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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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 육군 원수
발터 모델
FM Walter Model


파일:GenralOberst Walter Model 1943.jpg

이름
Otto Moritz Walter Model
(오토 모리츠 발터 모델)
신장
171cm
출생
1891년 1월 24일[1]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겐틴
사망
1945년 4월 21일 (향년 54세)
나치 독일 뒤스부르크 인근 라팅엔 숲
복무
독일 제국군, 프로이센군(1910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1918년 ~ 1933년)
독일 국방군(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
파일:Si_2c.png 육군 원수(Generalfeldmarschall)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모스크바 공방전
르제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마켓 가든 작전
휘르트겐 숲 전투
아르덴 대공세
주요 서훈
금강석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제1차 세계 대전
2.3. 전간기
2.4. 제2차 세계 대전의 개전 및 서부 전역
2.5. 독소전쟁 초기
2.6. 독소전쟁 중기
2.6.1. 자이들리츠 작전
2.6.3. 들소 작전
2.6.3.1. 비판
2.6.4. 쿠르스크 전투와 가을여행 작전
2.7. 독소전쟁 말기
2.8. 서부전선 말기
2.8.1. 서부전선의 재건
2.8.2. 아르덴 대공세
2.8.3. 드레스덴 폭격의 여파
2.9. 최후
2.9.1. 1945년 4월 20일
2.9.2. 1945년 4월 21일
2.10. 사후
3. 생전의 일화들
3.1.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3.2. 동부전선에서
3.3. 서부전선에서
4. 평가
4.1. 인간적, 군사적 평가
4.2. 전쟁 범죄와 신화화에 대한 비판
4.3. 총평
5. 주요 보직 내역
6. 진급 내역
7. 주요 서훈 내역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Model 1942년 2월 서훈.jpg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나치 독일 국방군 육군 지휘관. 최종 계급은 원수.

방어의 귀재(鬼才)였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이력[편집]


프로이센 왕국 작센 주 겐틴(Genthin)에서 독실한 루터회 신자인 음악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제적인 여유는 없어서 생활고에 시달렸으나 김나지움에 다닐 수 있었고, 이때만 해도 라틴어와 그리스 문학 동호회에서 역사와 시에 관심을 갖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모델 일가가 새로 이사한 나움부르크가 포병보병 대대 주둔지였고, 군 장교를 아버지로 둔 친구들과 만나면서 큰 영향을 받는다. 이들은 모델을 데리고 육군 기지 내 훈련을 구경하곤 했는데 대표적인 절친이 당시 프로이센 육군 대령의 아들이었던 또 한 명의 우주방어 명장 한스-발렌틴 후베(Hans-Valentin Hube)[2] 상급대장이었다.

모델은 성적이 우수했기에 대입 자격 시험에 합격했으나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한스-발렌틴 후베를 비롯한 친구 6명과 함께 군에 보병으로 입대했다.[3] 사관후보생으로 추천서를 받아 입대했지만, 어릴 때부터 병약하고 학교를 자주 결석했으며 체육 시간에도 혼자 그늘에서 쉬고 있었던 모델이 기초 군사 훈련을 견뎌낼 리가 없었다. 참다 못한 교관이 '군인에게 필요한 끈기와 강인함이 부족하다'며 모델에게 군대를 그만둘 것을 진지하게 권유했고, 당사자인 모델도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군인의 길을 단념하고 의대에 진학할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모델은 군대에 남았고, 교관은 이에 보답하여 병약한 사관후보생이 모든 훈련과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단련시켜 주었다. 소위로 임관한 모델은 사냥과 승마, 테니스를 즐기며 타 부대와 대항 시합까지 주최할 정도로 외형적으로 달라진 모습이었고, 자신을 단련시켜준 고참 부사관의 거친 언행을 닮아가고 있었다.[4]


2.2. 제1차 세계 대전[편집]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보병 장교로 마른 전투, 베르됭 전투, 솜 전투에 참전했고 용맹을 떨쳐 철십자 훈장 1급을 받았다. 이때 여단장이었던 오스카 폰 프로이센 왕자[5]프랑스군의 압도적인 포격에 여단이 큰 피해를 입는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모델 중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장군참모 과정 이수를 직접 주선했다. 무공을 많이 세운 만큼 부상도 많았는데, 특히 1915년의 어깨 부상과 1916년의 다리 부상은 동맥을 다쳐서 긴 시간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했다.

퇴원 후 전선에 복귀한 모델을 오스카 왕자가 자신의 부관으로 임명했고, 이 기간 동안 참모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를 한스 폰 젝트오스만 제국 파견 근무시 연락장교로 동행토록 했으며 귀국 후 최고육군지휘부(OHL)의 병참 장교로 배치했다. 그리고 1918년 2월에는 오스카 왕자와 한스 폰 젝트의 추천을 받아 장군참모 과정을 이수했다. 랭스 공세에도 참전하여 대위로 종전을 맞을 때까지 발터 모델은 중요 전장과 참모 장교를 모두 경험했고 세 번의 부상에서 살아 남았다.

파일:attachment/600_OHL_1918.jpg
1918년 3월, 바트 크로이츠나흐에 위치한 OHL본부에서 촬영된 사진. 앞줄 중앙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 왼쪽 끝이 발터 모델 대위. 당시 모델은 사적인 자리에서 황제 빌헬름 2세와 만난 경험도 있다고 한다.


2.3. 전간기[편집]


장군참모 과정을 마친 엘리트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모델은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 조항에 실망하여 이대로 군에 남을지 확신을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919년 11월, 병력 100,000명과 장교 4,000명으로 줄어 들고, 무기 개발과 보유까지 제한된 상황에서 '독일군의 아버지' 한스 폰 젝트가 선발한 4,000명의 정예 장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해 1월의 대규모 기동 훈련에서 폰 란차우 장군은 모델에 대하여

"상급 지휘관에 걸맞는다."

라는 높은 평가를 남겼다.

1920년, 루르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소요 사태가 발생했을 때 중대장으로 치안 부대에 배속되었고, 당시 신세를 졌던 주인집 딸 헤르타 후이센과 인연을 맺게 되어 1년 후 결혼했다. 모델은 헬라, 한스게오르크, 크리스타 세 자녀 모두 루터회 세례를 받게 했는데 그의 결혼식을 집례했던 절친한 친우이자 지난 세계 대전에서 유보트 함장이었던 마르틴 니묄러 목사가 이를 담당했다.[6]

결혼 직후부터 4년 간 뮌스터에서 프리츠 폰 로스베르크(Fritz von Lossberg) 보병대장의 참모로 근무하는데 로스베르크의 전술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계기가 된다. 로스베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최전선의 패잔병들을 체계적인 부대로 재편성하고 종심방어 전술로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적절한 시기에 공세로 전환하여 큰 타격을 입히는 무훈을 세웠는데, 특히 종래의 방어 전법에 반대하며 후방 진지 구축과 예비대의 운용을 강조했다고 한다. 훗날 동부전선의 소방수(Feuerwehr der Ostfront) 발터 모델이 펼쳐낸 방어 전법은 '서부전선의 소방수'(The Fireman of the Western Front) 로스베르크 장군의 수제자임을 입증한 것이었다. 모델과 소위 시절부터 친구였고, 뮌스터에서도 함께 참모로 근무했던 에르빈 비오프 보병대장에 따르면 로스베르크 장군과의 인연과 여러 공통점들 덕분에 모델은 마법사의 제자(Zauberlehrling; 괴테의 발라드의 제목이기도 하다)'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한스 폰 젝트 상급대장이 소련과 체결한 라팔로 조약에 의거한 교환장교 훈련에 병무국 교육과장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수행하여, 6주 간 소련에 머무르며 기갑 부대를 활용한 기동전 교리를 접하고, 소련군의 무장 수준에 대한 심도 있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1928년, 모델은 장군참모 기본과정에서 전술 및 군사학을 강의하는 교관[7]으로 근무하며 아돌프 호이징어, 페르디난트 요들, 지크프리트 라스프, 아우구스트 빈터 등에게 해당 학기의 가장 뛰어난 교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소령으로 진급한 1929년, 모델은 자신이 존경하는 아우구스트 나이트하르트 폰 그나이제나우 원수를 연구한 논문인 <Gneisenau>를 발표[8]하여 널리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나이제나우 원수의 좌우명이었던

"Fortiter, fideliter, feliciter"

(용감하게, 충실하게, 성공적으로)

는 모델 자신에게도 좌우명이 되었다.[9]

파일:Oberst Walter Model 1934.jpg
1934년, 동프로이센 알렌슈타인 제2보병연대장에 취임한 발터 모델 대령의 사진. 이 무렵 모델은 바르샤바로 가서 폴란드 주재 독일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던 한스 크렙스를 만나고 왔고, 크렙스 또한 국경을 넘어 모델의 자택에 방문하며 오랜 친분을 다졌다.

독일 국방군으로 개편된 후에도 병무국에서 신병기 개발 및 테스트를 관할하던 8과(8. Abteilung - Technik)에 근무하던 모델은 루트비히 베크의 추천으로 1938년까지 베를린 참모본부에 재직하며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해외와 독일의 기갑 부대 발전 사항을 연구하며 기울인 엄청난 노력과 열정 덕분에 당시의 별명이 차량화 부대 광신자(Armee Modernisimus)였다.

정치에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군사 업무에만 열심이었다고 하나, 그의 오랜 상관인 발터 폰 브라우히치와 뜻을 같이 했다. 브라우히치는 나치당에 열광하는 젊은 장교들을 혐오했지만 나치의 재군비 정책을 열렬히 지지했고 모델 또한 독일의 국가 주권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나치에 의한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독일군의 부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귀족 출신 장교들과 그리 원만하게 지내진 못했던 모델에게 나치에 의한 참모본부 숙청에 따른 브라우히치의 육군 총사령관 취임은 그의 이력에 전환기가 되어주었다.[10] 이 때문에 모델이 친나치적 인사들과 친했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모델이 나치 인사들과 친했다는 기존의 주장은 사실보다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한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와 친했다는 말이 영국 전사학자들에 의해 정설처럼 주장되고 있으나 괴벨스의 일기에서 모델은 그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주목받기 이전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헤르만 괴링과 친하다는 것은 프란츠 할더의 전쟁 일지에서 1939년 10월 19일, 모델과 괴링이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었다는 내용에서 유래된 것인데 한나 라이치는 자서전에서 독일 글라이더 연구소의 신형기 테스트에 모델이 에른스트 우데트,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알베르트 케셀링, 에르하르트 밀히 등 공군 장성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관했다고 기록했다. 병무국 8과는 공군 재군비에도 깊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1937년 가을의 대규모 기동 훈련 직후 모델은 스페인에 체류하면서 OKH를 대표하여 스페인 국민군 장성들과 세부 사항을 논의했는데, 이때 콘도르 군단의 공군 장교들이 모델 대령과 따로 만나서 전투 보고를 하고 국민군의 훈련 상황과 문제점을 개진하는 등 모델은 원래부터 공군 장교들과 친분이 깊었고, 이러한 경험을 기반으로 훗날 군사령관으로서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리터 폰 그라임 장군과 긴밀한 공조하에 전투를 지휘할 수 있었다.[11]


2.4. 제2차 세계 대전의 개전 및 서부 전역[편집]


1939년 9월의 폴란드 침공 당시 드레스덴에 주둔 중인 4군단의 참모장이었던 모델은 폴란드 남부 침공 계획을 입안했고,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중장으로 승진하여 16군의 참모장으로 영전했다. 프랑스 침공에 참전하여 스당 돌파와 마지노선 우회 공격을 성공시켰으며 이후 영국 상륙 계획을 입안하여 16군의 훈련에 몰두했으나 바다사자 작전이 취소되면서 보직을 변경, 제3기갑사단장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야전 지휘관이 되었다. 모델은 여기서 병과에 상관없는 종합 훈련을 창안하여 이를 실시했다. 참모들은 처음엔 가중된 업무로 인하여 모델을 싫어했지만, 이는 매우 선진적이었고 앞날을 내다본 것이었다.[12]


2.5. 독소전쟁 초기[편집]


귀관의 말은 지극히 옳다. 그러나 지금 낭비하는 1분 1초가 나중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지금 진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 기술적 측면을 서둘러 해결하라. 이미 시간을 많이 잃었다.

발터 모델 중장. 1941년 7월 3일 스몰렌스크 포위전에서, 전차 198대 중 128대가 임무 수행이 불가능해지자 그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진격 속도를 늦추자는 부하 장교의 건의에 대하여

파일:attachment/600_Guderian_Model.jpg
1941년 8월 1일, 교량 점거를 보고하는 제3기갑사단장 발터 모델과 이를 치하하는 하인츠 구데리안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모델은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 휘하로 배속되었다. 전차 부대 실전 지휘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그러한 인사 조치에 불만도 있었으나, 모델은 교량이 파괴된 시하라 강 도하를 포함하여 4일 간 310km를 질주하며 소련군 14기계화군단을 해체시켜 버리고 개전 2주 만에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모델에게는 제1기병사단의 지휘권까지 주어졌고, 제3기갑사단은 '모델 집단'(Gruppe Model)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독일군의 진격으로 스몰렌스크에서 310,000명, 키예프에서는 무려 665,000명의 소련군이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 침공을 능가하는 독일 기갑전의 신화를 써내려갔다는 민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포위전에서 모델은 구데리안 기갑군에서도 최선봉에서 진두지휘했고, 그 무훈을 인정받아 기갑대장으로 진급했다. 특히 갑작스러운 키예프로의 방향 전환에 구데리안 기갑집단은 모스크바 방면으로 측면이 150마일이나 노출되었으나 최선두의 모델은 이러한 위험성마저 분쇄하며 돌격을 거듭하여 9월 14일,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군의 선봉인 제16기갑사단과 합류하면서 키예프 포위망을 완성시켰다. 이때 16기갑사단장이 학창 시절 급우였던 한스 후베 소장이었다.

사단장으로서의 모델은 언제나 선봉 부대를 직접 지휘하며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소련군이 미처 파괴하지 못한 교량을 확보하고 작전 지도를 노획하여 진격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선봉 부대는 적의 강력한 방어 진지에 반격할 틈을 주지 않도록 신속하게 우회하여 중요 거점을 우선 점거하며 전술적 우위를 장악했고, 연료 부족과 열악한 도로에 의한 전차의 비전투 손실, 악천후에 후속 부대가 합류하지 못하자 모델은 정예 부대원들을 선발하여 전투단을 재편성, 이들 선발대를 거듭 진격시키는 전법으로 3기갑사단은 3개월 동안 단 하루도 휴식 없이 키예프까지 도달[13]하는 압도적인 전과를 달성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가한 독일군 기갑 부대 지휘관 중에서도 모델의 숙련된 부대 운용과 공격적인 지휘는 가장 돋보였고, 이는 작전 개시 4개월 만에 기갑대장으로 진급하고, 연이어 4개월 후에 상급대장으로 진급하는 성과로 이어졌다.[14]

1941년 10월부터 시작된 모스크바 전투에서는 라인하르트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3기갑군 산하의 41기갑군단장으로 참전하여 모스크바 20km 앞까지 도달했으나, 강추위 및 소련군의 거센 반격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모델은 최후미에서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며 3기갑군의 후퇴를 엄호했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너져 버린 군율을 바로 세우기 위해 권총을 손에 든 채로 한계 지점의 전선까지 오고 가며 지휘를 하여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15]

가장 선두에 진격해 있었기에 전군 퇴각시 최후미를 맡게 된 모델은 역시 모스크바 13km 앞까지 진격했던 제6기갑사단장 에르하르트 라우스(Erhard Raus)와 처음으로 작전을 함께 했는데, 동부전선의 특성을 반영한 독창적인 전법을 창안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는 두 장성이 각별한 전우애[16]를 이어가며 수많은 전투를 함께 했던 나날의 시작이기도 했다.


2.6. 독소전쟁 중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르제프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부분의 장비를 잃어버리고 인적 손실도 보충받지 못한 채 철도망마저 차단되어 3면이 포위된 9군의 암담한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은 발터 모델 기갑대장, 저돌적인 야전 지휘관이자 냉철하고 치밀한 장군참모이기도 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곳의 간격을 닫는 것이다."

모델의 손이 작전 지도상의 르제프 서부와 니콜스코예, 솔로미노 방면의 소련군 화살표를 가리켰다. "소련군 사단들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돌파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모델은 9군 사령부가 위치한 시쵸프카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우리는 소련군의 측면에 역습을 가하여 궤멸시킨다."

제1기갑사단장 크뤼거 소장과 작전참모 발터 벵크 중령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낙관적인 의견에 감탄하고 말았다. 9군 작전참모 블라우로크 중령이 회의실에 있는 모든 이의 의문을 대표하여 방금 전에 도착한 신임 9군 사령관에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장군님, 이 반격작전을 위한 증원군이 왔습니까?"

모델은 가만히 자신의 작전참모를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Mich)!"

갑작스레 찾아온 거대한 안도감에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웃음에 동참했다. 이후로 오랜 기간동안, 유쾌한 웃음소리가 자주 들려오게 되는 시쵸프카 9군 사령부의 첫 번째 날이었다. 새로운 정신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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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Carrell 《Hitler Moves East 1941~1943》


파일:Model_Rzhev_Rshew_Jan_1942_e.jpg
1942년 1월, 모델이 처음 9군 사령관에 임명될 당시인 제1차 르제프 전투의 부대 배치도. 전역의 폭이 최대 450km나 되었고, 단 하루도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모델은 항상 격전의 중심에 있었다.

