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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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및 한국계 외국인 괴테 메달 수상자
1995년
1998년
2007년
윤이상(독일)
백남준(미국)
김민기
* 괄호는 수상 당시의 국적


백남준
白南準 | Paik Nam-june


파일:백남준 사진.png

출생
1932년 7월 20일
경기도 경성부 서린정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1]
사망
2006년 1월 29일 (향년 73세)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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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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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수원 백씨 (水原 白氏)
학력
경성수송국민학교 (졸업)
경성중학교 (졸업 / 47회)[2]
홍콩 로이든 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미술사학 / 학사)[3]
프라이부르크 국립 음악 대학교 (수료)
뮌헨 대학교 (철학 / 석사)
뮌헨 대학교 (음악사학 / 박사)
프랫 대학교 (미술학 / 명예박사)
가족
아버지 백낙승, 어머니 조종희, 3남 2녀 중 막내
배우자 구보타 시게코(1937~2015)[4]
외조카손자 김진우
직업
예술가 (비디오 아티스트)
종교
불교

파일:백남준 02.png
TV 안경을 쓰고 포즈를 취하는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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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구보타 시게코와 함께
1. 개요
2. 일생
2.1. 유소년기
2.2. 행위예술가로
2.3. 결혼
2.4. 비디오 아트
3. 평가
4. 국내 소장 미술관
5. 해외 소장 미술관
6. 어록
7.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출신의 미국 국적 예술가.

백남준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파격적인 예술적 세계관으로 매우 유명하며, 지금은 볼프 포스텔과 더불어 비디오 아트의 세계를 개척한 누구도 부정 못할 세계적인 예술가이지만, 비디오 아트 이전 시절에는 전위예술 퍼포먼스 아티스트였다. 전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으며, 플렉서스 멤버로 퍼포먼스 예술에서도 한 축을 담당했다.[5]


2. 일생[편집]



2.1. 유소년기[편집]


백남준은 조선 직물업계의 큰 손이자 친일파백낙승의 아들로 태어났고, 덕분에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집에는 피아노나 전축은 물론 당시에 서울에 딱 2대 밖에 없었던 캐딜락도 있었고, 광복 전에 유치원(애국유치원)에 다녔으며 한국 전쟁의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파인애플을 먹을 정도의 부잣집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돈은 물 쓰듯 쓰는 거다'라고 했다고 한다.[6] 그의 조부 백윤수 또한 청나라 비단을 독점 판매했던 거부로, 종로5가와 동대문시장 일대의 포목상 절반이 그의 것이었고, 국상 때 만조백관의 상복과 제복을 일체 도맡았을 정도로 섬유업계의 막강한 실력자였다. 후에 그는 직물, 대부업, 제약회사 등을 세웠고, 재산은 한성은행 자본금의 3배에 달했다.

백남준은 당시 상류층만 다니던 수송국민학교경기공립중학교[7]를 다녔는데, 광복 전 그 시절에 학교에는 수영장과 영사기가 있어서, 당시 학부모였던 대한극장 사장이 학교에서 직접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경기중학교 음악교사로, 후에 이대 음대학장을 지냈던 신재덕에게 피아노를,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가 음악을 배우고자 한 계기는 어린 시절 접한 아놀드 쇤베르크다. 부유했던 덕분에 당시로서는 최신 전위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때부터 그는 일반적인 클래식 음악보다는 음악 자체의 틀을 깨는 새로운 음악에 관심이 있었다. 훗날 음악을 전공하면서도 행위음악을 작곡하고, 퍼포먼스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8]

194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으로 무기구입을 위해 홍콩으로 갔다는 설이 있는 부친 백낙승[9]의 통역으로 따라가 홍콩의 로이덴 스쿨로 전학한다. 백남준은 이때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게 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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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행위예술가로[편집]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여권[11]일본 비자가 있었던 백남준은 도쿄로 넘어가서 도쿄대학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다.[12][13][14] 그리고 대학원을 당시 현대음악의 메카 독일 뮌헨 대학교로 진학하여 철학 석사와 음악학 석사를 취득했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현대음악 쪽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15] 이 때 같이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윤이상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 둘은 훗날 김민기 이전의 독일 괴테메달을 수여한 유이한 인물이 된다. [16][17] 그런데 독일에 있을 때쯤 존 케이지나 조지 마치우나스 등의 영향을 받아 행위예술을 접한 뒤, 행위예술가로 변신하게 된다. 머리카락에 먹을 묻혀 선을 그리는 것도 사실 백남준이 했던 퍼포먼스다. 이후 플럭서스의 일원이 되고, 미국 뉴욕과 독일을 오가면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사실 백남준이 1964년 미국 뉴욕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알아 주지 않았었다. 무대에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를 때려 부수거나 넥타이를 자르는 행위예술을 하기도 했다. 1967년에 백남준이 누드인 첼리스트 샬롯 무어먼과 공연하다가 샬롯이 경찰에 체포당하면서 논란을 일으킨 사건은 유명하다.[18] 그 결과 백남준은 미국 예술계에서 제대로 된 예술도 못하고 기행을 일삼는 사람, B급 예술가 정도로 치부되었다.[19]

다만 B급 예술가라는 것은, 당시의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언급일 수도 있다. 당시 60년대에서 70년대에는 서서히 퍼포먼스 예술이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였고, 물론, 현대에는 현대미술하면 알 수 없는 무용과 행위들을 떠올리곤 하지만, 이전 예술은 단순히 회화아니면 조각 정도로, 이루어지는 오브제 중심적인 예술이었다. 때문에, 당연히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오브제 없이 예술가의 행위 자체와 관람객이 느껴야하는 '경험' 위주의 예술은 매우 비주류라고 할 수 있으나, 개척기이자 태동기였다. 예술의 범위가 확장되는 시기였다고 생각하면 쉽다.[20]

후에 퍼포먼스예술은 80년대 이후 대중예술에서도 독특한 무대연출(패션쇼, 콘서트, 오케스트라 등)로 발전하여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다. 제대로 된 무대연출을 할 줄 아는 아티스트가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면, 퍼포먼스예술이 현대예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것은 종합예술의 영역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는 행위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음악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80년대부터 과학기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TV로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러운 이끌림인데 급기야는 로봇을 만든다. 이 로봇의 이름은 K-456으로 똥도 싸고, 말도 한다.[21] 그는 이 로봇의 최후를 연출했는데 뉴욕 한복판에서 같이 산책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난다. 21세기 최초의 참사라고 명명하였다. 최초의 로봇 교통사고다.

