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벵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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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치 독일 국장(화이트).svg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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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상급대장
한스 폰 젝트 | 쿠르트 폰하머슈타인에크보르트 | 게오르크 린데만 | 베르너 폰 프리치 | 루트비히 베크 |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 프리드리히 프롬 | 하인츠 구데리안 | 오이겐 리터 폰 쇼베르트 | 쿠르트 하제 | 에리히 회프너 | 프란츠 할더 | 헤르만 호트 |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 알프레트 요들 | 로타르 렌둘릭 | 에르하르트 라우스 |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 | 요하네스 프리스너 |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 에두아르트 디틀 | 카를 힐페르트 |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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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슈투덴트 | 에른스트 우데트
해군
상급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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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과대장 OF-8
General der Waffengattung / Admi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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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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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 | 헬무트 바이틀링 | 에두아르트 바그너 | 에리히 마르크스 | 에른스트에버하르트 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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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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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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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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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major / Konteradmi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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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소장
발터 도른베르거 | 카를 게프하르트 | 카를 브란트 | 헤닝 폰 트레슈코프 | 하인리히 크라이페 | 한스 오스터 | 오토 에른스트 레머
미하일 스코로두모프 | 이반 코노노프 | 세르게이 부냐첸코
공군
소장
디트리히 펠츠
해군
소장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독일 국방군의 상급대장과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독일 국방군 해군, 즉 크릭스마리네에만 있는 준장 계급은 미군의 대령에 상응
※ 윗 첨자 :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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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슈츠슈타펠 문장.svg 슈츠슈타펠의 장성급 지휘관






파일:발터 뱅크.jpg

이름
Walther Wenck
발터 벵크
출생
1900년 9월 18일
독일 제국 작센주 비텐베르크
사망
1982년 5월 1일
오스트리아 리트 임 인크라이스
복무
1920년 ~ 1945년
최종 계급
파일:Si_4b.png 육군 기갑대장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서훈
기사 철십자 훈장
독일 십자훈장
1. 개요
2. 군 경력
3. 평가
4. 전후
5. 서훈 내역



1. 개요[편집]


독일 국방군의 장성이다. 최종계급은 육군 병과대장(기갑) 이다. 1900년생으로 독일 국방군을 통틀어서 최연소 병과대장이었던 데다가 제법 동안인 외모 덕에 “소년 장군”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전쟁 말기 서부전선을 방어하는 유일한 독일군세였던 제12군의 사령관이었으며, 히틀러의 요구대로 포위되어있는 베를린을 공격하기보다는 민간인을 보호했다. 그런 이유로 양심적인 군인이라고 평가된다. 동시에 유능한 지휘관으로도 평가받는데, 스타르가르드 전투 당시 한물간 자신의 병력으로 소련군을 돌파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2. 군 경력[편집]


1900년 9월 18일 독일 제국 비텐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1920년 국가방위군(바이에른 공화국의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입대하기 전에도 이미 그는 자유군단 일원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1942년 11월 루마니아 3군 참모장이 된 벵크는 11월 말쯤 6군과의 넓은 간극을 메워서 A집단군과 돈집단군의 연결고리를 이어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된 6군의 상황을 이용할수 없게했다. 또 1939년부터 1942년까지 그는 제 1기갑사단의 작전지휘관이었다. 1942년에서 1943년에는 카를 아돌프 홀리트의 참모였고, 1943년에는 제 6군의 작전지휘관이 되었다. 1944년엔 육군최고사령부의 최고 운영책임자가 되었다. 1945년 2월 13일에 그는 고트하르트 하인리치가 이끌던 비스툴라 집단군의 참모장이 되었다. 1945년 4월 10일에 그는 제 12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1. 베를린 공방전[편집]


4월 21일, 펠릭스 슈타이너의 분견군은 게오르기 주코프의 부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슈타이너의 부대는 제대로 된 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공격도 이루어지지 못했다.[1].

이에 따라 하나의 군대라고 할 만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벵크의 12군은 이제 나치 독일의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 없었다. 4월 22일, 벵크는 부세의 제 9군과 합류하여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격파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다. 벵크의 12군은 공세를 개시했으나 소련군과의 전력 격차가 거대하여 베를린 서쪽 포츠담시 외곽 지역을 끝으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베를린 총통벙커에 들어박힌 히틀러는 벵크와 12군이 재차 베를린으로 진입할 것을 명령했으나, 벵크는 이를 거부하고 군대를 서부로 되돌려버렸다. 히틀러는 격노했으나 벵크는 "더 이상 한 개인의 운명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라고 대답하며 그대로 씹었다.[2][3]

4월 24일, 엘베 강을 9군과 함께 방어해내며 소련군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던 민간인을 미육군 점령지로 도하시켰다. 이 철수 작전은 쉽지 않았는데, 당시 엘베 강을 가로지르는 교각이 파괴된 상태였고, 보트도 몇 척 없었기에 대부분의 민간인들은 교각 잔해에 매달리거나 직접 헤엄을 쳐서, 또는 각종 잔해로 배를 만든 다음 강을 건너야 했다. 벵크 장군과 사령부 참모들은 맨 마지막에 건너갔는데, 그가 강을 건너던 도중 그가 타고 있던 보트가 소련 육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벵크 장군 본인은 무사했으나 동승한 장교 몇 명이 총상을 입었을 정도로 철수 작전은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3. 평가[편집]


벵크는 베를린 공방전 당시 민간인을 빼낸 이유로 좋은 평가를 받는다. 만약 베를린 공방전에서 벵크가 자신의 12군으로 제대로 공격을 할 수 있었더라면, 나치 독일의 패망은 늦춰졌을 수 도 있다.


4. 전후[편집]


전후에는 서독 니더작센에 거주하다가, 전쟁이 끝나고 1982년 오스트리아에 휴가차 방문하였다가 당시 탑승하였던 차량이 나무에 충돌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5. 서훈 내역[편집]


2급 철십자 훈장: 1939년 9월 13일
1급 철십자 훈장: 1939년 10월 4일
독일 십자훈장: 1942년 2월 26일
기사철십자 훈장: 1942년 12월 28일(당시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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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틀러의 마지막 몇 주를 다룬 독일 영화 다운폴에서도 히틀러가 직접 이 명령을 언급한다. 그리고 이 장면 이후 바로 전설의 그 장면이 등장한다.[2] 벵크의 12군은 나름 여력이 남아있긴 했으나 전쟁 말기 군대 자체가 와해되어가던 나치 독일 상황에서야 그렇게 평가할 수 있을 뿐, 몰려드는 연합군에 반격을 개시하기는 커녕 방어전을 수행하는 것도 힘겨운 수준이었다. 애초에 12군 자체가 계속된 패전으로 편제가 무너진 부대들을 모아서 재편성한 부대였으니 히틀러의 바램대로 12군이 소련군을 격파하고 포위망을 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3] 벵크가 기적을 일으켜서 베를린을 포위한 주코프의 군대를 격파한다고 해도 다음은 코네프의 군대가 몰려들 뿐이다. 신의 은총이라도 받아서 소련군을 모두 몰아냈다고 해봐야 그 다음은 미군과 영국군의 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