종전 후 오랜 시간 동안 스탈린그라드 주위를 둘러싼 남부가 주요 전역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뒤늦게 르제프 공방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특히 소련의 붕괴 후 공개된 사료에 의하면 1년 여의 시간 동안 적어도 4차례의 대규모 작전이 중부의 르제프 전역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1942년 1월, 9군 사령관으로 갑작스럽게 임명된 모델은 강추위가 독일군의 발을 묶은 것만큼이나 소련군의 발을 묶었기에 충분히 방어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돌출된 지형 탓에 포위되고, 후방에 소련군 공수부대까지 강하하여[17] 수적으로도 4:1의 열세인 상황에서도 예비 부대의 정확한 투입과 화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하여 사방에서 몰아치던 소련군의 공세를 모두 무력화시켰을 뿐 아니라 최상의 타이밍에서 공격으로 전환, 오히려 소련군을 궤멸시키며 간격을 닫아 버렸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겨울 공세로 인하여 와해 직전까지 갔던 9군을 도중에 지휘하게 된 제1차 르제프 전투에서부터 1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모델은 르제프 돌출부에서 끊임없이 격전을 거듭하며 소련군의 명장인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부대를 특유의 공세적인 방어로 모조리 패퇴시키는 위업을 달성하여 방어의 사자(Abwehrlöwen)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18]

파일:General Walter Model 1941 1942.jpg
左: 1942년 2월 21일 자 <Berliner Illustrierten Nachtausgabe> 타이틀 기사 사진[19]/ 右: 1942년 2월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 기념 촬영- 모델의 9군 지휘는 르제프 암흑의 나날(Rzhev Dark Days)을 9군 영광의 날들(9th Army Glory Days)로 바꾸었다는 극찬을 받았다.[20]


2.6.1. 자이들리츠 작전[편집]


1942년 5월 23일, 2기갑사단이 위치한 벨리 전선을 시찰한 모델이 9군 사령부로 귀환하기 위해 피젤러 슈토르히에 탑승하여 50m 가량 이륙했을 때, 숲에서 소련군 파르티잔에 의한 기관총 사격이 가해졌다. 파일럿인 빌헬름 하이스트 상사는

"마치 거대한 창에 꿰뚫린 것 같았다."고 진술했는데 탄환이 모델의 상반신을 아래에서 위로 관통하여 어깨로 빠져나가면서 특히 좌측 폐의 손상이 가장 심각했다.[21]


치사량의 출혈로 혼수상태였던 모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이스트 상사가 피탄당한 슈토르히를 필사적으로 독일군 야전 병원 근처에 착륙시키면서 신속한 응급 조치와 수혈이 이루어진 덕분이었다.

며칠 후 중부집단군 사령부가 위치한 스몰렌스크의 병원으로 이송된 모델은 슐츠 교수의 집도로 수술을 받았지만 여전히 중태였고, 에르푸르트 중령은 계속된 실혈로 인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9군 사령관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다행히도 고비를 넘기면서 회복이 무척이나 순조로웠고 충분한 휴식과 요양이 필요했던 만큼 6월 16일, 모델은 독일 드레스덴의 자택으로 보내졌다. 이때 5번의 전상을 인정받아 전상장 금장이 수여되었는데 장군참모 출신 장성이 전상장 금장을 받은 경우는 매우 극소수였다고 한다. 자꾸 전선에 나가니까 그렇지

그의 부재 중에도 9군은 7월 2일의 자이들리츠 작전(Operation Seydlitz)으로 소련군 39군을 포위-양단-섬멸하며 점령지를 더욱 넓히는데 성공했고, 르제프 돌출부의 남부 간격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이어진 소련군의 하계 공세마저도 9군의 방어 앞에 돈좌되었던 8월 7일, 발터 모델은 9군 사령관에 복귀했고 격전을 거듭한 부하들을 추스르며 다음 전투를 대비했다. 자이들리츠 작전의 성과가 없었으면 11월, 주코프의 화성 작전은 압도적인 대병력에 의한 완벽한 포위망으로, 천왕성 작전과도 같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6군처럼 9군을 가둬버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2.6.2. 화성 작전[편집]


3주 동안 4개 방면에서 동시에 진행된 르제프 동계 전투의 승리는 특히 독일군 지휘관 모델 장군의 역량 덕분이었다. 비교적 위험도가 낮은 전역에서 예비 부대를 만들어내어 최적의 순간에 승부처가 되는 전장(그는 모든 전역을 동시에 파악하고 있었다.)에 투입하는 탁월한 재능은 그의 방어전 승리에 가장 큰 요인이 되어 주었다.

호르스트 그로스만 보병대장 《Rshew, ECKPFEILER DER OSTFRONT》


1942년 9월과 10월에 걸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독일군 주력이 집중되는 가운데 르제프 방면 소련군의 대공세에 관하여 독일군은 정보 기관마다 그 예측이 다르고 내용이 몇 번이나 번복되는 등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델과 9군 정보참모 분트로크 중령은 감청과 항공 시찰, 소련군 포로의 진술 등을 통해 11월 25일의 소련군 동계 대공세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폭설에 정찰기와 차량이 운행하지 못하자 모델은 군용 무한궤도 바이크로 매일 최전선을 오가며, 주요 방어 진지를 보강하고 지휘관들과 논의하여 이를 기반으로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원수에게 증원 부대와 보급 물자를 요청했다.

파일:Rzhev_Rshew_map_1942_Jan.jpg.jpg
11월의 화성작전 부대 배치도로 위의 지도와 비교해 보면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9군의 공세적인 방어가 다대한 전공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1942년 9월, 이오시프 스탈린미국 대통령 특사 웬들 윌키에게 제2전선의 개전을 요구하며 르제프 전투를 참관시켰을 만큼 이곳은 동부전선 최대의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11월 25일 새벽, 이반 코네프의 서부 전선군과 막심 푸카예프의 칼리닌 전선군이 4개 방면에서 동시에 9군을 협공하여 대규모 포위망(화성 작전; Operation Mars)을 완성하려고 했으나 눈과 안개 때문에 목표물을 상실한 소련군 20군 포병대의 서전 포격은 아군의 진격에 방해가 될 만큼 지형을 파헤쳐 놓은 반면,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기갑대장의 39기갑군단은 이에 대비하여 후방 진지로 물러나 있었고, 독일군 포병과 보병은 방어 진지에 의해 제한된 소련군의 돌격로를 정확하게 예측하여 배치되어 있었다. 코네프의 서부 전선군은 첫날에만 투입한 보병의 절반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2개의 전차여단도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주코프와 코네프는 공세를 강행했으나 비좁은 돌파구에 6전차군단과 제2근위기병군단이 몰리면서 병목현상이 발생, 이들은 모델의 주특기인 포병 집중 운용(HArko 307- Higher Artillery Command 307)의 희생양이 되어 버렸고 여기에 모델이 직접 지시한 슈투카 폭격까지 더해지며 20군과도 단절, 고립되고 말았다. 아르님은 증원 기갑 부대가 도착한 11월 29일에 이미 공세로 전환, 교과서적인 포위 섬멸전으로 각개격파를 지휘했다.

푸카예프의 칼리닌 전선군이 22군과 41군으로 벨리에 위치한 독일군 41기갑군단의 서부 방면을 공격하고, 39군이 북부 방면을 공격했으나 41기갑군단장 요제프 하르페(Josef Harpe) 기갑대장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소련군 선봉 부대들의 합류를 저지시켰고, 통신이 두절되자 모델이 직접 벨리 전선으로 와서 지친 전투 부대를 후방으로 배치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한 후, 중부집단군 예비부대인 12, 19, 20기갑사단을 41기갑군단에 증원시켰다.[22] 이에 하르페는 돌출된 소련군 선봉 부대들을 각개 포위하여 섬멸시켰다.

마침내 12월 14일 늦은 밤, 주코프는 정식으로 소련군의 탈출을 허가했으나 간신히 확보한 탈출구에서도 HArko의 집중 포격과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예하 기갑척탄병의 맹공이 가해졌다. 결국 화성작전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40,000명을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무려 335,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정예 전차군단 6개가 와해되었으며 85%의 전차 손실(1,852대) 및 대부분의 중장비들이 독일군에 노획되는 대패를 기록해야만 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최대 규모의 방어전 승리로 손꼽히며 현대 전사학계에서 르제프 공방전이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2.6.3. 들소 작전[편집]


전시의 모든 군사 작전 중에서도 등 뒤에 적군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철수 작전이야말로 가장 위험하고 난이도가 높다. 1943년 3월, 비야즈마-르제프 전역에서 실시된 작전명 '들소'(Operation Büffel)는 질서정연하고 능률적으로 진행된 후퇴 작전의 모범적인 예시로 남았다. 이는 상세하게 기술할 가치가 있으며 난해한 철수 작전의 기법을 배우기 원하는 참모 장교를 위한 교재로 다루어질 만하다. 현대전에서 군 부대만의 철수는 있을 수 없으며 어떤 계획에서도 민간인들의 철수 문제를 포함해야 한다.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 소장 《Panzer Battles》


스탈린그라드의 참패 이후, 여전히 모스크바에서 18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의 르제프 돌출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중부집단군은 남부 방면에서 치고 올라오는 소련군과 북부집단군의 보급 거점인 벨리키예 루키를 탈환한 소련군에 전면 포위될 위험에 처했다. 결국 히틀러는 9군 전체와 4군의 절반을 르제프 돌출부에서 빼내어 전선을 축소시키는 중부집단군의 퇴각 작전을 승인했다. 사실 모델은 자신의 부재 중 9군이 큰 피해를 입었던 소련군의 하계 대공세 직후인 1942년 9월, 기갑사단의 주둔 없이는 방어가 어려운 돌출부를 포기하고 이들 정예 병력을 전략적 예비대로 활용할 것을 히틀러에게 촉구했지만 거부당했었다.[23]

모델에게는 9군 예하의 25개 사단(장교 8,691명, 군무원 2,325명, 부사관 57,083명, 병사 256,825명)과 독일군에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보복당할 것이 확실시되는 소련 주민 60,000명을 3주 동안에 탈출시켜야 하는 중책이 주어졌다. 2월 4일, 모델은 들소 작전을 총괄하기 위한 특별 참모진을 구성하고 무선 통신을 엄금시켰으며 오직 유선 전화로만 연락할 것을 명령했다.[24] 특별 참모진의 첫 번째 임무는 벨리시와 키로프 사이에 새로운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200km의 주 철수로의 신설과 함께 소그룹으로 이동할 피난민을 위한 600km의 예비 철로 및 도로가 부설되었고 군수품 및 야전 식량 배급소, 의무 및 수의 구호소가 설치되었다. 200개 이상의 열차가 10만 톤의 물자를 수용했고, 1만 톤 이상의 수송 차량이 집결했다. 변덕이 심한 3월의 날씨에 대비해 다양한 교통 수단을 마련해야 했다. 공병 부대는 작전 막바지에 1,000km의 철로와 1,300km 가량의 전화선 및 전선을 철거하고 파괴했다.

민간인과 병원의 환자들이 가장 먼저 오렐 방면으로 이송되면서 3월 1일, 철수 작전이 개시되었다. 전화선을 걷어내고 지뢰 매설 작업을 하던 중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면서 다시금 도로가 얼어붙었지만 미리 준비해 뒀던 썰매에 신속하게 옮겨 실으면서 작전은 치밀하게 계획된 시간표대로 진행되었다.

독일군은 오직 밤에만 움직였고, 주간 이동이 불가피할 경우에는 소련 공군에 발각되지 않도록 차량 운행을 통제하여 분산해서 이동했으며, 르제프에 잔류한 후위 부대의 철저한 기만전술로 인해 소련군은 독일군의 퇴각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뒤늦게 르제프 돌출부에서 독일군이 사라진 것을 파악했을 때엔 주코프가 춘계 공세를 준비하며 5군을 재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돌린 상태여서 더욱 추격이 늦어졌다. 독일군 후위 부대는 기민한 대응으로 소련군 추격 부대를 차단했고, 매설된 지뢰에 휘말리면서 큰 피해를 입은 소련군의 추격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안전하게 퇴각했다.

파일:attachment/발터 모델/Model_Heinrici_signed_Mar_06_1943.jpg
1943년 3월 6일,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4군 사령관이 9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모델과 함께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9군 방명록은 아군의 전황을 재치있게 풍자하는 삽화로 유명했는데 이듬해 1월 24일, 9군 사령부의 장교들은 시찰 차 방문한 전임 사령관 모델의 생일을 축하하며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사용했던 방명록 책자를 선물했다. 이는 전후에도 모델의 가족이 보관하고 있다.

3월 22일, 29,000명의 공병이 7주 동안 요새화시킨 폭 100km의 방어 진지에 병력과 장비를 무사히 온존시킨 9군과 4군이 도착하면서 들소작전은 성공리에 완수되었다.[25] 중부집단군은 530km의 광대한 전선을 200km로 축소하면서 15개의 보병사단, 3개의 기갑사단, 2개의 차량화사단, SS 기병사단을 예비 부대로 확보했고 4월 2일, 모델에게 곡엽 검 기사 철십자훈장이 수여되었다. 들소 작전은 지금도 독일 연방군의 사관학교에서 강의되고 있다.


2.6.3.1. 비판[편집]

국방군의 홀로코스트 및 학살 참여에 대하여 연구가 진행된 현대의 시각은 들소 작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이에 따르면 들소 작전은 실제로는 수많은 민간인 피해를 양산한 작전이었다. 모델과 9군은 탈출을 위한 퇴각로 정리 과정에서 약 3,000명 가량의 '파르티잔'들을 사살했는데, 막상 수거한 무기는 277정의 소총과 41정의 권총, 61정의 기관총 등 극히 소수였다. 이는 사살된 '파르티잔'들 중 절대 다수가 실제로는 비무장한 민간인이었음을 의미한다. 1990년대에 '국방군 범죄 전시회'를 주최했던 독일 사학자 한네스 헤어(Hannes Heer)는 당시 동부전선과 발칸 반도 등지에서 남발된 이런 빨치산 토벌전을 빙자한 학살들에 대해

"파르티잔이 없는 파르티잔 소탕전(Partisanenkampf ohne Partisanen)이라는 기이한 상황"

이라고 말했다.

또한 모델은 퇴각 과정에서 일대의 모든 남성들을 강제이주시키고 남겨진 마을들에는 방화를 지시했다. 냉전 시기 독일 측은 이에 대해서 소련 공군이 자국 민간인들에게도 폭격을 감행하는 일이 발생했으므로 피난민들이 소련군과 NKVD 위원들로부터 자기들을 지켜 달라며 독일군에 요청했다고 주장했으나 현대의 연구는 조금 다르다. 상기한 주장은 나치 독일군의 장성들이 전후 회고록에 쓴 일방적인 주장을, 국방군 무오설에 물들었던 서구 학계와 독일 사회가 그대로 받아들였던 결과물이다.

실제로 들소 작전 당시 발터 모델의 강요로 철수 행렬에 올랐던 민간인들의 숫자는 독일 측이 주장하는 60,000명이 아니라 그 두 배인 약 130,000명이었다. 이는 일대의 주민들 중 약 41%에 해당하는 매우 높은 수치였으며, 사실상 강제 소개였다. 이 모든 과정들은 민간인의 피해를 고려하지 않는 전형적인 나치 독일식 반덴베켐풍(Bandenbekämpfung), 즉 파르티잔 토벌전이었다. 들소 작전 역시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벨라루스 일대에서 국방군 및 친위대에 의해 수도 없이 벌어졌던 대학살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2.6.4. 쿠르스크 전투와 가을여행 작전[편집]


“모델은 성채 작전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성채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점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직언할 용기가 있었던 극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발레리 자물린 교수[26]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4 (2014)[27]


1943년 7월 5일, 모델의 9군은 쿠르스크 전투의 북방 공세를 맡아 오룔에서부터 남하하여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방어선을 공격, 이를 양단 직전까지 가며 독일군의 손실을 압도하는 피해를 입혔으나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작전 목표인 쿠르스크에 도달하지 못하고, 전투 개시 1주일 만인 7월 12일,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에 의하여 오렐의 사령부에 주둔 중이었던 2기갑군이 공격당하면서 급히 회군했다.

쿠투조프 작전은 오렐 탈환 및 소련군 입장에서 철천지원수인 9군을 궤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진행했던 것이나 모델은 9군뿐 아니라 2기갑군의 지휘권까지 인수하여 오렐에서 후퇴하는 '헤릅스트라이제(Operation Herbstreise; 가을여행) 작전'을 개시했다.

파일:attachment/발터 모델/Model_Kursk_Orel_July_1943_Gerd_Niepold.jpg
左: 1943년 7월, 오렐 돌출부에서. 컬러 사진답게 전상장 금장이 본연의 빛을 발하고 있다/ 右: 7월 19일, 12기갑사단 작전참모였던 게르트 니폴트 소령과 논의 중인 모습

7월 12일부터 8월 18일까지 38일 동안, 독일군 492,000명을 섬멸하기 위해 소련군 1,282,000명이 투입된 상황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60,804명,[28] 전차 손실 250대를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사상자 429,890명, 전차 손실 2,586대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고, 참모 1명만 동행한 채 마지막 순간까지 오렐에 남아서 작전을 지휘하던 모델은 최후까지 아군을 엄호하던 12기갑사단과 함께 하겐 라인[29]에 도착했다. 특히 소련군 포로 11,732명까지 데리고 와, 퇴각 작전에서 오히려 전술적인 승리를 거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9군은 소련군 전략 예비대의 거대 부분을 약화시켰고, 덕분에 중부집단군은 5개 기갑사단을 비롯한 19개 사단을 가용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사령관 이하 9군 장병 전원은 7주 동안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용전을 펼쳤으며, 특히 전장의 폭이 400km까지 확장된 상황에서도 모델은 이를 완벽하게 통제하여 끊임없이 최전선을 오가며 시간 단위로 직접 공군 폭격 지시를 내리고 예비대 투입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운용하는 등 지휘관으로서 천재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30]

파일:map Kursk Orel.jpg
1943년 7월 12일부터 8월 18일에 이르기까지 오렐 돌출부의 전황도. 헤릅스트라이제 작전의 개시일은 8월 1일이었다.

