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후중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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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Dolchstoßlegende(등 뒤에서 칼 찌르기)
영어: Stab-in-the-back myth
한국어: 배후중상(背後中傷)설
파일:external/padresteve.files.wordpress.com/stab-in-the-back.jpg 파일:external/pbs.twimg.com/CUFytHrWsAERpzM.jpg

Die deutsche Armee ist von hinten erdolcht worden.

독일의 군대는 배후의 적에게 당했다.


1. 개요
2. 배경
3. 현실
4. 결과
5. 타국의 유사 사례
5.1. 미국
5.2. 프랑스
5.3. 일본
5.4. 러시아


1. 개요[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떠돌던 정신승리음모론. 독일은 사실 전투에서 지지 않았으나 유대인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병역기피, 탈영, 파업선동, 간첩질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는 인지부조화적 음모론이다. 비수를 뒤에서 맞았다는 뜻의 비수 전설이라고도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잘 되면 내 덕! 망하면 네 탓!"[1]임은 어디서나 있는 말이라 색다를 것도 없지만 이 도시전설은 반유대주의, 나아가 나치당이 정권을 잡아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 원동력이었다.

구체적인 어원은 에리히 루덴도르프사민당이 자신에게 패전의 책임을 추궁할까 두려워해 해외로 망명하고 가졌던 미국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그는 1차대전 당시 독일 육군 참모 차장이자 군수 총감으로 상관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함께 실질적인 독일군의 최고 지휘관이자, 경제 사회 전 분야에서 막대한 권력을 휘두른 대전 말 독일의 실권자였다. 당시 기자가 취재를 마치고 인터뷰 내용을 확인하며 "그렇다면 이것은 등 뒤에서 칼에 찔렸다는 뜻입니까?"("Sie meinen, Sie seien in den Rücken gestochen worden?")라고 하자 루덴도르프가 "내 말이 바로 그거요!"라고 한 대답이 널리 퍼지면서 정착되었다.

2. 배경[편집]


이 음모론이 나온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거시적인 상황'과 민중의 '미시적인 개인의 인식'의 괴리감 때문이었다. 후대가 아는 전체적인 지식과 당시 개인의 삶 속의 지식은 차이가 있고, 이 때문에 배후중상설이라는 괴담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당시 동부전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러시아 제국에 박살이 나면서 붕괴 직전이다가 타넨베르크 전투로 한숨을 돌렸고 이후 1915년부터는 전과를 확대해서 오히려 러시아 제국 깊숙히 진격했다.

또한 서부전선은 독일군의 초기 전과로 알자스-로렌을 제외하면 프랑스, 벨기에 영토 안에서 전선이 형성되었다. 서부전선이 답도 없고, 끝도 없는 지옥같은 참호전으로 변해서 4년을 질질 끌면서 독일의 모든 물자가 바닥나고, 1917년과 1918년 겨울에는 매일마다 아침 점심 저녁 순무를 갈아서 순무에 발라먹고 찍어먹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독일 제국은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동부전선의 전투를 끝내고, 여기서 빼온 예비부대와 자원으로 1918년 서부전선에서 5번에 걸쳐서 대공세를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오히려 미군 병력이 본격적으로 들어오자 압도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한계에 달한 독일군은 1918년 9월 발칸 전선에서 동맹국 불가리아가 붕괴해도 속수무책, 동부전선의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전쟁을 포기했고, 서부전선도 군데군데 숭숭 구멍이 나면서 탈영병이 속출, 최후의 방어선으로 여긴 '힌덴부르크 선'까지 무너지면서 군부는 민간 내각에 협상국에 휴전을 요청해 달라고 통보한다.

당시 군부독재 체제였던 독일은 정보가 통제받던 탓에 내각총리조차 막장테크 탄 9월에 가서야 이런 상황을 보고받았다. 그 전까진 러시아의 항복 덕에 전쟁에서 이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차 대전에서는 일본 제국이 이런 생각을 하다가 패배한다 협상국은 휴전 요청을 사실상 항복으로 받아들이고, 휴전 협상 선결 조건으로 전쟁 이전 독일 국경까지 군대를 자진해서 퇴각하고 자신들이 전범으로 낙인찍은 군부빌헬름 2세 대신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은 민간 내각하고만 협상을 하겠다고 통보했다. 이 소식이 독일에 알려지자 민심이 폭발해 앞으로 있을 평화 협상에서 걸리적거리는 황제는 강제로 퇴위 당하고 공화정이 선포되었으며, 전쟁 전 선거에서 의회 다수당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갑작스러운 권력의 공백과 전후처리를 수습해야 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민간과 군부는 정부와 괴리되어 있었고, 게다가 독일 본토는 전쟁터가 아니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라디오 방송과 국가의 발표는 독일군이 연전연승을 거두거나 힘든 싸움을 하고 이겼다는 거짓된 선전들로 가득했다. 허황된 거짓말이었지만 민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고위인사들까지 의심치 않은 말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독일 국민들 중에서 상황을 안 좋게 보는 이들조차 "독일 안에서 전투가 없네?? 우리가 아직 지지 않았군." 이라고 현실을 오판하고 있었다. 패배를 알만한 이들도 패배를 체감할 시간은 전혀 겪지 않았다.

