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셸렌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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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발터 셸렌베르크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 소장이자 경찰 소장이다. 그는 1944년부터 국가보안본부(RSHA) 산하의 보안국(SD) 및 국방군최고사령부 방첩국(아프베어)이 통합된 정보국의 국장을 지냈다.
2. 초기 행적[편집]
프랑스 국경과 인접한 자르 지방의 도시인 자르브뤼켄에서 7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셸렌베르크는 피아노 제작업에 종사한 아버지와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과 신학교육을 받았는데 셸렌베르크는 8살때 첼로를 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23세일때 승마도중 낙마하여 양 손을 골절했기 때문에 이후 첼로를 연주할 수 없었다고 한다.
3. 청년기[편집]
자르 지방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에 점령되었다. 셸렌베르크의 부친도 전후 경제공황으로 인한 타격으로 인해 룩셈부르크로 이주했는데 이후 셸렌베르크는 룩셈부르크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상급 실업학교에 입학한 셸렌베르크는 역사에 관심을 가져 르네상스의 정치적 사상에 흥미를 가졌다. 또 어릴적부터 외교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29년에 실업학교를 졸업한 후 마르부르크 대학에 입학했다가 1931년에 본 대학으로 이동하여 처음에 의학을 공부했지만 다시 법학으로 전과했다. 1933년 3월 18일에 뒤셀도르프의 사법연수생 시험에 합격한 셸렌베르크는 진츠히의 주 재판소와 본의 검사장 사무소, 뒤셀도르프 재판소에서 연수를 받았다. 셸렌베르크는 1936년 12월 18일에 주 사법시험에도 합격했다.
4. 나치당과 슈츠슈타펠 가입[편집]
1933년에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나치당에 입당한 그는 당일로 친위대에도 입대했다. 셸렌베르크는 당시 집으로 보낼 수입이 낮았기에 돈을 좀 더 받기 위하여 나치당에 입당했다고 회고하였다. 당시 그는 사법연수생으로 연수중이었는데 친위대에서도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친위대 소년병의 역사교육 담당자로 일하던 중 반가톨릭 강연을 한 일로 인하여 가톨릭을 싫어했던 친위대 보안국(SD)장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눈에 들었고 셸렌베르크는 1934년에 친위대 보안국으로 이적했다. 1936년 12월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뒤셀도르프에서 베를린의 친위대 본부로 이동한 셸렌베르크는 제1국(인사국)에서 근무하며 1937년에 내무부에 들어가 참사관이 되었다. 1938년에 첫 아내인 케테와 결혼했지만 2년 후 이혼하여 1940년 10월에 일레네 그로세 세네파우크와 재혼한 셸렌베르크는 1939년 9월에 하이드리히를 장관으로 하는 친위대 국가보안본부가 창설되자 제4국(비밀국가경찰국, 게슈타포) E부(방첩부) 부장이 되었다. 국방군 방첩국(아프베어)의 빌헬름 카나리스와도 친했던 셸렌베르크는 카나리스를 싫어했던 하이드리히를 대신해 조율자의 입장에 서기도 했다.
5. 제2차 세계 대전[편집]
폴란드 침공 후인 1939년 9월에 독일 국경과 가까운 네덜란드 펜로 마을에서 영국군 첩보장교를 납치한 셸렌베르크는 당시 네덜란드가 중립국이어서 영국인을 체포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파이 혐의로 선전 후 이를 네덜란드 침공의 구실로 삼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만족하여 셸렌베르크를 총통부로 초대하여 직접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했다. 제6국(해외보안국, SD-Ausland)으로 이동한 셸렌베르크는 1942년에 아인자츠그루펜의 임무를 위해 이동한 국장 하인츠 요스트를 대신하여 제6국 국장, 즉 보안국(SD)의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셸렌베르크는 스톡홀름에 있던 일본공사관 주재무관이던 오노데라 마코토 육군소장과도 접촉했다. 셸렌베르크는 하인리히 뮐러와 함께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지 않은 몇 안 되는 국가보안본부의 간부이기도 했다. 셸렌베르크의 회고록에 의하면 하이드리히는 그를 아인자츠그루펜으로 보내려 했지만 친위대 전국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가 그의 차출에 반대했기에 전선에 보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이드리히가 암살된 후에 공석이 된 국가보안본부 장관자리에 힘러는 셸렌베르크를 고려했지만 히틀러가 너무 젊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1944년 2월에 중립국의 국방군 방첩국 협력자의 배신이 원인이 되어 빌헬름 카나리스의 방첩국은 히틀러의 신임을 잃었다. 히틀러는 이후 방첩국을 셸렌베르크의 산하로 넣는 이례적인 결단을 내렸다. 이리하여 셸렌베르크는 방첩국도 장악하게 되어 독일의 정보기관은 모두 그에 의해 통괄되어졌다.
6. 제2차 세계 대전 말기[편집]
전쟁말기에 셸렌베르크는 중립국 스웨덴의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과 교섭하여 연합군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하자고 힘러를 설득하여 비밀리에 회합을 가졌지만 실패했다.
7. 전후 전범 재판과 최후[편집]
셸렌베르크는 1945년 6월에 덴마크에서 연합군에게 체포되었다. 뉘른베르크 빌헬름 가 재판에서 6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옥중에서 회상록 <비밀기관장의 수기>를 집필했다. 수감생활 중 간장을 손상한 셸렌베르크는 1951년에 석방되어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 생활하다가 1952년에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8. 여담[편집]
만년에 그는 가톨릭교로 회귀하여 매주마다 미사에 참가하며 경건한 가톨릭 교도로 생활했다고 한다. 하지만 젊었을 적의 셸렌베르크는 플레이보이이기도 해서 많은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특히 상사였던 하이드리히의 아내인 리나와 불륜관계였다고 하는데, 셸렌베르크의 회고록에 의하면 페마른 섬에서 리나와 둘이서 산보하거나 드라이브하면서 커피를 마셨는데, 이를 안 하이드리히가 게슈타포 국장인 하인리히 뮐러와 함께 셸렌베르크를 불러내어 셸렌베르크에게 독을 마시게 한 후 해독제로 해독하는 고문을 실시해 앞으로 장관부인과 놀아나지 말라는 다짐을 받았다고 한다.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파리에서 패션 디자이너인 코코 샤넬은 애인관계이기도 했던 셸렌베르크와의 행적 탓에 전후 매국노로 취급받아 1954년까지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잭 히긴스의 첩보소설 독수리는 내리다의 속편 독수리는 날아오르다에서 독일측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진 주인공 리암 데블린이 전편의 주인공 슈타이너 중령을 구출하는 것을 돕는 등 선역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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