또한 9군의 주력 공격 부대인 하르페 전투단을 지휘하여 하루 평균 200대가 넘는 소련군 전차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 요제프 하르페 기갑대장, 9군이 양단될 수 있는 상황에서 가장 치열했던 돌출부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내며 전선의 지휘 체계를 굳건히 유지한 로타르 렌둘릭(Lothar Rendulic) 보병대장, 혼성 부대를 지휘하여 기갑전에서도 맹위를 떨친 요하네스 프리스너(Johannes Frießner) 보병대장의 무훈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들 세 명의 장성은 이듬해 상급대장으로 진급, 집단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2.7. 독소전쟁 말기[편집]


모델 원수가 중부집단군 사령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병들이 자신감을 되찾았다.

1944년 6월 28일, 9군 사령부 전쟁 일지


나의 최고의 야전원수(mein bester Feldmarschall). 귀관이 아니었다면, 귀관의 영웅적인 노력과 탁월한 통솔력이 없었다면 소련군은 이미 동프로이센에 도달했거나 심지어 베를린의 관문 앞에 와 있었을 것이다. 독일 국민은 조국을 위한 귀관의 헌신에 감사하고 있다.

1944년 8월, 아돌프 히틀러. 동부전선을 재건한 중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의 무훈을 거듭 치하하며


1944년 1월, 갑작스레 늑대굴로 호출되어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모델은 긴급히 방어선을 재편성했고, 특히 방패와 검(Schild und Schwert) 작전을 입안하여 총통의 승인을 받았다.

특이한 것은 그동안 히틀러 앞에서 후퇴라는 단어를 꺼내면 모조리 해임당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모델은 작전안에 후퇴를 가능한 우회적으로 표현하며, 물러서서 전력을 추스르다가 적의 허점이 보이면 그대로 공세로 전환하여 재점거한다는 적극적인 전법임을 강조하여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냈다. 무엇보다 모델의 북부집단군 사령관 부임 이후 첫 번째 명령은 16군 예하 사단의 공병 부대들을 차출하여 판터 라인을 제대로 된 방어 진지로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이번에도 OKH의 쿠르트 차이츨러 참모총장과 히틀러에게 들키지 않고 진행해야 했다.

덕분에 독일 북부집단군은 소련군에 5배가 넘는 피해를 안기며 무사히 퇴각, 판터 라인에 도착하여 레닌그라드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었고 1944년 3월 이 공적으로 모델은 원수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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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1944년 1월, 집단군 사령관으로 영전을 앞둔 모델이 오랜만에 9군을 방문하여 후임 사령관이었던 요제프 하르페(Josef Harpe)와 함께/ 우: 1944년 4월, 북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Walter Model) 원수와 휘하의 4기갑군 사령관 에르하르트 라우스(Erhard Raus). 53번째 생일을 이들 9군 장교들과 함께 보낼 만큼 모델과 9군의 전우애는 각별했다.

1944년 3월 말, 남부집단군 사령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전략적인 후퇴를 받아들이지 않는 히틀러에 의해 파면되고, 후임자로 모델이 임명되면서 남부집단군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명칭을 바꾸게 되었다. 1944년 6월 22일 소련의 하계 대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되었는데, 이 공세는 독일군의 예상과는 달리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아니라 중부집단군을 겨눈 것이었다. 공세 개시 7일이 지난 6월 28일, 중부집단군 사령관인 에른스트 부슈 원수가 해임되고 북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인 모델이 겸직하게 되었다. 모델이 중부집단군 사령관이 임명되었을 때 중부집단군 예하 3개 야전군의 사단 대부분이 이미 포위되었거나 포위될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

모델은 중부집단군 사령관직까지 겸임하며 실질적으로 혼자서 독일군의 동부전선을 책임지다시피 했다. 당시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부대의 전체 인원이 1명뿐인 경우나 장비와 보급품은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전선이 사라지고 거대한 구멍(More Hole Than Front)이 생겨난 지옥 같은 상황에서 쉴새없이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델은 그렇게 무너지던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체계적인 군대로 재편성했고, 어떻게든 전열을 유지한 채 퇴각하며 엷은 방어선을 거듭 만들어냈다. 특히 소련군의 진격 한계점을 포착하여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근교에서 특유의 파쇄 공격으로 알렉세이 라드집스키(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адзиевский)의 제2근위전차군을 궤멸시키고, 소련군을 50km나 후퇴시키며 다시금 견고한 전선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었다. 이 공적으로 모델은 제3제국 최고의 훈장인 다이아몬드 곡엽검 기사 철십자장을 받으며 동부 전선의 수호자(Retter der Ostfront)라는 별명까지 갖게 되었다.

독일의 중부집단군을 궤멸시킨 바그라티온 작전의 대성공 당시 소련군 수뇌부는 1944년 안에 베를린을 점령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또한 영•미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독일 공군의 지원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소련군 대 독일군의 전력비가 5:1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에리히 폰 만슈타인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등 유능한 장성들이 한꺼번에 해임되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독일 군부의 근간마저 위태로웠던 상황에서 홀로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지켜낸 발터 모델의 수완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회고록에서

"이토록 어려운 동부전선 중앙의 상황에서 모델 원수는 전선 재건의 임무를 맡을 수 있는 최상의 인물이었으며, 오직 자신의 용맹함으로 이를 해냈다."

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모델이 재건한 방어선은 그의 서부전선 전임 이후 육군참모총장인 구데리안이 동부전선 방어 전략의 요충지로서 활용하게 된다.

후대의 전사학자들도 동부전선을 재구축한 발터 모델에 대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자(Miracle Worke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리델 하트

"전역에서 예비 부대를 만들어 내어 전선을 재건하는 경이로운 재능"

이라고 기록했다.


2.8. 서부전선 말기[편집]


모든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한 모델 원수가, 지금의 정세를 만회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진심으로 그가 해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만일 그럴 수 없게 된다면, 그리고 귀하가 기대하던 신무기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총통께서 전쟁을 끝내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귄터 폰 클루게 원수가 1944년 8월 19일 자결 직전, 히틀러에게 보낸 친필 편지 중에서


1944년 8월, 에르빈 롬멜의 부상과 귄터 폰 클루게의 해임으로 서부 전선의 지휘 체계가 진공 상태에 빠지자

"귀관이 서부전선에서도 수호자가 되어주길 바란다."

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모델이 서부전선 총사령관과 B집단군 사령관을 겸임했다. 그는 팔레즈 포위망에 갇혀 있었던 독일군의 4할을 탈출시켰는데 특히 군단장 4명과 사단장 25명을 생환시켜서 서부 방어선을 재편했다. 이후 히틀러는 서부전선 총사령관직에 다시금 현역에 복귀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를 임명했고, 모델은 B집단군 사령관에 집중하도록 조치했다.


2.8.1. 서부전선의 재건[편집]


우리는 룬트슈테트 원수가 서부전선 총사령관에 복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진정한 공로자는 프로이센 사람- 지난 여름 비스툴라 강에서 소련군을 저지한 뒤 히틀러의 명령을 받고 서부전선 재건을 위해 부임한 발터 모델 원수였다. 적장 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지략가였던 모델이 국방군의 참패를 막아냈다.

그는 패닉을 진정시키고, 사기가 꺾인 독일군을 효율적인 전투 집단으로 재편성했다. 앤트워프에서 남쪽으로 260마일 떨어진 에피날까지, 모델은 기적적으로 독일군에 새로운 척추를 이식했다.

오마 브래들리 원수 《LIFE》 1951년 4월 23일


노르망디 상륙 이후 독일군의 퇴각을 무질서한 패주로 묘사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는 점령지를 축소하면서 주둔 병력을 서부 방벽으로 이동시켜 다시금 전선을 구축한 독일군 방어 전략이 성과를 거둔 것이었으며 당시 영•미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조차도 1944년 9월 29일자 서한에서

"독일군이 안정적이고, 밀도 높은 전선을 완성시켰다."

고 결론을 내렸다.

Joachim Ludewig의 저서인 《Rückzug: The German Retreat from France, 1944》에 따르면 모델이 총사령관에 부임하기 전의 서부전선 독일군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싸웠으나, 룬트슈테트와 달리 최전선에서 직접 지휘하는 모델의 모습은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된 상황에서조차 장병들의 사기를 고조시켰으며, 특히 G군집단[31] 사령관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Johannes Blaskowitz) 상급대장에게 최대한의 지휘 권한을 부여하고, 총통 직할 명령들을 교묘하게 무시하며, 하인리히 힘러의 개입[32]을 배제시키고, B집단군과의 연계 지점에 증원 부대를 투입하여 결과적으로 G군집단 185,000명을 무사히 퇴각시킨 것은 노르망디 상륙 당시 거듭 혼선을 빚었던 서부전선 지휘 체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모델은 OB West 부임 이후 블라스코비츠와 직접 대면할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신조차 거의 두절된 상황에서 대규모 연계 작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1938년 베르너 폰 프리치와 루트비히 베크가 물러나면서 베를린 참모본부에서 좌천된 모델이 드레스덴의 4군단으로 전임되었을 때 상위 제대인 3집단군 사령관이 블라스코비츠였고, 같은 루터교회 신자였던 그가 모델을 많이 챙겨주면서[33] 두 사람의 가족들도 친하게 지내왔던 오랜 인연 등으로 인해 서로 매우 잘 통하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34]

파일:img024_1944.jpg
서부전선 총사령관을 겸임하던 시기의 이 사진은 현재 두 가지 판본이 공개되어 있다. 귄터 라이히헬름이 소장했고 전사학자인 발터 괴를리츠 및 데릭 S. 점브로 박사에게 제공된 사진은 모델의 서명이 연필로, 이름만 기입되어 있고 아들인 한스게오르크 모델이 소장하고 있었던 본 사진만은 펜으로 날짜와 이름이 모두 서명되어 있다. 1945년 3월, 모델이 아들의 생일 즈음에 보내준 사진이다.

1944년 9월에는 영•미 연합군의 마켓 가든 작전에 기민하게 대응하여 재편성 중이던 빌헬름 비트리히의 제 2 SS기갑군단을 즉시 투입시키고 3시간 만에 방어선을 구축, 아른헴을 방어하고 작전을 분쇄하는 데 공훈을 세웠다. 제9 SS기갑사단의 사단장 대리였던 발터 하르처 SS중령이

"마켓 가든 작전에서 독일군의 승리가 자랑스러운 것은 2류 부대를 동원하여 연합군의 정예 부대를 막아냈기 때문이다."

라고 회고했으니 그야말로 발터 모델이 방어전의 1인자임을 공고히 한 전투였다. 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패전만 거듭하던 독일군에게 있어서 최초의 승리였다고 한다.[35]

이어서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명장 오마 브래들리와 코트니 하지스가 지휘하는 미군의 진격을 막아냄으로써 독일 국방군 중 유일하게 연합군 측인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미국의 오마 브래들리에게 승리를 거둔 장성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36]

전사에서도 매우 짜임새 있는 반격을 주도하며 각급 부대를 후방으로 집결시켜 재무장 및 재조정한 후 밀착 방어선을 형성한 당시 독일군의 전과를 서부 전선의 기적(Miracle In The West, Miracle At The West Wall)이라 기록하고 있다.


2.8.2. 아르덴 대공세[편집]


10월 말에 '라인 강 수비 계획'을 처음 전해들은 모델은 히틀러가 설정한 작전 목표가 불가능함을 잘 알고 제5기갑군 사령관 핫소 폰 만토이펠, 자신의 오랜 참모장인 한스 크렙스와 2개월에 걸쳐 의논하며 대안 작전[37]을 제안, 어떻게든 대규모 공세 작전을 취소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2월 2일, 육군참모총장 하인츠 구데리안이 동부전선에서 효율적으로 방어전을 펼치고 있는 부대를 아르덴 대공세로 투입하는 것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여 시작된 회의에서 모델과 만토이펠은 안트베르펜을 목표로 하는 것은 확률이 낮은 도박임을 강조하며 '작은 해결책'을 다시금 제안했다. 모델은 침착하고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긴 시간 동안 구체적인 자료들을 제시하며 발언했고, 히틀러마저도 중간에 끼어들지 못한채 말없이 경청했다. 결국 총통이 모델에게 양보한 것이 있다면 초기 작전 목표대로 공세를 시작하나 진행 과정에서 안트베르펜 점령 확률이 낮아질 경우에는 모델이 제시한 '작은 해결책'으로 작전 목표를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생사가 걸린 중요한 문제에 있어 모델 원수와 나를 지원하는 사항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회의에 참석했던 80명의 고위 장교들 중 어느 누구도 애매한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발언하거나 질문하려 하지 않았다."

핫소 폰 만토이펠 기갑대장


아르덴 대공세의 초반에는 히틀러와 요들의 작전안에 명시된 공격 시간(11:00)을 새벽 5시 30분으로 변경, 칠흑 같은 안개 속 연합군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틈을 타 미리 정해진 목표에 효율적인 포격과 동시에 고사포 진지에서 전조등을 비추어 보병의 돌격로를 이끌어낸 다음, 일몰 후에 전차를 투입하여 전과를 확대시키는 만토이펠과 모델의 새로운 작전안으로 기습에 성공을 거두었다. 공세 초기 독일군의 성과 덕분에 독일 국민의 사기가 진작되었고, 국방군에 대한 신뢰도와 인기가 급상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공권이 완전히 연합군 측에 있었기 때문에 하늘이 맑게 개인 12월 23일에 진격 속도가 둔화되었고, 이날 모델은 알베르트 슈페어크렙스에게 작전이 실패했음을 명시적으로 알리며 히틀러에게 공격 중단을 건의했다. 12월 28일에야 히틀러는 모델의 지속적인 건의를 받아들여 '작은 해결책'으로 전환했지만 제공권을 장악하려던 보덴플라테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는 등 너무 늦은 후였다. 팔레즈 포위망에서 탈출시키고 '서부 전선의 기적'을 통해 간신히 지켜낸 B집단군의 정예 병력과 장비 및 연료 대부분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파일:attachment/600_Model_Arnhem.jpg

병사들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모델 원수는 부관인 하인리히 슈프링어 SS소령에게 자신의 차량에 동승할 것을 명령했다. "슈프링어." 잠시 후 모델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침울했고, 시선은 여전히 그들이 가야 할 눈 덮인 언덕을 향한 채였다.

"지휘관은 휘하의 장병들을 자기 자식처럼 여겨야만 하네.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상황이 그들에게 너무도 가혹하군.”

1945년 1월, 아르덴 대공세 중[38]



2.8.3. 드레스덴 폭격의 여파[편집]


1945년 2월 13일, 영국 공군의 드레스덴 폭격 당시 발터 모델은 드레스덴의 자택에 거주하고 있었던 아내와 딸의 생사를 알 수 없었기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2월 16일, 히틀러의 호출을 받고 베를린의 작전 회의에 참석했을 때 모델은 가족의 행방을 찾기 위해 잠시 동안 드레스덴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허가를 구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하는 수 없이 모델은 부관인 테오도르 필링(Theodor Pilling) 대령을 드레스덴으로 보냈고, 필링 대령은 모델의 아내와 딸을 구출하여 뮐하우젠에 위치한 친형 오토 모델[39]의 집으로 피신시켰다.


2.9. 최후[편집]


1945년 3월, B집단군은 루르 공업 지대 사수를 명령받았으나 레마겐의 철교를 탈취한 미군은 거대한 포위망을 완성하고, 루르 포켓 작전을 성공시키며 완벽한 제공권을 활용해 루르 일대를 폭격했다. 모델은 포위망의 완성 전에 보유하고 있었던 전차로 역습을 가하여 미군 3기갑사단장을 전사시키는 등[40] 탈출구를 확보, 휘하 전 병력을 마르부르크 방면으로 탈출[41]시키려 했으나 히틀러로부터 후퇴 불가, 현지 사수(Ruhrfestung) 명령만이 반복되면서 결국 루르에 전군이 고립되었다. 모델은 텔레타이프와 항공편을 통해 서부전선 총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과 히틀러에게 몇 차례나 후퇴 의사를 타전했지만 그때마다 거부되었고 4월엔 휘하 참모인 빈리히 베어(Winrich Behr) 소령[42]과 귄터 라이히헬름(Günther Reichhelm) 대령을 포위망에서 탈출시켜 베를린의 총통사령부에 출석, 직접 히틀러에게 B집단군이 처한 상황을 보고하고 다시금 허가를 구했으나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한 한스 크렙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시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포위망 안에서의 최고의 전우는 포위망 밖에서도 전우가 되어준다."

(Der beste K.I.K wird K.A.K)

자신을 12군 참모장으로 임명한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면서까지 모델의 곁에 남으려 했던 라이히헬름 대령과 마지막으로 저녁을 함께하며, 장교 식당 방명록에 모델이 적은 문장이다.[43]


파일:attachment/600_Speer_Krebs_Reichhelm_Behr_Walter_Model.jpg
3월 20일과 24일, 루르의 산업 시설을 포함한 히틀러의 파괴 명령을 거역하기 위해 슈페어는 알텐키르헨의 B집단군 사령부를 방문했고, 모델도 이에 동의했다. 왼쪽부터 귄터 라이히헬름, 한스 크렙스, 알베르트 슈페어, 폰 블로트니츠 대령, 발터 모델, 빈리히 베어

네로 명령, 즉 연합군의 손에 넘어갈 것을 대비해 루르의 산업 시설을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전해지나 모델은 제국 군수부 장관 슈페어와 처음부터 협력하며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전투 손실마저 최소화하여 독일 산업 지대의 7할을 차지하고 있었던 루르를 지켜냈다. 그런 그에게 미군의 매튜 B. 리지웨이 소장이 개인적인 서한을 보내어 남북전쟁의 명장 로버트 리의 예를 들며 항복을 권고했다. 모델은 서한을 손에 든 채 참모장인 카를 바게너에게 질문했다.