2.3. 결혼[편집]


오노 요코 때문에 잠깐 존 레논과 약간의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백남준은 그 당시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으나 요코는 존을 선택해 그와 결혼했고, 백남준은 꽤 충격 받았던 듯. 존 케이지 등과도 교분이 있었으며 비디오 아트 예술가 이전에는 피아노 행위예술가로도 알려진 바 있다. 무엇보다 연주하다가 도끼로 피아노를 부숴버리던 짓도 곧잘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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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웨스트베스 작업실에서의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
1977년 자신과 같이 행위예술 작업을 했던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1937.8.2 ~ 2015.7.23)와 결혼했다. 구보타 시게코는 처음 봤을 때부터 그에게 매료되어 자신의 남자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구보타 시게코는 백남준을 만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1963년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 유럽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전위예술가로 소개한 기사를 본 것이다. 1년 후 백남준은 일본으로 퍼포먼스를 하러 갔다. 구보타 시게코는 이 퍼포먼스를 보러 갔고, 그때 백남준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신고 있던 구두에 막걸리를 부어 마시고, 붓 대신 머리를 이용해 거침없이 선을 그리는 것이었다. 엉망이 된 몰골로 퍼포먼스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온 백남준을 호감을 표했다고 한다. 그 모습이 아주 섹시했다고.

구보타 시게코는 괜히 그 공연을 보러 간 것은 아니다. 그녀도 역시 전위예술, 음악을 하고 있었는데 피아노를 연주하며 전위성을 찾는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피아노를 도끼로 깨부수는 사람을 알게 되었으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결국 결혼[22]. 이혼녀[23]인 구보타 시게코가 자궁암으로 불임 진단을 받고 엄청난 수술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백남준이 본인 명의의 의료보험 혜택을 활용하자며 먼저 청혼을 하고[24] 결혼 후에도 구보타 시게코의 불임 진단과 의료보험과 관련해서는 주변 친구들에게 전혀 입밖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등의 모습을 보면, 백남준의 구보타 시게코에 대한 배려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으며, 구보타 시게코 역시 이런 백남준의 배려와 사랑에 사후에도 그를 아끼는 마음에서 백남준과의 삶을 회고하는 책 "나의 사랑, 백남준"을 출간하기도 했다. # 다만 양자격인 백남준의 조카와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갈등을 빚어서 이미지 하락을 겪기도 했다. 이후 암 투병중이던 구보타 시게코는 2015년 7월 23일 만 77세로 작고했다.

“나의 사랑, 백남준”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나온다. 그 중 하나가 뉴욕에 살며 돈이 없었는데 한국의 백남준 형님이 1만 달러를 보내줬다고 한다. 아버지의 유산으로, 마지막으로 보내주는 돈이었다. 그런데 백남준은 그 돈으로 생계를 꾸릴 생각이 없었고, 컬러 텔레비전과 골동품이나 사다가 대뜸 불상을 하나 구입했다. 구보타 시게코는 이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돈을 다 탕진했는데 전시는 하고 싶어했다. 당시 ‘하늘을 나는 물고기’ 전시를 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못하고, 사뒀던 불상과 TV로 ‘TV부처’를 만들어 전시한다. 그리고 이 작품이 뉴욕 미술계에서 초대박을 친다. 동양의 오래되고 고고한 상징과 서양의 최첨단 기술이 마주보며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미지가 큰 감흥을 준 것이다. 결과는 좋았지만 백남준은 기본적으로 경제관념이 아주 부족했다고 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만큼[25] 돈을 어떻게 써야 잘 쓰는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는 사업가 아버지의 길을 전혀 따르지 않고 음악과 미학에 관심이 깊었다. 다른 일화가 하나 있는데 어쩌다 구보타 시게코가 돈이 생겨서 백남준에게 용돈으로 아껴쓰라며 줬는데 저녁이 되자 돈이 하나도 없다 했다고 한다. 어디에 썼냐고 물으니 받은 즉시 나가서 비싼 치즈케이크를 먹느라 거기에 다 썼다고 답했다.

2.4. 비디오 아트[편집]


B급 예술가로 치부당하는 와중에도 백남준의 인지도는 꾸준히 쌓여가고 있었고, 기괴한 퍼포먼스를 하며 조금씩 시도했었던 비디오 아트는 점점 백남준의 예술 세계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백남준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만 알고 있는데,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26][27] 1974년부터 비디오 아트 설치 작업을 선보였으며, 영상이 지상파 TV에 방영되는 등 점점 유명해지고 예전과 다르게 높은 평가를 받는다. 결국 1982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 회고전이 전시되었고, 뉴욕 뿐만이 아닌 미국 예술계에 큰 인지도를 얻게 된다. 이때부터 백남준은 바쁘게 활동하였다. 1979년부터 1996년까지 17년 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조각과 교수로 있었는데, 뉴욕에서 작품활동하느라 바빠서 학생들을 자주 보지 못해 미안해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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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 June Paik - Global Groove, 1973
위 작품은 1973년 백남준이 선보인 Global Groove라는 세계 최초의 뮤직비디오중 하나이다. 당시에는 영상을 편집할 수 있는 장비가 없었는데, 신디사이저라는 영상편집장비를 일본기술자와 함께 직접 만들어서 그 장비를 이용해 만든 작품이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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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llen Ginsberg Project - Good Morning, Mr Orwell! (Complete Video)[29]
1984년 새해 벽두에 전세계 동시송출된 <굿 모닝 미스터 오웰>[30] 의 풀 버전 영상.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생중계 쇼 프로그램인데다 더불어 뉴욕, 샌프란시스코, 파리의 다원생중계였다! 훗날 이 작업은 인공위성 예술의 대표적 사례로 불리게 된다. 연출은 영화 더티 댄싱시스터 액트 감독으로 유명한 에밀 아돌리노가 맡았는데, 그는 더티 댄싱 감독 이전에 아카데미상다큐멘터리 부문을 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이쪽 작업에도 능했다. 다만 한국에서는 (편성표상은 1월1일)1월 2일 새벽 1시에 KBS1에서 방송했는데(위 영상이 KBS의 중계 버전이다.) 수파(자막)와 더빙이 들어간 것으로 보아 영미권과 달리 KBS에서 미리 소스를 받아 작업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음악가의 전설로 남은 존 케이지가 나오는가 하면[31],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 배우 이브 몽땅이 신나게 탭댄스 추며 노래도 부르고, 현대무용의 거두이자 '뉴 댄스'의 창시자인 머스 커닝햄, 살바도르 달리까지 이곳에 등장한다. 후반부에 진지하게 첼로를 키는 장면은 압권. 전반적인 스토리는"오웰, 당신이 예측한 억압과 광기의 시대는 오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현재를 잘 살고 있다."로 전개된다.

