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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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서
裵聖瑞 / Bae Seong Seo

출생
1944년 5월 26일 (79세)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출신지
평안북도 영변군
학력
선린상고 - 건국대학교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한일은행 야구단 (?~?)
지도자
영남대학교 감독 (1973~1976)
동국대학교 감독(1977~1981)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 코치(1982)
한양대학교 감독 (1982~1985)
빙그레 이글스 감독 (1985~1987)
MBC 청룡 감독 (1989)
종교
개신교[1]
1. 개요
2. 감독 경력
3. 여담
4. 근황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야구 감독이다.

아마 시절 맹장(猛将)으로 이름을 날렸고 1985년 빙그레 이글스 창단 감독으로 프로에 입문했지만, 그가 부임했을 당시에는 빙그레의 전력이 약했고 성적도 좋지 않아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강훈련을 통해 선수들의 기본기를 다듬었고, 장종훈을 중심으로 한 초기 빙그레 이글스의 팀 컬러인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지도자다.


2. 감독 경력[편집]


1973년부터 감독 생활을 시작했으며. 가장 유명한 경력이 영남대학교 야구부 창단 감독인데, 이 당시 혹독하게 선수들을 훈련시켜 빠른 시간에 대학 리그 정상 등극에 성공한다. 당시 그 밑에 있었던 선수가 바로 내야수 김재박이었다. 아울러 만화가 이현세의 조카가 그 훈련 장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해 삼촌에게 소개시켜 줘서 탄생한 만화가 바로 공포의 외인구단이다. 공포의 외인구단 작품 속 지옥 훈련의 절반 정도가 실제 영남대학교 야구부 훈련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외인구단의 감독 손병호의 모델이 바로 배성서였다는 점. 이후 1977년 동국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2]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코치를 맡았다.[3]

그 뒤 1982년 한국프로야구의 출범과 함께 MBC 청룡의 창단 당시 초대 감독으로 내정되었고,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되는 상황에서 인사차 정동 MBC 본사에 갔다가 날벼락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일본프로야구에서 활동하던 백인천의 귀국 소식에 높으신 분들이 그를 대신해서 백인천을 감독으로 임명한 것. 이 때문에 프로 감독 진출은 무산되었다. 그 당시 하기 싫다고 버티던 배성서를 설득하여 MBC 감독으로 추천했던 이는 당시 MBC 스포츠국 국장이던 조광식[4]이었는데, 평소 배성서와 호형호제 하며 막역한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백인천 때문에 배성서 감독 선임건이 없던 일로 되자 조광식은 몸둘 바를 모르며 동생뻘인 배성서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고 한다(...). "내가 프로팀 감독 못 해서 환장한 놈으로 보이느냐"며 펄펄 뛰던 배성서도 형님의 사과에 "광식이형! 차제에 잘 됐수, 국가대표 감독은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 이라며 마음을 풀었다고. 그리고 배성서는 그 해 서울에서 개최된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한국 대표팀 코치로 선발되어 비록 감독은 아니었지만 한국이 우승하는 데 공헌하면서 어느 정도 원을 풀었다.[5] 그 과정에서 김인식이 동국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서울 세계선수권 대회 국가대표팀 코치와 한양대학교 감독을 거쳐 1985년에 창단한 빙그레 이글스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에도 MBC 청룡 감독 내정 후 무산 때처럼 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빙그레 초대감독으로 선임되기 전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처남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빙그레 프론트에서 감독직을 간곡히 청해 결국 부인과 아들 딸을 미국에 남겨두고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스파르타식 훈련과 기초 체력을 중시하는 야구로 훈련을 많이 시켰지만, 신생팀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하고 그리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채 계약 기간이 끝난 후 재계약하지 못했다. 하지만 후임으로 영입된 김영덕 감독은 선수들의 기본기가 많이 잡혀 있다며 그에게 고마워하기도 했다. 김성갑의 말에 따르면 훈련이 참 빡셌고, 팀 성적은 나빴어도 선수들이 감독과 정으로 똘똘 뭉친 사이였는지라 구단 사무실에서 모든 선수와 이별의 악수를 하는데 절반 이상의 빙그레 선수들이 울었다고 한다.