"우리는 역사의 빛 앞에서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일을 모두 한 걸까?"

바게너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모델은 이렇게 덧붙였다.

"패배한 사령관에게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난처한 침묵이 이어졌고 모델은 스스로 답했다.

"고대의 패장들은 독을 마셨다."[44]


같은 날인 4월 15일, 국민돌격대라는 이름하에 훈련도 받지 못하고 총을 손에 든 유소년들과 노년층으로 구성된 부하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제대증을 발부하고

"귀관들은 의무를 다했다. 집으로 돌아가라. 이 서류는 합법적인 것이니 만일 탈주병으로 체포[45]

되거나 미군의 포로가 되거든 제시하도록 하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

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4월 17일 아침을 기점으로 B집단군의 해산은 명령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장병들에게는 3개의 선택지 - 1. 항복 2. 집이 가까운 자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사복 차림으로 귀가 3. 포위망을 탈출하여 중부 독일 방면의 아군과 합류 – 가 주어졌고, 장교나 노련한 부사관들이 병사들과 동행하여 마지막 임무를 수행했다.[46] 이 날, 루르 전역의 모든 전투가 종결되었고 미군에 항복한 포로는 320,000명(국민돌격대 250,000명, 일반 장병 68,000명)에 가까웠다.

이후 모델은 탈출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만난 발터 막사이너 하사와 어린 병사들이 고위 장성과의 갑작스러운 대면에 놀라자 모델은 병사들의 이름, 고향, 군 경력을 일일이 물어보며

"집으로 돌아가게. 우리들의 전쟁은 끝났어."

라는 명령을 내렸고 모두와 악수를 나누며

"귀로에 행운을 비네. 독일의 미래는 자네들에게 달렸어. 전쟁에서 패했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훌륭한 청년이 되어 달라고 전해주게."

라고 말했다고 막사이너 하사는 기록했다. 적어도 이 순간의 모델 원수는 전선에서 직접 장병들을 지휘하고, 독려하던 평소의 모습을 회복했다고 한다.


2.9.1. 1945년 4월 20일[편집]


"군대는 반드시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하며, 무력으로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책무는 전선을 지키는 것이다."

발터 모델 원수, 1944년 서부전선[47]


4월 20일 밤, 뒤스부르크 인근 라팅엔 숲에서 모델은 해산 명령 이후에도 동행한 참모들과 함께 국방군 라디오 채널에서 송출하는 히틀러의 56번째 생일을 기념한 선전 장관 괴벨스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괴벨스는 서부전선의 독일군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상황에서도 (이미 거짓으로 밝혀진) 비밀 신병기가 최후의 승리와 독일의 황금기를 가져올 것을 부르짖었고, 영•미 연합군에 항복하는 민간인들을 비판하며 '루르의 배신자들'에게 강력한 어조로 비난을 퍼부었다. 그 어이없는 내용에 다들 할 말을 잃은 가운데 모델이 침묵을 깼다.

"진정으로 내가 범죄에 종사해 왔음을 믿게 되었네. 나는 양심적으로 부하들을 이끌었지… 하지만,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어."


참모들은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 가족들과도 전쟁 및 정치에 관한 대화를 절대로 하지 않았고, 휘하 장교들에게도 정치적인 발언을 자제할 것을 몇 번이나 당부했던 모델이 처음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밝힌 것이었다.

2.9.2. 1945년 4월 21일[편집]


"독일의 원수는 항복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어."

발터 모델 상급대장, 1943년 3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오랜 친구인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내린 마지막 결단에 대하여 아들인 한스게오르크가 의견을 구하자 위와 같이 답했다


다음날 아침, 모델은 빈리히 베어 소령을 긴히 불러 함께 오솔길을 걸으며 친필 편지와 결혼반지, 소지품이 담긴 봉투를 건네었다. 귀관의 실력과 경험이면 해 낼 수 있을 테니 이것을 자신의 아내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에, 모델의 그러한 최후를 원치 않은 베어는 함께 살아남을 것을 간청했고, 몇 분의 침묵 끝에 모델은 이렇게 말했다.

"베어,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군. 육군 원수로서 조국에 승리를 가져올 수도 없었고, 수백 수천이 넘는 부하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내가 이 숲 밖으로 걸어 나가 몽고메리, 혹은 미군 앞에 서서 '내가 모델 원수다, 항복하겠다.'라며 두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


다시금 베어는 포위망에서 탈출할 희망이 여전히 남아있다며 설득했고, 모델은 신중하게 최악의 결말을 대비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오솔길 밖으로 나와 일행들과 합류한 뒤 베어는 식량을 구하고 탈출 루트를 모색하기 위해 뒤스부르크 방면으로 정찰에 나서겠다고 제안했으며, 모델은 이를 허락했다.

정오 무렵 귀환한 빈리히 베어에게 필링 대령과 미하일 중령이 모델 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알려주었다.[48][49][50]


2.10. 사후[편집]


아들인 한스게오르크 모델(Hansgeorg Model, 1927~2016)은 육군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사관후보생으로 동부전선에서 복무했는데, 전투 중 3기갑군 사령관인 만토이펠 기갑대장이 아버지의 최후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종전 당시엔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고, 훗날 독일 연방군 육군에 입대했다. 그가 집필한 교범이 오늘날에도 미합중국 공군의 훈련 교리로 사용될 만큼 탁월한 전문성을 인정받았으며 육군 준장으로 7기계화여단장, 연방군 정보본부장을 역임했다. 한스게오르크 모델 장군은 독일 국방군 원수의 자제 중 연방군 장성의 지위에 오른 유일한 인물[51]로,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국군, 나치 독일 국방군, 서독 연방군에 이르기까지의 장군 및 참모의 역사와 인명록을 집대성[52]하여 연방군의 기틀을 다졌다. 이는 독일 연방군 시대에 이른 현재에도 꾸준히 갱신되어 출간되고 있으며, 이러한 업적으로 모델 장군에게 십자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1955년 7월, 한스게오르크는 빈리히 베어의 도움을 받아 사망 장소에 가매장되었던 아버지 모델 원수의 유해를 휘르트겐 숲 인근 독일 군인 묘지에 이장했다. 아른헴 전투, 휘르트겐 숲 전투, 아르덴 대공세에서 자신의 지휘를 받았던 부하들과 사후 1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3. 생전의 일화들[편집]


‘먼저 신임 9군 사령관 모델 장군에 대해 소개하자면, 작은 키에 강단이 있고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였으며, 몸놀림이 날렵하고 기민했다. 짙고 검은 머리칼에 항상 도수가 높은 모노클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렌즈 너머의 푸른색 눈동자는 자유분방하고 밝게 빛나고 있어서[53]

그가 무척 좋은 심성의 소유자임을 우리 모두가 알 수 있었다.’

-

호르스트 그로스만 보병대장 《Rshew, ECKPFEILER DER OSTFRONT》


발터 모델은 독일군 역사에 유일무이하게 동부전선의 남부/중부/북부 3개 집단군 사령관을 역임/겸임했고, 서부전선에서도 집단군 사령관과 총사령관을 겸임했으며, 이때도 변함없이 매일 최전선을 직접 시찰하는 지휘로 거의 모든 전선[54]에 걸쳐 수많은 장병들과의 만남을 가지면서 수많은 일화들을 남겼다.

그래서인지 당대의 동료 군인들도 후대의 전사학자들도, 전통적인 프로이센 장군참모 사고방식을, 매우 비정통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모델의 지휘/업무 스타일과 평소의 언행을 고참 하사관에 많이 비유했다. 독일 국방군 사령부 전쟁 일기 기록관인 퍼시 에른스트 슈람(Percy Ernst Schramm) 교수는

“모델은 북부 집단군 및 중부 집단군을 지켜냈고, 이러한 그의 성과는 서부전선 독일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같은 성공을 거두었다. 작은 일에도 신경을 쓰는 모델의 지휘 방식은 모델 특유의 뛰어난 두뇌 및 날카로운 논리와 결합하여 최악의 전황에서조차 해결책을 찾아냈으며 이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장점이었다.”

라고 평가했다.[55]

이렇듯 공인된 행보관답게 부하들의 기념일 선물도 자상하게 챙겨주었는데 호화로운 저녁 만찬, 와인 두 박스, 특별 휴가, 윤전기[56], 티거 전차[57]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은

"모델 원수가 매우 풍자적이고 재밌는 유머 감각의 소유자임을 뒤늦게 알았다."

며 아쉬워했는데 다름 아닌 루르, 즉 독일군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이자 모델 자신이 정신적/육체적으로 죽음에 맞닿아 있는 시기에 모델의 유머감각을 깨달았다고 할 정도였고, 귄터 블루멘트리트는 모델의 강건한 외양 안에는 선량하고 유머러스한 내면이 간직되어 있다고 묘사했다.[58]

그렇게 발터 모델은 독일 역사의 유명한 일화나 독일 고전 문학 작품을 인용하여[59] 현재 자신들의 상황을 비유하는 농담을 즐겨 했으며, 항상 최전선에서 언제나 낙천적인 모습으로 엄청난 무훈을 세웠다. 모델의 독창적인 지휘 스타일과 그의 개성이 넘치는 성격 및 다양한 일화들과 독보적인 무훈은 한데 어우러진 것으로, 이를 분리해서 기술하는 건 불가능하다.


3.1.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편집]


발터 모델의 부하들은 ‘모델 사령관은 자신의 롤 모델인 프리드리히 대왕과 생일이 같다’는 식으로 상관의 이름을 롤 모델이나 리모델로 즐겨 활용했는데 당사자인 모델 스스로도 이러한 유행어나 농담에 재밌어 하며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야심차게 사용하기도 했다.[60]

기회가 될 때마다 모델은 아내와 통화했고, 세 자녀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 받았다. 전간기에 모델은 가족들과 정치, 군사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않았고[61], 전쟁이 일상이 되어버린 제2차 세계대전의 한 가운데에서도 모델의 편지엔 전투에 대한 내용은 찾기 힘들다. 그 대신 평상시였다면 아빠[62]가 직접 10대 자녀들을 마주보며 대화했을 내용 -《성경》 구절, 루터의 격언, 쉽게 풀어놓는 루터교 교리- 을 편지로 쓰는 모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일례로 1941년 10월 27일자 편지에서 모델은 아들에게 50번째 엽서를 받은 기념일이라 자축하며, 전날 폰 보크 원수와 라인하르트 장군과의 반가웠던 만남을 언급한 뒤 우편번호가 새롭게 30957로 바뀌었다고 밑줄까지 그어가며 강조했다. 이는 모델이 기갑대장으로 진급하고, 사단장에서 41기갑군단장으로 영전하며 소속 사령부가 바뀌었으니 주소 또한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중부집단군 사령부에서 폰 보크와 라인하르트를 만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런데 편지 어디에도 진급과 영전에 대한 내용이 없다.[63]

1941년 11월 20일자 편지에선

“우린 여기서 오랫동안 동계 스포츠를 즐기게 될 것 같구나.”

라고 유쾌하게 적었는데, 같은 중부집단군 소속 장성들이 준비되지 않은 동계 전투의 고충을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나마 사실적으로 털어놓았던 내용과 매우 대조적이다.

당시에 이미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던 한스게오르크는 편지 덕분에 평소의 아버지가 최전선과 사령부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잘 알 수 있었지만, 군 지휘관으로서 모델의 전투에 대해선 알 수 없었는데 그게 아버지가 바라는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고 했다.[64]


3.2. 동부전선에서[편집]


  • 발터 모델은 소문난 사냥 마니아답게 제6보병사단 주둔지 인근에 검은 뇌조 서식지가 있음을 알게 되자, ‘언젠가 시간이 허락된다면 꼭 와보고 싶다.’고 종종 말하곤 했다.

그래서 제6보병사단은 9군 사령관을 위해 사냥용 마차와, 길 안내를 맡은 현지 러시아인 학생 및 경호와 수행을 맡은 아렌스 중위를 준비했다. 별이 총총 떠오르는 고요한 밤을 가로질러 달리는 동안, 평소의 긴장이 완전히 풀린 모델은 자신의 어린 시절 겐틴에서의 추억과, 드레스덴에 있는 아내와 세 자녀들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며 친근한 어조로 아렌스의 가족 안부를 물어보았다.
마침내 다다른 목적지엔 신비로운 안개가 자욱했다. 검은 뇌조 세 마리가 사냥꾼들의 눈에 띄었지만 사정거리 밖이었고, 모델은 사냥총을 들고 뇌조에게 접근하는 대신 잠든 만물이 깨어나는 새벽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그가 르제프 전역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총성과 포화가 사라진 고요한 밤이었다.
그렇게 두 명의 독일인과 한 명의 러시아인, 뇌조 세 마리가 함께 잊을 수 없는 새벽을 목도했다. 아침 햇살과 함께 안개가 걷히고 방아쇠 한 번 당기지 않은 사냥이 끝났다. 6보병사단 사령부에 돌아온 모델은 사단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또 올 수 있기를 기원하며 시쵸프카로 복귀했다.
1년 반이 지나서 1943년 7월의 쿠르스크 전역. 아렌스 중위는 모델과 재회했는데 모델이 먼저 아렌스를 알아보았고, 상급대장은 그날 밤 중위와 나눴던 모든 대화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파일:Walter Model John 6.Div.jpg
1942년, 제6보병사단 주둔지에서 작전참모 존 중령과 논의 중인 발터 모델 9군 사령관

  • 모델 장군은 제6보병사단의 소식지인 《임시방편》의 열렬한 애독자였다. 매주 발행되는 신문에는 주요 뉴스와 사단 내부 소식, 각종 유머와 푸짐한 경품이 걸린 애독자 퀴즈 등이 수록되었다. 기념비적인 《임시방편》 100호 발행일, 모델은 최신 윤전기와 수천 장의 고급 인쇄용지, 퀴즈 경품으로 제공될 수 있는 다양한 비품들을 6보병사단에 기부했다. 이러한 협찬이 발행인에게 엄청난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 모델 상급대장은 시쵸프카의 사우나에 종종 방문하곤 했다. 모델이 사우나에서 쉬는 동안, 사우나의 관리를 맡은 의무병은 감히 사령관의 휴식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긴장하고 있었다. 마침 인근을 지나가던 세 명의 병사가 사우나 안에 이용객이 한 명 뿐인 것을 보고, 자신들도 사우나를 즐기기로 했다. 잠시 후, 상병의 경악스러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고 모델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뭘, 벌거벗으면 장군인지 모를 수도 있지."

  • 시쵸프카의 전선 극장엔 영화 상영 직전까지 장병들이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엄청난 인파 때문에 극장 출입구 문을 여닫는 것조차 뜻대로 못하던 헌병은 격노했다.
"지금 제 정신들이냐, 좀 물러서!!"
그때 무질서한 관객들 속에서 뜻밖의 단합된 외침이 들려왔다.
"안 돼, 모델이 '우리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고 했잖아!!"
대답과 함께 더 많은 장병들이 전차와 같은 기세로 몰려 들어갔다.
그로스만 장군은 매우 흡족한 어조로 자신의 저서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그래, 명령은 (언제 어디서나) 명령이지!”[65]

  • 수술 후에도 사경을 헤매고 있는 9군 사령관의 용태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OKH는 귄터 블루멘트리트 병참감을 스몰렌스크 독일군 병원에 급파했다. 그리고 OKH 병참감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본 광경은-

불과 며칠 전에도 분명히 위태로운 상태였던 중환자가, 환자복 대신 예의 칼 같은 군복 차림으로, 병상에서 9군 사령부로 직접 명령할 수 있도록 모두를 다그치는 모습이었다. 이미 9군 사령관 대리가 임명되었는데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병원장,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를 위시한 병원의 모두가 활력이 너무도 넘치는 나머지 당장 박차고 나갈 기세의 중환자(상급대장)를 만류하면서도 떨고 있을 때 마침 OKH 소속 장성이 도착한 것이었다. 중환자의 넘쳐나는 에너지와 행동력 및 경이로운 회복력에도 불구하고 요양은 불가피했다.
블루멘트리트는 모델을 드레스덴의 자택으로 보내어 수년 만에 온 가족의 재회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중환자는 평화로운 긴 잠에 빠져들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드레스덴의 4군단 사령부도 물심양면으로 모델의 요양을 도왔다. 그렇게 지치지 않던 열정도 끝없던 걱정도 멈추었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66]
파일:Generaloberst Walter Model June 1942.jpg
1942년 6월의 사진. 불과 5월 24일에 중부집단군 사령부와 OKH로 발송된 긴급 전문에는 치명상을 당한 9군 사령관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고, 이송이 불가능한 용태라는 다급한 내용이 적혀 있다. 확실히 본 문서의 다른 사진들과 비교하면 많이 수척한 모습이다.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야전 병원에서 응급수혈로 모델의 생명을 지켜낸 장본인은 젊은 군의관 후보생이었다.


3.3. 서부전선에서[편집]


  • 동부전선의 북부, 중부, 남부 전역부터 서부전선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전역에서 활약한 국방군 장성답게 모델의 사진은 현재도 굉장히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원수의 상징과도 같은 지휘봉을 든 모델의 사진은 여전히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제작비도 많이 들고 제작 기간이 워낙 오래 걸리기에 임명 2개월 후인 1944년 5월 31일에 수여된 원수 지휘봉(Marschallstab)의 경우, 1944년 1월 복귀 이후 서훈과 진급에 관련된 휴가도 받지 못하고 집에서 하룻밤도 묵지 못한 채 오로지 전선에서의 지휘에만 매진했던 모델은 원수로서 예식 행사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결국 사진이 촬영될 기회조차 없었다.

