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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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성립기와 중심지
2.2. 전성기 (5세기 말)
2.3. 신라와의 동맹 (522년)
2.4. 백제와 동맹하다 (541년)
2.6. 멸망 이후
3. 문화 및 기타 사항
4. 반파국 연표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오늘날 경상북도 고령군 지역에 있었던 가야 여러 나라 중 하나. 흔히 삼국유사의 표현인 대가야로 알려져 있으며[1], 가야 후기의 가야 일대 정세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시조이진아시로 <지리지>에 의하면 520년간 존속했었다고 하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전성기에는 지금의 영호남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이후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한 백제신라 사이에서 치이다가 세력을 잃고 562년 신라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일본서기에서는 가라(加羅: 카라)[2], 반파국(伴跛國: 하헤노쿠니)[3] 등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한자로 작성된 일본서기의 원문이 아닌, 일본서기 현대 일본어 번역본에서는 임나(任那), 고령가라(高靈加羅)[4] 등의 용법도 등장하는데, 이게 실제로 한문 원문에서 사용되는 표현인지 아니면 현대 일본어 번역자들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달아놓은 주석인지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2. 역사[편집]


백제는 물론 신라나, 같은 가야 권역인 금관국보다도 조금 늦은 시기에 성장을 시작했으나, 빠른 속도로 특유의 문화를 성립시켰다. 주변 지역에 대가야 양식을 전파한 것을 보면 전성기 일시적으로는 오히려 신라보다 지방 장악력이 더 강했던 측면도 엿볼 수 있다. 신라 양식 유물은 진한 전체에 퍼졌지만 공유되는 신라 스타일 외에 각 지역의 토착 재지 양식도 같이 버무려져 5세기 말까지 꾸준히 발전한다. 그런데 대가야 양식은 주변 재지 요소의 발달을 억제하고 대가야 양식 일색으로 장악하는 경향이 있다. 즉, 둘 다 고만고만하던 시절 기준으론 지역별 위계질서가 좀 느슨한 신라 쪽보다 더 각이 잘 잡혀 있었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정작 신라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한 반면, 여기는 완전한 통합을 못 하고 위계질서가 잡힌 정도 이상까진 성장하지 못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2.1. 성립기와 중심지[편집]


반파국이 자리잡을 오늘날 고령군 지역은 고인돌 유적을 보아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5]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나오는 변진반로국이 기원이 되었다고 여겨진다.[6] 변진반로국은 지금의 대가야읍이 아니라 회천 건너편인 개진면 양전리, 반운리 일대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반운리에 있는 높이 129m의 낮은 언덕인 독산 정상에는 2~3세기의 철제 농경 도구, 철제 무기, 목곽묘가 조사 결과 드러났다. 여기서 출토된 와질토기는 부산 노포동 고분군이나 울산 웅촌면 하대마을 유적과 양상이 비슷해, 낙동강을 타고 타 지방과 교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소국체는 일찍부터 성립됐지만, 변한 시절부터 초기 가야를 김해 지역의 금관 연맹이 주도하던 시절에는 고고학적으로 4세기 이전 목곽묘 계통 분묘의 규모와 부장품의 양으로 볼 때 김해에 비해 매우 초라한 정도라 이후처럼 가야를 주도하는 나라가 아니라 흔한 여러 가야 제국(諸國) 중 하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김해 금관 연맹이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 때 상당히 붕괴당한 즈음부터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이다.[7] 5세기 이후 고분에서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 동시기 김해 지방의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진다. 이렇게 금관국의 몰락과 반파국 부흥의 시기가 맞물린다는 점에서 광개토대왕에게 당한 금관국의 유민들이 유입되었을 수도 있지만 가장 보수적으로 변하는 묘제나 토기 양식은 금관국과 여전히 차이가 있어 일부 고급 제철기술자의 유입은 있었을지 몰라도 주류는 어디까지나 원 지역 주민이 중심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령 지역은 기존의 맹주(로 여겨지는) 김해와 거리가 멀고 중국과 가까운 선진 지역인 고구려백제와는 가까우며, 훗날의 이중환택리지에서 논이 기름지고 생산성이 좋은 땅이라 극찬한 땅인 만큼[8] 가야권 다른 나라에 비해 땅의 조건부터가 좋았다.

반파국이라는 국명 또한 주로 초기에 쓰이던 이름으로, 400년 이후 원래 가라라는 이름을 쓰던 김해 금관국이 약체화되자 그 이름을 뺏어와 가라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고 보여지는데[9] 지산동 고분군 발굴 당시 특히 이 시기부터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서 무덤을 만들어서 반파국의 국력 신장을 나타내고 있다. 본래 반파국의 중심지는 낙동강가에 가까운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와 반운리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이후 지금의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로 천도했을 것이라는 것이 현재 학설.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고령초교 운동장 구석에는 대가야의 왕이 물을 마셨다는 우물, 어정이 남아 있으며, 1977년 발굴 결과 우물 밑바닥에서 대가야 양식의 목긴 항아리와 적갈색 안질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우물 남쪽으로 500여미터 떨어진 고령 향교 옆에는 대가야국성지라는 비석이 남아 있는데 이곳이 왕궁 터라고 추측된다. 1910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 타다시가 이곳 일대를 조사하여 기와 조각을 발굴했고, 2000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이 축대 근처를 발굴한 결과 부뚜막 2기와 대형 건물터, 그리고 500년 전후 시기의 사발, 그릇받침, 접시 뚜껑 등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하여 추측으로만 남을 뿐이다.

21세기 들어서 다시 고고학적 조사를 해 본 결과, 대가야궁성지로 알려진 지점 북쪽의 평탄한 땅에 토성 유적이 발견되었다. 주소는 연조리 594-4번지로 이곳을 대가야 왕성의 일부로 추정했다. 여기서 U자형 해자와 해자 밖 경사면에 3열의 석축, 돌 사이에 판축식으로 흙을 다진 토성이 확인되었다. 다만 맞더라도 극히 일부분일 것이고 오랜 세월 교란돼 왕성임을 직접 증명하기엔 미흡하다고 한다.[10]

한편 이 시기쯤인 일본서기 기록상 262년[11] 백제와 유착한 왜인 장수 사지비궤신라미인계에 넘어가 가라를 공격하는 바람에 왕실이 백제로 도망치고 백제 장수 목라근자가 대신 출진해 가라를 회복시켜 준 사건이 있었는데, 일본서기에서 수식어 없이 '가라'는 보통 반파국을 말하는 것이기에 이 사건을 반파국에 관련된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이것은 금관국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차피 교차검증도 되지 않는 이야기니 적당히 걸러 듣자.