이처럼 독일 국민들은 전황이 좀 나빠졌지만, 내부상황은 아직 버틸 만하다고 생각했고, 휴전을 요청하다가 갑자기 혁명이 일어나면서 정부가 바뀌어 "우리가 졌다. 항복 선언하겠다." 라고 전국적으로 발표를 하니 독일 국민들은 격하게 반발했다. 독일 국민들은 패배를 부정했고 내부의 배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태를 만들었다고 아우성이었다.

결국, 사회민주당 안에서도 국민들이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리고 민간정부 내각의 이후 국정이 어떻게 될지 심각하게 우려했고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정파의 이익보다는 독일을 위해서 고민 끝에 결국 이 역할을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는, 협상국의 실수도 한 몫 했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을 발효하고 나서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군대는 휴전 협상 뒤 평화협정을 하기 전 독일이 딴 마음을 못 품도록 북해 항구를 봉쇄하고 지상군은 라인 강까지 진격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파기했다. 전쟁이 끝났지만 1918~1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사이 독일 국민들은 휴전 이전처럼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결국, 독일 국민들은 곳곳에서 바이마르 공화국부르주아 체제라며 거부하고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체제 수립을 주장하는 로자 룩셈부르크 등 공산주의자들의 봉기와, 이를 진압하려는 집권당인 사회민주당, 그리고 이 모두와 대적하던 자유군단철모단 같은 우익 민병대[2]들이 내전을 벌이면서 나라 꼴은 이도저도 못하는 아노미 상태가 되어버렸다.

베를린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를 진압한 직후 1919년 1월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중도좌파~좌파)-중앙당(중도우파~우파)-독일민주당(중도~중도좌파)의 흑적황 좌우 대연정은 76.2%의 지지를 얻으면서 독일에서도 민주 공화 체제가 정착한 것 같았지만[3]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을 통보하면서 전국적으로 국민들의 심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독일 국민들은 휴전이라고 해서 프랑스에다 알자스-로렌 정도만 떼어주고 합리적인 수준의 평화안을 체결하리라는 희망을 품었는데, 프랑스벨기에에 대한 영토 할양도 모자라서 전쟁의 당사자도 아니었던 폴란드[4], 체코슬로바키아[5], 덴마크[6] 등에도 영토를 바치는 데다가 모든 전쟁의 책임을 독일에다 몰아붙이고, 독일을 완전히 거덜내버리고 몇 세대에 걸쳐서 갚아도 턱없이 모자랄 천문학적인 수준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지경이 되자 그만 정신줄을 놔버렸다. 그들은 휴전과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인 정치인들을 '11월의 범죄자(November­verbrecher)'라 부르며 비난했다.[7]

사실 전쟁기간 내내 해상을 영국에 봉쇄당한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순무만 먹고 살고 있었으며, 어린이들은 의약품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던데다, 전선의 병사들은 영양실조로 스페인 독감에 걸려서 픽픽 쓰러져 죽어가는 판국에서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들이라면 독일이 이기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현역으로 군복무를 하는 장군들조차도 진지하게 이 전설을 믿지 않았지만 휴전 직후 패전 책임을 묻기 위한 법정을 열려는 시도를 의회에서 제기하자 힌덴부르크가 직접 "우리는 전선에서 지지 않았다. 전쟁에서 패한 까닭은 오직 후방의 반란뿐이었다." 라고 억지주장을 하면서 강경하게 대응하여 법정의 성립을 무산시켰다.

또한 베르사유 조약에서 전범 800명 인도 조항에 황제와 군부 인사들이 들었는데[8] 군부 인사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배후중상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여기에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으로 정신줄을 놔버린 일부 독일인들이 협상국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이 군부 인사들을 영웅으로 띄워준다.

그리고 정치계에선 우익세력이 독일 정치계의 큰 축이었던 사회민주당을 공격하려는 수단으로 썼다는 평가가 유력하다.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 에베르트가 1918년 군수공장 파업에 연루된 의혹을, 반전세력인 공산당은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전쟁 이전 구체제에서 주류였던 우익 세력은 민중봉기로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들어서자 찬전/반전 논쟁 시기 이전에 독일 공산당과 같은 정파였던 사회민주당에게 초록은 동색이라고 몰아붙였다. 이 때 힌덴부르크 등의 군부 지도부나 보수파들은 헛소문에 휘둘린 쪽이 아니라 소문을 주도한 쪽이다. 실제로 힌덴부르크는 백일 전투 직후 독일군에게 재기의 여력이 없었음을 잘 알았다. 다만, 자신이 군인으로서 항복과 패전의 책임을 지는 것이 싫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각에 사실상 항복인 휴전 요청도 부관이었던 빌헬름 그뢰너 장군에게 떠넘겼다위임했다.

