들과 같은 정치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2020년 7월 이후로는 오거돈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부산광역시장 출마설도 나오는 등 # 다시 정치계 일선에 등장할 수도 있다는 평이 있었다. 그리고 9월, 지역언론인 국제신문 보도에서 “부산은 리더십에 따라 발전 잠재력이 큰 도시다. 통합당이 열린 경선을 한다면 고민해 볼 생각이다”고 말하며 부산시장 출마 의지를 보였다. # 그리고 부산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는 선공후사의 자세로 많은 양보를 해 왔다”며 “이제는 개인 욕심을 내겠다”고 선언하며 부산시장 출마를 공식화했다. #

부산광역시장 여론조사 결과들에 대해서는 2021년 재보궐선거 문서 참조.

2020년 12월 8일, 드디어 부산시장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본격적으로 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12월 15일, 부산 북항 컨벤션센터에서 출마 선언식을 열고 부산시장 보궐선거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 같은 날 발표된 아시아경제-윈지코리아컨설팅 여론조사에서도 가상 대결에서 민주당 김영춘 국회사무총장을 오차범위 밖에서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

2020년 12월 현재 발표중인 모든 여론조사에서 정당 후보군 조사와 가상대결 양쪽에서 오차범위 밖 선두를 달리고 있다. 대국민 여론조사를 최대한 반영하기로 경선룰이 확정된만큼 향후 유리한 고지를 점할 가능성이 높다. 또 국민의힘 내에서 박형준 다음으로 지지율이 높은 이언주의 경우에는 민주당 후보와 가상대결을 했을 때 오차범위 내에서 고전하고 있는 반면[7], 박형준은 민주당 후보를 상대로 한 1대1 가상대결에서 오차범위를 벗어나는 큰 격차의 우위를 나타내는 등 월등한 본선경쟁력을 보여주고 있다.

2월 16일 있었던 국민의힘 부산시장 예비후보 1차 1대1 토론회에서 이언주 후보와 맞붙었는데, 박형준 후보는 이 후보의 정체성을, 이언주 후보는 박 후보의 이명박 정부 당시 불거졌던 각종 의혹을 문제삼으면서 두 후보가 거친 설전을 벌였다. 이때문에 박형준 후보가 마지막에 사과까지 했다. 토론평가단은 박형준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이어 19일에 있었던 박성훈 후보와의 토론에서는 정책 검증에 주력하며 토론평가단의 좋은 평가를 받으며 우위를 굳혔다.#

3. 비판 및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형준(1960)/비판 및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정치 성향[편집]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 의 3가지를 보수의 핵심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그의 기본이념은 고전적 자유주의가 주장한 소극적 자유를 전제로, 신공화주의적 자유[8]와 적극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며, 이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이다. 다만 공공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시민적 덕성과 사회 내의 연대정신을 강조하며, 모든 것을 시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자유방임주의, 자유지상주의 등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기본 개념 중 하나인 최소 국가론도 부정했고, 작은 정부/큰 정부 프레임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보면 그의 정치관은 개인의 자유를 전제로 하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결국은 함께 더불어 사는 공화 정신이 필요하다는 이념이다.

또 행복을 매우 강조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개개인마다 행복을 느끼는 일이 다르다는 '행복 다원주의' 를 제창하지만, 동시에 평생교육과 타인과 함께 사는 삶이 행복에 매우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공화주의적 면모도 있어서 그런지, 사회적 합의와 적절한 절차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대한민국 보수 정치인 중에 공화주의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유승민 의원과 비교해 보면, 유승민 전 의원은 시민적 덕성과 공공선, 헌법정신을 가장 중시하는 고전적 공화주의자인 반면[9], 박형준 교수는 자유주의가 공화주의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그러면서도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상호 보완성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한다.

소련이 주도한 사회주의는 실패했으나,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성과도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스웨덴발렌베리 가문과 경제 자유도[10] 등을 들면서, 스웨덴식 사민주의가 반시장적이 않음을 피력하기도 한다.

정계 복귀 이후, 보수 통합을 주도하였고, 그 이후로도 황교안과 한동안 호흡을 맞췄다. 황교안이 대체로 범친박에 뿌리를 두었음에도 적극적으로 기용을 한 셈. 미래한국당 공천 관련해서는 한선교 당시 대표가 다름아닌 황교안 대표가 박형준 선대위원장의 공천을 요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위에서 보듯이 대표적인 친이계 인사인 그를 황교안이 중용한 것이 포인트.

그의 정치이념에 대해 더 깊게 알고자 하는 사람은 '보수의 재구성 : 새로운 정치를 위한 자유공화주의 선언' 이라는 그의 저서를 읽어보면 된다.