그 뒤 1988년 시즌 후에 유백만의 후임으로 MBC 청룡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팀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강한 훈련으로 기강을 바로잡아 달라는 의도였지만, 오히려 항명 파동의 주인공이 된다. 세 차례 합숙 전지훈련을 감행했는데, 마지막 전지훈련에서 투수 정삼흠이 "여기가 공산당이냐"고 반발한 것.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시즌 도중에는 고참 선수들이 구단 사장과 만나 감독 퇴진을 요구하는 초유의 하극상을 일으켰다. 그 결과 단 1년 만에 또(...) 백인천에게 감독직을 넘겼고, 그 뒤로 프로 무대에 다시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하극상이 일어난 이유는 배성서 감독의 스파르타식 훈련과 MBC 청룡 선수들의 느슨한 태도 및 파벌이 결부된 결과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런 방식이 빙그레 때처럼 빛을 본 것인지 바로 다음 해 우승에 성공한다.

선수 육성 능력은 나름대로 뛰어나서, 밑에서 길러 내어 프로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던 선수들이 많다. 앞에서 말한 영남대학교 시절의 김재박도 있고, 동국대학교 시절에 김성한, 한대화[6] 등을 키워냈다. 그리고 빙그레 이글스 시절에 연습생으로 발탁한 내야수 장종훈도 있다.


3. 여담[편집]


매서워 보이는 외모, 지옥훈련의 이미지와 달리 유머 감각이 굉장히 풍부해서 여러가지 일화를 남겼다.

  • 1986년 창단 첫 해 빙그레 이글스는 뒷심 부족으로 인하여 무려 29번의 1점차 패배를 당했는데, 이듬해 1987년 시즌 중반 배성서가 기자들과 말을 나누면서 "으하하하하, 올해는 1점차 패배가 많이 줄었다. 한번 세어 봐, 몇 번 안 된다구" 라면서 호탕하게 웃는 것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표정을 구기면서 한 기자에게 귀띔하기를, "젠장, 그런데 2점차 패배가 늘었단 말이지(...?)"

  • 배성서는 영남대 감독 시절부터 등번호 88번을 애용했다. 자신의 몸무게가 88kg나 나간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대나(...). 그럼 코끼리 감독은 세자릿수 번호 달아야 하나? 빙그레에서도 88번을 달았는데 이유가 좀 달랐다. 선수들이 팔팔하게 움직이라는 의미였다고.

  • 대전일보 체육부 소속이었던 이원재 기자[7]형님 동생 하는 굉장히 친밀한 사이였다. 근데 이원재 기자와 배성서 사이엔 묘한 징크스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 기자가 홈 경기 플레이볼 전에 배성서에게 "이원재 이 샛퀴! 너 한번 죽어볼래?!"라는 식으로 아무 이유 없이 욕을 먹으면 그날 빙그레의 승률은 거의 90%에 육박했다는 것. 아무리 친하더라도 이 기자는 좀 황당했을 듯(...) 그래서 이 기자는 빙그레 홈 경기 때마다 고향 팀을 위해 덕아웃에서 배성서에게 공연히 욕을 먹어 주곤 했는데, 어느 날 배성서가 홈 경기를 앞두고 이 기자를 애타게 찾았지만 끝내 경기 종료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이유인즉슨 그날 상대 선발이 한창 리그를 씹어먹고 있던 해태 타이거즈의 괴물투수 선동열(...). 질 것이 뻔한데 괜히 욕 먹을 필요가 있냐며 잠적해 버린 것이었다.