독일은 1차 대전 이전에도 사회주의가 성행했고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일이 항복하는 계기인 킬 군항의 반란은 노동자 농민들과 결합하면서 사회주의적 성향이 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독일 공산당의 전신 스파르타쿠스단의 칼 리프크네히트와 여성 사회주의자로서는 가장 유명한 축인 로자 룩셈부르크[9]이 폭력적인 공산 혁명을 시도했고, 이 사건이 극우파들의 주장이 잘 먹히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끔찍한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바로 자본주의의 극에 다다른 제국주의 세력의 충돌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 세계의 노동자들은 이 전쟁에서 부르주아들의 국가. 즉 자국의 정부가 패배하기를 바라야 한다'는 혁명적 조국패배주의를 주장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들에게 전쟁의 원인이자 패전의 주역으로 몰릴 위기였던 보수 우익들이 오히려 사회민주주의 세력에 건 역공이 바로 '등 뒤의 칼에 찔렸다!' 라는 이론이고 이 시기 거대 자본은 초기에는 전통적 보수파인 힌덴부르크를, 이후에는 나치를 지원하면서 좌파사회주의 세력을 제거하러 노력한다. 또한 좌파 세력도 급진파(독립사회민주당, 공산당)와 온건파(사회민주당)로 나뉘는 바람에 온건파가 세력을 쥔 뒤 급진파들을 무력으로 탄압을 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을 저지하던 시점이라 효과는 만점이었다.[10]

그 결과 1920년에 열린 총선에서 흑적금 좌우대연정의 지지율은 반토막 이상이 나 버렸다. 76.2%에서 35%까지 줄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사회민주당은 첫 총선에서 40%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으나 이후 20%대의 정체한 득표율에서 왔다갔다 하게 된다.

3. 현실[편집]


그러나 경제력 1위였던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거의 끝났다. 미국의 경제력은 2위 독일, 3위 영국,[11] 5위 프랑스를 더한 것보다 컸고[12] 1917년 독일 제국의 GDP는 미국의 35.6%에 불과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증원 병력과 물자가 쏟아지고,[13][14] 동부전선에선 러시아를 패배시켰지만 동맹국들이 몽땅 털리면서 독일이 이길 방법은 아예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 특히 프랑스는 인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나라가 거의 거덜이 났지만 미국 덕에 배는 곯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영국도 전비는 바닥이 났어도 미국 참전 전에도 이미 여럿에서 재정적으로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영국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영연방 국가와 인도 등의 해외 식민지에서 병력과 물자를 충원받아[15]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했고, 프랑스는 경제적 파탄은 피할 수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식민지 등에서 물자와 병력을 징발하여 적어도 인력손실은 어느 정도 메꿀 수 있었다. 또한 두 나라 모두 서부전선만, 그것도 각각 절반씩만 맡고 있어서 청년층은 무수히 죽어나갔지만 역설적으로 독일에 비해 전쟁비용은 덜 들어갔다.

반면에 독일은 해외 식민지가 얼마 없었고[16][17] 그나마도 영국이 제해권을 장악했으니 식민지에서 독일 본토로의 인력과 물자 수송은 도 꾸기 힘들었다. 그나마 있는 식민지도 아프리카의 토고, 카메룬, 나미비아, 탄자니아와 태평양의 섬 몇 개 정도로 뽑아먹는 것보다 유지비가 더 나가는 곳들이었다. 독일의 경제력은 거의 100퍼센트 국내의 공업 생산과 내수 시장으로 발전한 것이지, 식민지 수탈로 얻은 게 아니었다. 역으로 보면 세계의 30퍼센트를 지배한 대영제국과 역시 식민지가 넘치던 프랑스가 연합해서 식민지가 거의 없는 독일 상대로 4년간 겨우 대등하게 싸우고 미국이 개입하고서야 승리했을 정도로 식민지의 효율이 개판이었고 독일의 내수 체급이 강했다는 뜻이지만.[18]

거기에 빌헬름 2세 즉위 이후 외교는 한때 프랑스를 국제 왕따로 만들던 독일을 오히려 국제 왕따로 전락시켰으며 그나마 친구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은 상태가 나빴고 이탈리아 왕국은 배신까지 때렸다. 사실상 독일은 가진 능력을 전부 발휘해 최선을 다해 싸운 축이다.

하지만 사방이 고립된 상태에서 장기간의 전쟁으로 독일의 식량 사정은 나날이 나빠져 전국민이 굶주렸고, 대전공업 생산은 한계에 달한 데다 극심한 병력 소모와 사기 저하로 군은 붕괴 직전이었다. 1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군은 더이상 군수물자를 생산할 수 없었고 제공권과 재해권은 연합군이 장악했으며 병사들 먹일 식량도 바닥난 상태로 전선이 붕괴되고 있었다. 연합군으로 참전한 미국이 풍부한 물자와 최신 무기로 무장한 미군 25만명을 한달 간격으로 참전시키면서 병력우위도 깨져 사실상 독일군 궤멸이 확정되었다.

독일 11월 혁명의 도화선인 킬 군항의 반란은 이런 상황에서 승산도 없으면서 상층부에서 내려진 자멸적인 출격 명령에 일선 수병들이 반발하고 여기에 굶주린 노동자들이 결합하여 난 사건이었다. 만일 독일인들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 사건은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그냥 진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지역의 반란이 겨우 이레 만에 전국을 휩쓸고 황제가 도망갔다. 11월 4일에 킬 군항 수병 반란이 있었고 11월 7일에 전국적인 공화국 선언이 있었으며 11월 9일에는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불과 1주일 만에 자연발생적으로 독일 전역이 뒤집혔다. 전쟁을 포기한 것은 일반 독일 국민들의 분노가 한계에 다다라서였다. 하지만 패전 후 책임을 피하려는 군부와 우익들의 선동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민족감정이 격앙되면서 독일인들은 배후중상설을 믿기 시작했다.