5. 방송 출연[편집]


연도
방송사
제목
2013
SBS
최후의 권력
2014 ~ 2018
MBC
시사토크 이슈를 말한다
2017 ~ 2019
JTBC
썰전
2019 ~ 2020
KBS
정치합시다
2019~
TV조선
강적들


6. 저서[편집]


연도
출판사
제목
1990
학문사
현대 사회와 윤리
1991
백산 서당
현대 노동 과정론
1992
동아대학교 출판부
현대 사회와 이데올로기
1994
길벗
21세기 프론티어
1996
박영률 출판사
정보화의 문명사적 의미와 국가 전략의 방향
1997
동아대학교 출판부
21세기의 이해
2001
의암 출판 문화사
성찰적 시민 사회와 시민 운동
2007
한국 행정 연구원
규제 협상의 적용 방안에 관한 연구
2019
메디치 미디어
보수의 재구성 (공저)



7. 기타[편집]


  • 이재오, 이동관, 임태희와 더불어 그야말로 이명박 대통령 시절, MB키즈라고 불리며 대통령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그보다 더 사랑을 받았다고 평가되는 사람은 이명박의 정치 입문 이전부터 가신[11]으로 활동한, 진정한 이명박의 집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김백준[12] 밖에 없다.[13]

  • 남경필과 사적인 친분이 있다.[14] 썰전 238화에서 말하길 남경필의 장남이 마약 투약으로 체포된 후 속상한 마음에 문자 메시지로 "형, 가슴에 비가 내려요"라는 말을 했다고... 2017년 광역서울도 토론회에서 서로 옆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찍히기도 했다.

  • 유시민과 매우 가까운 사이인 걸로 알려져 있다. 서로 국회의 같은 축구팀에서 뛴 적도 있고, 같은 나이[15]에 동세대를 지낸 정치인들이기도 하고... 유시민은 JTBC 뉴스현장에서 토론 상대로 누가 좋냐는 사회자의 질문을 들었을 때 유승민과 함께 박형준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곧 박형준을 합리적인 보수로서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 최근 박형준이 썰전에서 자신의 하차요청글이 빗발치고 있다며 하소연할 때 적극적으로 위로해 준 것도 유시민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박형준을 제작진에게 적극 추천한 사람도 유시민이다.

  • 토론 능력에서 그 유시민도 몇 안 되게 인정한 인물이 박형준 본인과 유승민이고, 본인도 뛰어난 토론 능력으로 유명하나, 100분 토론 당시 노회찬의 공격에는 잠시 쩔쩔맨 적이 있었다.

  • 썰전 226화에서 유시민과의 토론.
박형준: 미국의 재협상 요구를 보면 한미FTA가 미국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한국에게 유리한 협정이었다는 반증이죠. 물론 한미FTA는 참여정부에서 시작했던 거지만 얼마나 반대가 심했습니까? (현장에서 웃음터짐) 제가 정무수석할 때인데, 나라팔아먹는다고 그렇게 결사반대하던 사람들 지금 다 어디에서 뭐하고 있냐고요.
유시민: 원래 하던 대로 했으면 더 잘되었지, 귀하 정부에서 물러섰잖아요.
박형준: 물러서긴 뭘 물러서?[16] 오함마를 휘두르고, 국회에서 최루탄을 터뜨리고, 정의화 국회의장은 아직도 기관지에 장애가...[17]
유시민: 70점 받을 수 있었는데 60점짜리 협정으로 바뀌었잖아요.
박형준: 솔직히 그런 문제 때문에 반대한 게 아니잖아.[18]
유시민: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네.
이에 김구라는 유시민더러 한 방 먹었다며 웃었다. 227화에서 김구라가 유시민에게 주변 반응이 어땠냐고 묻자 유시민이 말하길 그동안 매너리즘에 빠졌던 걸 반성하는 계기로 삼길 바란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 이렇게 유시민과 나름 막역한 사이인 듯 했으나, 2020년 21대 총선을 거치며 급격히 냉랭해졌다. 유세 기간 막바지, 논란이 되었던 유시민의 180석 논란에서, 미래통합당 선대위원장이었던 박형준이 그 말을 캐치해 누구보다 가열차게 정쟁에 이용했기 때문. 투표가 끝나고 KBS 개표방송에 함께 출연해, 미래통합당이 출구조사에서 유리한 것으로 보이자 옆에 있던 유시민을 비웃듯 "그 말을 캐치했기에 우리가 그나마 이만큼 선방했다"며 자화자찬했고, 유시민은 그 말을 듣자 표정관리가 안 되며 "이제 인간적인 정은 싹다 무시하도록 할께요." 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 개표에서 박형준은 완전히 역관광당했다. 개표 막바지 180석이 확정되었을때 박형준 교수는 참담한 표정을 가리지 못한채 패인에 대해 조목조목 얘기했는데, 이때 유시민이 끼어들어 그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더 있다며 부아를 확 돋구기도...

