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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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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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취소선은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방정환
方定煥 | Bang Jeonghwan


파일:방정환.webp


소파(小波), 목성(牧星)
본관
온양 방씨[1]
출생
1899년 11월 9일[2]
한성부 서서 인달방 야주현계 야주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당주동 5번지)[3]
원적
한성부 중서 견평방 이문동계 이문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118번지)[4]
사망
1931년 7월 23일 (향년 31세)
경기도 경성부 연건동 경성제국대학 부속의원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소
망우역사문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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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방경수(方慶洙), 어머니 손성녀(孫姓女)
배우자
손용화(孫溶華)[1]
자녀
아들 방운용[2], 방하용[3]
친인척
조부 방한룡
장인 손병희
처숙부 손병흠
4촌 처남 손천민
신체
158cm[4], 80kg 이상[5]
학력
보성소학교 (유치반 / 졸업)
매동보통학교 (전학)관립미동보통학교 (졸업 / 6회)
선린상업학교 (중퇴)
보성전문학교 (법과 / 졸업)
도쿄연수영어학교 (수료)
토요대학 (철학 / 학사)
종교
천도교
상훈
금관문화훈장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홈페이지
한국방정환재단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일제강점기 이후
2.3. 3.1운동 이후, 어린이 운동에 뛰어들다
2.4. 사망
3. 비판과 논란
4. 여담
5. 매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아동문학가, 인권운동가, 아동교육학자, 아동보육 · 복지학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독립유공자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아동 및 청소년의 인권을 연구 · 진흥한 선구자격 인물인 동시에, 한국 아동교육학 및 아동문학의 상징이 되는 작가들 중 한 명으로, 《개벽》에 번역 동시인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면서 어린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조어하였으며, 그가 어린이의 인격 및 행복 추구를 위해 1923년부터 기념하기 시작한 어린이날이 오늘날에도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 공휴일로 남아 있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파일:1683277536041.jpg
어린이 시절의 방정환.
1899년 11월 9일, 한성부 서서 인달방(仁達坊) 야주현계(夜珠峴契)[5]에서 어물전과 싸전[6]을 경영하던 잘 나가던 사업가 아버지 방경수(方慶洙, 1879. 7. 10 ~ ?)[7]와 어머니 손성녀(孫姓女, 1873. 9. 4 ~ 1917) 사이에서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7년 경성복심법원 검사국에서 작성된 인적사항에는 원적지가 한성부 중서 견평방 이문동계 이문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118번지)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후 1927년에는 경기도 경성부 돈의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의동) 83번지에 거주했다.

방정환은 고조부 방우구(方禹矩, 1782. 11. 9 ~ 1841. 11. 7) 때까지 의관, 무관 등을 세습한 전형적인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6대조 방태규(方泰逵, 1735. 7. 18 ~ 1792. 2. 22)[8]는 1762년(영조 38) 식년 의과에 3등 5위로 입격해 영조·정조 시기에 어의(御醫) 및 호군(護軍, 정4품)에 올랐고, 5대조 방효양(方孝良, 1756. 12. 15 ~ 1823. 7. 27)은 순조 때 무관으로 출사해 능마아청 낭청(能麽兒廳郞廳)과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 종6품) 등을 역임했다. 고조부 방우구는 1804년(순조 4) 가인의(假引儀, 종9품)로 출사해 1807년 겸인의(兼引儀, 종9), 1809년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1813년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 종6품), 1814년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종6품), 1816년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 종6품), 소촌찰방(召村察訪, 종6품) 등을 역임했다. 비록 증조부 방윤근(方允根, 1842 ~ ?) 대부터는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조부 방한룡(方漢龍, 1858. 9. 29 ~ ?) 대부터 상당한 부잣집으로서 집은 큰 기와집 한 채로도 부족해서 두 집을 사서 이어 붙여 만들었을 정도로 엄청 으리으리했고, 또한 하인들도 상당히 많이 부리고 있었다. 이러한 금수저로 태어난 방정환은 지역 유지이자 부잣집 아들로서 어릴 때는 어느 가게든지 빈손으로 들어가 엿, 과자, 과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고, 간식을 친구들에게도 아낌없이 나눠주었기에 콩고물을 얻기 위한 동네 아이들은 항상 방정환을 따라다녔고, 그 덕에 방정환은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골목대장이었다. 또한 그럴 때마다 가게 주인은 방정환의 할아버지에게 돈을 받아가곤 했다.