반면 '국방군 원수들이 수면 시간 외에는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는' 약식 지휘봉(Interimsstab)을 들고 있는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어느 날 한스게오르크가 아버지에게 약식 지휘봉의 행방을 질문하자 모델은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고 한다.

"아, 그거? 방해만 돼서 두고 왔어."[67][68]

파일:Walter Model 1943 July 30 Orel.jpg
사단장 시절부터 목에는 망원경을 메고, 어깨에는 카메라를 걸쳤으며, 손에는 지도를 든 채로 전선에서 지휘해 온 모델에게 약식 지휘봉은 번거로운 방해물이었다.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장성의 전사 사례가 급증하면서, 히틀러는 장군참모 출신 장성들이 적군의 눈에 잘 띄는 표적이 되지 않도록 '군복 바지의 붉은 세로줄 부착 금지'를 명령했다.

그러한 시기에 원수의 상징인 그 어떤 지휘봉도 들고 다니지 않고, 자신보다 연하의 상급대장이 단 한 명도 없을 만큼 동료 원수들에 비해 어린 나이였으며, 사관후보생으로 입대 이래 평생 동안 옆머리를 바짝 깎은 프로이센 헤어컷을 유지할 만큼 짙은 머리색과 숱의 모델과 대면한 일선의 병사들은 '원수 각하'(Herr Feldmarschall)도 아니고, '사령관님'(Herr Oberbefehlshaber)도 아닌 '대령님(Herr Oberst)' 혹은 그 비슷한 직위로 부르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69]

모델보다 23살 어린 하인리히 슈프링어 SS소령은 모델이 진심으로 웃을 때 '상냥한 소년처럼 웃는다'는 인상을 받은 것을 보면 신병들의 착각도 무리가 아니었는지, 모델 원수 혹은 모델 사령관을 못 알아본 일화들은 많은데 그러한 착각을 정정해주었다는 내용은 없다.

  • 아르덴 대공세 초반 독일군의 압도적인 전과로 1,500명이 넘는 포로들이 동시에 밀려들고 여기 저기 널브러진 미군 차량과 전차 등의 잔해로 인해 병목현상이 발생하자, 초조해진 5기갑군 사령관 만토이펠은 66군단장 발터 루흐트에게 "반드시 차량들을 끌어내도록, 포병대 없이는 생비트를 점령할 수 없다."고 다그쳤다. 마침 이를 본 모델은 약식 지휘봉을 들고 차량에서 뛰어내렸다.

성큼성큼 교차로 한 가운데에 올라선 모델이 약식 지휘봉을 휘두르며 직접 교통정리를 지도하자, 비로소 정체가 풀리고 차량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극히 실용적인 관점의 소유자인 모델 원수가 약식 지휘봉에게서 가치를 찾아낸 유일한 사례였다.[70]

  • 아른헴 전투에서 대교를 사수한 공로로, 모델은 크나우스트 육군 소령의 기사 철십자 훈장 서훈을 상신했고, 상부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원래대로라면 서훈 과정에서 원수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야 했다. 하지만 모델은 대교 남부에서 전투 중인 크나우스트 전투단을 직접 찾아가서 서훈 소식을 알리고 축하하기로 결정했다.

원수와 부관은 차를 타고 아른헴 대교에 도착했으나, 완전히 노출된 탁 트인 대로에서의 차량 이동은 불가능했다. 모델은 당연하다는 듯이 방공호로 뛰어내렸고, 슈프링어도 모델의 뒤를 따라서 수백m를 엄폐 이동했다.
벙커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는 갑자기 눈앞에 원수가 나타나자 얼어붙었고, 뒤이어 나온 슈프링어가 ‘원수 각하의 도착을 자네의 상관에게 알리도록.’이라고 명령하자 순식간에 안쪽으로 사라졌다. 바로 크나우스트 소령이 나와서 모델에게 보고를 올렸다. 전후 반세기가 흐른 후에도 슈프링어는 이날 모델과 크나우스트 중 누가 더 행복해 보였는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고 했다.[71]

  • 다음은 발터 괴를리츠가 집필한 《Model: Strategie der Defensive》 (1975)를 읽은 하인리히 슈프링어가 책의 상세한 내용에 만족하면서도, 해당 저서에 누락된 것을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자신의 회고록에 소개한 스페셜 에피소드이다.

'아른헴에서의 전투가 종결된 후, 평소처럼 전선을 시찰하던 모델 원수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금세 잠이 들곤 했다. 곤히 잠든 그는 공중에서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절대로 깨지 않았다. 실력파 운전병인 슈미트 상사와 한센 상사, 나를 비롯한 수행 장교들에게 완전히 의지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하루는 아이펠 방면의 탁 트인 산악도로를 통해 사령부로 귀환 중이던 우리는 라이트닝 두 대의 공격을 받았다. 차에서 뛰쳐나왔을 때, MG기관총 탄환이 바로 옆에 쏟아지는 걸 느끼며 우리들은 길가의 도랑으로 뛰어들었다. 깊게 패인 도랑이 우리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었다!
그때 우리의 용감한 운전병이 마구 고함을 지르며 도랑 위로 몸을 날리더니, 라이트닝이 선회하여 다시금 기관총을 퍼붓는 데도 개의치 않고 도로를 가로질러 재빨리 차에 올라타는 게 아닌가. 운전병은 그대로 차를 도랑까지 몰고 내려왔다. 이렇듯 장병들 모두가 모델 원수를 좋아했다.'[72]
파일:Bundesarchiv_Bild_183-1992-0617-506,_Walter_Model_im_Kübelwagen.jpg
1944년 10월 1일, 아헨에 도착한 모델 원수. 용감한 운전병 뒷좌석에 앉은 장교가 하인리히 슈프링어 SS소령이다.

  • 모델은 식사 메뉴에 별 관심이 없었고 전장에서의 식사에 즐거움을 바래선 안 된다는 지론의 소유자였지만, 저녁 식사 테이블에 올라오는 한 병의 레드 와인을 좋아했다.

1945년 2월 4일은 슈프링어가 원치 않았던 SS로의 복귀일이었다. 모델 원수는 참모장 한스 크렙스와 함께 참모 장교들이 출석한 송별 파티를 주최했고, 모두가 와인 잔을 들고 따스한 환송 분위기를 만들어서 슈프링어는 쉽게 작별 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슈프링어에게 모델은 자신과 크렙스의 서명이 담긴 기념사진을 선물했다.

작별 인사는 한 잔의 와인으로 끝나지 않았다. 송별 파티를 마치고 B집단군 사령부를 출발하기 위해 슈프링어가 차에 탑승하려는데, 도저히 그가 비집고 앉을 공간이 없었다. "기념품을 뭐 이리 많이 실었나?" 슈프링어의 웃음 섞인 질문에 운전병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제가 뭘 한 건 없고요, 원수 각하께서 직접 와인 두 박스를 넣어두고 가셨습니다."[73]
파일:Model Krebs to Heinrich Springer.jpg
친필 서명과 함께한 헌사: 하인리히 슈프링어 SS소령에게, 1944/45년 서부전선에서 우리가 함께한 여정을 감사히 기억하며
전후 포로수용소에 입소하는 과정에서 슈프링어는 군복과 소지품을 압수당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에도 국방군 장교들과 돈독한 인연을 맺은 SS 장교답게 슈프링어는 수용소를 관리하는 영국군들과도 친해졌는데 1948년 크리스마스, 부소장은 성탄절 깜짝 선물로 슈프링어에게 보관 중이던 그의 압수품 상자를 보여주었다.
상자 속에서 위의 사진을 찾아낸 슈프링어는 '이젠 세상에 없는 전우들의 사진을 가족에게 전해줄 수 있는지' 조심스레 부탁했고 부소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발터 모델과 한스 크렙스의 기념사진은 수용소 예배를 담당하는 목사와 인근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슈프링어의 고향인 킬까지 무사히 전달되었다. 슈프링어에겐 가장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74]

  • 1941년 동부전선에서 모델 기갑대장과 만토이펠 중령 간의 갈등은 항명과 명령 불복종으로 번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은 채 3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르덴 대공세를 앞두고 3년만의 재회에서, 모델이 너무 쉽게 지난 악연을 청산하고 만토이펠 또한 화해를 받아들이면서, 가난한 음악교사 집안 출신 원수와 명망 높은 프로이센 귀족 가문 출신 기갑대장의 우정이 시작되었다. 모델은 6살 연하의 만토이펠을 인간으로서, 군인으로서 존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75]
파일:Walter Model Hasso von Manteuffel Wolfgang Thomale 1944.jpg
1944년 12월, 아르덴 대공세에서 5기갑군 사령관 핫소 폰 만토이펠 기갑대장, 기갑총감부 참모장 볼프강 토말레 중장,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
만토이펠이 다이아몬드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은 후 동부전선으로 재배치되면서 생전에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이들의 우정은 짧은 시일로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만토이펠은 모델의 54번째 생일에, 자신이 사단장이었던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에 소속된 모델의 아들 한스게오르크를 B집단군 사령부로 보내주는 등 우정을 이어나갔다. 휴가를 받을 수 없는 사관후보생이 B집단군 사령부에 갔다가 육군 원수(이자 아버지)에게 군법 위반으로 친히 박살나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B집단군 사령관 특별 보좌 임무로 파견하도록 조치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사관후보생은 맡은 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아르덴 대공세의 실패로 침체되어 있었던 모델과 B집단군 사령부 장교들이 한스게오르크 덕분에 활력을 되찾았다.
두 사람의 우정은 모델의 사후에도 이어졌다. 3기갑군 사령관 만토이펠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에서 전투 중이던 한스게오르크를 호출하여 아버지 모델 원수의 운명을 알려준 뒤, 18세 소년을 전투 임무에서 배제할 것을 명령했다. 이제 독일의 패배는 정해졌고, 모델 가족은 하나 남은 아들을 더 이상 잃어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한스게오르크는 전임 명령을 거부했고, 동료 부대원들과 함께 최전선에 남겠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만토이펠은 한스게오르크가 모델 가족에 마지막으로 남은 아들임을 재차 강조하며 충고했다.
"사령관으로서 내겐 귀관을 전임시킬 수 있는 정당한 권한과, 귀관을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네."[76]
만토이펠의 명령과 배려로 한스게오르크 모델은 살아서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서독에 군대가 사라지자 본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77]하고 저널리스트를 지망했으나 서독 연방군의 부활과 함께 군에 재입대했다.


4. 평가[편집]



4.1. 인간적, 군사적 평가[편집]


다음 항목에서 모델 원수를 간략하게 기술하기에 앞서, 서문으로 괴테의 문장을 인용하여 모델이 선사했던 강렬한 인상을 표현하고자 한다. "나는 불가능을 갈망하는 자를 사랑한다.(Den lieb ich, der Unmögliches begehrt.)"

귄터 라이히헬름 대령 《US Army Foreign Military Studies, 1945-1961》 A-925 VII. Field Marshal Model 서문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규모 방어전의 마스터. 언제나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서 직접 지휘에 임했고 때로는 휘하 장병들에게 냉혹하고 무자비한 임무를 요구했지만, 그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냈으며 단 한 번도 자신의 부하들을 두려움 속에 남겨둔 적이 없었다."

게르트 니폴트 독일 연방군 육군 중장[78]

《Battle for White Russia: The Destruction of Army Group Centre, June 1944》


  • 능력적으로는 방어전 최고의 명장. 방어전에 너무도 뛰어나서 공세 지휘관으로서는 그보다 한 수 아래라는 말을 듣기도 하나, 그가 공세를 맡았던 때(쿠르스크 전투, 아르덴 대공세)는 이미 소련군이나 영미연합군 전력이 독일군을 압도하고 있었을 시기라서 그의 실력을 평가하는 데에 그리 적합하진 않다. 그리고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기민하고 과감한 전술로 교량을 장악하고 가교를 부설하여 후퇴하는 소련군을 따라잡을 만큼 쾌속 진격을 해냈으며[79], 프랑스 전역에서도 16군의 참모장으로 룩셈부르크, 남부 벨기에를 거쳐 스당을 돌파하고 마지노선 북부를 차단하며 스위스 국경까지 도달하는 급속 진격을 성공시켰다. 방어의 사자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대의 공격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기민하게 대응하면서도 최상의 순간에는 공세로 전환하여 적극적인 포위 섬멸전을 이끌어가는 것이 큰 특징.

  • 뢰어리히트 장군의 1956년 3월 1일자 기록에 따르면, 1945년 4월 말 자신이 포로가 된 직후 조지 S. 패튼과 대면하게 되었는데, 패튼은 모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특출나는 역할을 도맡았던 것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패튼은 미군 내에서도 여러 모로 예외적인 지휘관이었는데, 오히려 적군인 모델에게서 공통점을 찾고 일종의 롤 모델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뢰어리히트는 받았다.

다만 전사학자들은 '직접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지휘 스타일을 제외하고는, 패튼과 모델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고 판단한다. 패튼과 달리 모델은 명문가 귀족과 거리가 멀고 군사적 배경이 전혀 없는 중산층 출신에, 독실한 신앙인이고, 가정에 모범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였다는 점에서 비슷한 소도시 출신인 아이젠하워나 역시 아버지가 교사였던 오마 브래들리와 공통점을 찾는 경우도 있다.

이채로운 점은 동부전선에서 대부분의 기간 동안 모델과 맞대결을 펼쳤던 소련군 장성들과 달리, 8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모델과 서부전선에서 싸워왔던 미군 장성들은 모델의 전공을 솔직하게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패튼은 아르덴 대공세에서 미군의 창이 되어야 할 제6기갑사단에게 역사상 최악의 날로 남게 된 1945년 1월 4일자 일기에 "우리는 여전히 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고 기록했고, 다른 미군 사단들조차 모델이 재편성한 기갑부대의 반격에 휘말려 패퇴하자 "독일군은 우리보다 훨씬 춥고 굶주렸지만, 우리보다 더 잘 싸우고 있다."며 호적수에 대한 존중을 아끼지 않았다.[80] 휘르트겐 숲 전투 직후 누구보다 모델의 신병 확보를 간절히 바랐던 브래들리는 전후 라이프 지 기고문과 회고록을 통해,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독일군 동부전선의 재건과 D-DAY 이후 서부전선의 재건은 온전히 ‘프로이센인’ 모델의 전공임을 분명히 밝혔다.

  • 서부전선 총사령부 참모장이었던 귄터 블루멘트리트 장군은 모델은 부하들을 엄정하게 질책했던 것은 그들이 멍청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뿐이며, 참모장교 한 사람의 잘못은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참모장교들에게 유독 엄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고 이를 받아들였다.[81] 또한 “사단장과 군단장들은 모델을 정면으로 마주할 땐 그를 두려워했고 정확한 보고를 올리지 못하면 가차없이 질책을 받았지만, 이들은 모델을 진심으로 존경했다.”고 증언했다. 이렇듯 모델의 지휘 방식을 이해한 참모들과 부대 지휘관들, 일선 장병들은 보고를 받을 때 전선에서의 고충뿐 아니라 개인적인 이야기나 고향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까지 전부 들어주는 발터 모델을 무척이나 친근하게 여기고 존경했다.

파일:attachment/발터 모델/Walter_Model_1944_with_soldiers.jpg
북부집단군 사령관에 부임 즉시 모델은 최전선, 사단 사령부, 기차역에서 귀국하는 병사들을 위한 환송연까지 직접 참석하여 '증원 부대가 오고 있으며 작금의 위기 상황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으니 모든 장병들은 맡은 바 의무를 다할 것'을 한결같이 호소하였고 이는 압도적인 전력 차이[82]에도 북부집단군이 판터 라인으로 퇴각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모델은 언제 어디서나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현재 상황에 대한 정확한 보고와 긍정적인 관점, 최소한 3개 이상의 대안을 제시하도록 한다. 그러면 내가 귀관들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도록 하지."를 강조하였는데 이를 기반으로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해결책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보고가 잘못되거나 머뭇거리거나 늦어지면 폭언으로 점철된 호된 질책[83]을 각오해야만 했다.

  • 대신 보고가 정확하고 대답이 충실하면, 혹한의 날씨에 대전차포병들이 자리를 이탈하여 대형 모닥불 앞에서 온기를 쬐고 있어도 관대하게 봐주었다. 빙긋 웃으며 "모닥불로 돌아가서 몸을 더 데우도록 하게."라고 말한 뒤 재빨리 사라져 주는 '작은 키에 모노클을 착용한 장군'이 9군 사령관 모델임을 Bernhard Averback는 뒤늦게 깨달았는데 어느새 모닥불 앞에 다시 모인 이탈자 동료들이 박수 갈채로 그를 맞이해 주었다.[84] 전사학자인 발터 괴를리츠는 장병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장성은 발터 모델이었으며 당시 동부 전선에서 유행하던 말이 "모델이 있는 곳에선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다(Wo Model ist, geht's nicht schief).", "모델 한 사람의 가치는 수 개의 기갑사단에 버금간다."였다고 한다.