2.2. 전성기 (5세기 말)[편집]


5세기 초쯤부터 급격하게 강한 세력이 등장한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특징으로는 5세기 전반부로 편년되는 고분이 매우 많다는 점인데, 단일한 왕가 중심의 정권이라면 이렇게 비슷한 시기 고분이 많을 이유가 없다. 즉 여러 집단이 서로 비슷한 위계를 가지고 같은 묘역을 공유한 것으로 추정된다.[12] 5세기 중반 이후로는 이런 현상이 마무리되고, 다른 가야 지역과 완전히 구분되는 대가야 양식 가야토기가 등장하는 등 특색있는 문화를 발전해나가게 된다. 고령 왕성의 부속 산성인 '주산성'은 백제의 부소산성과 입지와 규모가 비슷할 정도로 5세기에는 대가야가 한때나마 백제에 맞먹게 강성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이 주산성을 중심으로 대가야 왕도를 방어하는 다수의 산성이 서로 연계된 성곽 방어망이 축조돼, 낙동강 동편 지금의 대구 지역까지 지배하던 신라는 이후 150년 동안 낙동강 건너 대가야를 공략하지 못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백제는 개로왕이 전장 한복판에서 사형당하고 수도 위례성까지 잃는 등 말 그대로 박살이 나고,[13] 금관가야는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차츰 주도력을 상실해 평범한 가야소국 중 하나 정도로 떨어지고 이 시기 신라마저 고구려에게 내정간섭을 당하는 반속국으로 전락하자,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대가야는 이러한 한반도 남부지방의 힘의 공백을 틈타 성장하기 시작했다. 고령의 왕릉급 분묘가 모여있는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출토 철기 유물이 다른 가야 지역 고분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과 양 모두 다양하고 많아서 반파국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5세기 후반경에는 고령계 유물이 합천, 거창 등 인접 지역을 넘어서서 김해, 창원, 함안, 함양, 산청, 진주, 의령 등 가야권 대부분 지역에 퍼졌고, 심지어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정신없었을 5세기 무렵에 반파국은 원래 백제의 영향권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서남쪽 방향으로도 세력을 확장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호남 동부 일부 지역(섬진강 유역)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편 이 시기 호남 동부에서 백제계 유물의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일반적으로 가야 = 경상남도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5세기 전반에 먼저 대가야의 중심지 고령군과 호남 사이인 서부경남 일대(진주시[14], 합천군[15], 거창군[16], 산청군[17] 등)의 대가야화를 거쳐 5세기 경에는 지금의 여수시[18], 순천시[19], 광양시[20], 남원시[21], 곡성군, 구례군, 장수군[22], 진안군[23], 임실군[24] 등에서도 고령계 가야토기가 백제계 유물이나 이전의 토착 양식을 누르고 다수 출토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토기뿐 아니라 고령 지산동 고분군 32~35호분에서 출토된 철기 축소 모형 같은 특징적인 부장품이 남원 월산리에서 나오기도 하고, 부장품이야 받아와서 묻었다고 쳐도 특히 두락리 1호분처럼 묘제까지 전형적인 대가야식으로 세장한 평면구조를 보이기도 한다. 현대 한국인이 양복을 입고 아파트에 살며 식단도 서구화가 진행됐지만 장례문화의 기본 틀은 옛날과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묘제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두락리 1호분 등에 묻힌 사람이 고령 대가야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입증한다.[25]

물론 출토유물 고고학 양상에만 근거해서 어느 나라의 세력권을 추정하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26] 이 정도로 고고학적 지표가 뚜렷하게 드러난 정도면 어느 정도 대가야의 영향력에 대한 최소한의 파악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호남 동부보다 밀도는 낮지만 광주광역시[27][28][29], 부안군[30], 해남군[31], 나주시[32]까지 대가야계 유물이 소수 출토되기도 했다.

그리고 대가야는 이 섬진강 교역로를 지키기 위해 산성봉수대를 촘촘하게 깔아서 체계적으로 지켰다. 전북 장수군, 완주군 등지의 전북 동부 지역에 가야의 봉화대 유적이 집중적으로 발견됐다. 이 전북 동부 지역 봉수대 유적에서 가야 토기가 다수 출토되기도 했고, 고려 이후 수도가 중부 서해안 지방에 자리잡았는데 이 전북 동부 지역은 고려나 조선이 봉수대로 사용하지 않았던 경로였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의 봉수대가 아닌 가야의 봉수대임을 알 수 있다.역사스페셜: 제4의 제국 대가야, 백두대간을 넘다

그러나 그렇다고 백제가 이 호남 동부를 그냥 내버려둔 건 아니었다. 반파국보다 분명 반수 아래급이었을 망정 호남 서남부 영산강 유역 세력은 분명 어느 정도는 융성을 자랑했기 때문. 이런 영산강 유역 세력이 호남 동부로 전혀 뻗어나가지 못한 건 백제의 강력한 견제와 감시 탓이었다. 반파국 같은 비마한 계열이야 교역 정도로 만족한다면 후기 마한 영도국인 백제 입장에선 아무래도 상관 없는 얘기였으나, 백제국의 마한 영도국 지위 자체를 한때 정면 부정한 바 있는 영산강 유역 마한 신미국 세력이 같은 마한 소속인 호남 동부까지 장악한다면 백제국은 마한 통합 이데올로기 자체에 크게 생채기를 입는 판이었다.

다만 침미다례가 근초고왕 남벌 기사에서 비하용어인 '남만'으로 표현된 건 이들의 문화가 딱히 이질적이어서가 아니라, 이들이 백제국에게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3]

한편 호남 동부는 이미 4세기부터 소가야와 거래를 텄고 5세기에는 아라가야, 6세기에는 대가야와 거래를 터서 이들 대가야 연합과의 교역을 통해 차차 성장하고 있었다. 호남 동부의 고고학적 발전 속도는 백제와 가야는 고사하고 아예 호남 서남부와도 비교가 안 되는 수준으로 미발전 지역이었으니, 평소부터 오랜 거래 관계로 이 지역을 잘 아는 대가야가 백제가 어려운 틈을 타 침투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백제 변방 영역을 침범한 셈이지만 웅진천도 초기 백제가 워낙에 내외로 혼란스러운 상태라 일단은 묵인했는지 백제와 대가야의 우호관계는 한동안은 계속 이어졌다.[34]

다만 대가야가 호남 동부를 직할령으로 다스린 것은 아니고, 이 지역의 문화적 독자성을 강조하는 지역 학계에서는 대가야와 다른 독자적인(즉 영향을 받는 정도) '장수가야', '운봉가야' 등 명칭으로 호남 동부의 가야 문화를 정의하려 하기도 한다.