7살 되던 1905년까지 방정환은 할아버지 방한룡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다. 1905년 작은아버지 방흥수(方興洙, 1897. 3. 5 ~ ?)를 따라 보성소학교에 갔다가 신식 공부를 하는 그 곳의 모습을 보고[9] 호기심이 생겨서 들여다봤다가 당시 학교장이던 김중환 교장을 우연히 만났고, 그에게 이 곳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이 곳에 입학하려면 먼저 댕기도 자르고 머리도 짧게 깎아야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랬다가는 할아버지한테 크게 꾸중 듣는 것도 모자라 아예 집에서 쫓겨날지도 몰라서 약간 망설이다가 이내 용기를 낸 뒤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고, 그렇게 방정환은 댕기도 자르고 머리도 짧게 깎은 뒤 귀갓길에 올랐지만, 한편으로는 이걸 보고 몹시 분기탱천할 할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조금 겁도 냈다. 물론 집에 오자마자 이를 본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고, 그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누가 네 머리를 이 꼴로 만들었느냐고 가장 불같이 화를 냈고, 이어 회초리종아리를 때리려다가 손자의 자초지종을 듣고는 손자의 뜻을 존중하여 회초리를 내려놓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해 주면서 신식학교에 다니는 것을 허락했고[10], 그렇게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했다. 9살 때이던 1907년, 집안의 사업이 실패[11]하면서 초가집으로 이사를 가고 마음씨 좋은 고모에게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부유했던 집은 한순간에 가난해지면서 금수저에서 흙수저로 추락하고 말았다.[12] 어려서 어머니와 누나를 잃었고, 계모 해주 오씨 오애기(吳愛其)[13]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였고, 방정환 본인은 그림 그리기와 글짓기에만 몰두했다. 게다가 그렇게나 꿈에 그리던 신식 공부를 하게 돼서 신났다고 해 놓고는 막상 학교 공부에는 적응을 못 했다. 이미 어려서부터 천성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1908년, 불과 10살 나이의 소학생으로서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 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했다.


2.2. 일제강점기 이후[편집]


1913년, 이광수가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게재되기도 했는데, 실제로 문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방정환의 정식 등단 시기를 1913년으로 보고 있다. 1913년 관립미동보통학교(現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학교(現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 만에 중퇴했다.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은 방정환이 공부를 계속 하길 바랐으나, 이재승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등이 쓴 '이야기 교과서 인물 방정환'(시공주니어)에 의하면 몹시 어려운 집안 형편[14]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선린상업학교에서의 공부는 방정환이 하고 싶은 공부가 아니었단다. 문학을 공부하고 싶은데 현실은 조선은행(한국은행) 서기와 같은 금융 노동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면의 갈등이 심했던 것이다.

방정환은 훗날 "만일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조선은행 서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금융 노동자와 아동문학가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아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만일 담임교사와 부친의 바람대로 금융 노동자가 되었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닌데 억지로 해야 하다니...", "아동문학가가 되고 싶은데 생활비는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갈등에 시달렸을 것이다. 다만 후대 사람들이 추정하기를, 방정환이 학교를 그만 둔 이유로는 공부가 본인과 안 맞아서가 아니라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그만 둔 것이라는 것을 실질적인 이유로 추정한다.

1916년 생활비 조달을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해 서류 필사 업무를 했는데, 일급으로 임금을 계산하여 1달에 1번 지급받았다. 사직 후에 그 곳에서 함께 일하면서 친해진 류광렬[15]과 함께 문학을 토론하고, 노동자들의 숙소에서 머물기도 했다. 끼니를 잇기 힘들어 호떡을 사다 먹기도 했는데, 류광렬은 훗날 가정사로 인해 고향 고양군으로 귀향해 면서기를 했다[16]. 사직 후 천도교 청년회, 개벽사, 천도교 소년회 등의 천도교 기관에서 일했는데, 부친이 성실한 천도교 신자였고 자신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8년, 천도교 제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3녀 손용화[17]와 중매결혼[18]했으며, 결혼하던 해에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5년간 활동하면서 어린이 운동에 열성을 보였다. 장인 손병희의 권유로 보성전문학교[19] 법과(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거쳐 현재의 고려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했다. 또한 넉넉한 장인 덕에 집안 형편도 차츰 나아졌다.