  •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 사람에게 그토록 많은 군사적 책임이 중첩된 적은 없었다.'는 평가에 걸맞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만 모델이 가지고 있던 별명과 유행어가 도합 10개가 넘었다. 특히 독일군 장병들은 "이번에도 모델(Model)이 리모델(model)해 냈다. -Das hat Model wieder hingemodelt-"라는 말을 즐겨했는데 여기서의 동사 modeln은 그의 이름에서 착안하여 '적군의 총공격을 막아내고, 전선을 만들어냈다'를 의미하였다. 동부전선에서도 서부전선에서도 이등병부터 원수에 이르는 모든 계급의 독일 군인이 모델의 실력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85] 오늘날의 독일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ummodeln이란 단어는 영어로 remodel과 비슷한 의미로,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발터 모델의 무훈과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신조어이다. 영어로 model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Modell로 18세기,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표현인데 여기에 모델의 이름처럼 l자를 제외시켰던 유행어가 정착된 것이다.[86]

  • 실로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로 휘하 30개 사단 대대장들의 얼굴을 전부 알고 있었고 이들과 나눈 대화 내용까지 기억하고 있었으며 부하들의 서훈도 잊지 않고 추천해주었다고 한다. 한 번도 자신에 대한 특별 대우를 요구한 적이 없었으며, 관례적으로 고위급 장성에게 인정되던 혜택조차 맹렬하게 비판하며 거부했다. 그래서 1945년 1월 24일, 모델의 54번째 생일 선물로 만토이펠 기갑대장과 필링 대령이 비밀리에 합작하여 아들인 한스게오르크를 B집단군 사령부로 데려오면서도 아버지 모델이 '동부전선에서 전투 중인 사단의 사관후보생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군율 위반'이라며 화내지 않을까 우려했다. 다행히도 모델 부자의 재회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발터 모델은 저녁 식사 시간에 깜짝 등장한 아들의 모습에 무척 기뻐하였고 한스게오르크는 최전선을 시찰하는 아버지와 동행하고 장군참모들과 눈싸움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생애 마지막 만남이 된다.[87][88]

반대로 장병들의 복지는 굉장히 신경 써서 병사들과 대화할 때 '몇 시간 째 잠을 못 자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따뜻한 식사를 하고 군복을 갈아입은 것은 언제인지.' 챙겨 주었다고 한다. 중부집단군에서 군수참모로 재직하던 헤르만 테스케 대령은 '첫 인상은 무뚝뚝하고 언행은 거칠었지만 병사들에게 아버지처럼 너그러웠다'고 발터 모델을 회상하였다.

  • 아르덴 대공세가 한창이던 1944년 12월 23일 이른 아침, 모델은 하인리히 슈프링어 SS소령에게 크리스마스 이브는 최전선의 부대원들과 함께 보낼 예정이니 그들에게 가져다 줄 작은 선물을 준비할 것을 당부하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아이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면, 아버지는 어둡고 폭설이 몰아치는 험난한 길이라 해도 두려워 말고 가서 지켜 줘야 해. 나의 장병들은 내 아이들이야 (Meine Soldaten sind Meine Kinder)."
슈프링어는 회고록에서 이를 '언제나 장병들을 먼저 생각했던 위대한 군인의, 나에게는 가장 잊을 수 없는 말이었다.'라고 기록하였다.[89]

  • 파울 카렐은 모델과 장병들의 관계를 충전기와 건전지에 비유하였는데 모델은 피젤러 슈토르히와 퀴벨바겐에 탑승하여 상시 전선을 시찰하였고 악천후에 차량이 움직이지 못하면 러시아 썰매, 스키를 타거나 기마(모델은 상당히 뛰어난 승마술의 소유자로 모델 특수기병여단- Special Cavalry Brigade "Model"- 을 직접 편성하여 훈련시켰고 춘계, 하계의 진창 속 전투에서 우수한 기동력을 발휘하게 된다), 두 발로 걸어서라도 매일 전선의 병사들과 만났으며 이러한 사령관의 모습은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전투력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의 서부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파일:attachment/발터 모델/9th_army_Walter_Model_Rzhev_1943_Jan.jpg
9군 장병들은 사령관의 시찰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고 어김없이 모델은 나타났다. 르제프 전역은 폭이 최대 450km에 이르는 만큼 상급대장을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도 많았기에 모델이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장병들의 요구 사항을 귀담아 들으며 재미난 농담도 즐겨했다.[90] 1942년 8월 초, 중상을 입고 본국에서 요양 중이던 사령관의 복귀 소식이 전해지자 일선의 장병들에서부터 시쵸프카 9군 사령부 참모 장교들까지 모두가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사령관 대리인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 기갑대장은 부드러운 언행의 소유자였지만 모델만큼 열정적이고 다이내믹한 지휘관은 아니었다고 한다.[91] 사진은 1943년 1월, 폭설이 내린 르제프 전역 최전방을 시찰 중인 발터 모델 상급대장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호전의 지옥 속에서 갈고 닦았다는 발터 모델의 직설 화법은 아돌프 히틀러 앞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총통과의 설전에서도 승리를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1942년 1월 20일, 9군 사령관 취임 딱 5일째였던 모델은 중부집단군의 증원 부대가 총통이 주관하는 다른 작전에 예비대로 투입되어야 한다는 중부집단군 참모장의 연락을 받자마자 눈보라가 몰아치는 데도 조종사에게 명령, 러시아 하늘을 가로질러 동프로이센의 늑대굴에 도착하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야전지휘관에게 히틀러가 재차 자신의 명령을 따를 것을 요구했지만 모델은 총통을 모노클 너머로 차갑게 바라보며 질문하였다.
"총통 각하, 9군 사령관이 누구입니까. 당신입니까, 저입니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책상 위에서 지도나 들여다보는 당신과 참모들보다는 전장에 있는 자신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통보하는 일개 기갑대장의 발언에 한참동안 할 말을 잃은 히틀러는 결국 "좋아 모델, 자네 뜻대로 하게. 하지만 자네 목숨을 걸어야 할 걸."이라며 모델의 지휘권을 존중하기로 결정한다.[92][93]

3일 전, 신임 9군 사령관 모델이 처음으로 늑대굴에 와서 보고를 올릴 때에도 히틀러는 모델이 나간 후 루돌프 슈문트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자의 눈빛을 보았나? 나는 모델이 자신의 임무를 해 낼 거라 믿어. 하지만 그의 부하가 되고 싶진 않군."

폰 멜렌틴이 '험악한 언쟁'이라 정의한 이 사건 다음 날인 1월 21일에 모델은 예정대로 반격 작전을 개시하였고 언쟁에서 승리의 대가로 받아낸 증원 부대를 운용하여 소련군을 분쇄, 그 공적을 인정받아 상급대장으로 진급한다. 그 어떤 장성도 모델처럼 히틀러와 대놓고 몇 번이나 언쟁을 벌여 총통의 고집을 꺾어 버린 적은 없었다[94]고 한다.

  • 일련의 대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1943년 가을, 히틀러는 사령관들이 집결한 자리에서 그들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에 대해 불평했다. "1941년에 보여줬던 투쟁 정신은 어디로 가버린 거요? 그렇게 용맹했던 사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사령관들의 면전에서 장병들을 모욕하는 총통을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1941년의 그 사내들이 전사했으니까요. 그들의 무덤은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습니다."

히틀러의 분노를 직시하며, 목숨을 걸고 싸운 부하들을 옹호하고 애도한 단 한 명의 사령관이 모델이었다.[95]

파일:GeneralOberst Walter Model July 1943.jpg
1943년 7월, 오렐 전투. 지휘 차량에서 9군 사령관 모델과 2기갑사단장 볼라트 뤼베 중장

  • 히틀러는 원수와 상급대장, 대장급의 고위 장성들에게 현금, 수표, 귀중품, 부동산 등의 거액 뇌물을 지급해왔고, 나치와 거리가 먼 군인이었다고 평판을 얻은 장성들조차 히틀러에게 수십만 마르크에 달하는 '충성의 대가'를 수령하였다.

모델은 총통의 뇌물을 거절했고, 여기에는 두 가지 증언이 있다. 북부집단군 장군참모였던 요아힘 폰 브룬 대령은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모델이 생일 선물로 받은 히틀러의 수표를 반송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진술했다. 반송된 수표가 나치 당수의 엄중한 경고와 함께 재차 모델에게 도착하자, 이에 모델은 답신을 보냈다.

"명령대로 수표를 수령했고 같은 날, 같은 금액을 적십자사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45년 1월 말, 모델의 아들 한스게오르크가 B집단군 사령부에 체류할 때 한스 크렙스 참모장이 '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너도 알 수 있도록' 들려준 말에 따르면, 육군 인사청장이자 히틀러의 수석 보좌관인 루돌프 슈문트 장군이 먼저 모델에게 총통의 증여 의사가 있음을 알려준 뒤, 모델의 의사를 타진해보았다.

탁월한 중재자였던 슈문트는 뇌물이 거절당할 경우, 총통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할 것임을 우려했다. 모델과의 친분 덕분에 슈문트는 그의 성격과 물질적 혜택을 필요치 않는 태도를 잘 알고 있었고, 모델이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에만 포상금이 지급되는 게 프로이센의 오랜 전통인데, 우리가 전쟁을 이미 승리로 끝냈던가?"

질문에 질문으로 대신하는 모델의 말을 듣고, 슈문트는 더 이상 해당 논의가 진행되지 않도록 조치하였다.[96]

파일:Schmundt von Sacucken Walter Model 08 1943.jpg
1943년 8월, 왼쪽부터 루돌프 슈문트 중장과 디트리히 폰 자우켄 중장, 발터 모델 상급대장. 모델과 폰 자우켄은 후일 다이아몬드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서훈자가 된다.

  • 구데리안은 모델을 '대담하고 지칠 줄 모르는 군인'이라고 평가하였고 동료 장성들은 물론 연합군과 전사학자들도 '강철 같은 체력과 의지의 소유자'임을 인정하였다. 새벽 1시나 2시까지 일했으며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1시간 동안 지도를 분석하고 아침 6시에 사령부를 출발하여 10시간 동안 최전선을 시찰'했고 전날 과음을 해도 어김없이 5시에 일어났다. 모델 자신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피폐해져 있던 최후의 전장 루르에서도 기상 시간을 지키며 전선의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대규모 작전 중일 때에는 아예 밤을 지새워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군 지휘관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권리가 없다." 모델의 지휘 철학이었다.

  • 항상 모노클을 착용하고 각 잡힌 군복 차림과 경례 자세 등 외양에서부터 프로이센 장교의 전통을 충실히 지켜온 모델은 비정치적인 성향, 용전을 펼친 적에 대한 기사도 정신 등 사상적으로도 프로이센 장교의 전통을 고수하였다고 한다. 제1차 르제프 전투 당시 포위망에 갇힌 채 항공 탈출을 거부하고 최후까지 부하들의 곁에 남았다가 중상을 입고 자결한 제33군 사령관 미하일 예프레모프(Mikhail Grigoryevich Yefremov) 중장에 대하여 독일군 장교들은 포로가 된 소련군 장교들과 함께 2열로 마주 서서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교회 묘지에 안장하였고 종전 후 소련 국립 묘지에 이장할 때 예프레모프의 유해에는 금장 손목시계가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2009년에 방영된 러시아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를 '상대편의 야전 병원에도 포격이 가해지던 시기에 무척이나 이례적인 경우'라고 표현하였다.

  • 대부분의 독일군 장성들이 다른 추축국 진영 군대에 대하여 대전 중에도 종전 후의 회고록에도 평가 절하했던 것에 비하면, 모델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 시절 헝가리군에게 우호적이었으며 헝가리 1군 사령관 러커토슈 게저(Lakatos Géza) 상급대장에게 상당한 지휘 권한을 부여하였다. 특히 헝가리군 전차 부대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1944년 5월 4일, 헝가리 왕립 제2전차사단에 4호 전차 H형 12대, 3호 돌격포 10대, 6호 전차 티거 10대가 모델의 명령에 따라 배치되었는데 이는 최근 국내의 게임 뉴스 게시판#에 소개될 만큼 매우 예외적인 조치이다.

파일:attachment/발터 모델/Walter_Model_General_Lakatos_Hungarian_1944.jpg
헝가리 1군을 시찰 중인 발터 모델 원수. 그의 뒤편에 코트를 입은 장성이 후일 헝가리 총리의 지위에 오르는 러커토슈 상급대장. 헝가리군의 뛰어난 전공으로 5월 25일, 러커토슈에게 기사 철십자 훈장이 수여되었다.[97]



4.2. 전쟁 범죄와 신화화에 대한 비판[편집]


"모델 원수와 크렙스 장군, 그리고 정보참모와의 면담이 있었다. 우리는 친위특무대와 9군 소속 군단 정보참모들이 긴밀히 협력하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지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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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2월에서 1943년 1월까지 친위대 특무대 7a의 지휘관을 역임했던 알베르트 라프(Albert Rapp) 친위중령의 증언


문서를 지금까지 읽었으면 알겠지만 서술된 "장군으로서의" 측면만 보면 모델은 이상적인 장군상 그 자체이다. 전술·전략적 능력의 탁월함은 물론이요, 부하들을 아낄 줄 알고 존재만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올릴 만큼 능력과 인격을 겸비했으며, 상관에게도 직언을 서슴치 않고, 정치와도 담 쌓고 청렴하기까지 한, 군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참군인 장군상을 그대로 구현해 놓은 듯한 인물이다.

이는 이 문서가 기반한 서적들 다수가 참전용사로써 전쟁 당시 모델의 곁에 함께했던 이들, 또는 그의 아들 한스 게오르크 모델의 시각에서 쓰여졌거나, 또는 이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회고록은 각종 증언과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는 중요한 1차 자료임과 동시에, 철저한 검증이 필요한 주관적인 자료라는 것이다. 이 회고록들은 나치 독일군과 전우, 그리고 가족이라는 좁은 집단의 시각을 넘어서는 객관성을 제공하지 못한다. 가령 이 문서에서 인용한 "기갑 전투(Panzerschlachten, Panzer Battles)"은 냉전 초기인 1956년에 초판이 발간된 것을 시작으로 1976년까지 약 20년간 큰 인기를 누렸던 서적이다. 하지만 저자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은 국방군 소장 출신으로 1944년에 9기갑사단을 지휘하며 모델 휘하에서 싸웠던 인물이므로 그의 서술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실제 그 내용 또한 매우 시대착오적이다. "Panzer Battles"에서 멜렌틴은 나치즘적 시각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데, 그는 소련군 장병들을 두고 "소련 제국의 가장 깊은 오지에서 끌려나온 아시아인"으로서 "감정과 본능에 좌우되는 원시적 존재"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독일군이 패배한 이유는 그런 열등한 소련군이 물량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서술한다. 이는 전후 국방군 장성들의 회고록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인종주의이자 자기 변론으로, 이미 1980년대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깨진 지 오래다. 미국 유타 대학의 명예교수로 있는 역사학자 로널드 스멜서에드워드 데이비스 2세는 공동 저술한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에서 멜렌틴을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한스 울리히 루델, 카를 폰 루크와 같은 전후 역사왜곡의 거두 중 하나로 분류할 정도다. 국방군 범죄 연구의 권위자인 독일 군사사학자 볼프람 베테 또한 마찬가지로 멜렌틴 소장을 친 국방군 역사수정주의의 거두 중 하나로 꼽으며 비판한다.

그리고 르제프 전투 항목에서 근거로 드는 "르제프, 동부전선의 주춧돌(Rshew, Eckpfeiler der Ostfront)" 또한 60년 전인 1962년에 나온 서적이며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이 책의 저자는 호르스트 그로스만 국방군 육군대장으로, 르제프 전투 당시 6보병사단을 지휘하며 모델 휘하에서 싸운 적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로스만 대장 또한 국방군 범죄와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6사단장이던 시절 그 휘하의 제18연대장직을 맡고 있던 카를 베커는 국방군 인사평가에서 극렬 나치라는 평가를 받던 인물로, 르제프 시에서 벌인 학살 때문에 전후 소련에 전범으로 잡혀 10년간 옥살이까지 했다. 때문에 멜렌틴 소장과 그로스만 대장의 호평은 당시 모델의 부하들의 구술 증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현장에 있던 이들로서 그들의 증언은 매우 귀중한 1차 사료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들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며, 실제 역사적 평가는 더욱 엄격해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비판받아 마땅한 서적들은 오히려 모델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강화하였다. 이 회고록들의 저자들은 모델을 만나본 적 없는 이들은 이야기할 수 없는 모델의 여러 모습과, 그와 함께했던 온갖 자질구레한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경험과 모델이 세운 놀라운 군사적 업적을 바탕으로, 그를 매력 있는 '방어의 사자', '총통의 소방수', '마법사의 제자' 따위의 영웅심을 자극하는 단어들로 수식되는 신화적인 존재로 서술했다.

