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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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주공화당 로고만.png 파일:민주공화당 글씨만.png 총재 및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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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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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우회 의장
민주정의당 총재 및 대표
한국국민당 총재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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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민주공화당 의장
백남억
白南檍 | Baek Nam-eok


출생
1914년 11월 11일
경상북도 김천군 금릉면 삼락동
사망
2001년 1월 15일 (향년 86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학력
보성전문학교 (법과 / 졸업)
규슈제국대학 (법학 / 학사)
미시간대학교 (법학 / 석사)
영남대학교 (법학 / 박사)
경력
대구대학 법학과 교수
민주공화당 의장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
한국자동차보험 회장

의원 선수
5 [1]
의원 대수
5(참), 6, 7, 8, 9
최종 당적

[[민주공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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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저서
5. 기타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수원(水原)[2]. 종교불교이다.

국회의원에 다섯 번 당선되었으며, 민주공화당 의장을 지냈다. 송산 박준규국회의장에게는 자형(姉兄)이 된다.[3]


2. 생애[편집]


1914년 11월 11일 경상북도 김천군 금릉면(현 김천시) 삼락동[4]에서 태어났다. 봉계공립보통학교(현 봉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5학년 때 중퇴하고[5] 상경,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편입한 뒤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1939년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미국 미시간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규슈제국대학 졸업 후 귀국한 뒤 1939년부터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관리로 근무했다. 1940년 평양철도사무소 평양열차구 서기로 근무했으며, 1941년에는 부산지방철도국 부산철도사무소 부산열차구에서 서기로 근무했다.

8.15 광복 후에는 교육계에 투신하여 1946년 대구대학[6] 법학과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14년 동안 법학 교수로 활동하며 형법 과목을 담당하였고, 대구대학 대학원장도 겸직하였다. 그리고 동국대학교 대학원건국대학교 대학원에도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4.19 혁명 이후 치러진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참의원(경상북도)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당에서 구파에 속하였으며, 같은 해 연말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같은 신민당 소속이었던 박준규, 김재순, 민관식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금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내리 당선되었다. 6대 국회에서는 초대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이 시기 민주공화당 경상북도 제6지구당 위원장 및 중앙상임위원, 정책위원회 의장, 당무위원 등을 지냈다. 그리고 경북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으로서 사회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성곤, 김진만, 길재호 등과 반 김종필 4인 체제를 형성하였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연합하여 1969년 3선 개헌을 주도하였다. 1971년에는 민주공화당 의장이 되었다.

1971년 6월 야당인 신민당과 협조하여 오치성 내무부장관의 해임건의안 가결을 주도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10.2 항명 파동 참조. 항명파동으로 박정희의 분노를 사면서 자연스레 4인체제는 무너졌고, 백남억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지만 쫓겨나지는 않았다. 그 뒤 민주공화당 총재상임고문을 지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금릉군-상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여 무소속 김윤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박정수 후보와 정휘동 후보에 밀려 낙선하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88년부터 1996년까지 동부화재해상보험의 전신인 한국자동차보험 회장을, 1991년부터 5년간 재단법인 성균관대학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97년 허경영이 세운 공화당의 상임고문으로 재직한 사실이 있다. 그러나 허경영을 미친놈이라고 부른 장국진 역시 해당 정당에서 상임고문 직을 맡은 것을 보면 실제로 허경영을 지지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허경영의 저서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에 허경영이 무단으로 백남억의 사인을 삽입하자 백남억은 그 사인을 빼 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다.

2001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자녀로는 백종현(白種玹) 국민대학교 경상대학장 등 3남 1녀가 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1 (참의원)


214.300 (62.20%)
당선 (1위)
초선 [7]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6[8]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32,527 (47.09%)
재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38,244 (50.62%)
3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8[9]
40,173 (53.97%)
4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5[10]
41,943 (25.49%)
5선[11]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35,200 (19.48%)
낙선 (3위)



4. 저서[편집]


저서로는 '단독범의 이론', '형법총론'이 있다.


5. 기타[편집]


허경영은 자신의 저서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의 추천사를 백남억이 써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당 추천사는 주술 관계가 맞지 않는 등 백남억이 썼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부실하며 백남억이 후에 본인의 사인을 빼 달라고 요청하는 등 사인만 받고 추천사는 허경영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인다.


6. 관련 문서[편집]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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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5대 국회의원은 임기 도중 5.16 군사반란이 발생하여 자격이 정지되었었다.[2] 28세 남(南) 항렬.[3] 백남억은 박준규의 큰누나 박갑규(朴甲圭, 1922. 5. 25 ~ 1990. 9. 25)와 결혼했다.출처: 《순천박씨족보》 박갑규편.[4] #[5] 경북고 동문회에서는 15회 졸업생으로 대우하고 있다.[6] 그 뒤 청구대학과 통합되어 영남대학교가 되었다.[7] 1961년 5.16 쿠데타로 자격정지[8] 김천군, 금릉군[9] 김천시, 금릉군[10] 김천시, 금릉군, 상주군[11] 무소속 김윤하 후보와 동반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