2.3. 3.1운동 이후, 어린이 운동에 뛰어들다[편집]


1919년, 손병희를 도와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다가 일본 제국 경찰이 들이닥치자 등사기를 우물 속에 던져넣어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있다. 이때 고문을 받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적도 있는데, 당시 동료들 몇 명은 감옥에서 옥사까지 했으니 고초가 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때부터 방정환은 위험 인물로 분류되어 고등계 형사들에게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다.

파일:1683277532388.jpg
1923년 5월 1일 찍은 색동회 창립 기념 사진.
아랫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방정환.


1919년 말 도쿄에 유학, 도쿄연수(硏修)영어학교에 입학해 소정의 과정을 수료했고, 1920년 토요대학 철학과에 보통청강생으로 입학해 본격적으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토요대학 철학과에 다닐 때 마해송, 윤극영 등과 함께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20] 김기전과 함께 어린이날을 만드는 등, 활발한 어린이 교육사업을 전개했다. 또한 도쿄에 천도교청년회 지부를 설립해 중심인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0년 ~ 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을 연재했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으며 사회주의자가 쓴 글을 소개했다. 1921년에는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외국 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했다. <사랑의 선물>은 방정환이 살아있을 때 만든 유일한 단행본이며 난파선, 산드룡의 유리구두, 왕자와 제비, 잠자는 왕녀 등 번안 동화 10편이 실렸다.

다작을 번역하면서 본인이 소설도 많이 썼다. 소파, 잔물, 몽견초, 몽견인, 삼산인, 북극성, 쌍S, 서삼득,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 김파영, 파영, ㅈㅎ생[21] 등등 여러 가명을 썼는데, 이는 잡지사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22]

방정환은 또한 신문과 잡지에 수필도 많이 기고했다. 그의 글을 보면, 1920년대의 글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문체가 굉장히 현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1921년 김기전과 함께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 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상하 관념과 나이를 중시하는 유교문화 아래에서 사회적 약자들인 어린이들이 천시와 억압을 받는다고 생각했으며, 일제 치하에서 조선의 미래는 어린이들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실제로 '어린이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자!'는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다."아동인권 존중의 역사, 한국서 먼저 태동"

1922년, 장인 손병희가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싹을 위하는 나무는 잘 커가고, 싹을 짓밟는 나무는 죽어 버립니다.

1923년 5월 1일


1923년 어린이 잡지인 월간 <어린이>[24]를 창간했다. 그가 창간한 <어린이>는 매년 10만 부씩 판매되는 등 사상 유례없는 인기를 누렸고[25] 이원수, 마해송 등 아동문학가들이 이름을 알리는 장이 되어 한국 아동문학계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위대한 예술을 품고 있는 어린이여! 어떻게도 이렇게 자유로운 행복만을 갖추어 가졌느냐!
어린이는 복되다. 어린이는 복되다. 한이 없는 복을 가진 어린이를 찬미하는 동시에, 나는 어린이 나라에 가깝게 있을 수 있는 것을 얼마든지 감사한다.

〈어린이찬미〉, 1924년 5월 15일


잡지 어린이에는 읽을거리 뿐 아니라 다양한 유희 컨텐츠가 실렸는데, 그 중에는 보드 게임도 있었다.

파일:NISI20210504_0000740552_web.jpg
1930년 2월호 '어린이' 부록으로 실린 '어린이 대운동회' 말판. (출처)

그 이외에도 다른 보드 게임들도 직접 만들었다. #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 후로도 '아기별 삼형제'[26] 등의 동요를 짓고 추리소설인 <칠칠단의 비밀>[27] 등을 집필했다. 외국 동화도 계속 번역했고 세계 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당시 그가 기획한 전시회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야기하는 재주가 뛰어나서 동화구연을 하러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매년 70회, 통산 1,000회 이상의 동화구연을 했으며, 당시로서는 시골인 경상남도 양산시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다.[28] 일본 경찰의 의심을 받아 감옥에 갔을 당시에도 죄수들에게 이야기를 너무 재밌게 해줘서, 슬픈 이야기를 하면 몰래 이야기를 듣던 간수들도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나중에 방정환이 석방될 때, 다른 죄수들과 간수들이 그를 못 가게 막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방정환 스스로도 '신데렐라' 동화구연을 하고 나서 이렇게 회고했다.

