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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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삼
Baek Naksam


출생
1931년 11월 5일
경상남도 울산군 두동면 삼정리
(現 울산광역시 울주군)
사망
2023년 4월 28일 (향년 91세)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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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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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두동국민학교 (전학)
성지국민학교 (졸업)
공생중학교
동아초급대학 (졸업)
중앙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육학 / 학사[1])
약력
신신예식장 대표
신신장학회장
가족
배우자 최필순[2]
장남 백남문,[3] 2녀 / 사위 박노자
서훈
국민포장 1988년
국민훈장 석류장 2019년

1. 개요
2. 생애
3. 방송 출연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사진사이자 신신예식장의 대표. 자신이 운영하는 예식장에서 금전적으로 형편이 안 좋은 커플들을 위해 무려 55년동안[4] 무료로 결혼식을 치러주었다.


2. 생애[편집]


일제강점기인 1931년 두동면 삼정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의 가족은 한 방에 부모님을 포함해 13명이 지낼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두동국민학교 재학 중이던 1945년 광복을 맞았다. 그해 10월 백낙삼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살다간 희망이 없다며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의 아버지는 부산 가야동에 조그마한 집을 구했다.

다음해 1월 집에서 3km 떨어진 성지국민학교에 들어갔다. 이때, 백낙삼이 아버지의 뻥튀기 장사를 도와서, 친구들은 그를 "박상[5]쟁이"라고 불렀다.

한글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상태에서 공생중학교[6]를 거쳐 중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4년제 초급대학인 동아초급대학에 입학했다. 6.25 전쟁 동안 군복무를 하였다. 군복무를 마친후 중앙대로 진학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형편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졸업을 단 1년 남겨두고 대학을 중퇴하게 되면서 교사의 꿈을 포기했다.[7] 이러한 그에게 결혼은 그림의 떡이었다. 주변의 성화에 맞선을 나간 그는 지금의 아내에게 '자신과 결혼하면 고생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 뒤 결혼식을 미루고 1년 넘게 돈을 벌러 경상남도 일대를 돌아다녔다.

20대 때부터 사진사로 일하며 닥치는 대로 돈을 번 그는 1967년 경남 마산시(現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에 3층 건물을 사서 신신예식장을 열어 사망시까지 평생동안 운영했다. 이곳에서 자신들처럼 결혼식을 제때 올리지 못하는 신혼부부를 돕고자 사진촬영비만 받고 무료로 결혼식을 올려주었다. 그러가다, 2019년 국민훈장을 수훈받은 후에는 사진비마저도 받지 않으며 무료로 예식을 치러줬다.

1만 4천여쌍의 결혼을 올리며 1만번 이상은 백 대표가 주례를 섰다고 한다.[8] 또한, 1988년 국민포장 수훈 후 받은 상금 50만원과 사비를 털어 신신장학회을 조직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지급하였으나, 재정 문제로 1992년 해체하였다.

2015년, 중앙대학교에서 백낙삼의 사회 공헌을 인정해 62년만에 졸업장을 수여하였다.

그러던 2022년 4월 옥상에 심어둔 채소를 보러 가던 도중에 뇌출혈로 쓰러졌고, 의식을 되찾긴 했으나 팔, 다리가 마비되어 일어날 수가 없어서 재활치료와 투병치료를 하였으나 결국 2023년 4월 28일에 향년 9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3. 방송 출연[편집]




무료로 14000쌍 결혼식을 올려주었다?! 신신예식장 대표 백낙삼 자기님! | 2021.10.16. 유 퀴즈 온 더 튜브


4. 여담[편집]


  • 2012년 4월, 인간극장에 '우리는 매일 결혼한다'라는 제목으로 부부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그 후 10년이 지난 2022년 3월, '우리는 지금도 결혼한다'는 제목으로 여전히 예식장을 운영하고 있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안타깝게도 백낙삼 대표는 후속작 방영 거의 정확히 한달 후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 2014년 영화 국제시장에 신신예식장이 배경으로 사용되었고, 사진사역으로 짧게 출연하면서 20대 시절 꿈인 영화배우를 이루기도 했다.

  • 국제시장 출연 후 그의 삶을 이야기하는 인터뷰를 가졌다.#

  • 생전 2021년에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별세 소식이 나온 후 이 프로그램의 공식 SNS에서 그의 별세를 알린 후 애도했다.

  • 저 시절 당시에는 대학교는 커녕 국민학교도 못 나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저 당시에 중앙대학교를 들어갈 정도인거면 상당한 인재였던거다. 본인은 단란한 수준이라 했지만 그의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기 전에는 꽤 부유했던 집안으로 추정된다.

  • 2022년에 뇌출혈로 쓰러지기 이전에도 생사에 고비가 왔던 적이 있는데, 2005년에 대장암 3기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어느 날 손님이 남편이 대장암 말기라 죽기 전에 결혼하고 싶다는 식으로 대화를 했었는데 본인의 몸 상태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그 자리에서 진료를 권유받았다고 한다. 수술 당시 운이 정말 좋았는데, 병원에 전화를 한 다음날 바로 입원실이 나왔다고 하며 수술도 곧바로 하게 됐다고 한다. 그것도 서울대학교병원의 교수 특진[9]으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고. 병원 입원이나 수술 모두 운이 나쁘면 몇 달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운이 좋은 케이스.

  • 사위가 대한민국의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논객들 중 한 명인 역사학자 박노자다. 백낙삼의 딸이 바로 바이올리니스트인 백명정인데, 러시아 유학 도중에 박노자를 만났고 이후에 한국으로 귀국하여 아버지가 운영하는 신신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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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졸업을 1년 남기고 중퇴하였으나, 평생동안 신신예식장을 운영하며 생계가 어려운 커플들의 결혼식을 무료로 치러주며 사회 공헌에 이바지했다는 점을 인정받아, 2015년 졸업장을 수여받았다.[2] 1941년생. 생전에 오 실장이라는 별칭으로 주로 불렀다고 한다. 이유는 다섯 개의 방의 실장을 담당한다고 붙인 것.[3] 아버지에 뒤를 이어서 신신예식장에서 무료결혼식을 치러주고 있다.[4] 그의 살아생전 햇수만 센 것이다. 사후에도 문을 닫지 않고 아들이 이어받아 운영 중이다.[5] 뻔튀기의 경상도 사투리[6]동아중학교[7] 사업 실패로 부모님이 재학 중이던 그를 부산으로 불러들였고 그렇게 일을 하며 살던 도중 어느 날 나머지 가족들이 본인이 잠을 자던 사이에 쪽지 한 장만 남기고 집을 떠났다고 한다.[8] 자신이 운영하는 신신예식장이 아닌 다른 예식장이나 호텔에서 하는 결혼식에도 가끔 초청이 되어 주례를 봐준다고 한다.[9] 유퀴즈 온더 블럭에서 이를 언급했는데 담당 의사에 대한 설명과 ㅂㅈㄱ이란 이니셜 등을 볼 때 정황상 대장암 치료의 권위자인 박재갑 교수일 가능성이 크다.[10] 당연히도 박노자-백명정 부부의 결혼식 주례를 이들의 장인이자 아버지인 백낙삼이 서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