실제로 소설 1984에는 발달한 과학이 텔레스크린같은 것처럼 오히려 인류를 옥죄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데, 백남준은 발달한 과학을 이용해 예술의 새 지평을 연 셈. 예술의 신기원을 열면서 동시의 영미문화의 대작가를 비판(혹은 비평)하고, 아울러 현대 과학의 발전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갖춘 셈인데, 이렇게 보고 위 동영상을 보면 소름이 쫙 돋는다. 오직 1984년에만 할 수 있는 예술인 셈이다.

1986년에는 <바이 바이 키플링>이라는 작품으로, 러디어드 키플링(1936년 졸로 당시 사망 50주년)의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다. 동양과 서양은 절대로 서로 어울릴수 없다'(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ver the twain shall meet)는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주제로 도쿄, 뉴욕, 서울의 '서구'와 '비(非)서구'의 모습을 순서 없이 뒤죽박죽 방영하면서 동양과 서양 모두 동일한 시간축에 살고 있음을 역설하는, 동양과 서양이 서로 상대를 봤을때 신기하고 자기들 끼리는 비슷비슷해보이는 것 처럼, 제3의 생명체가 봤을떈 동양과 서양 둘은 쌍둥이처럼 같아보인다는 논리이다. 오리엔탈리즘을 철저하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딕 카벳과 류이치 사카모토가 출연하기도 했다. KBS1, TV아사히, WNET 의 세 방송사에서 방송되었다. PBS, NHK에서 방송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바이 바이 키플링>은 당시 한국에서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얻었는데, '1등을 달리고 있는 일본인 마라토너의 모습'등 아시아의 문화적 선두주자는 일본이라는 암시가 포함된 장면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 영화등 주류 일본 문화가 금지되어 있던 한국의 입장에서 이런 메세지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고, 언론에서는 백남준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잠시 일었다. 그렇지만 올림픽을 앞두고서 결국 다시 백남준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게 된다.

1988 서울 올림픽 1주일전, <손에 손잡고>라는 작품으로 2년전의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더 많은 참가국가로 극대화 시키며, 냉전의 시대가 끝났음과, 전세계의 조화와 공존을 담아내면서 백남준의 위성 연작 3부작의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한국 대중들에게 '백남준'이라는 예술가는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비로소 한국에 알려지게 된다. 사실상 한국은 백남준에 대해서 역수입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백남준이 일본에서 뉴욕에 가기까지는 한국에서도 무명이었고, 그가 현지에서 악평을 들을 때도, 유명해지고 세계적인 수준에 오를 때 까지도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백남준보고 세계적인 예술가라고 해도 한국에서는 실감이 안나기 마련이었던 것이다.[32]

그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랴부랴 일본으로 출국하여 독일과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를 떠돌다 34년만인 1984년에 다시 고국을 찾았을 때 한 기자가 '왜 한국 무대를 놔두고 외국 무대에서만 활동하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는 수출이 필요해요.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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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익선, 1988년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에서 백남준은 초기의 악동 행위예술가 같은 이미지는 거의 없고, 88올림픽을 기념해 만든 다다익선 같은 작품처럼 오로지 텔레비전 여러 대를 이용한 비디오 아트의 이미지만 강하게 남아있다.

흔히 비디오아트라 하면 정신사납거나 아름다운 영상물을 생각하기 마련이나 다다익선처럼 TV를 쌓아두는 비디오 설치 작업도 많이 했다. TV를 쌓아 역사 속 유명한 인물들의 이름을 가져와 그 사람들의 조각상을 만들기도 했다. 마르코 폴로, 징기스칸, 알렉산더 대왕 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동서양을 가로지른 대표적인 인물이다. Television이란 말 자체가 원거리를 가로지른다는 의미가 있으니, TV에서 이들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TV부처라는 작업도 유명하다. 불상을 두고, 그 앞에 CCTV를 설치하였다. 명상하는 부처가 TV를 통해 자기 모습을 들여다 보는 굉장히 묘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다양한 배리에이션이 존재한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보여지는 모습, 영상물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비디오 신디사이저라는 작업도 했는데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그에 맞춰 TV에 입력된 영상이 송출되고, 동시에 실시간으로 합성되는 장치다. 일본의 공학자 아베 슈아와 함께 만들었다. 이러한 비디오 신디사이저는 방송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그의 비디오 아트는 바이바이 키플링, 굿모닝 미스터 오웰처럼 영상의 내용적인 면으로도 분석할 수 있지만 영상 작업의 구조와 형태 자체로도 분석할 수 있다. [34]

브라운관 TV의 특성을 이용하기도 했다. 브라운관은 전자총을 쏘아 유리판에 발린 형광물질을 자극하여 영상을 보여준다. 백남준은 이를 직접 조작하여 이미지를 만들어냈는데 TV를 위한 선과 같은 작업이 있다. 또한 자석을 갖다대어 이미지를 조작하거나 심지어는 관객이 직접 자석을 가지고 움직이며 영상을 만들 수 있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35]

비디오 아트 작업을 하는 데 많은 TV가 필요했는데, 활동 초기엔 소니에서 출시한 제품을 쓰다가[36] 어느 시점[37] 이후로는 삼성전자의 협력을 받아 삼성 TV를 사용하였다.