  • 배성서는 연습생으로 들어온 장종훈을 유난히 예뻐했다. 대형 유격수의 자질이 보였기 때문이었지만, 미국으로 유학을 간 아들[8]과 1968년생 동갑이어서 그랬기도 했다.
그런데 빙그레는 1986년 시즌을 최하위로 마친 후 대규모의 선수단 정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중 장종훈도 정리 대상이었다. 게다가 연봉 3백만원으로 입단한 장종훈은 연봉을 6백만원으로 올려주고 계약금까지 6백만원을 요구하여 구단 측에서는 "저놈(장종훈) 만큼은 반드시 자른다" 라며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자 당시 코치이던 이재환이 구단 고위층을 찾아가서 "잘만 다듬으면 반드시 큰 재목이 될 선수니 1년만 자르지 말고 봐달라"며 읍소하여 결국 연봉만 6백만원으로 올려주고 계약금은 나중에 하는 거 봐서 지급하는 것으로 장종훈을 보류 선수 명단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장종훈은 배성서와 이재환의 예상대로 1987년 시즌부터 빙그레의 주전 유격수로 발돋움했다.

  • 장종훈이 팀의 주력 선수로 자리잡은 이후, 배성서는 경기 중 장종훈 타석에서 중요한 시점이다 싶으면 더그아웃 구석으로 장종훈을 불러 영 좋지 않은 곳을 주무르곤 했는데 장종훈에게는 하늘같은 감독이라 꼼짝 없이 당하기만 했다. 신기한 건 그러고 난 후 장종훈은 70~80%의 확률로 안타를 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장종훈이 자진해서 만져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훗날 배성서는 "종훈이의 긴장을 풀어주려 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 징크스는 포수들만 차던 급소 보호대를 장종훈도 차기 시작하며 슬그머니 사라졌다고 한다.
생활 잡지식을 모아놓은 어떤 책에서 남자가 긴장하면 오그라드는 것(...)이란 제목으로 이 사례를 들었는데, 긴장해서 오그라들면 안타를 못 치고, 멀쩡하면 안타를 쳤다는 후문이 있었다.

  • 배성서는 애연가였다. 그런데 피우던 담배를 2번 바꾸었는데, 애초에 애용하던 담배는 아리랑이었지만, "십리도 못가 발병이 나니 역전패가 많다"라는 주변 얘기에 담배를 로 바꾸었다. 하지만 솔은 (상대팀에) 점수를 "솔솔" 내준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얼마 안 가 끊어 버렸고 그 다음에 바꾼 담배는 태양, 타격이 태양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태양의 효과가 나타난 것은 배성서의 후임으로 김영덕 감독이 부임한 1988년 이후였다(...).

  • 1986년 6월 5일, 사직야구장 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원정경기에서 빙그레는 상대 선발투수 김정행에게 KBO 리그 통산 두 번째로 노히트 노런을 허용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날 김정행은 무려 8개의 볼넷[9]를 남발하면서도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하여 무실점에 무안타로 대기록을 작성하는 쾌거를 올렸는데, 공교롭게도 다음 날인 6일 오전(한국시간) 열린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조별 예선 2차전에서 김종부의 동점골로 한국불가리아에 1대 1로 비기면서 16강 진출의 실낱같은 희망에 관한 기사로 모든 신문의 스포츠 지면이 도배되는 바람에 그의 노히트 노런은 단신처리 되는 비운을 맛봐야 했다.
아무튼 노히트 노런 허용으로 망신살이 뻗힌 배성서가 경기 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변명 비슷하게 털어놓길 "(김정행)이 더러운 놈,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칠거 아냐? 오늘 볼넷만 여덟개인데 어떻게 치라고???"(...)

  • 1987년 6월 5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청주 홈 경기 때 빙그레 마운드는 김성한에게 3연타석 홈런을 허용하고 9회 초에 다시 김성한과 대결하게 되었다. 이미 승부는 해태 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상황이라 투수 손문곤[10]은 배성서에게 거르겠다는 사인을 보냈지만, 배성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면승부를 지시했다. 손문곤은 '4연타석 홈런이란 대기록을 허용할 수도 있는데?' 라며 의문을 품었지만, 배 감독의 지시대로 정면승부로 맞섰고, 결국 큼지막한 외야 플라이로 김성한을 간신히 잡아냈다. 경기 후 기자들이 "왜 그때 정면승부를 지시했는가?" 라고 질문하자 배성서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딱 한 마디만 했다. "흥, 어차피 김성한도 내 새끼 아닌감?" 김성한동국대 시절 배성서 감독의 제자였다.

