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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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光炫[1]
1625년(인조 3) 4월 6일 ~ 1697년(숙종 23)[2]

1. 개요
2. 행적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선 왕조 궁중 어의(御醫)이자 한의사로, 조선 당대의 명의(名醫)로 평가받았던 인물. 본관은 임천(林川)[3], 자(字)는 미숙(微叔).


2. 행적[편집]


1625년 4월 6일 아버지 백철명(白哲明, 1604. 6. 20 ~ 1665. 7. 28)[4]과 어머니 조씨(曺氏, 1607. 12. 4 ~ 1660. 8. 21)[5] 사이의 9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조부는 백기종(白起宗, 1480. 8. 22 ~ 1561. 6. 25), 증조부는 백서룡(白瑞龍, 1524. 10. 1 ~ 1610. 7. 24), 조부는 백인호(白仁豪, 1567. 10. 1 ~ 1640. 3. 30)[6]이다.[7] 위로는 형 백광찬(白光璨, 1623. 6. 4 ~ 1697. 10. 18)[8], 아래로는 남동생 백광순(白光珣, 1627. 4. 9 ~ 1680. 12. 4), 백광환(白光瓛, 요절), 백광원(白光瑗, 1632. 5. 11 ~ 1711. 10. 1), 백광진(白光璡, 요절), 백광선(白光瑄, 요절), 백광린(白光璘, 1647. 9. 19 ~ 1721. 8. 20)[9], 백광근(白光瑾, 요절)[10][11] 등 7명, 그 밖에 누이 3명이 있었다.

본래 비천한 신분으로 말(馬) 목장에서 말을 치료하고 그 건강에 신경 쓰는, 오늘날의 수의사마의(馬醫)였다. 독학으로 침술(鍼術)을 익혀 말을 돌보다 종기를 앓는 사람에게 침을 시술하여 치료에 성공하면서, 사람의 건강을 챙기고 치료하는 의원으로 신분이 격상된다.[12]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 절뚝거리는 병자가 있었는데, 백광현을 따라다니며 치료를 부탁하니 백광현이 치료해 주었다. 얼마 후 절뚝거리던 그자가 보통사람의 걸음으로 시장에 들어오니, 시장 사람들이 하나같이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이름이 났다.[13] 이후 뛰어난 의술을 인정받아 궁중 내의원 의관(醫官)에 올랐고 치종교수(治腫敎授)를 겸했다.

1670년 조선 18대 임금인 현종이 목에 종기를 앓자 이를 시료하여 완치시킨다. 이와 더불어 효종의 비(妃)인 인선왕후의 발진과 염증을 치료한 공로를 인정받아 마침내 임금의 주치의 격인 궁중 어의(御醫)에 오르게 되었다.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한 후에도 내의원에서 종사하다 1683년 강령현감(康翎縣監)에 임명되었고 이어 포천현감(抱川縣監)을 지냈다. 1691년에는 지중추부사에 올랐다가 이듬해에는 숭록대부에까지 올랐다.

종기치료의 달인이기에 외과수술을 통해 현종의 종기를 치료했으며, 그로 인해 위에 언급된 현감 벼슬까지 제수. 그런데 의원이 내의원 관직이 아닌 실직을 받는 것은 대단한 일로 이렇게 출세한 이후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치료해주어 인망이 높았다. 의과 합격자 명단인 의과 방목에 이름이 없는 걸 볼 때 의술이 소문나 내의원으로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성정이 순박하여 빈부귀천 및 신분에 상관없이 병자라면 누구라도 병을 돌보았다고 전해지며 왕과 왕족 그리고 양반을 비롯하여 평민과 천민들까지 모두 치료한 경력에 의해 세간에서 신의(神醫)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사후 그의 아들 백흥령과 제자 박순이 대를 이어 의술을 펼쳤으며 그들도 뛰어난 의술을 펼쳐 사람들을 도왔으나 백흥령은 신의로 불린 부친을 앞서지 못했고 제자 박순[14] 역시 종기는 잘 고쳤으나 스승에 미치지 못했다.[15]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왔으며 기다리는 것이 지겹다고 중간에 돌아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 #

맹꽁이 서당에 나온 일화 중 하나에 따르면 한 마을 유지가 자신의 늙은 아버지의 등에 난 종기를 고쳐달라 청하였는데 백광현은 이를 보자마자 얼굴이 어두워졌다.
걱정이 든 유지가 물어보니 백광현은 "이틀 전이었다면 고치는 게 가능했는데...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소.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시니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군요."라며 말하였다.

결국 백광현의 말대로 그 노인은 그날 밤 등창의 악화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2012년에 장웅진 작가가 마의 백광현이라는 제목으로 2권의 소설을 발표했는데,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그 밖에 마의 - 천민의 신분에서 어의가 된 백광현 이야기라는 초등학생동화도 있다.

이미 1978년 11월 12일부터 19일까지 KBS-TV <일요사극 맥> '생명의 손' 편에서 다뤄졌고, 1986년 5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같은 제목으로 또 드라마화되어 KBS1을 통해 방영되었는데, 극본은 오재호, 연출은 주일청 PD가 맡았으며 배우 김순철이 백광현 역을 맡았다. 2012년 MBC에서 월화 드라마 마의로 영상화시켰다. 주인공 백광현 역은 배우 조승우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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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천백씨족보 152쪽에는 白光玹으로 등재되어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같은 시기라도 기사에 따라 白光炫, 白光玹, 白光鉉 등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백광현 사후에는 白光賢, 白光顯으로 기재한 기사도 종종 있었다. 출처: 방성혜, 《조선 최고의 외과의사 백광현뎐 1》, 시대의창, 2012, 20쪽.[2] 출처: 방성혜, 《조선 최고의 외과의사 백광현뎐 1》, 시대의창, 2012, 12쪽. 하지만 위키백과나 마의 공식 홈페이지 이외의 다른 백과사전에서는 생몰년도가 불명인 경우도 있다.[3] 31세 광(光) 항렬.[4]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를 역임했다.[5] 조덕건(曺德建)의 딸이다.[6]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용양위부사과(龍驤尉副司果, 종6품)를 역임했다.[7] 출처: 《임천백씨족보》 백광순편.[8] 이후 백시창(白時昌)으로 개명했다.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 종6품), 내침의(內鍼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를 역임했다.[9] 내침의(內鍼醫)를 역임했다. 출처: 방성혜, 《조선 최고의 외과의사 백광현뎐 1》, 시대의창, 2012, 12쪽.[10] 방성혜, 《조선 최고의 외과의사 백광현뎐 1》, 시대의창, 2012, 27쪽.[11] 방성혜, 《조선 최고의 외과의사 백광현뎐 2》, 시대의창, 2012, 263쪽.[12] 즉 침이나 칼로 종기를 짜고 째는 외과적 시술을 했다는 얘기다. 당대 사람들도 외과 수술을 모르고 못한 것은 아니지만, 마취약이나 위생적이지 못한 환경 때문에 잘 발달되진 못했다.[13] 『귀록집(歸鹿集)』[14] 朴洵. 생몰년 미상 백광현의 제자. 백광현의 의술을 이어받아 종기를 잘 치료하는 의원이 된다. 출처: 방성혜, 《조선 최고의 외과의사 백광현뎐 1》, 시대의창, 2012, 13쪽.[15] 윤승운, 《맹꽁이 서당 14》, 웅진주니어, 2006, 133쪽. 『완암집(浣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