  • 썰전 244화에서 밝히길 국민의당에 합류할까 라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제3지대론'을 추진할 당시 우리 정치가 양극화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봐서 중도에서 합리적 진보와 보수가 만나는 틀을 구상해서 실행하려고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잘 안됐다고 밝혔다. 이를 듣고 게스트로 온 박지원 의원이 그때 그 선택(국민의당에 안 온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말해 빵 터트렸다.


  • 진보 진영의 정치인들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많은데,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정청래다. 정청래의 정치 성향을 보자면 어색해 보이는 조합이지만 정청래가 박형준과 함께 썰전에 출연했을 당시 말한 바에 의하면 함께 일했을 때 헤매고 어려웠던 부분을 박형준이 많이 도와주었고 자신이 의견을 다소 과격하게 피력할 때에도 매우 합리적인 의논을 할 수 있었다고... 둘 다 성향이 성향이다보니 부딪힐 때도 많지만 정청래는 늘 박형준을 얘기할 때 존경스럽다며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빼먹지 않는다.
  • 자신도 과거엔 좌파였다고 밝혔다. # 5공 때 엄청난 탄압 속에 젊은 지식인들은 쉽게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모택동주의에 빠져들었고, 박형준 본인 또한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갔다고 한다. 다만 애초부터 박형준 본인은 교조주의적 태도와는 거리를 두었고, 88년 유럽에 체류하며 동유럽체제 문제점을 보면서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희망의 원리가 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19] 이후 해당 과거가 재조명되면서 과거 주사파였던 하태경과 비슷하게 자유한국당을 비난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실제로 하태경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

  •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캠프 대변인이었기 때문에 당시 박근혜 캠프 단장이었던 유승민과는 한때 정치적 대립 관계였다. 하지만 썰전에서 말하길 창과 방패 같은 관계(유승민이 창, 박형준이 방패)였다고 하며, 유세가 끝나고 서로 회식 자리에 함께해서 덕담을 건넬 정도로 개인적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박형준이 친박 때문에 정계에서 은퇴하고 유승민도 비박계가 된 지금은 서로 협력하며 원만하게 지내는 듯. 다만 박형준은 자신이 국회사무총장 시절 많이 도와줬는데 유승민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살짝 디스하기도 했다. 유승민이 2017년 바른정당에서 개강한 지방선거학교 강연에 박형준을 초청하기도 했다.

  • 263화에서 박형준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이 정치보복이라고 비판하며, 언제까지 이런 방식을 계속 할 수 있겠느냐, '덕이 미움을 이긴다.' 라고 국민통합으로 '미움의 정치'를 넘어서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이에 유시민은 동의하면서도 통합이라는 미명하에 과거의 불의를 덮으면 과연 통합이 될 지라는 딜레마가 있다고 반박했다. 박형준은 덮자는게 아니라고 했는데 이와 관련해서 논란이 일어났다.

  • 썰전 255화에서 MB정부의 노무현 수사에 대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 과정에 정치보복적 성격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당시 MB 청와대 내에서도 신중한 수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MB도 구속 기소에는 부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관련해서 같인 친이계 출신이지만 정두언의 주장은 맥락이 조금 다른데 이명박이 구속 기소에 부정적이었지만 어차피 재판에서 실형인데 구속시키면 이명박 본인이 구속을 주도한 것으로 돼 정치적 부담을 느낀 것이라고 한다.# 이 두 주장은 다른 맥락이지만 양립도 가능하다. 당시 청와대가 노 전 대통령 구속 건에 대해 신중론과 정치적 부담 등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구속수사에 회의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20]

  • 2009년 행정구역 개편 논의가 무르익을 당시(청와대 정무수석 재직)에 광명시, 구리시의 서울편입 논의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력하기도 했다. 기사

  • 동아대 대학원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강의의 충실도와 깊이가 남다르다고 한다. '동아대 교수로 계시기엔 아깝다'라는 다소 셀프디스스런 코멘트를 하는 동아대 학생들도 있다.


  • 21대 총선 이후 홍준표는“지금 미래통합당은 당명부터 무엇을 추구하는 정당인지 불확실하고, 황 전 대표의 무능과 "박형준의 몽상"이 만들어낸 ‘잡탕당’에 불과하다"고 황교안, 박형준을 함께 묶어서 혹독한 비판을 했다. #

  • 부산시장 출마가 가시화된 때인 2020년 11월 18일 MBC의 '시선집중'에 출연하여 동남권 신공항 문제에 관해 '당연히 가덕도로 가야'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와대 보좌관이던 때인 2011년 4월 6일에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에는 이명박이 신공항을 백지화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 옹호한 바 있다.#


8.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파일:민중당 1990년 글자.svg

1990 - 1992
창당
정계 입문[21]