"남녀 선생이 가끔 얼굴을 돌이키고 눈물을 씻으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때 학생들은 벌써 눈물이 줄줄 흘러 비단저고리에 비 오듯 하는 것을 그냥 씻지도 않고 듣고 있었다. 그러다 이야기가 산드룡[29]

이가 의붓어머니에게 두들겨 맞는 구절에 이르자, 그 많은 여학생이 그만 두 손으로 수그러지는 얼굴을 받들고 마치 상갓집 곡성같이 큰소리로 응- 응- 소리치면서 일시에 울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선생들도 일어나 호령을 할 수 없고, 나인들 울려는 놓았지만 울지 말라고 할 재주는 없고, 한동안 단상에 먹먹히 서 있기가 거북한 것은 고사하고 교원들 뵙기에 민망해서 곤란했다."


그를 감시하기 위해 강연에 항상 참석했던 고등계 형사도 최루성 동화구연에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강연을 듣다 보면 자기도 자지러지게 울어야 했기 때문이다.[30] 당시 고등계 형사였던 미와 와사부로는 방정환을 이렇게 평가했다.

"방정환이라는 놈, 흉측하지만 절대 미워할 수 없는 놈이다 그놈이 내지 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경부 나부랭이한테 불려다닐 위인은 아냐 일본 사회라면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



2.4. 사망[편집]


1930년대 중앙유치원 사범과(現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유아교육과)에서 아동문학을 가르친 기록이 있다. 하지만 본디 허약한 체질이면서 너무 열성적으로 활동한 탓에 건강이 심하게 나빠졌는데, 평소 폭식, 골초 등 나쁜 생활 습관이 있었던 것까지 더해[31] 특히 1931년부터 지병인 고혈압과 신장염이 악화되었고, 결정적으로 동아일보의 <신동아> 창간으로 인해 <개벽>의 판매 조직이 와해되고 많은 빚을 지게 되면서 스트레스가 겹친 데다 자신의 건강을 챙기지 않고 어린이들을 위해 바쁘게 활동하다 보니 자리에 눕게 되었다.

파일:1683277545877.jpg
방정환의 장례식.

결국 1931년 7월 9일에 사무실에서 코피를 쏟으면서 쓰러졌고, 입원한지 2주가 된 7월 23일, 향년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고혈압과 신장염으로 별세했다.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문간에 검정 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으니 가야겠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방정환의 유언[32]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슬하에는 방운용(方云容, 1918 ~ 2002) 전 색동회 부회장, 방하용(方夏容) 등 두 아들을 두었다.

묘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망우역사문화공원[33]에 있는데 특이하게도 봉분 대신에 자연석들을 두르고 그 위에 묘지석을 얹어 놓은 형태의 무덤이다. 그의 묘비에는 '동심여선(童心如仙)'[34][35]이라는 글씨가 크게 써 있고 밑에 '어린이의 동무 소파 방정환의 묘'라고 쓰여 있다. 최근에는 '중랑구방정환교육지원센터'라는 사업을 통해 방정환을 기리고 있는데, 정작 방정환은 중랑구와 아무 연관도 없다.