이 때를 즈음해서 삼성 텔레비전 광고도 찍었다. 백남준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오리지널 서울 사투리가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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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사이다 CF 1편 - "기억하는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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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사이다 CF 2편 "창조하는 현재"

1995년 8.15 광복 5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제작된 칠성사이다 CF에 출연하여 과거 칠성사이다의 CF 영상들과 시대별 영상자료들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웅장함으로 뇌리에 깊숙히 남는 1편의 BGM은 가수 김수철이 작곡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0년 1월 1일로 넘어가던 새벽(미국 동부시간), 굿모닝 미스터 오웰 때와 마찬가지로 밀레니엄을 기념한 백남준의 작품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is Alive)"가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위성 생방송으로 동시 송출되었다. 한국에서는 CBS와 뉴스 제휴 관계에 있는 MBC에서 중계했는데, 방송을 진행하던 손석희[38] 앵커가 "시청자 여러분, 텔레비전이 고장난 것이 아님을 재차 말씀드립니다."라는 멘트를 여러 번 하기도 했다(...). 사실 비디오아트의 특성상 아무런 코멘트 없이 영상만 보고 있으면 "이거 TV가 고장난 것 아냐?"라고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긴 했다.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에도 "동방으로부터"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2006년 1월 29일[39]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아파트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유언은 "맛있어, 맛있어"로 아내가 해준 장어 덮밥을 맛있게 먹곤 얼마 안가 눈을 감았다고 한다. 장례식은 평소 그의 기행(?)에 걸맞게, 슬픈 기운 없이 폭소 속에 이뤄졌는데, 사회자가 젊은 시절 관객들의 넥타이를 마구잡이로 잘라댔던 그의 이야기를 하자 조문객들 모두 폭소했고 그걸 그대로 재현하자는 제안에 참가자들 모두 메고 온 넥타이를 잘라 그의 관에 넣어 주고 웃으며 그와 작별했다.

# # 그의 유해는 그가 주로 활동했던 한국, 독일, 미국에 분산되어 안치되었으며, 한국에 있는 유해는 봉은사에 안치되어 있다. # #


심지어는 사망 후에도 광고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사망 2년 후인 2008년 TV 전파를 탄 KT의 'show' 브랜드 광고 중 Mr.Innovative 편은 백남준 선생의 생전 퍼포먼스를 재편집한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디. 마지막에는 3D 모델링으로 재구성한 선생의 얼굴과 "쑈를 해라"라는 생전의 목소리가 나온다.


3. 평가[편집]


"백남준을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고만 규정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20세기에 이미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을 내다본 선지자였으며 인공위성까지 동원할 만큼 엄청난 배포의 기획자였다. 마셜 매클루언 같은 문명비평가부터 데이비드 보위 같은 가수까지 전 세계 수많은 인사가 그의 친구였다. 백남준이 연하장을 보내는 이는 1000명이 넘었다. 그야말로 국제적인 스타였다."

미술사학자 김홍희 #


"백남준이 한국에서 예술을 했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 되었을까? 나는 가끔 주변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마도 힘들었을 거라고. 아쉽게도 한국 사회는 귤을 맛있는 귤로 키우지 못하고 탱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일찍 한국을 떠난 덕분에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과 내면을 가장 잘 보존한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만든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기억과 한국의 문화적 유전자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령[40]


백남준이 높게 평가 받는 이유는 첨단기술매체와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 상상하고 이를 예술로 표현했다는 점에 있다. 당시 예술가들이 텔레비전 같은 새로운 매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이를 배척하거나 파괴하는 작업을 선보인데 반해, 백남준은 새로운 예술을 선보이기 위해 전자회로 관련 기술도 직접 공부하고 아베 슈야 같은 기술자와 협력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작품 <etude 1>(1967-1968)을 만들기 위해 벨 연구소에서 포트란 언어로 코딩까지 시도했다고 한다.[41]

백남준은 저술이나 이론 작업도 꽤 많이 했다. '전자 고속도로'를 예견한다든지, '인포 아트'에 대해 논한다든지. 인터넷[42]스마트폰[43], 유튜브스트리밍[44]이 일상화된 지금 읽어보면 당연하고 뻔하다 싶은 내용을 써놓은 경우가 많지만, 인터넷은 커녕 모든 사람이 컴퓨터를 휴대하고 다닌다는 발상 자체가 공상 과학의 영역이었던 70년대에 그런 예견을 한 것으로, 전자 고속도로의 개념을 작품화한 '전자 초고속도로' 라는 작품을 1974년도에 만들었다.[45] 본문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를 74년도 이전에 예견했고, 93년도까지 현재 21세기의 모습을 예언했으며 전부 현실화되었다. 그 빌 게이츠도 자신의 저서에 비슷한 내용을 저술했지만, 이쪽은 95년도다. Apple의 존 스컬리가 지식 탐색기의 개념을 제안하기 시작한 것도 83년이었고 이 때도 아직 시기상조였다고 여겨졌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구현되었다. 그의 통찰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많은 예술가들은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 마다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는데 당시 TV는 '바보상자'로 취급하고 TV를 비롯한 미디어 컨텐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대부분이었으며 좋은 미래를 전망하지 않았다.[46] 이 때문에 사실상 비디오 아트 뿐 아니라 미디어 아트를 논할 때도 백남준을 빼놓고 말하는 것은 힘들 정도다. 실제로, 미디어 아트 관련 서적에 백남준은 적어도 한 구절씩은 꼭 들어가 있을 정도다.[47]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소장품목에 넣은 것도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해외 예술 경향을 국내에 소개하거나, 휘트니 비엔날레의 경험을 살려서 광주비엔날레 [48]조직에 큰 도움을 주는 등 한국 미술 역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4. 국내 소장 미술관[편집]


