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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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97.10[1]
1. 개요
2. 일생
3.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만화가로, 본명은 방좌근.


2. 일생[편집]


1939년 서울 종로에서 제화점을 하던 집안의 9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교동국민학교에 다닐 적부터 만화에 재미가 들려 있던 그는 중학생이 되면서 김용환, 김성환의 작품을 사 모으며 본격적으로 만화가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한다.

양정고등학교 시절에는 같은 지역 출신으로 후에 만화가가 된 노석규, 이우헌과 서로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 고교를 졸업할 때쯤 방영진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노석규가 당시 신문만화를 그리던 김경언에게 편지를 띄워 답장을 받고는 나보란 듯이 그의 문하로 들어가자 방영진도 평소 존경하던 신동헌 씨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리고는 답장이 오기까지 기다리지를 못하고 직접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20세 초반부터 퇴행성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아서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이렇게 힘들게 그의 집을 찾아간 이래 그는 신동헌 씨 밑에서 데생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와 동갑이던 무협만화가 이재학도 이중 한 사람이었다.

1958년에 <7천사>라는 잡지에서 단편 '오복이'라는 작품이 처녀작이며 1959년에 발표한 단편 '투명인간'으로 인기를 모으게 된다. 그런데 이 투명인간은 원래 출판사 측이 일본 만화를 베끼라며 주던 일어판 만화책이 바로 데즈카 오사무 작품이었다. 하지만 방영진은 기분나빠하면서 투명인간이란 설정 하나만 써먹고 아주 줄거리랑 인물을 모조리 창작하여 그렸는데 매우 평이 좋아서 출판사 사장이 사과를 했다고 한다.

이후로 1960년대 한국만화계를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와 함께 아그작 아그작 씹어먹던 메가톤급 히트작인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추리만화,명탐정 약동이와 동일한 이름의 주인공을 내세운 레전드 학원물약동이와 영팔이를 만든 한국의 레전드 만화가이자 한국 대본소 만화의 전성기를 구축했던 만화가이다.[2]

영국펀치뉴요커, 딕 트레시, 찰스 아담슨 등 영미권의 유명한 잡지나 만화, 동서양의 유명한 추리소설, 일본 만화 등에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로, 배트맨 등의 미국만화에선 주로 조수역만 하던 10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것도 모자라 심지어 탐정역까지 시켜 사건을 직접 해결하게하는 만화인 명탐정 약동이에선 일본 만화가들보다 20년이나 앞서서 정통 추리만화를 선보이고 소년탐정이란 개념도 정립한 선구자이다. 이런 히어로틱한 만화에선 당시 10대들은 주로 조연만 맡았는데, 이를 단번에 깨뜨렸단 점에선 스파이더맨보다도 앞섰다. 그야말로 타임머신을 갖고 있는게 아닐까 할 정도로 시대초월자였다. 더 나아가 그는 만화책을 한 번 내면 원고를 즉시 회수해 불살라버리는 완벽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1964년, 겨우 만 25살 한창 나이에 지병인 류머티스가 심해져서 그림을 그릴 때조차 몸을 벽에 붙인 채로 지탱해야 할 판국이었으며, 원고도 합판에 대고 그려야 했다. 그럼에도 몸을 쉬지 않은 채 창작을 계속하다 보니 병마가 점점 심해져 약을 먹는 횟수가 늘어만 갔고, 손도 떨린 데다가 혼자서 문 밖으로 못 나갈 정도로 거동이 불편해졌다. 결국 의사가 만화를 그리는 건 위험하다고 충고하여 너무나도 안타까운 20대 중순 나이로 만화계를 떠나고 말았다. 사실 그 시절 만화가들은 돈벌기 무척 어려웠고 도서윤리위의 원고 사전검열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며 허구헌날 5월에 청소년 불량하게 만드는 만화를 불태우는 관변 단체들이 안 그래도 만화가를 비난한데다가, 합동출판사라는 한국만화계를 좀먹는 독점업체 집단이 나올 무렵이라 계속 활동했더라도 엄청난 스트레스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생명까지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겨우 6년동안 활동하다 보니 작품 수도 별로 없다. 게다가 60년대 말즈음에 명탐정 약동이 일기라는 약동이 후속편의 스토리 작가를 맡았다가(참고로 이 작품의 그림작가가 후일 삼국지, 일지매, 초한지 등으로 유명한 고우영이다!) 이마저도 병세로 중도 포기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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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0년 가까이 만화계에서 떠났다가 다시 재기하여 그린 마지막 작품인 미니 행진곡. 70년대에 여학생이란 잡지에 12회까지 연재했지만 결국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만화계를 영영 떠나고 만다.

만화계를 떠난 뒤 고교 시절 밴드부에서 갈고 닦은 음악 솜씨를 되살려 이름을 거꾸로 한 '진영방'이란 예명으로 활동하면서 기타 연주나 동요 작곡을 하여 방송국 노래나 창작동요제에 입상하였으며 아이들 그림책을 그리는 일을 하면서 지냈으나, 1994년 MBC 여름방학 특집 다큐멘터리 <만화의 스타들> 1부에 따르면 1993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누나가 간병을 해야 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오랜 투병생활 끝에 1997년 10월에 작고했다. 사망할 당시 평생을 아끼던 기타와 펜이 곁에 있었다고 한다. 사후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화장터 앞산에 뿌려졌고, 그토록 소장한 유작 만화책들은 유가족들에 의해 모두 소각되었다. 1960년대를 대표한 대가와 작품은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그의 팬 중 하나가 바로 허영만으로 허영만은 학창시절 약동이와 영팔이에 푹 빠져서 만화가로서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래서 허영만이 만화가로 데뷔했지만 그가 데뷔하던 70년대에는 이미 방영진은 만화계를 떠난 뒤였고 개인적으로 찾아가 인사를 나눴다고 한다. 식객에서 유명화가인 방영진 화백이란 이름을 등장시켰는데 바로 이 이름이 그 방영진에서 따온 이름이다.

시사만화가로 유명한 박재동 화백도 방영진 이름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하며 어릴적 부모님이 18년동안 만화가게를 하다가 가게를 정리할때 유일하게 남겨둔 게 바로 약동이와 영팔이 전집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약동이와 영팔이는 이렇게 전집을 소장한 이들이 여럿 있어서 복간판으로 여럿 나오기도 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대로 유가족들이 작가 사후 작품들을 전부 소각한 탓에[3] 명탐정 약동이나 나머지 단편들은 무척 구하기 힘들고 현재 남아있는 것들도 훼손된 채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뒤늦게나마 한국만화박물관 등이 자료 기증에 나서긴 했으나, 사실 방영진 말고도 많은 한국만화들이 그렇게라도 남은 게 고마울 정도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3.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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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화평론가 손상익이 쓴 <한국만화 인명사전>에 의하면 사망연도가 1999년이라 나옴.[2] 만화방 만화에 "스타시스템"이 정착된것도 그의 공로였다.[3] 1978년에 작고한 박광현 화백 작품도 작가 사후 부인이 원고 전량을 불태운 탓에 작품이 별로 전해지지 못했다. 그리고 1960년에 숨을 거둔 최상권 화백의 작품들 또한 당시 사용된 종이가 산성 재생용지(일명 말똥종이)여서 오랜 세월에 걸쳐 삭아버려 보관이 어려워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