3. 비판과 논란[편집]


그는 당대 엘리트 김명순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트렸다가 명예훼손 죄로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구금까지 된적 있다. '개벽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별건곤』에 "김명순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고도 처녀 행세한다"는 글을 썼다. 김명순은 이 기사를 쓴 방정환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연재는 중단되었다. 하지만 1927년 김명순이 아이를 입양하자 잡지 『별건곤』에 방정환은 또 '김명순이 혼외자로 낳은 아기의 성을 무엇이라 붙여야 할지 몰라 애쓴다'는 글을 투고했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도 기사화된 적 있는 실제 사건이다. 1927년 4월 22일자 조선일보 석간

참고로 방정환은 김명순 외에도 여성혐오에 해당하는 칼럼이나 소설을 수시로 썼다. 특히 당대 잡지에 은파리 등의 익명으로 활동하며 신여성에 대한 불만과 열등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주눅든 식민지 남성 신여성에 눈 흘기다'-한겨레

그의 논란은 그동안 남성 중심적 사회 인식 때문에 제대로 조명 받지도 않다가 21세기가 되어서야 김명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며 알려지게 되었다. 2016년 중앙일보 2022년 경향신문 2023년 EBS <다큐프라임>에서도 방정환을 비롯한 남성 문인들의 폭력을 다루었다.

방정환과 관련된 내용은 해당 영상 25분부터 등장한다.


4. 여담[편집]


  •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 기준으로 봐도 비만이 심한 편이었다고 하는데, 사진만 봐도 살이 찐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신체 사이즈에 관한 기록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키는 약 158cm정도인데 몸무게는 120kg대에 해당한다고. 본래 방정환은 몸이 허약한 편이었는데, 장인인 손병희가 자신의 딸과 함께 처음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을 당시만 해도 마른 체형이었던 사위를 보고 안쓰러웠던 나머지 보약을 해먹이고 그 후로도 방정환이 처가를 찾을 때마다 고기반찬 같은 기름진 음식을 자주 권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곧 비만이 심해진 방정환은 맞는 허리띠가 없었고 땀도 많이 흘려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늘 닦고 다녀야 했다고 한다. 택시를 탔는데 너무 무거워서 택시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아무리 옛날 자동차라지만 상식적으로 뚱뚱한 사람이 탔다고 자동차가 퍼질 일은 없으며, 이런 말이 떠돌 정도로 매우 뚱뚱했다는 의미라 보면 된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방정환은 비만까지 되자 고혈압과 신장염을 앓게 된다.

  • 빙수설탕 등 단 것을 좋아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냥 1.5~2그릇 먹는 수준이 아니었다고 하며 아예 집에 빙수기를 사서 7~8그릇을 만들어 먹을 정도였다. 특히 빙수를 주제로 한 수필을 써서 잡지에 게재한 적도 있다. 아래는 방정환을 옆에서 보조하던 사람이 그에 대한 증언을 남긴 내용이다
(전략) 우리 사(社)에 있는 이의 이야기를 또 해서 미안하지만은 방정환 씨는 빙수를 어찌 좋아하는지 여름에 빙수점에서 파는 빙수 같은 것은 보통 오십 그릇은 범 본 사람의 창(窓) 구멍 감추듯 하고 설탕은 또 좋아하야 십오 전짜리 냉면에도 십 전짜리 설탕 한 봉을 넣지 않고는 잘 못 자신다.[36] 그와 친한 분은 누구나 조심하십시오. 약간 돈 가지고 빙수나 냉면 내려다는 큰 코 다칠 터이니.....(후략)

<별건곤> 제39호(1931년 4월 1일자)[37]
혈압 높은 비만 환자가 단 음식을 이토록 달고 살았던 데다가 담배까지 많이 피웠으니 방정환은 31세의 나이에 당연하게도 요절을 하고 만다.

  • 아동문학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의 출판 사업도 했다. 한국 최초의 영화잡지 <녹성>을 창간했고, 이화학당 출신들과 더불어 <신여자> 편집에도 개입했다. 이때 이화학당 출신의 신준려[38]라는 여성을 만났는데, 유부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준려를 좋아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아직은 정략결혼이 흔한 데다 새로 유입된 자유연애 사상 대비 조선시대의 축첩개념이 호색한 남자들에겐 교묘히 뒤섞여 유지되고 있어서, 결혼은 일찌감치 집안 어른 등이 맺어준 사람과, 혹은 출세에 도움 될만한 집안을 찾아 해놓고도 도시에 나오거나 유학을 하거나 기회만 생기면 아무 죄의식 없이 신여성이나 여학생, 기생 등 다른 여성과 또 관계를 맺어보려는 남자가 많았다.

