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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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백남규.jpg
성명
백남규 (白南奎)

남수(南壽)

운암(雲庵)
생몰
1884년 8월 22일 ~ 1970년 2월 19일
출생지
충청도 충주목
(현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월상리)
본관
수원 백씨[1]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편집]


백남규는 1884년 8월 22일[2] 충청도 충주목(현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월상리)에서 빈농 백낙성(白樂成)과 남양 홍씨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7살 때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입교하여 무술을 익히고 졸업 후 안동진위대 부위로 근무했다. 그러던 1907년 8월 1일 정미 7조약 체결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자, 그는 경북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8백 명을 이끌고 강원도 횡성의 봉복사(鳳復寺)에서 이강년 의병대와 합세하여 우선봉을 맡았다.

1907년 8월 13일, 이강년이 고종의 밀조를 받고 제천에서 40여 의진의 총대장에 오를 때, 백남규는 선봉장(都先鋒將)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9월 10일 갈평 전투에서 남산에 배치돼 40여 명의 일본군을 포위하고 공격해 일본 병사 수명을 전사시키고 많은 물자를 노획했다. 또한 10월 6일 덕포의 독산에서 서쪽 고지에 배치된 20여 명의 영월 수비대와 교전해 주변 건물에 불을 지르는 등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탄환이 떨어지자 물러났다.

이 무렵 선유위원(宣諭委員) 권태준(權泰俊)을 체포한 전군장 윤기영으로부터 선유사 홍유석이 일본군 20명과 함께 싸리재를 넘어 주천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가 오자, 백남규는 좌선봉장 하한서, 우선봉장 권용일과 함께 이들을 기습하기로 하고 권태준의 목을 벤 뒤 9월 16일 추치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을 가해 패퇴시켰다. 이후 10월 거석리(巨石里)로 들어가 험준한 요새지를 찾아 주둔하고 있었는데, 부친이 적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이강년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해 허락을 얻어냈다. 그의 직임은 허섭(許燮)에게 맡겨졌지만 허섭은 나중에 적에게 패하고 항복했다. 이에 백남규는 돌아와 우선봉의 직임을 맡았다.

백남규는 1908년 3월 12일 인제 백담사에서 일본군과 교전했고, 4월엔 안동 서벽에서 교전했으며, 4월 6일엔 봉화 내성, 4월 8일엔 안동 재산에서 적군과 교전했다. 그해 5월에 이강년의 지시를 받고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안동 서벽에 집결했는데, 이때 안동 서벽에 모인 의병은 4천여 명에 달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영천수비대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의 수비대와 경찰을 토벌대로 파견하여 의병과 접전을 치렀다. 백남규 등은 서벽에서 일본군과 헌병보조원, 일진회원 등 수십명을 사로잡고 20여 명을 사살했다. 일본군은 봉화 내성으로 후퇴했고, 이어 영천에서 수십 명을 파견했지만 의병과의 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하자 후퇴했다.

5월 7일 강원, 경북 의병들이 안동 재산에 이르자, 일본군은 토벌대를 파견했다. 이강년은 남산에 올라가 총독장 이만원과 선봉장 권용일을 동구에, 중군한 하한서는 왼쪽에, 성대장 성익현은 오른쪽에 포진하고 도선봉장 백남규에겐 병사를 나눠 양쪽에 매복했다가 적을 유인, 포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일본군은 의병을 속이기 위해 의병 복장으로 변장하고 가짜 의병 깃발을 든채 계곡으로 접근했다. 이때 백남규의 의병부대가 일제히 사격을 퍼붓자, 많은 이들이 죽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운강창의일록'에 따르면, 이날 일본군 절반이 죽었고 아군은 10명 전사, 부상자 8명에 그쳤다고 한다.

이후 백남규는 1908년 5월 23일 제천 오미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해 6월 4일 청북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이강년이 적의 기습을 받고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백남규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서벽, 내성과 충남 아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맞섰지만 12월 중순 죽산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8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특사로 석방된 뒤 1917년 2월 중국으로 망명하려 했지만 음성 개와실에서 재차 체포되어 다시 15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던 백남규는 8.15 광복 후 1945년 10월 우국노인회 회장 및 구간회 고문을 역임했고 1970년 2월 1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충주시에서는 그를 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백남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 28세손 남(南) 항렬[2] 9월 2일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