2008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백남준아트센터를 개관했다.[49] 바로 옆이 경기도박물관이 위치한다. 주로 현대미술을 위시한, 퍼포먼스, 개념, 설치 미술이 중점적으로 전시되며, 정기적으로 행위예술 페스티벌이 열리곤 한다. 백남준미술관이 들어선 곳은 도립박물관과 한국민속촌, 도립국악당 등이 인접해 있어 용인시는 용인 G-뮤지엄파크(경기도박물관·백남준아트센터·경기도어린이박물관)를 구축해 문화·예술적 시너지효과를 내고 있다. 또한 용인 마북동에 있는 한국미술관은 그의 작품과 그의 아내의 작품이 자주 전시된다. 이래저래 백남준과 용인은 인연이 깊은 듯. 용인의 백남준 아트센터 외에는 다음의 기관에서 백남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다만 소장중이더라도 모니터가 나가서 수리중일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말자. 실제로 백남준 작품은 CRT 모니터가 나가서 수장고에 끌려가거나 가림막으로 가려놓거나 아예 TV를 꺼버리는 경우가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엄청 큰 작품을 갖고 있다. 모니터가 자그마치 1003개... 작품명은 '다다익선'. 수리할 때가 되었는데 이미 단종된 CRT를 구해서 고칠지 이참에 LCD로 바꿀지 고민하더니 그냥 CRT로 고친듯. CRT의 수명 문제와 부품 노후화로 화재나 폭발 등의 가능성이 있어 2018년 4월 18일 부로 가동이 중단되었으며 보수작업을 거쳐 2022년 9월 재가동을 시작했다.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층 통로에 설치되어 있는데 웬만한 사람들은 전시물인지 모르고 지나친다. 작품명은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1965-67>
  • 대전시립미술관: 1993년 대전 엑스포 당시 재생관에 전시되었던 비정수의 거북선[50]이 있다. 근래까지 재생관에 방치되어 있었으나 현재 대전시립미술관으로 이동, 수리후 전시중이다.
  • 삼성미술관 리움: 2동 1층에 전시중. 도슨트가 투어 중에 설명해주는 작품에 포함되어 있다.
  • 부산시립미술관: 1층 로비의 <덕수궁> 외에 4점 보유.
  • 삼성화재교통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 - 1997>가 전시되어 있다.[51]
  • 서울시립미술관: 1층 로비에 <서울 랩소디> 전시 중.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바이 키플링', '서울 판타지아', '네 마음 속의 서울' 등 영상이 담겨있다. 이 중 2대의 모니터에서는 꽤 야한 누드가 나온다.
  •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로비에 <호랑이는 살아 있다> 영구설치.
  • 수원역 AK프라자: 6층 문화센터 입구에 전시 중. 2003년 수원역 민자역사(개관 당시 애경백화점) 준공 당시부터 2층 로비에 있었던 작품이지만 AK프라자 측이 매각을 시도한 적이 있어서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 우리들병원: 병원로비에 <안심낙관> 작품이 전시중이다.
  • 창원 성산아트홀 전시관 로비 : <창원의 봄> 상시 전시 중. 현재 작동하고 있지는 않다.
  • 포스코: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 포스코 센터 1층 입구에 <철이철철> 이라는 작품을 전시중이다.
  • 한국산업은행: 여의도 영업부 로비에 1점. 산은본점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니 눈으로만 보자. 다이렉트 계좌개설 핑계삼아 가보자.
  • 하나금융투자 여의도 본점: 1층 후문[52] 쪽에 <하나 로보트, 2001>, <초고속 경제, 2001>, <시집온 부처, 2001>, 총 세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촬영과 출입이 자유롭다.
  • 한양대학교 백남학술정보관(중앙도서관): 로비에 라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출입통제 및 사진촬영 금지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로비 앞 출입게이트에 있는 경비가 해당 작품을 감시하고 있다.
  • 효성그룹 본사(공덕동): 1층 로비에 <백제무령왕>, 2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 SK증권 여의도점: 1층 로비에 <개선장군>이 전시되어 있다.
  • 본태박물관 : 제주의 본태박물관 4점 소장. 그 외 백남준의 드로잉작업 등도 전시중이다. <금붕어를 위한 소나티네>, , <나는 결코 비트겐슈타인을 읽지 않는다.>,
  • 메종글래드 제주: 1층 로비에 <벤자민 프랭클린>이 전시되어 있다.
  • 에코랜드 호텔: G층 갤러리에 <요셉 보이스>가 전시되어 있다.

5. 해외 소장 미술관[편집]


  • 미국 워싱턴 DC의 허쉬혼 미술관과 아메리칸 아트 미술관
  • 예일 대학교 미술관
  • UC 버클리 BAMPFA 미술관
  •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 일본 후쿠오카의 후쿠오카 미술관과 캐널시티 하카타
  • 독일 뒤셀도르프의 노르트라인주립미술관
  • 독일 쾰른의 루드비히박물관
  • 호주 캔버라의 국립미술관
  • 호주 호바트의 MONA(Museum of Old and New Art)
  •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미술관
  • 스웨덴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 테이트 모던에서는 아예 백남준의 작품만을 전시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현대 자동차 후원관. #


6. 어록[편집]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는 수출이 필요해요.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서 세상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1984년에 "왜 한국 무대를 놔두고 외국 무대에서만 활동하는가?" 질문에서.#[53]


"인생은 싱거운 것입니다. 짭짤하고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예술을) 하는 거지요."


"1982년에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쉰 살이 될 것이다. 2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

— 1964년, 동료 예술가 볼프 포스텔이 "정확한 자서전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써낸 답글 중


''백남준을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고만 규정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20세기에 이미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을 내다본 선지자였으며 인공위성까지 동원할 만큼 엄청난 배포의 기획자였다. 마셜 매클루언 같은 문명비평가부터 데이비드 보위 같은 가수까지 전 세계 수많은 인사가 그의 친구였다. 백남준이 연하장을 보내는 이는 1000명이 넘었다. 그야말로 국제적인 스타였다.”

미술사학자 김홍희 #


"백남준이 한국에서 예술을 했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 되었을까? 나는 가끔 주변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마도 힘들었을 거라고. 아쉽게도 한국 사회는 귤을 맛있는 귤로 키우지 못하고 탱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일찍 한국을 떠난 덕분에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과 내면을 가장 잘 보존한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만든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기억과 한국의 문화적 유전자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백남준의 오랜 호형호제, 이어령


"그건 그렇고, 30세기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선생님, 혹시 (곧 다가올) 21세기 말씀이십니까?"

"아니, 1000년 후 30세기."

1994년 미국 휘트니미술관 2인 전시를 함께한 설치미술가 강익중과 나눈 대화[54]


백남준은 어려울 때마다 정신적으로 의지한 내 마음 속의 부처였다.

오노 요코, 백남준의 장례식 추모연설 中


나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아닙니다. 세기(世紀)적인 예술가입니다.