다만 이 경우는 방정환의 친구도 신준려를 좋아하여 3각 관계가 되는 바람에 플라토닉한 감정에 머물렀다고 한다. 링크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정환은 일본 유학을 떠나고, 신준려는 미국 유학 중에 만난 감리교 지도자 류형기와 만나 혼인하여 둘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링크 참고로 신준려는 남편과 함께 미국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 친일파 의혹은 그가 일본 아동문학가 이와야 사자나미(巖谷小波)를 존경해서 그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호로 썼다는 소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방정환 스스로는 '소파(小波)'란 호는 "잔잔한 물결처럼 천천히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바꾸겠다"는 데에서 유래한 거라고 밝혔다고 한다. 진짜 일본인을 존경해서 그랬어도 어떤 인물을 존경하는 마음이 친일과 어느 정도까지 연결되는지는 연구해 볼 부분. 또한 조선총독부 서기로 잠시 근무한 경력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반면으론 3.1 운동 당시 장인어른인 손병희를 따라 만세운동 격문을 찍고 배포한 혐의로 잡혀갔다는 행적도 존재한다. 다만 이 건은 증거 불충분으로 바로 풀려났다.

  • 2020년 이후, 앞서 설명된 방정환의 논란이 부각되면서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는 말이 인터넷 커뮤에 떠도는데 이는 대안 교육을 주장하는 수필이 와전된 것이다. 링크 입시만을 목적으로 한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비판하면서, 학교교육 대신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현실적인 교육을 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한 것으로, 오늘날 대안 학교 지지자들의 사고방식과 비슷하다. 문제는 이처럼 진보적인 생각을 피력한 사람이 앞 항목에서 언급되듯, 죄 없는 입양아를 인격 살인하는 위선적인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다.[39]

  •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강연회에서 <난파선>[40]이라는 이탈리아 동화를 번안해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모든 어른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든 관객도 심지어는 감시차 방문했던 일본 경찰도 눈시울을 적셨다. 문제는 그날따라 물을 많이 마셔서 소변이 많이 급했는데, 이야기를 끝내고 황급히 화장실을 가던 차에 참석한 아이의 학부모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에 일일이 답례하느라 결국 바지에 실례를 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방정환을 평생의 스승으로 생각한 아동문학가 최신복은 역시 방정환의 숭배자였던 부친의 묘를 선산에 쓰지 않고 방정환의 묘 옆에 장만했으며, 자신도 죽어서 방정환 옆에 묻혔고 최신복의 부인도 그 곁에 합장되었다. 최신복의 여동생 최순애는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아내였는데,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잘 알려진 오빠생각의 작사자이다.


  • 방정환의 뜻을 이어받기 위한 비영리 공익재단인 한국방정환재단이 있다.홈페이지링크


5. 매체[편집]


