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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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독일 국방군의 포병대장.
제2차 세계 대전 때 참전했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함께 소련군에 항복하였다. 항복 후 반나치 활동을 벌였으나 종전 후 전범으로 처벌받았다.
2. 초기 행적[편집]
함부르크 출신의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의 선조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다스리던 시절, 로스바흐 전투에서 용기병을 거느리고 활약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틀리츠라는 명장을 배출한 명문 융커 가문이었다. 1908년부터 군에 발을 들여놓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장교로 복무한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독일 국방군에 남았다.
3. 제2차 세계 대전[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보병사단장으로 종군한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는 데미얀스크 전투에서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포병대장으로 승진한 후 제51군단장으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상급대장의 제6군 휘하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는 제6군이 포위되자 적극적으로 항복을 주장해 파울루스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
4. 항복 후 행적[편집]
1943년 1월에 소련군에 항복한 그는 적극적으로 반나치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독일장교동맹[3] 을 결성하여, 비협조적인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에른스트-에버하르트 헬 등의 국방군 장성급 포로들을 여기에 가담시켰다. 나중에 독일 자유국민 위원회에 흡수되어 멤버가 되었다.
이 때문에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의 전 재산과 명예는 나치 독일에 의해 반역자로 규정되어 몰수당하고 궐석재판에서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는 소련군 포로를 거느리고 아군과 싸운 안드레이 블라소프 중장처럼 독일군 포로로 이루어진 의용부대를 이끌고 소련측에 가담하여 베를린에 공수낙하한 뒤 독일 국방군 내부의 반 히틀러 동지들과 함께 히틀러 타도를 주장했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장군들 및 소련의 비협조로 실제로 이행되지는 못했다.[4]
5. 전후 전범 재판과 최후[편집]
전후 1949년에 소련에선 다시 숙청이 진행되었는데 포로가 되었던 다수의 전 독일군 장교들도 전범으로 규정되어 탄압받았다.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도 항명죄로 체포되어 징역 25년형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1955년에 서독의 콘라트 아데나워 수상이 모스크바를 방문해서야 그는 간신히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형판결은 취소되었지만 독일 연방군은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의 계급을 인정하지 않았고 연금지급도 거부했기 때문에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는 고독한 노후를 보내다가 1976년에 브레멘에서 사망했다.
6. 기타[편집]
Hoi4의 독일 생성 장군의 랜덤 초상화 중 하나이다. 이 외에도 요제프 강글, 헬무트 바이틀링, 에리히 코흐 등이 생성 장군의 랜덤 초상화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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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2] 이 사진을 찍을 때는 상급대장이었다.[3] Bund Deutscher Offiziere(BDO)[4]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독일에 대한 선전용으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