2002년 무렵 경기문화재단에 보낸 친필 편지



7. 여담[편집]



  • 미국의 빌 클린턴, 김대중 대통령 앞에서 실수를 범한 사건이 잘 알려져 있다. 1998년 6월 김대중 대통령 방미에 맞춰져 백악관에 초대된 백남준은 빌 클린턴 대통령 면전에서 그와 악수하다가 바지가 흘러내렸다. 당시 백남준은 뇌졸중 후유증으로 지체장애인이 되어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악수 직전에 바지가 흘러내린 것. 그것도 아무 속옷도 입지 않은 채 였다. 단순한 실수였다고는 하는데 당시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백남준은 이에 대해서 "My pants dropped. That’s all.(바지가 흘러내렸다, 그게 다야)" 라고 말했다고. 많은 사람들은 연이은 섹스 스캔들에 시달렸던 클린턴을 '빗대어' 이 같은 '퍼포먼스'를 했다거나 'Electric hightway(전자 정보 고속도로)'라는 단어를 클린턴이 마음대로 가져다 사용했기 때문에 그랬다는 등 각종 설들이 나왔다.[55] 이 당시 백남준이 바지를 잡고 입장하다가 놓은 점이나, 바지가 흘러내린 이후에도 백남준의 표정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러한 설들이 더 부추겨진 면도 있는 듯. 그러나 이미 1998년은 한 번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이기에 표정 변화가 없는 점은 감안할 수 있다. 이 사건에 대해 그의 행위예술가적 행보를 잘 알고 있는 서양에서는 항의 내지 풍자성 행위 예술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아예 이를 포스터로 쓰며 그를 '트릭스터'로 칭하기도 했다. 기다리고 걸어오기까지 하다 하필 빌 클린턴 앞에서 했다는 것이 타이밍도 너무 절묘해서 실수가 아닐 것이라 보는 이들이 많긴하다.


  • 원로 코미디언 백남봉과 앞글자 두 자가 동일하고 연령대도 비슷한 데다[56] 두 사람 모두 국내에서는 이름이 잘 알려진 관계로, 80~90년대에는 대중들이 두 사람의 이름을 은근히 헷갈리거나 백남봉이 백남준의 짝퉁 취급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57] 물론 2006년 백남준의 작고와 더불어 2010년 백남봉의 작고로 이런 혼란은 완전히 사그라든 듯 하다.
  • 일본의 작곡의 신이자 YMO사카모토 류이치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YMO의 PV를 보면 백남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걸 볼 수 있다.[58]
  • 현재도 백남준의 영향력은 미술사, 예술가, 음악가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발휘되며, Martin garrix - Yottabyte 뮤비에서 나온 비디오 아트, 이은결 마술사의 일부 마술 트릭도 다 백남준 미술가가 개척한 장르라고 하는 걸 생각하면, 전공자가 아닌 사람한테 생소한 현대미술이라는 장르를 대중들한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 사람 중 한 명임을 알 수 있다. 비디오 아트가 여기저기서 재해석되면서 의외로 대중에게 친숙해졌다.
  • 브라운관의 수명이 다하면서 그의 대표 작품인 다다익선의 보존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 1998년 예술계에 기여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수상했다. 한국계로서는 두 번째 괴테 메달 수상자이다. 첫 번째는 작곡가 윤이상.
  • 최경한 서울여대 명예교수(서양화가)와 경기고등학교 47기 동기생이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반에서 같이 활동했다. 백남준 사후 백남준미술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았다. 고교 1년 후배인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도 친분이 있었다.
  • 백남준의 작품과 관련해서 미술평론가 손철주가 쓴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책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1992년 8월 한 화가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회고전에 갔다가 본 광경으로, 두 여고생이 전시된 작품들 중 속을 뜯어낸 진공관식 TV 속에 촛불 하나가 켜진 〈TV 촛불〉이라는 제목의 작품 앞에서 대화를 하고 있더란다. 이 때 한 쪽 여고생이 "야, 이것도 예술이냐?"라고 묻자 옆에서 함께 구경하던 다른 여고생 曰, "아니, 예술이 아니고 기술이지. 일주일 전에 봤던 촛불이 아직 안 꺼졌잖아."
  • 백남준 : 말馬 에서 크리스토까지라는 책이 있다. 백남준의 글을 모아 놓은 총서인데, 백남준의 생전 생각과 아이디어를 잘 볼 수 있다. 방대한 관심사와 깊은 지식, 무엇보다 이를 엮어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돋보인다.