대체역사소설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 중요 조연으로 등장한다. 방정환이 일본 유학 중에 주인공인 유진 킴과 만나게 되었고, 그걸 계기로 샌프랑코 동양교육발전기금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에 유학까지 가게 된다. 마성의 입담과 컨텐츠 제작 능력으로 샌프랑코 미디어 사업 분야의 핵심 브레인이 된다. 샌프랑코 회장 김유신 피셜 "업계의 신". 현지 미국인들조차도 미스터 뱅(Mr. Bang)으로 부르며 그 능력을 인정할 정도이다. "미스터 뱅이 제작에 참가"라는 문구만으로 투자금을 쓸어담는 경지에 이르러있다. 여담으로 실제 역사에서 비만과 고혈압 등으로 단명한 사실을 알고 있는 유진 킴이 건강 관리를 빡세게 시켜서, 본 역사와 다르게 건강히 잘 살아 해방 이후에도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광기를 목도하고는 좌절해버린다. 본인의 작품이 파시즘 선전에 악용되고 나치즘의 세뇌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것 등에 멘탈이 붕괴해 유진 킴의 동생 유신 킴을 만나 이 전쟁을 막을 방법이 없었겠냐고 묻기도 한다. 미국 정부는 방정환을 전시공채 관련해서 움직이고자 했지만 이 역시 거부했고, 2차대전이 끝나 한반도가 독립한 뒤로는 대한민국으로 떠났다.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9화에 등장한 인물 '방구뽕'의 모티브가 소파 방정환이라는 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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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판서공파(判書公派) 35세 환(煥) 항렬.[2] 음력 10월 7일.[3] #. 현재 이 자리에는 로얄빌딩이 들어서 있다.[4] 왜정시대인물사료[5]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당주동. 세종문화회관 서쪽 뒷길.[6] 미곡상의 순우리말. 즉, 쌀을 파는 곳이다.[7] 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방두영(方斗榮)으로 기재돼 있는데, 이는 아명이다.[8] 초명 방태연(方泰衍).[9] 일부 어린이 위인전에 따라서는 방흥수가 신식 공부하는 게 부럽지 않냐고 자랑하는 모습도 나온다.[10] 이 부분도 버전에 따라서 회초리질을 한 뒤 비로소 입학을 허가해 주었다고 나오기도 한다. 또한 방정환 본인도 집안 어른들과의 상의도 없이 멋대로 머리를 깎고 학교에 입학하는 일에 대해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신식 공부를 하게 되어서 설렌다고 기뻐하는 것도 있었고, 할아버지가 회초리질을 하면서 천자문만 공부해도 될 것을 서양 공부는 굳이 왜 하려고 하냐고 꾸중하는 것도 삽입되기도 한다.[11] 이 사업 실패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후대인들은 2가지 추측을 할 뿐이다. 첫 번째는 빚쟁이들한테 쫓겨서 이렇게 되었다는 설, 두 번째는 할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한순간에 가난해졌다는 설이 있다.[12] 더불어서 이 무렵에는 가난 해결을 위하여 당시 12살에 불과했던 누나가 일찍 시집을 가기까지 했다. 저 때는 어느 가난한 집이든 저런 일이 일상이었다.[13] 오영준(吳永俊)의 딸이다.[14] 훗날 옹서(翁壻) 지간이 된 의암 손병희 선생이 사윗감인 방정환을 처음 보고 놀랄 정도로 말랐다면서 경악했다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끼니를 잇기도 힘든 빈곤, 인쇄소에서 임금 노동을 하는 조부와 부친, 몸이 병약한 모친까지 얼마나 가난한 사람이었는지를 단번에 대변해 주는 부분들이 많았다.[15] 류광렬 역시 가난한 집안 사람으로써 방정환의 심정을 잘 알아서 같이 동병상련을 느끼면서 자연스레 친해졌다.[16] 하지만 귀향 후에도 류광렬과 방정환은 여전히 끈끈한 우정을 유지했다.[17] 1991년 10월 18일, 91세의 나이로 사망.[18] 당시 중매에는 방정환의 부친과 의형제를 맺었던 권병덕(權秉德, 1867~1943)이 나섰는데, 그는 손병희와 함께 동학농민혁명민족대표 33인으로 활약했다.[19] 당시 보성전문학교는 천도교 재단에 인수되었다. 인촌 김성수가 인수한 건 나중의 일.[20] '색동회'라는 이름은 후에 동요 작가로 활약하게 되는 윤극영이 예쁜 색동저고리를 떠올리며 제안한 이름.[21] 오타초성체가 아니라 정말 방정환 선생이 썼던 필명이다. 사실 ㅇㅇ생 형태의 필명은 일제강점기 당시 잡지 등에서 많이 쓰였다.[22] 한국의 어떤 전설적인 게임음악 작곡가세기말에 이걸 재현한 바 있다. 역시 개발사에 사람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같은 게임모 작곡가 역시 이를 다시 재현해냈다.[23] 대중들의 인기를 받던 고전소설들을 색상을 입혀 화려하게 꾸미고 6전(錢)이라는 싼 가격에 인쇄한 소설. 딱지본이라고도 하는데 딱지처럼 작은 판형이기 때문이다.[24] 방정환이 1923년에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를 펴내기 이전부터 육당 최남선이 1916년 일본 유학을 그만두고 조선에 돌아올 때에 인쇄 노동자들과 함께 돌아와 서울에 출판사를 차리고 나서 육전소설[23]과 <어린이보이>, <붉은저고리>를 펴내었다. 