배후중상설에서 내부 배신자로 지목된 것은 좌파 사회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사회주의자(사민주의자 포함)는 대체로 1차대전에 협력했다. 무엇보다도 좌파사회주의 세력의 중심인 사회민주당은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런 행위를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짓고 로자 룩셈부르크 등 강경파들이 뛰쳐나왔으나 대중적인 영향력은 적었으며, 1차대전 당시 일부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들의 전쟁이라면서 전시 협력을 거부하고 탈영 데모 파업을 했지만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규모가 미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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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중상설에 반박하여 대응한 유대인 단체의 포스터.

유대인들도 배신자로 거론되었다. 이 음모론을 해명하기 위해 독일내 유대인 단체에선 독일 국민 평균보다 유대인의 참전율과 전사율이 더 높다고 홍보했다. 당시 독일의 인구 1% 미만인 60만 인구 중 10만명이 참전해 1만 2천명이 전사했고 78%가 전방에 갔다. 더구나 독일 제국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프로이센 왕국에서는 유대인은 장교 입대도 불허했고 병사 입대만 허용했다. 그래서 당시 독일 제국군 내에 있던 유대인 출신 장교는 바이에른 왕국과 같은 다른 제후국 소속이었다. 한 예로 히틀러철십자 훈장을 추천한 유대인 장교로 이름이 알려진 후고 구트만은 바이에른 왕국군 출신이었다.[19] 당시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유대교를 믿는, 혹은 조상이나 부모 중에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 있었던 독일인이라고 생각했지 단 한번도 이방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조국 독일을 위해서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음모론자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나치를 포함한 우익들은 밸푸어 선언까지 붙여 "유대인들은 영국이 약속한 유대 국가를 건국하기 위해 독일의 패전을 사주했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도 만들어냈고,[20] 히틀러는 히브리인 1만 2천에서 1만 5천을 일찍 목 매달았다면 100만 명의 독일인은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이란 선동으로 화답했다. 히틀러가 일찍 자살했으면 5천만 명이 피를 흘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4. 결과[편집]


흔히 배후중상설의 실체를 '전쟁을 일으키고 독일을 패전시킨 군부의 똥을 수습한 불쌍한 사민당과 자유주의 세력'으로 일축하지만 현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했다.

일단 현대 역사학계는 '독일 수뇌부가 전쟁을 일으켰다' or '독일의 전쟁 책임이 가장 크다'라는 식의 옛 학설들을 반박하고 뒤집고 있다. 자세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문서 참조.

또한 패전에 대해서도 독일 군부가 할 말이 있는게, '에리히 루덴도르프로 대표되는 독일 군부 세력이 카이저를 일방적으로 뒷구멍으로 몰아내고 횡포를 부려서 망했다'는 인식도 현재는 적극적으로 반박되고 있다. 1917년 이후부터 루덴도르프가 독일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독재자는 아니었다.[21] 카이저는 여전히 인사권을 쥐고 있었고, 베트맨홀베크 수상과 사회민주당 역시 여전히 독일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전쟁 내내 그 어떤 방면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따라서 대전 기간 동안 독일 민중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군부측 인사였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만이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얻은 전공을 바탕으로 범국민적인 존경을 누리고 있었고, 이를 이용한게 그의 야심만만한 부관 에리히 루덴도르프이었다. 그는 반대 세력이 그들의 정책을 반대하면 힌덴부르크가 사퇴하겠다고 땡깡을 부리고, 우유부단하고 인기를 잃는게 싫었던 카이저/수상/사민당 등이 결국 깨갱해서 굴복하는 식으로 국정이 굴러갔다. 흔히 일컬어지는 '독일 군부 독재' 체제는 실상 루덴도르프가 독일 제국의 실무를 담당하는 대신 힌덴부르크가 자신의 인기로 루덴도르프를 비호해 권력을 누리는 시스템이었다. 실제로 전쟁 막바지에 힌덴부르크의 지지를 상실했던 루덴도르프는 빌헬름 2세한테 바로 모가지 당했다.[22].

이를 반대로 생각하자면, 만약 사회민주당이나 빌헬름 2세가 독일 민중들에게 제대로 된 리더십이나 뚝심을 보여주었다면 군부가 모든걸 좌우하는 사태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례로 1917년 초반에 제국의회에서 연합군과 '합병이나 배상금 없는 평화'조약을 맺는다는 안건을 통과시키자, 힌덴부르크는 자신의 주특기인 사퇴를 무기로 협박해 왔다. 빌헬름 2세와 사민당 다수의 의회는 이러한 공갈에 대항하기는커녕 굴복을 택했고,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물론 베트만홀베크 수상의 사임 요구까지 들어주었다.[23] 이런 식으로 사민당은 이론적으로 무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내내 군부의 횡포를 막는 노력을 보이기는 커녕 방관하고 협조했다. 이 비판은 역시 우유부단했고 전쟁 전부터 독일의 외교 상황을 악화시킨 빌헬름 2세에게도 적용된다.