  • 1987년 신인 2차 지명[11]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으로 당시 2차지명 최대어였던 이정훈을 영입하는 데 성공한 바가 있다. 1986년 시즌의 성적을 보자면 빙그레는 최하위, 청보 핀토스는 6위에 그치며 2차 지명에서 각각 2차 1순위 지명권을 2장씩 받아 전체 1, 3순위와 2, 4순위 지명권을 득템했는데, 지명회의가 열리기 직전 청보 박정삼 단장이 빙그레 노진호 단장[12]과 배성서 감독과 환담을 나누며 "우리가 어차피 먼저 뽑는데 서로 카드를 공개하자. 누굴 뽑을 건가?" 라고 묻자, 노 단장이 당시 2차 지명 신인 중 최대어인 투수 이동석[13]을 뽑을 것이라고 했고 그 다음에는 외야수 정상진[14] 이라고 했는데, 옆에 있던 배성서가 노 단장에게 "투수가 부족한데 투수를 더 뽑아야지 야수는 필요없다. (정상진)걔는 선수도 아니다"라고 펄펄 뛰는 것이었다. 정상진 뜬금없는 의문의 1패(...) 이에 박 단장은 "어라 빙그레는 이정훈에 관심이 없나 보네? 그럼 우리도 2순위로 투수를 찍고 4순위로 이정훈을 뽑아야지" 라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지명회의 시작. 앞서 말한 대로 빙그레는 이동석을 1순위로 지명했고 이어 청보는 투수 이상훈[15]을 2순위로 지명했는데, 3순위에서 빙그레는 기습적으로 이정훈을 지명했다. 순간 박 단장은 속았다는 생각에 눈 앞이 캄캄해졌고,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청보 핀토스 감독 강태정은 책상을 발로 걷어차는 등 분통을 터트렸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이렇게 배성서의 허허실실로 빙그레의 유니폼을 입은 이정훈은 고향 팀 삼성 라이온즈의 지명을 받지 못한 분풀이라도 하듯 그 해 5월 1일 삼성과의 홈 경기 때 연장 10회말 김시진에게 끝내기 홈런을 날렸는데, 그 끝내기 홈런은 빙그레 창단 후 최초의 끝내기 홈런이었다.
  • 그런데 이 홈런에 대한 뒷이야기가 있다. 그날 연장 10회말 이정훈이 타석에 들어서자 마스크를 쓰고 있던 상대 포수이자 그의 대구상고 선배인 이만수가 삼성 야수들을 향하여 "다들 들어온나! 와 그리 뒤로 빠져있노? (이정훈)야는 등치가 쪼막만해가꼬 거기까지 공 안간다카이! 전진수비 하그래이" 라고 소리를 쳤다. 이정훈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요량으로 내뱉은 야유였지만, 아무리 선배라도 자신의 단신 컴플렉스를 들먹이는 것에 발끈한 이정훈은 어금니를 깨물며 도끼눈으로 한번 이만수를 째려보고는 자신이 몸쪽 공에 약하다는 점을 김시진[16]이 노릴 거라고 예측했는데, 마침 몸쪽으로 들어오는 공을 그대로 후려쳐 끝내기 홈런이란 쾌거를 이끌어 냈다. 단번에 대선배 두 명을 물먹인 능력자(...)
이정훈은 그 해 22경기 연속 안타 등 맹활약을 펼치며 0.335의 고타율로 그 해 신인왕을 수상, 배성서의 기대에 100% 이상 부응했다. 이 때 이정훈은 1987년 최우수 신인선수로 선정되었을 때 뉴스데스크에서의 인터뷰에서"배팅이 안 맞으면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고심을 하고, 노력하다 보니까 오늘 이 좋은 상을 타게 됐는데 특히 배 감독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인터뷰를 했었다.