[[무소속|
무소속
]]

1992 - 1994
정당 해산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4 - 1995
입당
정계 복귀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7
당명 변경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1997 - 2012
합당[22]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2012 - 2020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

[[미래한국당|
파일:미래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20
입당

[[무소속|
무소속
]]

2020
비례대표 출마 철회

[[미래통합당|
파일:미래통합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20 -
복당

파일: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svg

2020 -
당명 변경

9.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수영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50,803 (58.80%)
당선 (1위)
초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27,940 (41.96%)
낙선 (2위)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무소속|
무소속
]]

24,630 (29.59%)
낙선 (2위)



10.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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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썰전 269회에서 말한 내용.[2] 나중에 오마이뉴스를 창립하는 오연호 기자 등을 지도하였다고 한다.[3] 다만, 유시민이 박형준에게 본인도 그런 소리를 듣고 있다며 위로를 해 주기는 했다.[4] 방송 내용을 들어보면 초반부에 박형준이 19대 총선에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무소속으로 출마한 시점은 19대가 맞다. 숫자를 착각한 듯.[5] 과반을 확신한다는 둥[6] 이날 김종인만 믿던 미래통합당 지지자들의 충격은 말로 형용할수 없을 정도였다. 당이 과반이라는데 갑자기 민주당 180석이 뜨고 있으니...[7] 이언주가 부산이 고향이기는 하지만 각종 발언으로 논란이 쌓인데다 오랫동안 부산에서 활동을 해 온 박형준이나 김영춘과 달리 지역구가 경기도 광명이었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바닥을 친 이후 고향 부산으로 내려와 21대 총선을 치르고 나서 눌러앉은 것이므로 어찌보면 자연스럽다. 거기에 이언주 예비후보의 본인 주소지는 여전히 부산이 아닌 경기도 성남시 이다.[8] 비간섭을 중심으로 하는 소극적 자유와 달리, 신공화주의적 자유는 예속받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9] 징병제에 대한 옹호, 보수는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라는 소신 등이 이를 알 수 있다.[10] 스웨덴의 경제자유지수는 세계 20위권 안에 속한다.[11] 이명박이 현대에서 일하던 시절에 그 역시 현대 직원이었다.[12] BBK 주요 관계자 중 한 명으로, 특별한 정치 경력은 없으나, 이명박 서울시장 때는 서울 메트로 감사를 맡았고, 대통령이 되자 청와대 총무비서관 및 총무기획관, 즉 총무실 한 자리로 4년 내내 있었다. 그 이후 그 자리를 맡은 사람은 이명박의 친형 이상득의 비서실장이었던, 이상득의 오른팔 장다사로였다. 2010년 당시 자원외교 논란의 중심이던 메릴린치(뱅크 오브 아메리카 계열사)에 김백준의 아들 김형찬(피터김)이 상무로 들어갔었고, 훗날 메릴린치 한국지점장에 투자은행부문 대표까지 되고 승승장구하다가 2016년에 그만둔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2010년 당시 메릴린치는 자원외교 자문비에 힘입어 무려 저 유명한 골드만삭스를 제치고 외국계 자문회사 중 자문 쪽 1년 수입으로 1위를 찍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당시 그냥 메릴린치가 잘 나간다는 기사만 수없이 나오다가, 그가 김백준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이명박 정부 다 끝나고 나서야 알려진다.[13] 2017년 11월 20일, MBN판도라에서 주진우 기자는 박형준은 MB 정권 당시 이명박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라고 지목했다. 이에 정두언 전 의원은 자신이 알기로는 그렇지 않다며 일을 잘해서 그럴 수는 있겠지만 확실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박형준 본인 또한 방송에서 그건 아니라고 주장했다.[14] 남경필은 또한 유시민과도 사적인 친분이 있어 서로 농담을 나누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다.[15] 박형준의 출생년도가 1960년이기는 하지만, 빠른 년생이라서 사실상 유시민과 동갑으로 취급된다.[16] 재협상으로 바뀐 건 유예 세 개 정도인데, 이 유예들 중 한국이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는 자동차 관련이 한국에게 불리하게, 미국이 강한 축산물과 의약품은 한국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17] 김선동이 최류탄을 터뜨릴 때에 가루를 고스란히 마신 사람이 당시 회의를 진행하던 정의화 국회부의장이었다.[18]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에 진영논리로 무분별하게 반대했다는 뜻. 유시민도 일정부분 인정했다.[19] 인물과 사상’ 12월호에 기고한 글.[20] 실제로 당시 여권에서도 갑론을박이 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전직 대통령인데 다 준비해놓고 한번에 깔끔하게 끝내야지 뒤로 언플하면서 모욕 주면 되냐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왔을 정도.[21] #[22]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