그럼에도 전쟁 중반부터 끝까지 독일의 실권을 잡고 전세를 주도한 세력이 독일 군부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볼수 있다. 카이저와 베트만홀베크가 반대했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다시 밀어붙여서 미국을 참전을 유도하고, 전쟁 중후반 동안 제기 되었던 합리적인 평화 협상들을 전부 걷어 찼던 장본인들 또한 루덴도르프를 주축으로 한 군부 세력이었다. 이들은 앞서 서술한 의회의 평화 안건 말고도 빌헬름 2세의 비교적 온건한 대러시아 강화 조건들과 1918년 초반에 벌어진 노동자들의 반전 시위들을 강압적으로 탄압했고, 그 결과는 독일 제국의 완전한 패망이었다. 따라서 배후중상설을 떠들어 댄 독일 군부야말로 독일의 패배를 불러온 가장 큰 책임자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루덴도르프힌덴부르크를 포함한 상당수의 군부 수뇌부들[24]은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기 싫어서 배후중상설을 고집했다. 그리고 군부의 주장을 수용한 극우 선동가들의 의해 배후중상설은 독일 사회 곳곳에 퍼지게 된다. 이는 패전 수습이라도 시도했던 사민당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통성에 치명타를 가했고, 공화국은 배후중상설의 여파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나치에게 끝장나게 된다.

인지부조화도 이만하면 대단하다고 볼 수준.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한 정신승리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해보면 가능성이 있다고 여긴 독일 국민들의 믿음으로 발전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잠시나마 실현되는 듯 보였으나, 연합국의 강력한 항전의지를 꺾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전쟁 초기에 독일에게 당할 대로 당한 연합군은 단순히 최전선의 독일군을 격퇴하는 것을 넘어 수년간 독일 본토를 폭격하였으며, 1945년에는 거의 모든 점령지를 탈환한 다음에 독일 본토까지 지상군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의 수뇌부가 계속 저항을 지속하려 하자 연합군은 수도를 빼앗아버렸고, 결국 히틀러의 자살 이후 열흘도 안 되어 독일이 모든 연합국에 항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비극이 끝났다.

그리고 배후중상설을 믿은 독일 국민들은 이 모든 고난을 겪으면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독일 국민들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던 터전이 대대적인 폭격이 떨어지고, 1945년 1월~5월에는 자국의 영토로 진입한 연합군에 의해 고향과 국토가 불타는 동시에 가족과 이웃들이 이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고 있는데도 정부와 군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을 눈 앞에서 직접 보고 나서야 비로소 배후중상설이 헛된 것임을 자각하였다. 참고로 이 때문에, 실제로 일부가 항복을 제안하려 했을 때, 연합군은 그냥 씹고 진격했다. 이미 때는 늦었고, 따라서 이제서야 독일인들이 현실을 자각하거나 후회해보았자 소용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참고로 양차대전으로 질린 미국은 전후 독일의 산업능력을 아예 거세해버리고 농업국가로 만들 계획도 세웠었다. 냉전이 일어난 것이 독일에게는 행운일 따름.[25][26] 항복 여론을 확실히 하고 나아가 전후에 패전국 국민들 사이에서 배후중상설같은 헛소리가 횡행하다 다시 전쟁이 벌어지는 참사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패전국 국민들에게 "질만 해서 졌다"는 현실을 똑바로 보게 해야한다는 어느 정도의 합의가 이뤄졌다. 어쩌면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얘기.

하지만 이걸로 끝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연합군이 자신들의 고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의 의식 사이에서 배후중상설은 오랜기간 동안 근절되지 않았다. 1952년에 이루어진 설문조사의 따르면 독일인들의 68%가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믿었고, 1950년대 중반까지도 독일인들의 절반 이상이 히틀러가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믿었다. 심지어 1959년에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독일인들의 90%가 유대인들을 자신들과 이질적인 인종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독일인의 인식에서 배후중상설을 완전히 일소하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20-30년이라는 긴 세월과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는 연합국의 끈질긴 교육 활동, 그리고 대규모의 사회운동이 필요했다.

5. 타국의 유사 사례[편집]



5.1. 미국[편집]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패전 이후 미군 내 강경파를 중심으로 베트남 전쟁 패전 이유를 '구정 공세 이후 미국 언론에 의해 형성된 반전 여론'에서 찾는 주장이 있었다. 이들은 반전 여론만 아니었다면 미국은 북베트남을 밀어버리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5.2. 프랑스[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에 6주만에 완패한 프랑스도 '배후 중상'을 믿었다. 즉 독일군의 승리가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반란[27] 때문이라 생각했고, 1942년 패전 책임을 묻는 재판정에 선 사람들이 모두 정치인이나 지식인이었다고. 비시 정부를 이끌었던 필리프 페탱도 그렇게 생각했다.[28]

사실 프랑스에서는 이미 한 세기 이전에 이와 비슷한 인지부조화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까지 터졌다. 자세한 건 드레퓌스 사건 참조.

5.3. 일본[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뒤의 일본의 상황이 제1차 세계 대전 뒤의 독일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몰락 작전을 펴기 전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항복하면서 결론적으로 일본 본토에는 연합군이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 실제 일본 내에서도 1차 대전 이후의 독일과 2차 대전 이후의 일본이 '패전의 실감이 없는 패전'으로 유사하다는 분석이 있다.