서해에 면한 지역인 부안군에도 조선시대 고지도에 가야포(加耶浦)라는 지명이 전하는 것과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에서 대가야 계통 유물이 출토된 것을 근거로 일시적으로라도 가야 세력이 서해안까지 진출했다고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주보돈 교수는 이 루트를 4세기 후반부터 이어져온 백제와 대가야의 우호 관계하에서, 섬진강을 자유롭게 이용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사용한 통로로 추정했다. 그러나 외부와의 교역 통로를 동맹이라지만 어쨌든 외국인 백제에 크게 의존하는 점은 대가야에게 꽤 부담으로 다가와서 섬진강이란 대체 루트를 장악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위와 같이 백제의 영향력이 강하던 섬진강 유역을 얻은 것을 통해 남방 해상을 통한 중국, 일본 등 외부 교역도 놓치지 않아 동쪽에서 금관국의 쇠퇴와 신라의 강성으로 잃어버린 낙동강 수로를 대체할 수도 있어서[35] 479년에는 하지왕(荷知)이황해를 건너 중국 남제에 단독으로 조공사신을 보내 백제나 신라와는 차별화되는 독립적인 지배권력의 존재를 알리고 '보국장군 본국왕' 작호를 하사받았다. 사실 당시 중국 남조는 유송(劉宋)이었는데, 마침 대가야가 사신을 보낸 그 해 송의 권신 소도성황제를 칭하고 제나라를 건국했기 때문에 하지왕의 사신 파견은 의도적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마치 제나라의 건국을 축하하는 듯한 형태가 되었다. 이는 가야가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낸 유일한 사례. 양직공도에서 다른 가야 국가들이 백제에 딸려서 겨우 조공하고 있었고 같은 시기 신라조차도 중국과 직접교역을 전혀 못하고 있었던 것[36]을 생각하면 이는 독보적인 것이다(다만 6세기 백제의 남방 진출에 압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왜국이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 대장군'으로 책봉받은 데서도[37] 자극을 받은 듯하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212년 이후 한동안 사라졌던 '가야' 기록이 481년 이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반파국이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결과물로 풀이된다.

게다가 중국뿐 아니라 일본 방면으로도 교역에 나서서, 5세기부턴 대가야산 금동관이 일본 후쿠이현 니혼마츠야마(二本松山) 고분에서 출토되고 기타 대가야 위신재는 일본열도 여기저기서 나오는 등, 원래 김해가 일본과 가깝다는 위치상 당연하게 금관가야가 맡아왔던[38] 왜국 방향 교섭마저 대가야가 주도권을 빼앗은 정황도 나타난다.

신라 눌지 마립간이 454년경 신라 땅의 고구려 군인들을 몰살시키면서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적대관계로 돌아섰고 나제동맹으로 외교 관계가 재편된 뒤에도, 백제와 신라는 전성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나제동맹으로 막아내는 데에 급급했으므로 이 시기 가야와는 그리 큰 노골적인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주변과 별 충돌이 없었기 때문인지 이 시기 가야 동향에 대한 기록 자체가 적은 편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5세기 후반 고령은 큰 규모의 고분이 집중 조영되고 있고 한국사에서 손꼽히게 많은 사람을 순장할 정도로 대가야 국력의 최전성기임을 알 수 있다. 481년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해 수도 경주 인근 미질부(지금의 포항시)까지 진군하자 백제와 함께 원군을 보내서 신라군을 도와 막았다. 원래 대가야와 신라는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 때는 고구려가 신라를 때려주는 정도가 아니라 서라벌 털고 멸망시킬 기세로 내려오는데 신라가 아예 없어져버리고 고구려와 국경이 닿으면 가야에게도 부담이니까. 아무튼 이제 국제 관계에서도 삼국에 이은 제4의 세력, 정치적 변수로 등장한 것이다. 496년에는 희귀한 흰 을 신라에 보내 호의를 표시하고 적당히 친신라 정책으로 정세를 유지했다.

경남 합천군 저포리 고분군에서는 대가야 양식의 토기에서 하부(下部)란 글자가 발견되었고 대왕(大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목긴 항아리도 발견되었다. 이것을 보면 알수 있는 것은 반파국은 왕을 대왕이라 불렀으며 대가야 내부의 통치를 위한 위세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진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지산동 고분군에서도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반까지 대형의 왕릉들이 열상(列像)으로 나란히 배치되기 시작한다. 또는 최고 지배자들의 묘역이 분리된 것으로 왕권의 강화 나아가 성읍국가를 넘어 초보적인 고대국가 단계에 돌입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고령, 합천 일부 지역이 포함된 왕도를 신라의 6부처럼 여러 부로 나누어 편제하고[39] 중앙과 지방의 구분이 생겨난 점, 대가야식 금공위세품의 분배, 대가야 산성의 분포를 통해 추정되는 대규모 역역 동원 체계 등으로써 고대국가 또는 그에 준하는 수준까지 올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홍익대 김태식 교수나 계명대 김세기 교수 등이 대가야 고대국가 진입을 주장한다.


2.3. 신라와의 동맹 (522년)[편집]


여기까지 크고 아름다운 대가야의 장밋빛 미래를 길게 썼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대가야가 이렇게 막강한 영역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 5세기에 대가야가 차지한 경남 서북부와 전라도 동부가 한반도에서 비교적 정치 체제의 발달이 느린 곳이었고, 둘째로는 강적 백제와 신라의 직접적 영향권 바깥이었는데다 마침 5세기에 이들이 고구려 때문에 약해져 신경쓸 수도 없는 무주공산의 타이밍을 잘 노린 것이었다.

허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이 나제동맹의 굳건함에 막히고 백제와 신라가 6세기 초부터 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자 상황이 다시 급변하기 시작한다.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 뒤 혼란기를 겪다가 무령왕 재위 무렵부터는 고구려에게 당했던 후유증을 극복하고 장수왕 때까지는 전혀 못하던 반격까지 시작하며, 잃어버린 한강 유역 대신 본격적으로 지금의 전라도 지역 경영을 시작하게 된다. 삼국사기 동성왕 20년(498년)에 백제가 탐라국을 공격하기 위해 무진주(광주광역시)까지 내려갔다는 것을 통해 이 시기 전라도 서남부 일대에 백제가 다시 그 영향력을 회복한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대가야가 차지한 전라도 동부 지역까지 백제가 노리게 되고, 전라도 동부 지역의 쟁탈전에 관한 국내 기록은 없지만 백제 기록을 인용한 일본서기+대가야의 영향을 받던 전라 동부 재지 세력의 쇠퇴와 소멸이라는 고고학적 성과를 통해 그 정황과 과정을 대략 파악해볼 수는 있다.

일본서기 기록상 512년(케이타이 덴노 6년) '백제가 일본한테 임나국의 상다리(上哆唎)·하다리(下多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4현을 달라고 요청했다'고 나와있는데, 일본서기 특유의 무조건 일본을 상국으로 갖다붙이는 기질을 빼고 보면 무령왕이 이끄는 백제가 대가야 영토인 4곳을 얻었다고 이해된다. 이 4현은 지금의 여수, 순천, 광양 지역으로 비정하는 해석이 일반적이다.[40] 바로 다음 513년 6월조 기사에는 백제와 반파국이 기문(己汶)이라는 곳을 놓고 영역을 다투는 모습이 보이는데, 기문이 지금의 어디인진 여러 설이 있지만 전라북도 동부 지역으로 비정된다.[41] 역시 일본서기 특유의 백제가 신하국이라는 식의 윤색 빼고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대가야가 (원래 백제 것인) 기문을 '약탈'해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백제측이 대외적으로 알려서 백제의 기문지방에 대한 침공 명분을 만들고, 동시에 왜국에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를 보내 선진문물을 전하는 등 국제여론을 유리하게 조성했다.

