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트 드 발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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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장녀이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세번째 아내이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5남 5녀 중 둘째이며 장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미래의 새언니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와 같은 방을 쓰고 자랐기 때문에 굉장히 친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는 출중한 용모에 발랄한 성품을 갖춘 공주로서 당시 유럽 여러 나라의 왕이나 왕세자의 배필로 고려된 인기가 많은 신붓감이었다.
1550년에 엘리자베트의 아버지 앙리 2세는 엘리자베트를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6세와 결혼시키려 하였다. 교황 율리오 3세가 만약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두 사람을 모두 파면시켜버리겠다고 하였으나, 앙리 2세는 개의치 않고 결혼 준비를 진행했다. 하지만 1553년에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면서 결혼 계획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2.2. 스페인의 왕비[편집]
엘리자베트는 원래 펠리페 2세의 장남 돈 카를로스와 혼담이 오고 갔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시아버지가 될 뻔한 펠리페 2세와 14세 때 결혼을 해서 그의 세번째 부인이 되었다. 비록 두 사람은 18살이나 나이 차이가 났지만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펠리페 2세가 정부를 두지 않을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트가 천연두에 걸렸을 때에도 곁을 지켰다고 한다. 다만 금슬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펠리페 2세 특유의 일 중독 성향 탓에, 너무 바빠서 하루에 부부가 만나서 대화하는 시간도 겨우 10여 분 남짓이었다고.
엘리자베트는 성격이 포악했던 의붓아들인 돈 카를로스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후에 그가 펠리페 2세의 명령으로 탑에 감금되어 있다가 숨졌을 때 며칠 동안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돈 카를로스가 계모였던 엘리자베트와 연인 관계였다는 야사가 있으며, 이를 반영한 예술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야사를 뒷받침할 만한 역사적인 신빙성은 없다. 돈 카를로스는 성격이 포악했지만 두번째 계모인 엘리자베트에게만큼은 다정다감하게 대했고, 동년배이자 똑같이 궁정 생활을 갑갑해하던 엘리자베트도 의붓아들을 편하게 대한 수준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실제로 펠리페 2세는 어린 부인이 궁정에서 지루해 하자 부인을 위해 놀이와 같은 유희를 마련해 주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돈 카를로스 역시 궁정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동년배의 계모와 대화하며 재미있게 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펠리페 2세와의 9년 여에 걸친 결혼 기간 중에 엘리자베트는 4번 가량 임신[1] 했으나 유산과 사산을 거듭했기에, 장성한 자녀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 이사벨과 사보이아 공작부인 카탈리나뿐으로 결국 펠리페 2세가 그토록 바라던 건강한 남자 후계자를 낳아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1568년 10월 3일에 다섯 번째 딸을 임신 4개월 만에 유산하고 후유증으로 같은 날 사망했다. 향년 23세. 그녀의 죽음으로 친정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물론이고 남편인 펠리페 2세도 몹시 슬퍼했다. 그러나 변변치 못한 장남 돈 카를로스마저 잃은 상태였기에 한시라도 빨리 남자 후계자를 얻어야 했던 펠리페 2세는 조카인 오스트리아의 아나와 네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2] 참고로 아나 역시 한때 돈 카를로스와 혼담이 오간 바 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3.2.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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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번째 임신 때 쌍둥이 딸을 유산했다.[2]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정치적인 이유로 엘리자베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를 새 아내로 추천하기도 했으나 펠리페 2세가 거절했다고 한다.[3] 막시밀리안 2세의 5남이다.[4]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