오히려 이러한 문제는 패전을 통해 나라가 박살났지만,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10년만에 세계적인 강국으로 빠르게 성장했던 일본의 현대사로 인해 생긴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패전을 통해서 오랫동안 전국이 피폐해졌으면 전쟁에 대한 극도의 혐오정서가 생겼을텐데 10년만에 다시 한 번 세계적인 강국으로 성장하다보니 이런 정서가 완전히 정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은 전간기 독일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1차 대전 당시에는 전선이 독일 영토 밖에서 형성되었고, 독일의 열세로 인해 전선이 뚫리기 전에 이미 전쟁이 끝났다. 독일 국경 내로 연합군이 진입하긴 했지만 이는 독일의 사실상 항복 이후의 일이었다. 이 때문에 비록 독일도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적, 경제적 피해는 입었지만, 정작 독일 본토 자체는 전쟁의 참화를 비켜가는 데에 성공했다. 게다가 당시의 공군은 아직 초창기였기 때문에 후방지역이었던 독일 본토의 폭격 피해도 주목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 당시 독일에 대한 폭격은 거의 전부 철도나 군수공장 등 군사 목표물에 대해서만 행해졌고 일반 시민들이 거주하는 도시에 폭탄이 떨어진건 런던 정도였다. 그래서 "국민 여러분! 신경쓰지 마시고 하던 일을 하세요!"를 영국 정부가 국민에게 선전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독일 제국은 비록 전쟁에서 열세였지만 어쨌든 독일인 자신들의 혁명으로 멸망했고, 곧이어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가 들어서서 실권을 쥐어 가혹한 패전조약을 맺었으나 일본의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같은 실권을 쥔 외국군의 점령기관이 없었다.

이와 달리 일본은 지상군 상륙만 없었다 뿐이지, 도쿄 대공습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등의 엄청난 공습을 통해 본토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으며, "오늘은 어디어디 도시를 폭격할 것입니다, 민간인들은 대피하세요." 라고 여유로운 폭격 사전예고까지 하면서 그걸 그대로 실행하는 미국의 압도적인 힘에 저항의 의지까지 잃어가며 처절하게 짓눌리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 열도 전체를 마치 하나의 실험장으로 삼은 것 마냥 마음대로 폭격하고 있었는데 도쿄 대공습이 대표적이다.

특히 네이팜탄이나 원자폭탄의 무자비한 위력을 직접 겪어본 일본인들의 연합군에 대한 공포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연합군에 대한 완패는 일본 내부에서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완전히 인정되어 있었고, 궁성사건과 같이 항복을 거부하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으며, 일본 정부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별다른 저항없이 실권을 내주었다. 말하자면 워낙 깔끔한 자국 상황에 전쟁의 피해를 실감하지 못해서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진짜 실력으로 진 건 아닌거 같은데?" 라는 잠꼬대가 가능했던 독일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내부의 적에게 책임을 돌리기에는 일본의 패배가 눈앞에 닥쳐왔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2차대전 이후의 일본의 우경화우익사관, 일본의 극우 미디어물, 일본의 피해자 행세, 일본의 혐한 풍조 등은 그 막장성과는 별개로 배후중상설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에 대해선 해당 문서들을 참고하자.

다만 폭격의 참화를 피해간 지역에서는 배후중상설에 기반한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다. 별다른 전략적 가치가 없어 폭격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시마네현에서는 마츠에 소요 사건 등 항복을 인정하지 못한 극우세력의 소요사태가 있었으며, 조금 다르긴 하지만 브라질의 이민자 일본인들도 제한된 정보 속에서 항복을 받아 들이지 않았으며 자기들끼리 맞다 아니다로 싸워 20명이 넘게 죽은 병맛나는 짓을 하기도 했다. 관련글 결국 독일이나 일본을 불문하고 실제 전장의 참혹함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이나 전선과 괴리된 이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잘못된 판단을 하기 마련이며, 그런 심리는 배후중상설의 배경이 되는 심리와 맞닿아 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

상술된 요소 때문에 21세기 일본의 우경화는 지리적 요소와 역사성에 기반하는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독일은 다른 들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대륙국이기에 생존을 위해 주변국과의 관계를 개선해야할 필요가 있었지만, 일본은 국경선을 맞댄 나라가 없는 섬나라인데다 든든한 후원자인 미국까지 있었고, 전후 유럽과 달리 아시아 사회는 대체로 발전을 못하고 혼란의 시기를 겪었던 탓에 독일과는 다르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으며 식민지와 관련된 잔혹행위약탈 등의 문제는 독일과 미국을 포함한 열강 전부가 가지는 문제라서 유대인 문제로 독일을 압박한 것처럼 압박하는 것도 곤란했다는 것이 해당 의견의 주장이다. 또한 독일인은 선거를 통해 자기 손으로 나치를 집권시킨 것이라 어떠한 심리적 도피의 여지도 없었으나, 일본은 5.15 사건 등 군부의 폭주로 문민정부가 붕괴하며 우경화한 것이라 일반인 입장에서는 자기변호를 할 여지가 있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꼽힌다.