이렇게 호남 동부지역을 획득하게 된 백제는 급기야 반파국의 '전통적인 대외교역 창구'였던[42] 지금의 하동군인 대사진을 노리기 시작한다. 섬진강 하구로 이어지는 이곳 항구까지 잃으면 남해로의 진출이 아예 막히는 셈이므로[43] 필사적으로 막아내야 했고 일본서기 계체8년(514) 3월에 자탄(진주시)과 대사, 이열비(爾列比)와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아 마차해(麻且奚)와 추봉(推封) 지역까지 걸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봉수대와 저택들을 설치해 백제 및 왜국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 시기 반파국의 남해바다 제해권 다툼을 말하는 기록이 있는데, 일본서기 계체9년(515) 2월 및 4월조의 기사에서 왜국에 갔다가 돌아오던 백제 사신 문귀(文貴)장군을 왜인 모노노베노무라지(物部連)가 호송했는데, 사도도(沙都嶋)라는 섬(거제도로 비정되기도 한다)을 지날 때 '반파인이 사납게 군다'는 말을 듣고, 문귀 장군을 일단 신라 땅에 상륙시킨 후 모노노베노무라지는 수군 500명을 이끌고 곧장 대사강(帶沙江)으로 진격했는데, 반파국이 군대를 보내 공격하자 무서워서 달아나 문모라(汶慕羅)에 정박했다는 것이다.

결국 513년에 일본은 반파국이 가지고 있었던, 위에서 말한 기문과 대사(帶沙, 혹은 滯沙)지방을 백제가 달라고 해서 결국 줬다고 일본서기에 기록했는데 이 역시 일본이 맘대로 가야 땅을 백제에 떼준다는 식의 중간과정의 윤색을 빼면 백제가 반파국 땅 호남 동부(기문)와 하동(대사)을 빼앗으려 했고 일본 측은 이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529년 기사에서도 결국 대사지역을 백제가 차지한 것으로 나온다. 기록문헌이 전하는 것처럼 고고학적으로도 6세기 전반 여수 고락산성, 순천 죽내리 고분군과 성암산성, 광양 칠성리, 남원 초촌리 고분군은 양상이 가야계에서 백제계로 바뀌어가는 모습이 나타나, 백제의 지방 지배력이 이곳으로 본격적으로 침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중국과 교류할 수 없으니 바다 건너 중국에도 백제가 일방적으로 언론플레이하는 소식만 들어가서, 521년 '양직공도'에서는 반파를 포함한 가야 각국+기문 등 가야에서 빼앗았던 섬진강 소국+신라(사라)까지 전부 백제에 부속된 속국이라고 쓰고 있다.

이렇게 반파국은 여기저기서 백제에 밀리기 시작했으나, 가야 입장에선 다행이게도 그나마 아직 고구려가 장수왕 때만큼 효과적이지는 않더라도 백제 북쪽 변경을 줄기차게 침공해주던 시절이라 백제는 이 이상 동쪽으로 침입하려 하진 않았다. 사실 웅진백제는 한강유역 고토수복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으므로 반대편인 이 쪽 전선에 지나치게 집중할 이유는 적었다.

한편 반대편의 신라도 나제동맹으로 고구려를 막아냈고 고구려에 반격에도 나서서, 한때 포항까지 밀렸다가도 결국 서서히 수습하고 슬금슬금 북진해서 영덕군울진군을 지나 삼척시 지역까지 탈환에 성공하는 등 신라와 백제 양국은 국가의 체급에서 도시국가들의 느슨한 모임 수준에 머무르는 가야를 철저히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데는 장수왕 때부터 그동안 백제와 신라를 열심히 위에서 때려서 정신 못 차리게 해주던 전성기 고구려가 쇠퇴한 것도 그 원인 중 하나. 고구려는 장수왕 시절부터 수십년간 안 뚫리는[44] 백제, 신라 공격에 너무 오랫동안 국력을 낭비해왔고 안에서도 내분이 이어난데다 신흥세력 돌궐의 침입까지 겹쳤다.

신라는 백제와 달리 반파국의 영역을 직접적으로 침범하진 않았지만, 반파국의 본거지 고령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성주군, 경산시, 대구광역시 지역에 5세기 경부터 신라 토기가 늘어나는 등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45] 대가야는 신라의 침입에도 나름대로 대비했다는 것을 낙동강 서안에 가야의 성을 집중적으로 쌓은 것으로 간접적으로 알 수 있지만[46] 어쨌든 반파국 땅을 더 뺏어가고 더 위협적인 건 백제였기 때문에 그 대신 신라와 친밀하게 지내보기 위해 6세기 초 결혼 동맹을 시도한다.[47] 신라의 법흥왕 역시 가야에 영향력을 늘릴 수 있는, 좋으면 좋았지 나쁘진 않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몇 년간은 신라와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고 두 나라의 왕족 사이에서 월광태자가 태어나기도 했다. 524년에는 법흥왕이 남쪽 변경의 땅을 살펴보는데 가야왕이 직접 나가 만나 정상회담이 이뤄지기도 했다.[48]

그러나 일이 꼬여서 결혼 동맹은 결렬되고 오히려 반파국은 후기 가야의 맹주 역할조차 타격을 받고 가야 남부권의 주도권을 잠깐 함안 안라국이 쥐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5세기 때보다 다소 쇠퇴하게 된다.

九年 春三月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湌比助夫之妹送之

9년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49]

를 그에게 보냈다.

삼국사기》 본기 법흥왕 9년(522년)


가라왕(加羅王)이 신라 왕의 딸[50]

을 아내로 맞이하여 드디어 아이를 가졌다. 신라가 처음 여자를 보낼때 100인을 아울러 보내 그녀의 시종으로 삼았으므로, 받아들여 여러 현에 나누어 배치했는데, 신라의 의관을 입도록 하였다. 아리사등은 그들이 복장을 바꾸어 입었다고 성내며 사자를 보내 돌아가게 하라고 시켰다. 신라는 크게 부끄러워 그녀를 도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다.

"전에 그대가 장가드는 것을 받아들여 나는 즉시 혼인을 허락했으나, 지금 이미 이처럼 되었으니 왕녀를 돌려주길 바라오"

가라(加羅) 기부리지가(己富利知伽)[51]

가 대답하였다.

"부부로 짝지워졌는데 어찌 다시 헤어질 수 있겠소? 또한 아이가 있으니 그를 버리면 어디로 가겠소?"

결국 (신라는) 지나가는 길에 도가(刀伽), 고파(古跛), 포나모라(布那牟羅)의 세성을 함락시키고 또한 북쪽 변경의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

일본서기계체기 23년(529년) 3월조.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고 가야 각지에 신라인을 분산 배치해서 반파국이 가야의 대표고 모두 반파국의 노선에 따르라는 것을 명확히 하려 했지만[52] 신라 법흥왕은 그 신라인들이 신라식 옷을 입도록 해 오히려 신라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다. 보란듯이 신라옷을 입은 신라인들이 배치되는 이런 상황에서, 반파국의 과한 친신라노선에 반발한 가야계 소국 탁순국이 먼저 반기를 들었고, 반파국 측이 결례에 분노하자 신라가 파혼하려 하고 반파국은 파혼만큼은 안된다며 빌었지만 결국 신라는 동맹을 거두고 신라에 거리가 가까운 금관국탁기탄 등 일부 가야 지역이 신라에 흡수되어버리고 반파국의 리더십에 큰 흠이 생기게 되었다.