  •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넷플릭스 로맨틱 코미디 영화《우리 사이 어쩌면》여주인공인, 알리웡의 전남편, 저스틴 하쿠타의 아버지가 백남준의 조카 켄 하쿠타이다. 백남준 일가는 친일행적으로 일본으로 망명간뒤에, 귀하하고 백씨성을 하쿠타로 개명했으며 이후 미국으로 이민갔다. 백남준의 사후, 유산처분을 주도한 것이 켄 하쿠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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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1937년부터 1950년까지 어린 시절을 살았던 곳은 창신동 197번지에 위치한 99칸짜리 한옥집이었던, 속칭 '큰대문집' 이다. 지금은 백남준기념관으로 리모델링했고, 본인도 창신동을 평생 그리워했다.[2] 일제강점기는 5년제, 광복 후에는 6년제 중·고등학교 통합 학제였기 때문에 중학 과정 수료 후 영국령 홍콩으로 유학을 떠났다.[3] 부전공 음악사학[4] 재혼했다.[5] 퍼포먼스 예술은 그 이전 예술에서는 볼 수 없는 현대예술의 대표적 예술활동인데, 플렉서스 멤버들과 했던 수많은 퍼포먼스가 이제는 주류 예술이 되었다.[6] 사실 부자들이 소비를 많이 하면 금전의 회전율이 높아져서 경제에 도움이 되니 부자들에게는 맞는 말이다.[7] 이전까지는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였다가 1938년에 경기공립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지금의 중학교가 아닌 중고등 과정이 통합된 구제중학교 과정이다.[8] 바이올린을 깨부수는 퍼포먼스는 백남준에게 동양에서 온 황색 재앙이라는 칭호를 달아준다. 클래식 음악이 가지고 있는 권위를 부수는 의미가 있다. 클래식은 예로부터 귀족, 부호들이 향유하는 고고한 이미지가 있는데 백남준은 예술이 가진 권위성으로 일반 대중과 전문가, 권위 있는 사람이 나뉘는 것을 거부했다. 예술이 모두를 향해야 하며, 모든 일상이 예술이라는 플럭서스 운동과도 상통한다. 영상은 그의 행위예술을 존경하는 다른 퍼포머.[9] 1956년 사망 후 백남준의 큰형이 태창방직을 경영하였으나 5.16 군사 정변 이후, 부정축재 대상자가 되어 태창방직이 국고로 몰수되었다. 이후 온가족이 일본으로 망명 후 귀화했다.[10] 떠돌이 인생의 영향으로 백남준은 6개 국어를 할 수 있었다.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다. 그는 이 6개의 언어를 혼용하여 말하기도 했으며, 자기만 아는 직접 만든 말을 쓰기도 했다. 인터뷰 영상을 보면 여러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특이한 점은 어린 시절 한국(식민지 조선)을 떠나 평생을 지냈기에 1990년, 2000년대가 되어서도 한국어를 쓸 때는 예스러운 어휘와 억양을 썼다는 점. 말투는 굉장히 어눌한 편이다.[11] 여권 번호가 '7번'이었다. # 그 당시에 여권 번호는 발행 순서대로 부여되었다.[12] 수험 준비 기간이 3개월밖에 안 걸렸다는 전설이 있다. 백남준의 가족은 백남준이 법학부나 경제학부에 지망할 거라고 생각하고 입학 절차를 전적으로 백남준 본인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입학 전 도쿄대학에서 학부모 모임을 초대하는 편지에서 백남준이 문학부를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백남준은 훗날 이 시절을 회상하며 그렇게 스파르타식으로 공부를 다시는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시험 결과가 좋아 입학처에서도 이 성적으로 법학을 공부하지, 왜 미학을 하려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13] 도쿄대학의 체제상 지원당시는 문학부로의 지원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전공은 교양과정을 이수하고 정하는 것.[14] 사실 어릴 때부터 백남준은 기업인이나 정치가보다는 예술가 기질이 강했다. 어린 시절에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과달카날 레퀴엠 같은 이후의 작업 경향을 봐도 권위주의나 군국주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약간 온건한 윤이상 내지 오늘날의 강남 좌파 같은 느낌이 있었던 듯. 이 때문에 독일 유학 때는 유학비를 제한받을 정도로 부친과 사이가 안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비디오 아트 작업을 할때 사용할 비싼 텔레비전을 구하는데에는 백남준 집안의 도움이 컸다.[15] 사실 그는 음악이나 미술을 따로 보지 않은 경향이 있다. 통틀어 예술이라 했으며, 평생 음악, 미술, 행위예술 등 모든 예술분야를 넘나들고, 이어 붙이는 작업을 했다. 그의 첫 전시는 현대음악과 관련된 작업이었다. 13대의 텔레비전을 전시하여 관객이 직접 작동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다른 영상과 소리가 재생되는 작품이다. 음악을 전시하겠다는 개념과 함께 근래 유행하는 인터랙티브의 성질도 있는 작업이다. 여담으로 그는 첫 전시장 입구 위쪽에 죽은 소의 머리를 아무 처리도 없이 걸어둬 주민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16] 동경대에서 전공한 미학이 음악미학이다. 학부때의 부전공도 음악사학. 이미 이전부터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았다.[17] 뮌헨대학에서의 공부도 그에게는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보다 진취적인 분위기의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으로 옯겨서 현대음악 공부를 더했다고... 뮌헨대학의 석사학위를 완전히 마쳤는지는 자료에 따라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18] 샬롯은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당시 뉴욕 예술계는 유죄 판결에 대해 반대하는 여론이 있었다. 결국 당시 주지사였던 넬슨 록펠러(록펠러 가문 출신, 후에 미국 부통령)는 예술적인 퍼포먼스라면 누드라도 처벌할 수 없다고 법을 개정하게 만든다. 이로써 뉴욕은 행위예술같은 퍼포먼스에 관해서 보다 자유롭게 변했다.[19] 백남준이 샬롯 무어먼과 나체의 퍼포먼스를 한 이유는 음악에는 섹스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미술, 문학, 공연 등의 다른 모든 예술에는 섹스가 존재하나 음악에서는 찾을 수 없었으며, 백남준은 그 이유가 음악이 가진 위선적인 권위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반골 기질이 강했으며, 권력과 권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예술 또한 모두가 즐길 수 있고, 또 평범한 모든 일상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따라서 음악에서도 사람의 급을 나누는 권위를 싫어했고, 이에 따라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 샬롯 무어먼과 나체로 공연을 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샬롯 무어먼과 함께한 작업으로는 TV브라 등이 있다. TV로 만든 첼로를 가지고 연주를 하는 것이다. 물론 첼로는 현도 엉성하고 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이런 퍼포먼스도 했다.[20] 물론 행위 예술이 남발하고 있는 현대에도 그림이나 조각이라는 '물질'의 존재 없이 퍼포먼스를 예술로 삼는 예술가들은 비교적 높은 수준의 예술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시각에서도, 당시 예술계에 이단아들이자, 맨땅에 퍼포먼스 예술을 시도한 '플럭서스'의 일원이며 그중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던 백남준의 수준은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다.[21] 작동 모습 작동 모습[22] 두 사람 다 재혼이었다. 백남준에겐 첫번째 부인이 있었다.[23] 게다가 전 남편은 다름아닌 백남준의 친구인 작곡가 데이비드 베어맨이었다. 백남준을 기다리다 지친 상황에서 베어맨이 청혼을 해서 결혼하게 된 것. 하지만 일본인과 독일인을 싫어했던 시아버지 때문에 갈등을 빚고 결국 이혼한다.[24] 백남준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불임은 문제가 아니었다고 한다.[25] 그의 유년기 집안에는 한반도에 딱 3대밖에 없던 승용차가 하나 있어 그것을 타고 등하교를 했다고 한다. 그만큼 부유했다.