당장에 지금까지도 일본 제국의 전범들과 그에 편승한 후계 세력들이 축출되지 않고 아직도 일본 정치, 사회의 주류세력으로 자리잡은 꼴을 봐도 그렇다. 거기다 유럽에서는 그나마 68혁명 이후 대부분의 전범관련 극우파들이 힘을 잃었으나 일본의 경우 60-70년대를 휩슨 전공투나 반전운동, 대학운동들이 싸그리 국가에 진압되거나, 삽질 끝에 자멸하고 세력이 약해지면서 정치적 물갈이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도 일본의 우경화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며 일본의 전범 처벌 실패와 어두운 일본 제국의 과거사 청산 실패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꼬집는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이러한 풍조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가 있다. 이른바 혼네, 다테마에라 하는 문화로서 일본인들은 자기 주장을 하는 걸 극도로 꺼린다. 또한 일본은 막부라는 고유의 폭력적 군정체제를 천년동안 행해왔고, 군정체제 지배층 말단이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현재까지 일본 정치의 주도권을 쥐어왔다.[29] 그래서 일본 정치는 전근대적 위계질서가 근대적 외피를 쓴 채 정부와 지도층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주의로 자리잡혔으며, 이게 우생학적 요소와 전체주의[30]와 어우러져 근대 일본의 국가체제를 이루었다.[31] 패전으로 근대 일본의 국가체제는 해체되었지만 국가체제를 이루었던 질서와 사상은 완전히 해체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5.4. 러시아[편집]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 9월 우크라이나 대공세의 패전은 러시아 국내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 탓이라는 이른바 '배신자' 이론을 주장하는 것이 비슷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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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과학에서는 지각(perception, 知覺) 과정에서의 '귀인의 오류'로 자존적 편견(self-serving bias)이라고 한다.[2] 태반이 제대군인이었고, 이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내내 벌어진 우익 준동의 주역일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주요 지지세력이 된다.[3] 1919년 1월 선거는 남녀 보통선거였다. 제2제국에서 선거권의 제한으로 노동계층의 정치참여가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전혀 근거가 없다. 영국은 이 당시 남녀 차별 선거권 (남성 21세, 여성은 30세 이상), 프랑스는 1945년에야 여성투표권을 인정할 만큼 당시 독일의 선거는 선진적이었다.[4] 포젠, 서프로이센, 상부 슐레지엔, 단치히. 그러나 폴란드 입장에서도 분명히 할 말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참고.[5] 상부 슐레지엔의 일부 지역이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넘어갔다.[6]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북부가 덴마크로 돌아갔다.[7] 프랑스는 독일이 못 갚을 만큼 지나친 배상금을 요구했고, 이에 대해 독일 뿐만 아니라 영국미국 일각에서도 좀 지나치치 않은가 하는 의견이 나왔었다.[8]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이에 비판적이고 전쟁의 발발에 대한 책임을 한쪽에만 물을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어쨌든 당시 협상국의 주장이 그러했다.[9] 당시 독일 공산당은 찬전/반전 갈등으로 사회민주당(SPD)에서 갈라져 나왔고 소련 코민테른의 지시와 무관한 독자노선이었다.[10] 물론 극우들에게 명분을 갖다 바쳐주는데다가 기껏 평화적으로 얻은 사회개혁 기회를 통째로 날려버리려 하는 트롤러 급진파들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먼저 무력을 사용한 측과 훗날 나치당과 함께 사민당을 흔들어 버린측이 바로 독일 공산당을 주축으로 한 급진사회주의 세력이었다.[11] 전세계 각지의 식민지를 다 끌어모으면 대충 미국과 비슷한 수치가 나온다. 그러나 당시 식민지같은 전근대사회의 GDP는 근대화된 국가의 GDP와 단순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산업화 이전 사회는 대부분의 GDP가 단순한 1차 생산물로 이루어져 있고 그마저도 기본적인 의식주를 위해서 대부분 자체 소모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곡물이나 광물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GDP는 전시 생산에 투입될 수 있는 종류의 경제력이 아니다. 그래도 많은 인도인들이 동원된 걸 보면 인력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12] 이미 미국은 1872년에 영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경제력을 달성했다. 다만, 이 당시에는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으로 인해 미국의 본격적인 국력이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긴 했다. 특히 국력의 척도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군대의 경우 고립주의 + 본토주변의 적수가 없는 미국의 특성상 상비군이 매우 적어 참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중소국가 수준이었던 것도 사실이였다. 이 때문에 세계는 미국을 단순 열강들 중 하나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13] 이 때를 계기로 미국의 경제력은 정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전쟁 이전부터 이미 미국은 전 유럽과 대등한 수준의 공업력을 보유하고는 있었지만, 세계대전으로 인해 무기수출과 기타 관련된 군수산업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미국은 넘사벽급의 공업능력에 더불어 수출을 통한 강한 경제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14] 무기수출의 경우 수요는 대폭 늘었겠으나, 당장 미군을 무장시킬 무기 생산도 전혀 충족시키지 못해 프랑스나 영국한테서 무기를 받아쓰는 실정이었다. 이것도 그냥 부족분 받아쓰는게 아니라 사실상 무기 물량을 의존하는 수준에 가까웠다. 프랑스한테서 받은것만 해도 전차 300대 이상, 대포 3000문 이상, 항공기 1000대 이상인데, 이정도면 왠만한 유럽 중견국들의 보유량을 넘어선 수준이다. 