가까운 합천은 반파국이 제대로 종속시킨 것으로 보이나 남강 유역권은 산청 아래로는 끝끝내 확장하지 못했다. 안라국(아라가야)이 함안을 벗어나지 못했고, 고자국(소가야) 지역은 고성 일대에서 여전히 큰 세력 없는 분산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음에도 가야 통합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은 반파국 자체의 한계 때문이거나 주변국인 백제나 신라의 간섭 때문으로 생각된다. 대가야 왕실은 522년에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는 등 백제의 동진에 대비하려 하였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나제동맹이 유지되던 터라 뚜렷한 효력도 없었고 이 결혼 동맹조차도 결렬돼버린다. 531년경 안라국백제의 속국화, 532년 금관국신라에 항복, 탁순국도 어느 시점에 멸망하는 등 가야 소국들이 잇따라 백제와 신라에 굴복하거나 멸망하면서 반파국의 영향력은 낙동강 상류 내륙의 '반파국과 아이들' 정도로 세력이 축소된다.


2.4. 백제와 동맹하다 (541년)[편집]


530년대부터 신라가 무섭게 성장, 금관가야를 멸망시키자 위기를 직감한 대가야는 다시 백제와의 동맹을 모색하게 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동맹 관계는 541년과 544년의, 두 차례에 걸친 사비회의에서 결성되었다. 해당 문서 참고. 다만 이시기 백제 쪽 외교는 안라국이 주도하고 반파국은 거기에 비교적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안라가 사비회의에 대표자를 2~3명 보내는 데 반해 반파는 상수위(上首位) 고전해 1명만 보낸다. 이 상수위(上首位)라는 직위도 얼마나 높은지 알기는 힘들지만, 추정하자면 안라가 백제에 파견한 2~3명은 하한기(下旱岐) 지위인데, 여기에서 한기는 왕을 뜻하는 말이라 즉 부왕(副王)급, 왕통 2인자격으로 여겨지며, 다른 가야 소국들은 한기가 직접 백제에 가거나 한기의 아들급을 보냈기 때문에, 상수위가 대략 재상급이라 해도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왕과 왕자보다는 상수위가 급이 낮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지위가 낮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서 우리나라는 여기에 참가는 하지만 적극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내비치려 한 것. 그리고 그 이름도 가라(반파국)보다 안라가 앞에 기록되어 있다.

이미 김해 금관국과 창원 탁순국이 신라에 떨어진 이상 창원 서쪽의 다음 타깃으로 유력한 함안 안라국이 더 급하기도 했고, 520년대 친신라정책 실패와 일부 신라 합병이라는 어마어마한 외교적 실책을 저지른 반파국을 대신해 2인자쯤 되는 안라국을 일단은 외교 리더로 삼고 여러 가야 국가들이 밀어줬던 듯하다.[53] 그리고 한때 섬진강을 두고 반파국과 백제가 치열하게 대립했던 것도 이제와서 친백제외교를 반파국이 뻔뻔하게 주도하기 껄그러운 점도 있었다. 그러나 백제도 당연히 호구가 아니니 신라한테서 보호 핑계로 백제군 주둔과 백제 성을 쌓고 가야를 속국으로 만들고 나아가 행정구역으로 흡수하려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결국 안라국이 백제의 마수를 멈추기 위해 고구려에 백제 공격(독성산성 전투)을 사주했다가 고구려는 깨지고 사주했다는 사실까지 백제한테 들키는 사건 이후 얄짤없이 백제의 반 속국 신세로 몇 년간 조용히 지내게 된다.

말기 반파국이 잠시 백제의 영향력에 놓였던 건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되는데, 고령 고아리 벽화 고분은 6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며 석실 구조는 전형적인 공주 송산리식이고, 도굴을 당했긴 하지만 남아 있던 토기에도 백제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조족문(鳥足文) 토기가 있어 백제의 간섭을 받던 시기의 고분임을 알 수 있다.

551년, 나제 연합군의 한강 유역 공격을 할 때 가야군이 동원되었다.[54] 가야의 국익하고는 별 상관없는 방향의 전쟁이었지만 이미 백제의 영향력 아래 놓인 상황이라 별 수 없이 억지로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라의 진흥왕과 백제 성왕의 의견 대립으로 나제동맹이 깨지자 반파국과 가야제국들은 백제 성왕 편에 붙었다. 사실 사비회의대로 가야 땅에는 백제군과 백제의 동맹 왜군이 주둔하고 있으니 백제에 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휘말린 553년 관산성 전투에 휘말리고 대패해 많은 병사들을 상실해버렸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서 목을 벤 병사가 29,600여 명이라고 하는데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군이 1만여 명, 왜군이 1천여 명이었다. 나머지는 가야인이라는 건데 수치가 구체적인 사실이 아니라도 많은 가야군이 전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2.5. 멸망 (562년)[편집]


가야는 그나마 내정간섭을 대가로라도 지켜주던 백제가 성왕이 전사하는 대참패로 밀려나면서 동시에 왜군도 세트로 깨졌고 고구려도 한강 유역 이북 저 멀리로 쫓겨나고, 홀로 거대해진 전성기 신라 앞마당의 한 끼 도시락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제 도와줄 수 있는 세력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고, 우륵과 같이 미래가 없는 나라를 미리 떠나는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신라는 관산성 전투가 끝나고 1년 뒤인 555년 가야권 한가운데인 비사벌(창녕)에 하주(下州)의 주치(州治)를 설치하고 556년에는 거창 등 가야 서부로 가는 길목이자 백제 지원군까지 대비해 추풍령을 틀어막을 수 있는 감문(김천)에 하주의 주치를 옮기는 등 신라군 병력이 주둔하는 거점들을 설치하고, 이후 기록이 구체적으로 남지는 않았지만 562년 이전까지 7~8년 동안 안라국을 포함한 10개 가야소국들을 하나하나 신라의 직할영토로 합병했다. 561년에 세워진 창녕 척경비에는 멀게는 한성까지 신라 전국의 사방군주(四方軍主)가 본인의 관할지역을 뒤로 하고 창녕에 집결한 것이 나오는데 이를 대가야 총공격 준비와 관련시키기도 한다.

결국 관산성 전투로부터 9년 후인 562년, 사실상 고립된 대가야는 진흥왕의 명령에 의해 이사부사다함이 이끄는 신라군의 기습적 공격에 결국 항복하여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 관해서는 가야멸망전 문서 참조.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백제는 아직 패전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음에도 마지막 대가야까지 신라에 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562년 7월 신라의 변경을 왜군과 함께 공격했지만 이 역시 신라가 승리하고 백제+왜군 1천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가야멸망전의 정황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서는 화랑 사다함이 기병 5천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적진에 백기를 꽂은 활약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한편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에서는 신라군이 휴전의 뜻으로 백기를 걸었는데 반파국을 돕기 위해 온 왜군 장수가 백기의 의미를 몰랐다가 당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한일 양국 사서에서 가까운 시점에 동일한 백기 일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상황이 다른 입장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이 패배가 왜에게 꽤 치명적이었는지, 일본서기 권 제19 긴메이 덴노 해당 기사에는 왜국의 대장군 키노오미 오마로노스쿠네(紀臣 男麻呂宿禰)는 백제군 진영으로 도망치고, 다른 왜 장수들은 신라군에 붙잡혀 부장군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 瓊缶)는 아내 우마시히메(甘美媛)를 비롯한 여자들을 신라 장군에게 바치는 등 온갖 굴욕을 당하고,[55] 장수 츠키노키시 이키나(調吉士 伊企儺)는 왜국의 장군을 모욕하는 행동을 하라는 신라 장군의 명령을 거부하고 어린 아들인 오지코(舅子)와 함께 당당하게 죽는 그런 에피소드가 꽤 자세하게 실려 있다.