4. 근황[편집]


야구계를 떠난 후로는 대구에서 보험업에 종사한다고 알려졌다. 현재는 충청남도 당진시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2012년 11월 북한에 억류된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본명:배준호)의 아버지로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되었다. 이는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의 한 교회에서 배성서가 아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예배를 하는 모습이 보이면서 알려졌다. 아들 상봉을 위해 북한 당국의 동의를 얻어 방북, 케네스 배와 평양국제비행장에서 상봉했다. 아들이 15세 되던 해에 온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배성서가 빙그레 이글스의 초대 감독을 맡게 되어 귀국한 뒤 기러기 아빠 생활을 했다고 한다. 미국 정부의 노력 끝에 케네스 배는 2014년 11월에 석방됐으며, 동네 기원에서 바둑을 두고 있다가 석방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 경상북도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고향이 평안북도 영변군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이북을 잘 안다. 그러니 다시는 북한 근처로 아들이 못 가도록 막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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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7년판 빙그레 이글스 팬북#에 실린 배성서 감독 페이지에 있는 소개 글에 의하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에 기독교의 교리처럼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라고 주장하며(중략)"라고 쓰여져 있다. 또한 아들인 배준호(후술할 케네스 배)는 목사로 키웠고 후일 미국 국적으로 귀화했다.[2]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술회하기를 김성한 특유의 오리궁둥이 타법은 배성서 감독이 기초를 만들어줬다고 한다.[3] 당시 감독은 어우홍, 코치는 배성서와 김충이었으며 당시 대표팀 선수였던 김일권과의 불화로 김일권이 대표팀에서 보따리를 싸서 나갔고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게 된다.[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원조 대도’ 김일권 ⑥-끝[4]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출신으로 1981년 11월 MBC 스포츠국 국장으로 스카웃 되었고, MBC 청룡 창단 작업에 깊이 개입하여 MBC의 프런트로 근무하였다. 이후 LG 트윈스가 창단하면서 LG로 건너와 초대 단장으로 LG의 창단 첫 해 우승에 크게 공헌하였다. 2011년 별세.[5] 덧붙이자면, 감독 선임 무산과 상관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교롭게도 MBC가 프로야구 출범 개막전을 중계할 때 김용 캐스터와 합을 맞춘 해설가는 바로 배성서였다.[6] 1982년 세계선수권 당시 대표팀 코치이던 배성서가 한대화를 국가대표로 추천하였다. 한대화는 이 때의 인연으로 1986년 해태에 트레이드되기 전에 고향 팀인 빙그레로 보내 달라고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7] 대전일보를 거쳐 주간야구, 한국스포츠TV 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외환위기의 여파로 1998년 실직한 후 2002년 만 50세의 나이로 법무사 시험 최고령 합격이라는 기록을 남겼다.[8] 그가 바로 2012년 북한에 억류당했다가 풀려난 케네스 배(배준호, 1968년 8월 1일생)이다.[9] 그런데 당시 언론 보도와 KBO 기록지에는 4볼넷으로 기재되어 있다.[10] 1965년 1월 29일생. 1986년 빙그레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으나 1990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특별지명을 받고 이적하여 1992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6시즌 통산 성적은 5승 16패 1세이브.[11] 1986년 11월 24일에 열렸다.[12] 박정삼 단장은 한국일보, 노진호 단장은 동아일보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서로 언론인 시절부터 친분을 쌓아온 사이였다.[13] 군산상고 - 동국대 출신의 투수로, 연고 팀인 해태의 지명을 받지 못하고 빙그레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1988년 4월 해태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의 쾌거를 이룩했는데, 상대 투수가 무려 선동열(...). 이후 1992년 쌍방울 레이더스로 이적하여 7시즌 통산 12승 16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5.01의 성적을 남기고 1993년에 은퇴했다. 이후 화순고군산상고의 감독을 지냈다.[14] 훗날 태평양 돌핀스에서 1991년 시즌 개막전에 선발출장 하게 된다.[15] 야생마 이상훈과 동명이인.[16] 아이러니 하게도 김시진 또한 이정훈의 대구상고 선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