물론 미국 또한 영국처럼 프랑스한테 석탄과 철을 지원해줬으니 상호의존 격이긴 하겠지만. 이 때문에 미국은 영국식 인치 파운드를 쓰는 국가임에도 해군은 영국처럼 인치를 사용하지만 육군은 당시 프랑스 규격의 mm를 사용하며, 프랑스 군복과 무기를 착용한 제369보병연대 할렘 헬파이터같은 부대들도 존재한다.[15] 다만 인도는 간디가 영국의 자치권 확대를 조건으로 병력지원에 동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영국이 얻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16] 독일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제국이 형성되고 나서도 한동안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 아래 식민지 확보에 나서지 않고 있다가, 빌헬름 2세 들어 본격적으로 식민지 확보에 나섰기 때문에, 이미 알짜배기 식민지를 영, 프에게 죄다 뺏긴 채 생산성이 떨어지는 식민지 몇개 정도만 건졌을 뿐이었다. 알짜배기를 가진 영국, 프랑스조차 식민지가 도움이 되지 못했는데 독일은 한마디로 식민지가 없는 게 도와주는 수준이었다.[17] 2차 산업혁명의 주도국이라 인식되는 독일, 미국 모두 식민지가 별로 없는 수준이라는걸 감안했을때, 오히려 내실있는 성장을 한 것으로 보이는 독일이 식민지가 없다고 해서 다양한 자원 흡수 이외엔 크게 불리한 점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즉, 세계로 뻗어나가 식민지를 확보하겠다고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은 따지고 보면 독일에게 손해만 나는 선택이었던 것.[18] 일찍이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확보의 모순을 깨닫고는 빌헬름 2세에게 식민지 확보보다는 본토 내부의 산업과 경제력 육성에 주목하라고 주장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선발주자들과 같이 광대한 식민지를 확보하고 싶었던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를 해임하고는 3B 정책을 시작으로 식민지 사냥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가치가 있는 땅들은 전부 선발 열강들이 차지한 상황에서 독일은 쭉정이 정도밖에 얻을 수 없었으며, 오히려 전간기에 영, 프가 식민지 관리하느라 본토 역량을 키우지 못하는 동안 독일이 다시 한 번 발달된 공업을 바탕으로 전쟁수행능력을 확보하게 되면서 비스마르크의 말이 사실이었음이 증명되었다.[19] 참고로 구트만은 후일 나치 집권 후 게슈타포에 체포되는데 다행히도 히틀러가 옛 인연 때문인지 곧장 풀어줬고 나중에 구트만은 미국으로 이주해 2차대전이 끝나고도 17년 정도 더 살았다.[20] 정작 맥마흔 선언을 통해 똑같이 아랍 국가 건설을 약속받은 아랍인을 상대로는 처음에는 유대인과 다를 바 없이 여기다가 영국을 상대한다는 미명하여 립서비스를 해주곤 해서 일관성이 없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랍인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은 안 좋았다고 하는데 정작 현 아랍인 상당수는 반유대주의 기치에 열광해서 히틀러를 좋게 본다.[21] Tipton, Frank B. A History of Modern German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3.[22] Mommsen, Hans Eugene. The Rise and Fall of Weimar Democracy. Translated by Elborg Eugene. Forster and Larry Eugene. Jones.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98[23] de Gaulle, Charles (2002). The enemy's house divided.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24]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고 전쟁 기간 동안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에 부정적이었거나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군부 인사들은 패전 책임에 대해서 쉬쉬했다.[25] 일본에 대한 민간인 폭격도 어느정도는 이 논리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일본쪽은 아예 일본어를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을 정도까지 깡그리 밀어버리려 들었다.[26] 사실 독일 수뇌부는 이미 냉전이 올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고 여기에 희망을 걸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냉전을 너무 기대한 나머지 알아서 서방연합군이 자신들의 편에 서줄 것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서방연합군이 바보도 아니고 김칫국만 들이마시는 독일을 냅둘리는 없었고 결국 히틀러가 자살한 후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야 부랴부랴 협상하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27] 실제로 프랑스 공산당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고 정부의 국방비 증액을 방해하거나 전시에도 파업, 사보타주 등의 이적 행위를 저지르기는 했다. 이들은 독소전쟁이 터지고나선 반독으로 전환해 적극적으로 레지스탕스 활동을 이끌었지만 이미 앳저녁에 프랑스는 항복한 뒤인지라..[28] 애시당초 이 역시 배후중상설과 마찬가지로 군부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쇼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페탱은 독일에 점령된 것을 기회로 반 왕당파, 진보 지식인, 사회주의자 등 자신이 생각하기에 눈에 거슬리는 자들을 전부 프랑스에서 몰아낼 생각으로 이런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에게 누명을 씌운 것에 불과했다.[29] 지금의 자민당 주요 계파와 그 수장급 인물들의 지역기반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의 출신지인 구 사쓰마 번, 조슈 번과 일치한다.[30] "이치닌 마에". 정부와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일을 '반사회적'이고 '반국가적'이라는 논리로 탄압하고 국민들이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구성원의 임무'를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31]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를 억압의 이양이란 말로 설명한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