마지막 왕 도설지왕은 대가야 멸망 이전에 신라의 장군으로 활동한 행적이 금석문으로 발견되고 있어서 신라가 반파국을 완전히 먹기 전에 잠시 허수아비격으로 세운 임금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2.6. 멸망 이후[편집]


일본서기에서는 가야 10국 멸망기사 이후에 긴메이 덴노가 말하는 형식으로 '신라가 가야의 귀족과 백성들을 모두 잔혹하게 살육했다'는 식으로 강한 논조로 표현하고 있지만, 고령 지산동 고분군 남단에는 횡혈식 석실분과 신라 후기 양식 토기가 대규모로 발굴되어, 대가야 왕족의 후예들이 562년 완전히 몰락한 것이 아니고, 신라 통치를 받으면서 규모가 대폭 축소되긴 했지만 멸망 후에도 한동안 자기들식의 고분을 축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까지 저항한 반파국에는 어느 정도 탄압과 격하가 있었을 개연성은 높지만 기존 사회를 완전히 해체할 정도로 가혹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대가야인의 일부는 지금의 강원도 동해시 지역으로 사민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56] 대가야의 원래 영역과 수백 km 떨어져 있어 전혀 관련 없을 듯한 동해시 추암동 고분군에서, 마침 대가야가 멸망하는 6세기 대가야 양식 토기가 신라 후기 양식 토기와 함께 다수 출토된 것이다. 이 무덤들은 조사 지역 동쪽 모퉁이에 집중돼 있어 마치 신라계 구역 속에 작게 대가야계 구역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더 나중에 조성된 고분에서는 대가야식 토기가 나오지 않아 곧 동해 지역의 신라인 사회에 동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중원경(지금의 충주시)에 살면서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이라고 본인의 출신을 밝힌 신라 중대의 학자 강수의 출신지도 금관가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대가야의 귀족 세력들이 562년 대가야 멸망 후 충주로 옮겨졌기 때문에 강수 집안을 대가야 출신으로 보는 설도 있다.

반파국이 멸망하던 때의 절절함은 반파국인이었던 우륵가실왕의 명을 받아 12곡을 지었다가 신라인들이 5곡으로 줄이자(즉 대가야에서 우호 국가로 생각하던 가야 7국이 멸망했다는 것이다) 화를 냈다가 어쩔 도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곡이 좋다'고 칭찬한 일화에서 알 수 있다.

신라는 대가야 멸망 후 구 가야 지역의 통치 거점으로 고령 대신 본래 대가야의 변방 지역이던 대야성, 즉 현 합천군 지역을 선택했다. 물론 이는 대야성 문서에도 서술돼있듯 합천이 백제의 공격을 수비하기 좋은 요새 같은 지형이라는 점이 컸지만, 아무튼 대야주 산하의 일개 고을이 된 고령은 한때 가야 권역의 1인자였던 시절보다 지역 위상은 떨어졌을 것이다. 실제로도 합천 대야성과 달리 고령은 이후로는 대가야 시절만큼 역사에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57]

한편 신라에 협조적인 대가야 왕족 후손은 재지 세력으로 활용하였다.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은 대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802년(애장왕 3)에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아 옛 대가야 영토인 가야산 자락에 해인사를 창건했다.

신찬성씨록에서는 일본에서 이어지고 있는 가야계 성씨가 7개 확인되는데, 그 중 하라 하실왕(賀羅賀室王)의 후예 씨족으로 미치타노무라지(道田連)가 있다고 적혀 있다. 그가 가실왕의 후예가 맞다면 훗날 일부 고구려, 백제 왕족이 그랬듯 대가야 왕족의 일부도 멸망 후 왜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라는 내친 김에 호남 동부로 밀고 들어가서 임실, 장수, 남원 일대를 백제에게서 빼앗는데, 이 일대는 다름 아닌 대가야가 장악했던 전남북 서부 영역 최대 판도에서 순천, 광양, 여수를 뺀 그대로였다. 대가야는 망했지만 대가야가 무령왕 시절 백제에게 잠깐 반격에 성공해서 차지했던 영역들이 신라 진흥왕의 치세 아래에서 다시 하나가 된 모양새였고, 백제는 이 일대를 되찾으려면 무왕이 즉위할 때까지 무려 30여 년을 기다려야 했다. 무왕 또한 7세기 초반에 경남 동쪽으로 계속 밀고 들어가서 옛 대가야 판도 대부분을 백제 영역으로 만들었음이 특이한 점.


3. 문화 및 기타 사항[편집]


종교불교를 도입해서 널리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령 고아리 벽화 고분에서 불교의 상징인 연꽃 무늬를 천장에 그려 넣은 것이 지금도 남아 있고, 가야 멸망 후 멀지 않은 시대 사람인[58]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에서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월광태자가 등장하고 그는 대가야 멸망 후 불교에 귀의해 살았다고 전한다.

무시무시한 규모의 순장으로 유명하다. 이는 대가야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고령 지산동 고분군 발굴 조사로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이것은 영혼이 사라지지 않듯 삶과 죽음의 세계가 이어진다는 계세사상(係世思想)이 당시 가야인들의 생각이었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전후 많은 왕들이 순장을 악습이라고 폐지하고, 특히 같은 시기 신라가 지증왕이 순장을 법적으로 폐지한 걸 보면 당시 세계관 기준으로도 악습이 맞았다.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도 물론 그렇지만 당시에는 특히나 인구가 곧 국력이었는데 별로 크지도 않은 나라에서 높으신 분들 한 명 죽을 때마다 수십 명의 인재들[59]을 죽여서 무덤에 파묻으니 인적 손실이라는 측면에서도 악습이었던 것이다.

흔히 알려진 수로왕이 주인공이 되는 '가야의 시조 신화'는 금관국 중심이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반파국이 중심이 되는 시조 설화가 존재한다.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하늘의 신 이비가지(夷毗訶之)와 감응하여 두 아들을 얻었다. 맏아들은 뇌질주일이고 둘째 아들은 뇌질청예라 하였다. 뇌질주일은 대가야국을 건설하여 시조 이진아시왕이 되었고, 뇌질청예는 김해에서 가락국을 건국하여 수로왕이 되었다는 신화이다. 이진아시, 정견모주 문서 참조.

이 두 가지 신화를 해석하자면 반파국과 금관국은 일단 형제국 의식은 있었는데, 반파국은 자기가 형이라고 생각했고 금관국은 자기가 형이라고 생각했다 정도. 시대의 변화를 생각하면 반파국에서 힘의 변화에 따라 원래 있던 신화를 뒤집어버렸을 가능성도 크다.