모델이 부하들을 적극적으로 챙겼다는 온갖 일화들이나 전쟁 후반기에 그가 히틀러의 명령에 반하는 일부 결정들을 내렸던 이야기들은 모델이란 캐릭터를 더욱 인간적으로 꾸며 주어 결국 이 신화를 강화하는 작용을 한다. 다시 말해, 독자들은 회고록의 저자들이 모델에게서 받았던 인간적이고 친밀한, 때로는 강렬하기까지 한 인상과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들으며, 저자들이 모델의 지인이라는 주관적인 시각으로 말하는 '영웅적 인간' 발터 모델을 내면화한다. 따라서 독자가 책을 덮을 즈음에는 모델이 범죄 집단의 군인이었다는 사실을 지극히 무의식적이고 감정적으로 부정하게 된다. 저자들이 실제 모델의 주변인이고 같이 전쟁을 겪었던 이들이라는 사실이, 그들이 구술하는 모델에 대한 증언이 진실일 것이라는 강력한 설득력과 근거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모델에 호의적인 주변인이라는 특성 때문에 이들이 회고록에 모델에 대한 비판점이나 역사적인 잘못 등을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서술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편, 이 회고록들에서는 신화에 필요없는 끔찍한 진실과 상흔들, 즉 동유럽의 파괴된 수많은 도시들, 수천만의 희생자들과 곳곳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 등 광기 넘치는 '절멸전쟁(Vernichtungskrieg)'이었던 동부전선의 현실은 누락된다. 대신 위대한 승리와 천재적인 군사 재능, 다가오는 패배를 마주하고서도 놓지 않는 희망과 영웅적 항전, 돈독한 전우애, 고리타분한 프로이센 기사도 정신으로 그 빈 자리를 채웠다. 그들이 말하는 모델의 일대기는 소설 속의 한 영웅의 일대기처럼 흥미진진하게 서술된다. 중산층 출신의 허약한 소년이 군사 귀족의 자제들이 독점하는 군에 입대하여 스스로의 힘만으로 인정받고, 천재적인 군사 재능을 발휘하며 평생을 조국에 헌신하는 이야기.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희망을 잃지 않았고, 부하들을 챙기는 덕장이다. 또한 자신의 지론을 철저하게 지키는 곧은 성정을 지녔으며, 그렇기에 조국의 패배와 잘못을 깨닫자 자살함으로써 양심과 충성을 모두 지킨 사람이다. 이렇게 반쪽짜리 사실이 만들어질 필요 전혀 없고 만들어져서도 안 되는 고전적인 영웅의 비극 서사시로 각색되어, 실제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가로막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결국 모델은 유래가 없을 정도로 정치적이며 인종적이었던 나치의 섬멸전쟁에서 감정적인 수준에서부터 분리되었으며, 회고록과 평전의 독자들은 그를 양심적인 참군인이라 여기게 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다. 이 영웅화 작업은 비단 모델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독일 장군들, 특히 만슈타인이나 구데리안하우서롬멜호트 등 나치 독일군과 무장친위대의 아이돌 같은 장군들과 그 부하들은 전후 냉전 시기의 반소적 정서에 편승하여 이런 식의 회고록과 역사서들을 생산해냈고,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유럽의 보호자 독일이라는 구태의연한 레퍼토리로 자신들의 과거를 포장했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대로, 회고록에 경도된 영미권 독자들이 그들의 신화를 퍼뜨림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면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이후 국방군 무오설과 위 장군들의 신화는 나치 장군들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자행한 역사 왜곡과 숨기기 급급했던 학살 관여 사실들이 볼프람 베테와 같은 역사학자들의 조사로 낱낱이 밝혀지면서 점차 무너져갔다. 모델은 자살로써 오롯이 과거에 남게 되었기에 한동안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다른 이들의 신화가 무너지는 때에 맞춰 시의적절하게도 재조명된 것. 그리고 그의 '비정치적' 행적은 그 신화의 가장 강력한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대표적으로 르제프 전투 당시 들소 작전에서 모델이 벌였던 견벽청야 작전은 자그마치 10만 명을 상회하는 막대한 피해자들을 양산하고 1만 채에 가까운 건물을 파괴하였으나, 반러적 또는 친독적 매체들에서는 이를 그저 러시아의 왜곡이라 치부하거나 부수적인 피해라며 축소하곤 한다.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그가 평생의 신조로 삼았던, 정치적인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기계적 중립 논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반인륜적인 전쟁을 자행하던 나치 독일을 위해 발현되었지 인류애적인 측면에서 발휘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군 계급의 최정점이라 할 수 있는 원수였으며, 책임 범위 또한 몇 개 부대 수준이 아니라 수 백 km가 넘는 전선을 통째로 담당하는 집단군사령관이었다. 전선에서 벌어진 독일군의 숱한 전쟁범죄에 대한 최종적 책임은 결국 사령관에게 있다. 그토록 전선을 직접 뛰어다니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정보수집에 열을 올렸던 모델의 성격상 전쟁범죄를 몰랐을 리도 없고, 설령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적극적으로 학살을 행하거나 명령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렇다고 그런 범죄 행위들을 자신의 직책이나 목숨을 걸어가며 막았다는 증거 또한 없다.

오히려 모델 원수와 그 참모장 한스 크렙스는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아인자츠그루펜 B가 벌이는 온갖 학살 범죄에 대해 정기적인 보고를 받고 있었지만 지역 안정화를 명목으로 그들과 협력했다. 아인자츠그루펜 B는 9군과 모델이 자신들에게 "열정적으로 협조(laufende Zusammenarbeit)"했다고 상부에 보고했을 정도였다. 아인자츠그루펜 B의 사령관인 친위중장 아르투어 네베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벌어지자 휘하의 특무대 7a와 7b를 9군에 배속했고, 그 중에서도 7a는 9군 사령관 아돌프 슈트라우스 상급대장의 명확한 지휘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슈트라우스의 후임자가 바로 모델이며, 모델 또한 특무대 7a와 협조하였다. 그들의 사령관으로써 그는 실제로 이에 대해 저지하는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1944년 그가 사령관이었던 당시의 중부집단군은 벨라루스에서 빨치산 토벌을 명목으로 3년째 무자비한 파괴를 일삼아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반덴베켐풍(Bandenbekämpfung), 의역해서 나치의 치안 전쟁으로도 불리는 무차별적 소탕전이 가장 심각하게 벌어졌던 곳은 다름아닌 중부집단군의 벨라루스였다. 모델이 이 학살을 시작하거나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독소전쟁 참전 기간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모델은 중부집단군에서 복무했고 그의 임기 동안에도 파괴는 이어졌다. 이러한 파괴 행위를 알았지만 방조한 책임은 분명히 모델에게 있다. 그리고 벨라루스에 대한 파괴 행위는 소련이 벨라루스를 해방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당시의 독일군은 비정규전을 통상적인 전쟁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악한 아시아적 유대 볼셰비키들의 편법적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도 그에 상응하여 통상적 전쟁을 벗어난 잔혹한 수단을 동원해도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독일군에게 있어 마을 전체를 파르티잔 동조자로 몰아가며 무차별 학살을 벌이는 것은 공식적이고 '당연한' 대파르티잔 작전이었으며,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이는 극소수였다.

군사적 천재라는 모델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중부집단군이 소련군의 주공을 전부 받아내며 괴멸적인 피해를 입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해도, 전선 후방의 점령지 민간인들에 대한 초토화는 결국 막지 못한 사령관의 책임이다. 군사 전술이나 부하들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호되게 질책하고 전선 하나하나를 시찰하며 세부적인 전황을 직접 조정하며, 필요하다면 후방으로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 총통 집무실에 들이닥쳐 히틀러 면전에다 대놓고 따지기까지 할 정도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던 사람이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방조한 것이다.#

이런 면모 때문에 냉전 해체 직후 연구를 본격적으로 들어갔을 때 모델을 친나치 인사로 보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런 논의가 진지하게 이루어졌을 정도로 모델이 나치에 협조적이었던 편이었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그렇다기보다는 모델은 당시 국방군 내에서 팽배했던 전형적인 프로이센 군인 마인드였다는 관점을 좀더 타당하게 보는 편이다. 본질적으로 왕당파 귀족 집단이었던 그들은 민주선거를 통해 집권한 나치당에 대해 전적으로 충성하지 않았고 그 기조에 모두 동의하지도 않았으나, "독일의 영광"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필요악 정도로 보며 적극 협조했다. 모델이 학살 명령에 대해서는 방조했으면서 막판에 히틀러가 폭주하면서 독일 자체를 파괴하라는 네로 명령을 내리자 적극적으로 항명한 것을 보면 그의 판단잣대와 그에 따른 한계에 대해 명확한 판단이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애국이라는 대전제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무슨 전쟁범죄를 저지르건 정권 기조에 무작정 충성하는 장군이었던 것. 실제로 이건, 본인도 그 유명한 "범죄 정권에 종사했다."라는 실토로 시인한 일이며 그렇게 시인한 것도 전후 문제된 학살이나 수용소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정권이 폭주하다 못 해 조국 독일에 해가 되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을 때였다.


4.3. 총평[편집]


결국 모델은 진심으로 악인은 아니었던,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뿐이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범죄 집단에 적극 협조하게 되었던 입체적 인물이다. 분명 그의 인간적 매력과 특히 그 군사적 능력은 경이로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부하들의 무의미한 희생에 가슴 아파하고 히틀러에 반기를 들 줄도 알았다. 이는 그를 만나거나 연구하는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바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일면만을 바라보며 그가 침략 전쟁의 충실한 선봉장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를 '참군인' 이라고 과도하게 찬양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히틀러의 예스맨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에게서 '나의 가장 최고의 원수'라는 평가까지 들을 정도로 그의 전쟁에 가장 훌륭히 협조하였기에, 모델 원수의 행적은 더욱 문제가 된다. 그리고 모델의 죽음 또한, 결국에는 현실을 끝까지 외면하다 마지막 순간에서야 자신의 죗값을 깨달았지만, 재판에 서서 속죄하기는커녕 자살로 책임을 회피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모델의 절친한 친구였지만 전임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강조 명령을 직접 폐기시키면서 적극적으로 전쟁범죄에 반대했고, 죽음으로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거부한 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대비된다. 참고로 모델이 살아남았다면 뉘른베르크 재판에 세워질 예정이었다. 소련이 라트비아의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577,000명과 노예노동에 동원된 175,000명에 대한 책임을 물어 모델을 전쟁범죄자로 기소했기 때문이었다.

여튼 이런 면 때문에 모델은 나치 독일이 보통 악으로 나오는 보통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창작물에서도 단순 악역이라기보다는 이런 점이 반영되어 개인적인 인품은 좋지만 한계가 명확한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일각에서는 방어전 능력이 출중하다 못해 자살로 자신에 대한 비판까지 방어해 버렸다는 의미로 저승으로의 기동방어#라는 식으로 희화화되기도 한다.


5. 주요 보직 내역[편집]


  • 1938.11.10 ~ 1939.10.25 : 4군단 참모장
  • 1939.10.25 ~ 1940.11.13 : 16군 참모장
  • 1940.11.13 ~ 1941.10.01 : 3기갑사단장
  • 1941.10.01 ~ 1942.01.14 : 41기갑군단장
  • 1942.01.15 ~ 1943.11.01 : 9군 사령관
  • 1943.07.12 ~ 1943.08.14 : 9군 사령관 겸 2기갑군 사령관
  • 1944.01.28 ~ 1944.03.31 : 북부집단군 사령관
  • 1944.04.04 ~ 1944.06.27 : 북 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
  • 1944.06.27 ~ 1944.08.17 : 중부집단군 사령관 겸 북 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
  • 1944.08.17 ~ 1944.09.04 : 서부 전선 총사령관 겸 B집단군 사령관
  • 1944.08.17 ~ 1945.04.17 : B집단군 사령관


6. 진급 내역[편집]


  • 1910.08.22 : 소위(Leutnant)
  • 1915.02.25 : 중위(Oberleutnant)
  • 1918.03 : 대위(Hauptmann)
  • 1929 : 소령(Major)
  • 1932 : 중령(Oberstleutnant)
  • 1934.10.01 : 대령(Oberst)
  • 1938.03.01 : 소장(Generalmajor)
  • 1940.04.01 : 중장(Generalleutnant)
  • 1941.10.01 : 기갑대장(General der Panzertruppe)
  • 1942.02.28 : 상급대장(Generaloberst)
  • 1944.03.31 : 원수(Generalfeldmarschall)


7. 주요 서훈 내역[편집]