방정환도 선린상업학교에서 공부할 때에 이들 잡지를 읽으며 문학을 공부했다. 1923년 창간되었으며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에 따라 1934년 7월 발간 중지될 때까지 통권 제122호를 찍었다. 처음에는 "엽서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보내주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준다"고 선전해도 8명이 신청할만큼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방정환이 구연동화를 하며 열심히 선전하고 독자퀴즈를 내어 정답을 맞힌 어린이에게는 상품을 주고 독자를 초대하는 행사를 했으며, 방정환 자신이 광고문구를 작성하는 등 발행인으로서 활약을 하자,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25] 당시 서울 인구가 30만 명이었으니 매년 10만 부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 요즘 '월간조선'과 '한겨레21'의 발행 부수가 매년 4만 부다.[26] 오늘날에는 '형제별'이라는 제목으로 더 알려져 있다.동영상 참조 [27] 조선 아이들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팔아버리는 조직에게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아나선 오빠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한반도중국을 오가며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담고 있다. 1970년대에 극장용 만화영화로 만들어졌고, 2008년 MBC에서 TV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28] 이때 이원수가 양산까지 찾아와 동화구연을 하는 방정환의 모습에 감명을 받고 아동문학가가 되었다고 한다.[29] 신데렐라프랑스어 발음인 \[sɑdʁijɔ\]의 차용발음이다. 비음모음이 제1음절에서는 종성ㄴ첨가로 실현되었고 마지막 음절에서는 종성ㅇ첨가로 실현된 것이 특징이다. 무표적으로 비음모음이 종성ㅇ로 차용되지만, 제1음절의 경우는 조음위치동화를 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제2음절의 초성으로 치경음이 나오기 때문이다.[30] 한 번은 고등계 형사가 참석했다가 동화구연을 중지시키라고 외쳤는데, 이미 이야기에 푹 빠져있던 사람들은 듣지도 못했고, 종국에는 형사 자신도 이야기에 빠져버려 동화구연을 마치자 울었다. 그러다가 자기 입장을 자각하고 허겁지겁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지만, 이미 청중들이 보고 만터라 망신을 당했다. 이후 방정환은 '형사를 울린 남자'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31] 글을 쓰고 손님을 맞이하고 외출할 때 항상 담배를 손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32] 이 유언은 현대에 '검은마차 노래 괴담'의 모티브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단 참조.[33] 한용운, 이중섭 등의 묘와 함께 있다.[34] 아이 마음은 신선처럼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35] 방정환의 묘비명인 '동심여선'은 <맹꽁이 서당>의 작가인 윤승운 화백이 사인을 할 때마다 반드시 사용하는 글귀이다.[36] 당시 한반도에서 설탕냉면은 전국의 노동자들이 여름에 즐겨먹는 식단이었다(오리온제과의 창업주 이양곤 역시 좋아했던 음식이라한다.). 설탕은 한국에서는 1970년대까지도 고급선물세트로 틴케이스로 포장되어 팔릴 정도로 비싼 것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당시 일본의 같은 식민지였던 대만사탕수수가 유입되면서 상대적으로 풍족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설탕과 빙수를 좋아하신 이야기를 쓰면서, 먹다를 "자시다"라고 했는데, 자시다는 먹다를 근대 국어를 쓰던 사람들이 먹다를 높여서 쓴 동사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활동하던 시대는 현대국어를 썼지만, 자시다, 깃브고나(1923년 어린이날 노래, 기쁘구나)같은 근대국어 전통이 남아있었던 것. 현대국어에서는 먹다를 높여 쓸 때(경어법)에 잡수시다, 드시다라고 읽고 쓴다.[37] 출처: "아이스크림의 지구사", 로라 B. 와이스 저[38] 참고로 신준려도 독립운동을 하다 검거된 적이 있었다. 링크[39] 사실 방정환은 사회주의자와 친분이 있어서 겉으로 주장한 사상 자체는 진보적인 면이 많았다. 김명순을 공격한 김기진만 해도 카프 소속 사회주의 문인이었다. 단지, 자신의 문학관과 대립하는 유미주의 문학인을 공격하기 위해 김명순을 제물로 삼은 것이고, 방정환은 친구라고 두둔한 것이다.[40] 결말이 감동적이면서 비극적으로 누구나 슬퍼할 만한 동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