유독 한국의 여러 시조 탄생 신화 중에서도 정견모주 신화는 산신이 중심이 된다는 점은 좀 특이한데, 대가야지산동 고분군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릉급 무덤들이 평지나 산능선자락 정도에 있는 것과 달리 아예 산꼭대기 능선에 만들어졌던 것도 특이한 점이다. 이런 점들에서 가야권에 다른 나라에는 없었던 특유의 산악 신앙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왕궁 터 추정 지역에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가 쓴 '임나 대가야국 성지'라는 비석이 있었는데 1986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이 비석에는 '임나', '남차랑(南次郎)'[60] 등의 글자는 인위적으로 지운 흔적이 있는데 이것은 이곳으로 옮겨오기 전 임나일본부설로 이용할 것을 우려한 사람들이 고의로 지웠다고 한다.

파일:고령 한국사.jpg
2020년 지방직 9급 공무원 한국사 시험에 반파국 관련 문제가 출제되었다. 답은 3번이다.[61]


4. 반파국 연표[편집]


연도
기록
출처
42년
대가야 시조 이진아시(뇌질주일)왕이 즉위해 대가야를 건국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522년 3월
대가야의 이뇌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신라에서 이찬 비조부의 딸[62]을 보냄. 그들 사이에서 월광 태자가 탄생하였다.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551년 3월
신라 진흥왕이 낭성에 행차했을 때 국원에 있던 대가야 출신 악사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을 불러 음악을 연주케 했다.
삼국사기
552년 3월
신라 진흥왕이 계고, 법지, 만덕 등 세 명에게 우륵으로부터 음악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삼국사기
554년
가야, 백제와 함께 신라 관산성을 공격하다 실패했다.
삼국사기
562년
가야가 신라에 반하다가 신라 장군 이사부가 거느린 군대의 공격으로 멸망. 그곳에 대가야군이 설치되었다.
삼국사기