  • 1914.09.20 :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 1915.03.29 : 바이에른 전공 훈장 4급
  • 1915.10.19 :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 1917.02.26 : 호엔촐레른 왕가 검 기사 십자 훈장
  • 1917.11.22 : 튀르크 전역 참전 기념장 철 초승달장
  • 1917.11.22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전공 훈장 2급
  • 1917.11.22 : 오스트리아-헝가리 전공 훈장 3급
  • 1918.08.27 : 전상장 은장
  • 1935.01.26 : 최전선 전투 명예장
  • 1939.05.31 : 스페인 전역 참전 기념장 검 동장
  • 1939.09.22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10.02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41.07.09 : 기사 철십자 훈장(344번째 서훈)
  • 1941.08.29 : 기갑전 휘장 은장
  • 1942.02.17 :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74번째 서훈)
  • 1942.05.25 : 1939년 제정 전상장 금장
  • 1942.07.15 : 1941/1942 동부전선 동계 전역 기념장
  • 1943.04.02 :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28번째 서훈)
  • 1944.08.17 : 다이아몬드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17번째 서훈)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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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리드리히 대왕과 같은 날 태어났다.[2]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당시 병력의 열세 및 무솔리니의 축출 등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효율적인 지연전으로 상당수의 병력을 이탈리아 본토로 무사히 퇴각시켰다. 또한, 동부전선에서 제1기갑군 사령관으로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에서 무사히 탈출시킨 공적이 있다. 1944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3] 당시 독일 제국은 군인 집안 출신이나 융커 계급 출신이 아니면 '황제의 군대'에서 출세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군대에 아무런 가문적 배경이 없었던 발터 모델이 군에 입대한 것은 가족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들은 발터가 아버지처럼 교사가 되거나 친형처럼 법대에 진학할 거라 생각했다.[4] 《Generalfeldmarschall Model Biographie》 Walter Göriltz, 2012[5] 황제 빌헬름 2세의 5남으로 당시 대령이었다.[6]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훗날 나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체포 후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갇혔으나 살아서 종전을 맞았다. <처음 그들이 왔을 때>라는 시로 국내에도 무척 잘 알려진 인물이다.[7] 이때 모델의 직속 상관이 당시 소령이었던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였다.[8] 독일 전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프리드리히 폰 코헨하우젠 포병대장이 대령 시절에 발간한 《Gneisenau – Seine Bedeutung in der Geschichte und für die Gegenwart》에 수록되어 있다.[9] 《Generalfeldmarschall Walter Model. Von Genthin bis vor Moskaus Tore》 Konrad Leppa, 1962[10]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 당시 OKH 참모총장이었던 루트비히 베크가 1935년, 발터 모델 대령을 베를린 참모본부로 추천한 장본인으로 3년 후 모델은 소장으로 진급했다. 베크가 물러나면서 모델 또한 드레스덴으로 좌천된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베크의 후임인 프란츠 할더는 모델의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구데리안의 기갑화 정책에 동조하는 모델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직속 상관인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가 모델을 총애했기에 반대 의사를 적극 표명할 수는 없었다.[11] 당시 대위였던 폰 크노블로흐 중령에 따르면 스페인 장교들 앞에선 꺼내기 힘든 말이 있어서 모델에게 개별 면담을 요청하자 이를 흔쾌히 들어 주었으며, 그동안 의례적으로 베를린에서 파견됐던 육군 장교들은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모델과의 만남은 종전 후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Generalfeldmarschall Walter Model. Von Genthin bis vor Moskaus Tore》 Konrad Leppa, 1962[12] 모델이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전투단(Kampfgruppen)이 3기갑사단의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쾌속 진격에 큰 공헌을 하면서 참모들과 사단장 모델의 유대감도 강해졌고 전후 제3기갑사단 전우회에서 출간한 《Geschichte der 3. Panzer-Division, Berlin-Brandenburg 1935-1945》에선 무한한 열정과 강인한 의지, 비전을 지녔던 사단장으로 기록되고 있다.[13] 9월 17일에야 처음으로 진군을 멈추고 차량을 수리할 수 있는 휴식이 주어졌다.[14]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1~1942》 Robert Forczyk, 2014[15] 그렇지만 군단장과 동행하여 눈폭풍이 몰아치는 끔찍한 전장을 오고 가야 했던 참모들은 모델을 전선의 멧돼지(Frontschwein)라 부르며 비난했다.[16] 모델이 라우스를 만나러 오던 중 부대의 이동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지대에 위치한 근사한 저택을 발견했다. 프로이센 출신의 저돌적인 군단장은 당장 이곳에 군단 사령부를 설치하고, 통신선을 연결할 것을 명령했으나 오스트리아 출신의 점잖은 사단장은 침착하게 반대 의견을 말하려 했고, 참다 못한 모델이 고함을 지르자 결국 라우스마저 맞고함을 질렀다. "지뢰가 발견되었습니다!!" 머쓱해진 모델은 웃음을 터뜨렸는데 이 작은 사건이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언쟁일 만큼 서로 마음이 잘 맞았다고 한다. 두 살 연상의 라우스가 모델의 속사포 화법에 적응했다고 한다.[17] "하느님 맙소사, 우린 완전히 섬 안에 갇혀 있는 셈이로군." 첫 전선 시찰 후 모델의 소감이었다.[18] 현대에는 모델의 별명으로 총통의 소방수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가장 유명하고 널리 알려졌던 모델의 별명은 방어의 사자였다. '총통의 소방수'는 동부전선에서 제3 SS기갑사단 토텐코프도 가지고 있었던 별명이었으며 전략 예비대 역할을 한 정예 기갑 부대들도 공통적으로 사용했다. 인상적인 사실은 모델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로스베르크 장군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방어의 사자'나 '방어전의 마스터'라는 이명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방어 전법에 이어 별명까지 사제 간에 계승한 셈이었다.[19] 당시 르제프에 종군 기자가 없었는지, 3기갑사단장 시절의 사진이 기사에 수록되었다[20] 《Hitler's War on Russia》에서는 모델이 사령관이었던 9군을 Germany’s biggest and most powerful army라고 표현했다.[21] 《Generalfeldmarschall Model Biographie》 - Walter Göriltz , 《Verantwortung und Gewissensnot》 - Günther Reichhelm[22] 독일군의 주공이 남부집단군에 집중된 탓에 9군의 전차 보유 대수는 편제의 절반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델은 연료를 충분히 확보하여 적재적소의 기갑 운용을 가능케 했다.[23] 9군은 8월 한 달 동안 8,700명의 전사/실종자를 포함하여 32,974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치명상을 입었던 모델이 두 달도 안 되는 짧은 요양을 마치고 8월 7일에 급히 9군 사령관으로 복귀한 것도 7월 30일과 8월 4일에 이반 코네프와 게오르기 주코프의 지휘하에 행해진 칼리닌 전선군과 서부 전선군의 대공세 때문이었다.[24] 이후 모델은 아르덴 대공세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영•미 연합군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250,000명의 공세 병력을 집결시켰다.[25] Die Absetzbewegung von Rshew 《Rshew, Eckpfeiler der Ostfront》 Horst Großmann, 1962[26] 쿠르스크 주립 대학 교수. 서방 사회에 공개된 독일군 사료와 자국의 소련군 사료를 철저히 비교 분석한 객관적인 저술로 명성이 높다. 그의 저서 중 《The Battle of Kursk: Controversial and Neglected Aspects》, 《Demolishing the Myth: The Tank Battle at Prokhorovka, Kursk July 1943: An Operational Narrative》, 《The Forgotten Battle of the Kursk Salient: 7th Guards Army’s Stand Against Army Detachment Kempf》는 영문판으로도 발매되었다.[27] 기고문의 제목은 <Could Germany Have Won the Battle of Kursk if It Had Started in Late May or the Beginning of June 1943?>[28] 1997년도에 발간된 서적만 해도 86,064명이라고 표기되었으나, 중부집단군이 쿠르스크-오렐 전투를 통합하여 기록했다는 최신 연구 결과를 반영하도록 한다. 차이가 나는 20,000여 명은 7월 5일부터 11일까지의 치타델 작전에서의 사상자 20,720명이다. Robert Forczyk, 《Walther Model: The background, strategies, tactics and battlefield experiences of the greatest commanders of history》[29] 모델이 히틀러의 '후방 방어선 구축 금지' 지령을 무시하고, 휘하 공병들에게 명령하여 독단적으로 구축해 놓은 브랸스크 방면의 방어 진지였다.[30] 《Kursk: The German View》[31] Armeegruppe G. 9월 중순 이후 G집단군(Heersgruppe G)으로 개편되었다.[32] 당시 보충군 사령관이었던 힘러는 1939년 폴란드 전역에서 행한 친위대의 인종 범죄를 정면에서 비난한 블라스코비츠를 블랙 리스트에 올려 놓았기에 서부전선 총사령부가 요청한 대부분의 장비와 병력을 친위대에 독점시켰고, SD로 하여금 국방군 장교들을 연행하려다가 이를 가로막는 발터 모델과 사사건건 충돌했다.[33] 작센 주의 명문 귀족 출신인 마이센 가문이 모델 부부를 식사에 자주 초대하는 등 고급 장교로서 지역 사회와 관련된 사회적인 의무 수행을 블라스코비츠가 주선해 주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모델은 자택에 머물렀던 짧은 기간 동안 드레스덴 시에서 개최하는 문화 행사와 자선 행사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했다.[34] 1944년 8월 26일, 모델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무려 8년 연상의 선배 장성을 '너의 친구 블라스코'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행운이 그와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35] Samuel W. Mitcham은 모델의 전적이 연합군, 심지어 논픽션 작가들과 영화 시나리오 작가들에게도 폄하되고 있다며 그가 친나치이건 아니건 마켓 가든 작전은 발터 모델이 승자라고 비판했다.[36] 르제프 전역의 소련군 참전 용사들이 르제프를 고기분쇄기(Meatgrinder)라고 회상할 만큼 소련군의 출혈이 컸으며 주민들은 "4차례의 대규모 작전이 르제프에서 실행되었으나 전부 실패했다. 대조국전쟁의 최악의 군사적 실패는 르제프 전역이라는 이유로 정부는 르제프에서의 희생을 간과하고 있다."며 지금도 분개하고 있다. 또한 휘르트겐 숲 전투는 생지옥 또는 마녀의 숲이라 불리며 미군이 가장 긴 시간 치러야 했던 단일 규모의 전투가 되었고, 최대급의 패배였다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37] 작은 해결책, 작전명 가을안개; Operation Herbstnebel[38] 2000년, 하인리히 슈프링어(Heinrich Springer)의 인터뷰[39] 동생인 발터 모델보다 7살 위였던 오토 모델(Dr. Otto Model, 1884. 5. 26~1964)은 저명한 세법 변호사로 그의 저서인 《Deutsches Staatsbürger-Taschenbuch》은 2012년에 33판이 출간되었을 만큼 명작이었다.[40] 전사한 미 3기갑사단장 모리스 로즈 소장은 3월 30일, 전투를 정찰하러 나섰다가 티거 전차들에게 그의 지프가 포위당했다. 이때 그가 항복하려고 권총을 내려놓는 것을 공격행위로 오인한 독일군 전차장에게 사살당했다.[41] 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는 회고록에서 이때 탈출 기회가 있었다며 B집단군을 묶어놓은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4월에 들어서면서 제공권이 완전히 연합군에 장악되어 보급 물자를 실은 수송기가 대부분 격추당했기에 B집단군의 연료와 탄환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42]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베어는 6군 사령부 소속이었는데, 6군이 포위당하자 파울루스의 명령을 받고 늑대굴에 출석해서 히틀러에게 전황을 직접 보고한 뒤 6군의 탈출을 허락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반격 작전이 성공하리라 믿었던 히틀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베어는 에르하르트 밀히 원수 휘하로 배치되었다.[43] 2002년, 귄터 라이히헬름(Günther Reichhelm)의 인터뷰[44] 바게너는 미군 사절과 함께 리지웨이 소장을 찾아가 모델이 항복을 거절하는 내용을 구두로 전한 뒤, 자신은 그대로 남아서 항복했다. 이날 모델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주어진 임무 이상을 해 준 것에 감사하며 영광스러운 싸움 끝의 패배를 부끄럽게 여기지 말 것."을 당부한 뒤 참모진을 해산시켰다.[45] 히틀러는 '국가반역죄' 및 '패배주의자'라는 죄목하에 고위 장성이라도 그 당사자와 가족에 대하여 즉결 처형이 가능하다는 명령을 내렸으며, 특별 재판부와 사형 집행 부대가 직접 이를 실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리하르트 폰 보트머 소장은 휘하의 장병들이 미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라인 강에서 본 방면으로 무사히 철수시켰다는 ‘죄목’으로 특별 군사재판에 기소되어 유죄가 확정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46] FMS B-593 Army Group B (22 Mar-17 Apr 1945). B집단군 해산 직전인 4월 15일 아침, 모델은 5기갑군 사령부에서 사령관 요제프 하르페 상급대장 및 참모장 폰 멜렌틴 소장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하르페 장군은 부하들과 함께 미군에 항복했고 폰 멜렌틴은 사복으로 갈아입은 후 포위망을 탈출, 소련군과 전투 중인 아군 부대로 향했으나 결국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47] 핫소 폰 만토이펠은 "우리는 어떤 정부에 대해서도 군이 정치적으로 신뢰할 만한 수단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 신념은 총참모장 한스 폰 젝트 상급대장에 의해 각인되었는데 군은 권력을 잡은 어떤 정부에 대해서도 봉사해야 하고, 그 이유는 정부가 국가를 뒷받침하는 기둥이기 때문이었다."라고 회고했는데 26세의 젊은 중위였을 때 이미 젝트의 직속 부하였던 모델은 이러한 젝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왔음을 알 수 있다.[48] 2002년, 빈리히 베어(Winrich Behr)의 인터뷰. B집단군 해산 이후 모델의 상세한 행적은 베어의 장시간 의 인터뷰를 인용했다. Derek S. Zumbro <Battle For The Ruhr>, 2006[49] 미군에 포로로 잡힌 필링 대령은 오마 브래들리 휘하 참모들의 심문 공세에도 마지막까지 모델의 최후에 대한 진술을 거부했으며 종전 후인 1951년, 모델의 사망 증명서를 직접 작성한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50] 독일군 생존자들의 진술을 반영하지 못한 196, 70년대의 영•미권 전사 서적에는 소련에 인도되어 전범 재판을 받을까 봐 두려워 자살한 것이라는 학자의 주장이 기술되어 있으며, 영어 위키백과도 이를 인용하고 있다. 반면 독일에서 1962년에 출간된 서적만 봐도 저자의 추측을 배제하고, 생존자의 진술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들 중 21세기까지 생존한 귄터 라이히헬름, 빈리히 베어는 ZDF 다큐멘터리에도 직접 출연했다.[51] 모델 원수의 친형인 오토 모델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예비역 육군 포병 장교로 종군하여 철십자 훈장을 받았고, 1918년엔 동생인 발터 모델 대위와 같은 부대에 함께 배치되기도 했다. 오토의 아들이자 한스게오르크의 사촌 형인 한스-디터 모델은 서독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52] 독일어 위키를 찾아보면 웬만한 독일군 장성의 약력 출처는 한스게오르크 모델의 저서를 기초로 하고 있다. 독일군 관련 논문들 또한 주석의 자료 출처를 보면 한스게오르크 모델의 이름과 그의 저서가 자주 등장한다.[53] 귄터 블루멘트리트는 전간기에 만났던 35세의 모델 대위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50대의 모델 원수의 외양이 그대로여서 놀랐다고 한다. 머리숱이 적어지거나 희끗희끗해지지 않았고, 밝고 푸른색 눈빛도 똑같았다고. 《Generalfeldmarschall Walter Model. Von Genthin bis vor Moskaus Tore》 Konrad Leppa, 1962, P.48[54]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모델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과 중부집단군 사령관을 겸임하고, 요하네스 프리스너 상급대장의 북부집단군에 직접 명령을 내리면서 실질적으로 동부전선 독일군의 75%를 혼자서 책임졌다. 나머지 25%는 모델과 일면식도 없었다는 페르디난트 쇠르너의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이었다.[55] 《Generalfeldmarschall Walter Model Legende und Wirklichkeit》 Marcel Stein, 2001, P.148[56] 신문사나 인쇄소 등을 찍은 영상물을 볼 때 흔히 볼 수 있는 원통이 돌아가고 그 사이로 종이가 들어가 인쇄되는 인쇄기[57] 기존에 헝가리군 제2전차사단에 공여한 티거 10대에, 사단장의 생일에 맞춰 3대를 더 보내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6호 전차 티거 문서 참조[58] 《Generalfeldmarschall Walter Model. Von Genthin bis vor Moskaus Tore》 Konrad Leppa, 1962, P.48[59]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투, 프린츠 오이겐의 전투, 브레멘 음악대, 괴테의 시 등등[60] 《Generalfeldmarschall Walter Model (1891–1945) Dokumentation eines Soldatenlebens》 Hansgeorg Model, Dermot Bradley, 1991[61] 모델의 집을 방문하는 동료 군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으로,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군사 업무에 관한 대화가 일절 금지되었다. 《Generalfeldmarschall Walter Model. Von Genthin bis vor Moskaus Tore》 Konrad Leppa, 1962, P.60[62] 편지 본문이나 보내는 사람에 'Vater'가 아닌 Vati라고 적었다.[63] 《Generalfeldmarschall Walter Model (1891–1945) Dokumentation eines Soldatenlebens》 Hansgeorg Model, Dermot Bradley, 1991[64] 《Generalfeldmarschall Walter Model Legende und Wirklichkeit》 Marcel Stein, 2001, P.213[65] Einige Streiflichter 《Rshew, Eckpfeiler der Ostfront》 Horst Großmann, 1962[66] 《Generalfeldmarschall Model Biographie》 Walter Göriltz[67] Hansgeorg Model, in 《Orden und Militaria Journal》 Heft 14, September 1976, S. 174 f[68] 1976년에 발터 모델의 원수 지휘봉이 경매장에서 고가에 거래가 되었다, 하지만 진품은 거래가 되기 전 이미 도난당하여 모조품이 거래됐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오고 간 해이다. 원수 지휘봉을 수여받은 모델은 결혼식 당시 두 사람의 모습을 즐겁게 회상하며 헤르타에게 안전한 보관을 부탁했고, 전후에 서독으로 이주한 모델 가족이 간직하고 있었다. 다만 모델의 원수 지휘봉 제조사인 오토 클라인이 모조품을 다수 만든 것은 사실이다.[69] 《Generalfeldmarschall Walter Model Legende und Wirklichkeit》 Marcel Stein, 2001, P.4[70] 《A German Diary of Lt Behmen, OC 2 Troop, 1818 Artillery Regt, 19 VG Div》[71] Schlacht von Arnheim 《Stationen eines Lebens in Krieg und Frieden》 Heinrich Springer, 1996[72] Ruhe nach dem Sturm und was dann geschah 《Stationen eines Lebens in Krieg und Frieden》 Heinrich Springer, 1996[73] ABSCHIED VON 《Stationen eines Lebens in Krieg und Frieden》 Heinrich Springer, 1996[74] 원문도 느낌표로 마무리하며 뛸 듯이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Stationen eines Lebens in Krieg und Frieden》 Heinrich Springer, 1996, P.162 [75] 《The Ardennes, 1944-1945: Hitler's Winter Offensive》[76] Derek S. Zumbro 《Battle For The Ruhr》, 2006[77] 아버지 모델 원수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던 빈리히 베어도 1945년 가을, 본 대학에 입학하면서 한스게오르크의 대학 선배가 되었다.[78] 육군 중령으로 종전을 맞이한 뒤 연방군이 부활하자 육군에 재입대, 냉전 시대의 서독 연방군 육군 전략 수립에 높은 공헌을 인정받아 대십자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79] 바르바로사 작전에 투입된 독일군 중 제일 선두로 진격하던 부대는 그 하인츠 구데리안의 '구데리안 기갑집단'이었는데, 그 구데리안 기갑집단의 최선봉을 맡았던 부대가 바로 모델의 기갑사단이었다.[80] 《Generalfeldmarschall Walter Model Legende und Wirklichkeit》 Marcel Stein, 2001, 《The Ardennes, 1944-1945: Hitler's Winter Offensive》[81] 《Generalfeldmarschall Walter Model. Von Genthin bis vor Moskaus Tore》, Konrad Leppa, 1962, P.48[82] 1944년 1월 레닌그라드 전선에서의 소련군은 병력 80만 명, 전차 650대, 야포 3,680문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고 독일군은 병력 50만 명, 전차 146대, 야포 2,389문, 이후 모델이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직접 최전선을 시찰한 2월에는 수천 명 인원의 포병 부대에 단 1문의 야포조차 없었고 5만 2,000명 이상이 의료 시설에 수용 중일 정도로 더욱 악화된 상황이었다.[83] 오토 카리우스의 생생한 증언에 따르면 태어나서 그렇게 심하게 야단맞은 적이 없었으며 정신차려 보니 어느새 자신의 티거 소대는 나르바 강을 건너와 있었다고. 그래도 눈썹을 꿈틀대던 모델이 직접 내린 명령만은 영원히 잊혀지지가 않는다고 한다.[84] 회고록 Panzerjager: Tank Hunter[85] ZDF 5화, [86]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기록에는 사람마다 hingemodeln 혹은 ungemodeln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구데리안은 modeln이라는 표현을 당사자 앞에서 즐겨 사용했다. Generaloberst Model - Berliner Lokalanzeiger vom 4. April 1943, Walter Göriltz, 201[87] 2001년, 연방군 예비역 준장 한스게오르크 모델(Hansgeorg Model, Brigadegeneral a.D.) 인터뷰[88] 슈프링어는 한스게오르크 덕분에 모델 원수의 마지막 생일은 무척이나 화기애애한 시간이 되어주었다고 기록하였다. 한스게오르크는 29일까지 머물렀고 모델 부자가 함께 전선 시찰에 나설 때엔 슈프링어와 동승한 적도 있었다고. 이렇게 소중한 선물을 마련한 필링 대령은 정작 24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 그대로 초긴장 상태였다고 한다.[89] Heinrich Springer, 1996[90] <Rshew, Eckpfeiler der Ostfront> Horst Großmann, 1962[91] <Verantwortung und Gewissensnot> Günther Reichhelm, 2004[92] 의외로 히틀러는 자신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한 모습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장군들을 신뢰했으며, 개인적으로도 모델을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물론 예스맨 그 자체였던 카이텔이 있으나 그의 보직이었던 국방군최고사령부 총장은 사실상 이름만 그럴싸한 행정직에 불과했고, 일선 야전사령관에는 저돌적인 상남자 스타일의 장군들을 선호했다. 물론 전쟁 중후반을 넘어가며 거의 정신병 수준의 아집과 똘끼로 전쟁도 말아먹고 조국과 자신의 파멸을 불러왔지만, 모델이나 만슈타인 등의 유능한 장군들에게 원수 계급장을 달아주고 그 자리에 앉힌 것 또한 히틀러의 판단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93] 이런 또다른 경우가 하인츠 구데리안이다. 1차 대전의 지옥같은 참호전을 맛 본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기동전을 상당히 진지하게 바라봤기 때문에 히틀러와 구데리안은 전간기부터 친목을 다질 수 있었다. 문제는 구데리안이 아첨꾼이 아니라 히틀러와 정면으로 맞선 적이 많았다는 점. 히틀러는 구데리안을 꽤 신뢰한 것으로 보이지만 강한 직언으로 결국 짤리게 된다. 짤린 이후에도 신뢰는 어디 가지 않아서 다시 전선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복귀한 이후에도 아르덴 대공세에 동부전선 병력을 차출하는 것에 대놓고 또 대판 싸우고 짤렸다. 다른 참모였으면 모가지가 달아나고도 남았을 것이다.[94] 2007년, ZDF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5화[95] James Lucas 《Hitler's Enforcers: Leaders of the German War Machine 1939-1945》, 1996[96] 《Generalfeldmarschall Walter Model Legende und Wirklichkeit》 Marcel Stein, 2001, P.231[97] 1944년 10월, 러커토슈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헝가리 영토에서 주도하려 한 유대인 학살을 막아내었고 총리의 지위에서 추축국 진영을 탈퇴하려 했으나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의 아들이 독일에 납치되면서 실패한다. 이러한 연유로 모든 직위에서 해임당했고 독일에 소환되어 수감되었다. 종전 후 소련군이 헝가리에 진주하자 그는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생애(1890-1967)를 보내게 된다. 헝가리군은 대전 최후까지 자국 영토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