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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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제5대 회장
조선일보 제11대 사장
방우영
方又榮


파일:201605081692334849_1.jpg

성명
방우영(方又榮)

일민(逸民)[1]
본관
온양 방씨[2]
출생
1928년 1월 22일[3]
평안북도 정주군
사망
2016년 5월 8일 (향년 88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학력
정주 조일심상고등소학교 (졸업)
경신고등학교 (졸업 / 41회)
연희대학교 상과대학 (상학 / 학사)
종교
개신교(장로회)[4]

1. 개요
2. 평가
3. 일생
5. 저서
6. 수상경력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언론인, 기업가.


2. 평가[편집]


방응모[5]의 손자로, 1964넌 부터 1993년까지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방우영은 박정희 독재권력에 저항하던 젊은 기자들이 자유언론을 지키기 위해 싸웠을 때 이들을 파면한 장본인이다. 유신독재가 끝나는 순간까지 박정희를 미화하고 찬양했다.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결성한 집권기구 국보위에 입법위원으로 참여 했다. 전국지 규모의 언론사 사주로선 유일했다.[6]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보도를 통해 시민들을 난동자, 불순분자, 극렬분자, 폭도로 매도 했다.

이후 전두환 찬양과 유착으로 조선일보를 고속성장시키고 대한민국 정·관·언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밤의 대통령'으로 불렸다. 원래 이 별명은 형인 방일영의 별명이었다.


3. 일생[편집]


일제강점기인 1928년 1월 22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아버지 방재윤(方在胤, 1901. 2. 13 ~ 1940. 4. 30)과 어머니 수안 이씨(遂安 李氏) 이성춘(李成春, 1906. 5. 13 ~ 1973. 12. 8)[7]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방재윤은 본래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方應坤, 1880. 11. 25 ~ 1942. 11. 2)의 차남인데, 당시 아들이 없던 방응모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방우영은 형 방일영과 함께 방응모의 양손자가 됐다. 방응모는 금광사업으로 떼돈을 번 뒤 1932년 조선일보를 인수하게 된다. 그가 5살이 되던 해였다.

1940년 조일심상고등소학교, 1946년 경신고등학교졸업하고 연희대학교 상과대학에 들어가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졸업했다. 이어 1952년 조선일보 공무국 견습생으로 들어가 8년간 사회부, 경제부 기자로 일한 뒤 1960년 조선일보 계열사인 아카데미극장[8][9]#[10]# 대표를 맡았다. 이후 조선일보 상무로 복귀해 발행인, 전무, 대표이사,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1976년부터 14년간 한국언론연구원 비상근 이사장도 겸임했다.

1993년 형 방일영의 장남이자 조카방상훈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조선일보 회장이 되었고, 2003년에 명예회장으로 추대되고 2008년 그의 55년 언론계 생활을 정리한 팔순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를 펴냈다. 83세 되던 2010년에는 조선일보 상임고문으로 추대됐다. 2세 경영이 안착하면서 방우영 일가는 스포츠조선을 받아 분가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1977~1980년까지 학교법인 중앙대학교 이사장, 1980~1981년까지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1981~1997년까지 연세대학교 총동문회장, 1997~2013년까지 학교법인 연세대학교 이사장, 2015년부터 동 재단 명예이사장을 각각 지냈다.

2016년 5월 8일 오전 11시 7분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4.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선일보/오너 일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저서[편집]


  • <조선일보와 45년: 권력과 언론 사이에서> (1999)
  •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2008)


6. 수상경력[편집]


  •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1974)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2)
  • 금관문화훈장 (1998)
  • 독일 연방정부 1등 십자공로훈장 (2001)
  • 조선일보 60년 근속상 (2013)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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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으로 조선일보의 평생 경쟁자인 동아일보의 회장이었던 김상만 회장도 호가 일민(一民)이었지만 한자만 달랐다.[2] 판서공파 38세 영(榮) 항렬.[3] 음력 1927년 12월 30일.[4] https://news.sbs.co.kr/amp/news.amp?news_id=N1003569606&cmd=amp[5] 일제강점기 금광으로 돈을 벌어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해 오늘의 조선일보가 있게 한 인물. 여러 친일 경력을 인정받아 2009년 정부 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됐다.[6] 방우영이 정상적인 언론사 사주였다면 비판적 보도를 했어야 했다. 오히려 전두환이 대장으로 전역하고 대통령 자리를 꿰찰 무렵, 조선일보는 "人間 全斗煥" 이란 기사를 통해 찬양한다. "... 그가 혼신의 정열을 쏟고 있는 사화정화, 정치풍토의 개선도 그의 구국적 도덕관에서 뿌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7] 이은엽(李殷葉)의 딸이다.[8] 1968년까지 조선일보에서 자사 사옥부지에서 운영하던 극장. 60년대 인근의 국제극장, 충무로의 명보극장, 을지로의 국도극장 등과 방화(한국영화)전용관으로 유명했다.[9] 60년대 국내 영화업계는 10대 개봉관 극장-전속 영화사-전속 감독/작가-전속 배우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국제극장-동아흥행-홍성기 감독-김지미, 명보극장-신필름-신상옥 감독-신영균 등의 형태였다. 아카데미극장은 원래 외화상영관이었으나 방화전성시대가 도래하자 1962년 학교법인 한양학원에서 설립한 한양영화공사와 전속을 맺고 방화(한국영화)전용관으로 변모한다. 이후 극동흥업까지 추가되어 주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청춘영화를 개봉했는데, 63년~68년 사이 아카데미 극장의 한국영화 개봉작 125편 중 70%에 달하는 88편의 작품이 신성일 주연작이라 일명 신성일 극장으로 불렸는데, 그 대다수가 한양영화사 또는 극동흥업의 김기덕 감독 작품이다.[10] 신성일의 자서전 내용에 의하면 아예 한양대의 연영과 설립과 영화사 설립이 당시 아카데미 극장의 사장이던 방우영 사장이 한양대 김연준 총장에게 요청해서 이루어졌다고 나온다. 나이차가 있기는 하지만, 김연준과 방우영은 같은 연희전문 선후배 출신이고, 같은 이북 출신이므로 친분이 두터웠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