반파국 관련된 한국 측의 기록은 이게 전부이다. 가야 관련 기록은 일본서기에 훨씬 구체적으로 많이 남은 편이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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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가야는 고령군의 정체성이자 지역에서 가장 인지도 있는 명칭이라, 관광자원 활용 차원에서 과거 고령읍을 2015년 대가야읍으로 바꿨을 정도이다. 고령군 군청 소재지.[2] 예시: 케이타이 23년 3월조[3] 예시: 케이타이 7년 6월조[4] 삼국유사에 나오는 6가야 구성원 중 하나인 고령가야(古寧伽倻)와는 아예 한자가 다름을 주의.[5] 신석기 시대부터 살기 시작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지금까지의 고고학 조사로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 가장 오래된 유적이다.[6] 이런 추측이 가능한 이유는 기록상으로 국가 이름이 거의 흡사하기 때문. 반로국(半路國)/반파국(伴跛國). 이 정도로 비슷하게 생긴 한자를 오기하는 것은 전근대 기록에서 흔한 일이다.[7] 좀 더 이전 시기부터 금관 연맹이 이미 패권을 잃었다는 설이나,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로도 어느 정도는 금관국의 전성기가 이어졌다는 설도 있다. 혹은 주보돈, 유우창, 권주현 교수 등의 소수설로는 광개토대왕이 공격해 굴복시킨 '가라', '종발성'이 김해가 아니라 고령의 이 나라를 말한다는 견해를 내기도 했다. 이 경우 김해의 상대적 하락세와 대가야가 부상하는 시기를 통설보다 빠르게 잡은 것.[8] 조선 후기에 볍씨를 뿌리면 보통 지역에서는 3~4배의 수확을 거두지만 고령 지방에서는 13~14배의 수확을 거두고, 이 지역은 가뭄 피해를 잘 입지 않는다고 하였다.[9] 대신 금관국은 이때부터 남가라 등의 이름으로 기록에 나온다.[10] (재)가온문화재연구원, 2017, 고령 연조리(594-4번지) 단독주택 신축부지 내 유적 학술자문회의 자료집(2017.6.16).[11] 통설은 이갑자를 인하(이주갑인상 문서 참조)하면 382년이고, 다른 설로 삼갑자를 인하하면 442년이 된다.[12] 이한상(2013, 대가야양식 유물의 분포양상과 의미[13] 일본서기에서는 이 때 백제를 '거의 망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수도가 점령당하고 왕이 제압됐으니 660년 의자왕이 붙잡힌 때와 맞먹는 큰 타격이었다. 다만 이때는 태자 문주왕이 신라 지원군의 도움을 받아 바로 재기에 성공했다.[14] 수정봉 고분군 등.[15] 합천 옥전 고분군[16] 말흘리 고분군 등[17] 산청읍 옥산리 유적[18] 고락산성[19] 운평리, 왕지동 고분군[20] 광양시 진상면 비평리 고분군[21] 남원시 아영면 월산리, 두락리 고분군, 동면 건지리 고분군[22]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 고분군, 동촌리 고분군[23]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 황산 고분군[24] 임실읍 금성리 고분[25]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6월 1일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지시하면서 영호남 벽 허물기를 주장한 것도 '가야 = 대략 경상도 서쪽 절반' 정도로 학창시절에 배웠던 사람들이 보면 고개를 갸웃할 수 있지만 실제로 고령 대가야가 주도하는 전성기 가야는 경남권뿐만 아니라 호남 동부 지역까지 연관성이 높았다는 최신 학설을 반영한 것이다.[26] 같은 이유로 고조선 영역을 동검과 토기가 어디까지 나오나로 교과서에 그려놓는 것도 최근 학계에서는 비판을 많이 듣는다.[27] 광주광역시 신창동에서 가야금의 원형이 출토된 바가 있었는데 그게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라고 언급되었다.[28] 최근 1997년에 가야금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광주 신창동과 경북 경산지역에서 발굴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는데 이 유물들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후의 것으로 철기시대에 해당한다.[29] 경북대학교출판부 "가야, 영호남을 넘다" 319페이지, 광주 점등 1호 석실묘[30] 이희준 "대가야고고학연구" 제5장 대가야 토기 양식 확산 재론, II. 대가야 토기 양식, 1. 대가야의 의미와 토기 양식, 그림 1. 대가야양식 토기 출토 지역 관련 수계 개념도[31] 경북대학교출판부 "가야, 영호남을 넘다" 94페이지, 해남 황산리 분토유적[32] 경북대학교출판부 "가야, 영호남을 넘다" 146페이지, 나주 가흥리 신흥고분[33] 오히려 한성백제는 우리가 흔히 백제 자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원래의 공주부여 일대 문화권, 즉 경기충청전라 내륙부 토광목곽 혹은 석곽묘계 집단과 거리가 멀었고, 이들과 직접적으로 근연 관계가 있는 집단은 전라 서남해안 일대에 자리잡은 토돈분구묘제 집단, 즉 바로 이 침미다례였다. 침미다례는 토돈분구묘제 집단이 우위에 선 가운데 토광목관묘계 집단과 연합한 형국이었으니 목지국으로 대표되는 마한 주류 집단과는 토광목관묘계 집단을 통해 연관이 있었으나, 한성백제는 그렇지도 않았다. 때문에 애초엔 마한 내부 논리로 따지면 한성백제가 바로 비주류 후발 외래 집단이었다. 다만 우연히도 마한 주류가 하필이면 백제국과 가까운 충청도에 주로 자리 잡은 탓에 한성백제한테 훨씬 일찍 병탄당했을 뿐이다. 한편 재미있게도 한성백제(고구려식 적석총+토돈분구묘제) 및 목지국 마한 주류 집단(토광목곽-석곽묘) 모두와 고고학적으로 밀접하게 관련 있는 집단은 오히려 침미다례(토돈분구묘제+토광목곽-석곽)이다.[34] 나중에 국력을 수습한 무령왕대에 들어서야 이 지역을 다시 되찾으려는 모습을 보인다.[35] 대가야의 전성기인 5세기경에는 신라가 낙동강 동쪽을 전부 장악해 낙동강이 신라와 가야의 국경선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가야가 마음놓고 낙동강에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신라 영역인 대구에서 낙동강을 건너 고령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대가야가 수도를 지키기 위해 철저히 요새화해 틀어막은 수준이었다.[36] 이후 서해안 항구를 획득한 진흥왕 이후에나 중국에 직접교역을 시작한다.[37] 실제로 왜국이 신라 등등 저 범위를 모두 제압하고 있어서 저런 작위를 받은 게 아니라, 동쪽 한반도 정세를 잘 모르는 제3자인 중국 남조에 뻥을 친 것이다. 심지어 저 중에 진한, 모한은 5세기에는 이미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왜국은 저 작위에 심지어 '백제'까지 포함시키고 싶었지만 백제가 왜국의 속국이 아니라는 것은 중국도 평소에 백제와 교역을 꾸준히 해와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가 포함된 작위 요청은 거부하기도 한다.[38] 몇백 년 전 변한 시절부터 일본 방향으로 가려면 김해 구야국(금관국)을 거쳐야 한다고 기록돼 있다.[39] 조사된 명문은 하부(下部)뿐인데, 하부가 있으면 당연히 상부도 있을 것이라 상정할 수 있다. 백승충 교수는 우륵 12곡의 상가라도와 하가라도가 상부와 하부 2부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라 보았다. 혹은 상부, 중부, 하부 3부 체제로 추정하기도 한다.[40] 사타를 순천의 옛 지명인 사평에, 모루는 광양의 옛 지명인 마로에, 그리고 아래 나올 대사를 하동의 옛 지명인 한다사에 연결시키고, 따라서 상다리와 하다리는 인접지역인 여수로 비정하는 것이다.[41] 한국측 기록인 삼국유사에서 가야 지명을 딴 우륵 12곡 가운데 상, 하 기물(奇物)의 기물과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42] 왜측에서 과거의 일을 회고한 기사인 일본서기 529년 3월 기사에서 가야왕이 다사진(-=대사, 대사진) 나루가 옛날부터 가야왕이 일본에 조공하던 중요한 나루터라고 언급한다. 물론 일본서기 특성상 신(臣), 조공 등 윤색이 가해져 있다.[43] 다른 방향의 안라국이나 고자국, 금관국 쪽도 남해바다와 접하지만, 이 쪽 나라들은 출토유물상 반파국의 영향력이 있긴 있는데 좀 미약한 편이었다.[44] 물론 고구려도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신라 쪽도 수도 서라벌 코앞의 포항시까지 밀어본 적도 있지만, 결국 백제와 신라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건 실패했다.[45] 묘하게도, 오늘날 고령군과 성주군 경계선쯤을 기준으로 마치 물과 기름처럼 위 성주 용암면에서는 신라식 신라토기, 아래 고령 다산면에서는 대가야식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성주 용암면과 고령 다산면은 바로 옆 동네인데도 그렇게 차이가 나서, 당시 국경선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46] 조효식(2006), "낙동강 중류역 삼국시대 성곽의 분류와 특징", '고문화', 67, 71-92.[47] 일본서기 케이타이 덴노 23년 기록에서 백제가 다사진을 빼앗아 가라 왕이 백제와 일본에 원한을 품어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결혼 동맹을 했다고 한다.[48] 단 524년의 양국 정상회담에서 법흥왕과 만난 가야왕은 반파국왕인지 금관국왕인지 설이 갈린다. 반파국왕이라면 이제 막 결혼 동맹으로 맺어진 우호관계 확인을 목적으로 한 만남이겠고, 금관국왕이라면 이미 국력 약체화로 궁지에 몰린 금관국왕이 자진 굴복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실제로도 이로부터 10년도 안 지나 결국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게 되고.[49]삼국유사》에는 이찬 비조부의 딸이라고 적혀 있다. 위서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는 양화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50] 비조부의 누이로 서술된 위 국내 사서와 다르지만, 이찬(=진골)이면 이미 왕족급 고위귀족일 가능성이 높다.[51] 이뇌왕[52] 여기서 가야 다른 지역을 현(행정구역)이라 표현한 점에서 고령을 중앙으로, 그 외 지역을 수도에 대응하는 지방으로 판단했으며 영역 국가 수준에 이르렀다고 주보돈 교수는 추정하기도 했다. 물론 일본 측(혹은 일본이 인용했을 백제 측), 즉 가야 외부에서 쓴 기록이므로 잘 모르고 현이라 썼을 수도 있겠지만.[53] 고고학적으로 보면 자체 국력은 반파국이 거의 항상 안라국보다 강했다.[54] 가야(임나)의 한성 공격 동원 기록은 일본서기에서만 등장한다.[55] 신라 장군이 니에에게 목숨과 아내 중 어느 쪽이 중한가라고 묻자 니에는 당연히 목숨이 중하다며 아내 우마시히메와 여자들을 바치며 풀려났고 우마시히메는 옥외에서 신라 장군에게 능욕당하게 된다. 우마시히메는 나중에 풀려나서 니에와 다시 만나게 되는데 니에가 그녀와 말을 하려 하자 날 팔아치우고 살아난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말을 거냐고 일갈한다. 당연한 반응이다.[56] 이형기(2002), "멸망 이후 대가야 유민의 향방: 동해시 추암동고분군 출토품을 중심으로", '한국상고사학보' 38, 97-117.[57] 다만 대야성도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이후에는 방어력이 별로 상관없어졌기 때문인지 685년, 좀 더 교통이 편리한 지금의 진주시로 중심 도시를 옮겼다. 그리고 진주시는 21세기 현대까지 쭉 서부 경남 지역의 중심 도시로 기능하고 있다.[58] 300여 년 뒤 사람이라 아주 가깝진 않지만, 삼국사기 등 고려시대 기록들에 비하면 보다 당대에 가깝다는 것이다.[59] 저승가서 높으신 분 모시라고 같이 묻는 것이므로 당연히 아랫것들 중 똑똑하고 미목수려한 사람들을 골라 순장했다.[60] 미나미 지로의 이름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은 것.[61] 반파국이 호남 동부 섬진강 유역까지 진출했기 때문이다. 1번은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국왕이라는 얘기가 나오니 백제 성왕이고, 2번은 울릉도(우산국, 울릉군 일원)를 정복했다는 얘기니 신라 지증왕이고, 4번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이야기이다.[62] 또는 이찬 비지배의 여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