[26] 볼프 포스텔(Wolf Vostell)이 먼저 TV를 사용하긴 했는데, 포스텔은 TV를 끈채로 부수기만 했다.[27] 그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 역시 비디오아트를 했는데 어느 유명 예술잡지에서 비디오아트를 소개하며 구보타 시게코의 작품을 맨 처음 소개한 적이 있다. 백남준은 이를 보며 굉장히 투덜거리고 자존심 상해했다고 한다.[28] 신서사이저 하면 떠올리는 현대 음악에 널리 쓰이는 아날로그 신서사이저와는 초기 전기장비란 점에서 뿌리는 같지만 생김새도 사용법도 전혀 다른 물건이다.[29] 초반부에 등장하는 노래는 로리 앤더슨의 Excellent Birds. 같이 부르는 남자는 피터 가브리엘로 2년 후 가브리엘의 앨범 So에 This Is the Picture (Excellent Birds)라는 이름으로 수록된다.[30] 이름이 왜 이런지는 영미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다.[31] 상술한 대로 백남준의 스승이기도 했다.[32] 박하 줄거리, 허영만 그림인 만화 비트를 보면 여주인공 로미의 부모가 부자인데 80년대 백남준 관련 작품을 티브이로 보고 세계적으로 알아주는데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모르면 수준이 낮다고 할테고 이런 생각으로 작품을 보면 당황해하더라는 이야기가 나온다.[33] 역설적으로 이 점이 백남준이 한국에서 이름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백남준은 권위주의나 군국주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어떻게 보면 냉전을 직격으로 맞은 한국 사회에서는 불온시되는 사상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윤이상이 동백림 사건 이후로 한국 대중들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이 박히며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된 반면 백남준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프로그램이 TV로 방송되기 이전까지는 전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덕분에 한국 대중들에게 백남준이라는 이름이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34] 굿모닝 미스터 오웰도 영상 내용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으나 인공위성을 이용한 최초의 전세계 생중계라는 것에서도 의미가 크다. 특히 1984의 빅브라더를 TV에 대입하면 인공위성을 이용한 방송 송출은 빅브라더의 역량을 훨씬 강화해주는 장치다. 이를 이용하여 조지 오웰에게 안부를 묻는 것 자체가 굉장히 유쾌한 반론인 셈이다.[35] 일방향 매체의 대표격인 TV 앞에서 시청자가 직접 영상을 조작한다는 의미가 있다. 단순히 시청을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TV에 참여하는 것이다. 백남준은 비디오 캠코더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의 글을 보면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영상을 만들고, 이를 송출하고, 즐기는 것을 꿈꿨는데 오늘날의 유튜브와 같다. 그는 TV를 이용해 작업을 했지만 TV를 두고 TV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원거리의 소통과 영상물/비디오 자체를 생각했다. 일례로 백남준은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작업도 했다. 멀리 떨어진 연인이 달을 보며 서로를 떠올리고, 서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해가 쉽다.[36] 1965년 출시된 최초의 가정용 TV-비디오 결합기기인 소니 TCV-2010 사용자이며 여기에는 CV-2000 테이프 레코더 시스템이 포함되어 있다. 백남준의 초기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지라 일본에서 나온 자료에는 빠지지 않고 이 말이 들어가 있으며 심지어 영문 위키피디아에도 일본 유저들이 주석을 달아놓았다.[37] 88올림픽 전후 즈음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삼성전자가 금성사의 아성을 뒤엎고 전면으로 치고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으로, 1970년대는 "이코노"텔레비전 등 기술력보다는 경제적 이점에 치중하여 마케팅했다.[38] 당시 MBC 아나운서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다.[39] 이날은 2006년 설날 당일이었다.[40] 백남준과 오랜 세월 호형호제하는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41] 백남준은 자신이 예술가가 되지 않았다면 물리학자(공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42] 전자와 고속도로란 명칭 때문에 하이패스를 연상할 수 있지만, 정확히는 '전자초고속도로를 통해 풍부한 정보를 접할 가능성이 있음'을 언급했기에 인터넷 혁명을 예견했단 것이 맞을것이다.[43] 누구나 손에 작은 TV를 가지고 다니면서 전자고속도로를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44] 영상산업의 종반엔 누구나 쉽게 영상을 찍어 공유하고 소통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했다.[45] 휴대 및 이동이 가능한 컴퓨터 개념으로 만들어진 IBM 5100의 출시 연도가 1975년이었는데, 그렇게 가볍게 만든 컴퓨터의 무게는 우려 20kg이 넘었다.[46] 백남준은 기술 발달로 인한 미래 비관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TV가 보편화 되기 시작하면서 바보상자뿐 아니라 빅브라더로 유명한 1984 등의 소설도 유명했는데 그는 이를 빗대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업을 1984년 1월 1일 방송한다.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전세계 동시 생중계를 한 것이다. 빅브라더는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중매체라 생각할 수 있는데 백남준은 오히려 전세계에 영향을 미칠 기반이 되는 인공위성을 이용해 TV가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보다는 전세계인을 이어주는 매체이자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는 선언을 한 셈이다. 2020년 시점에서 TV를 넘어서 인터넷과 스마트폰이라는 매개체로 인해 미디어 매체가 일상 속에 녹아들고 단순 유흥을 넘어뉴스, 정치, 다큐 등등 다양하게 녹아들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된 것을 생각하면 그의 생각은 정확했던 것이다.[47] 백남준이 빠져 있다면, 그 서적의 전문성을 의심해봐도 무방하다.[48] MBC 인기가요에 나와서 광주비엔날레를 홍보하는 영상. 존댓말로 시작해 갑자기 반말을 하더니 애교 섞인 존댓말로 돈 좀 많이 써달라는 마무리가 압권이다.[49] 서울을 포함하더라도, 이 정도 수준의 현대미술관은 찾기어렵다. 난해하고,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백남준의 세계적 네임밸류로 인해, 해외의 현대미술작가들은 이 곳에서 전시를 많이 한다. 때로는, 해외에 엄청난 네임밸류를 가진 작가가 서울이 아닌, 용인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전시를 열기도 한다.[50] 일반에는 텔레비전거북선으로 잘 알려져 있다.[51] 독일 뮌스터 조각예술제 출품.[52] 여의도역 쪽을 정문이라 가정. 사실 정문과 후문이 구분이 안간다.[53] 이 명언은 백남준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랴부랴 일본으로 출국하여 독일과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를 떠돌다가 34년만인 1984년에 다시 고국을 찾았을 때 어느 기자가 백남준에게 물어본 질문과 대답이다. 백남준의 이 명언이 2020년대를 비롯한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한류의 영향력으로 전세계의 국가에서 한국 문화의 수출에 크게 기여하고 경제 분야에서도 큰 효과를 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제대로 미래를 예견했고 소름돋는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나 전쟁 직후 보다는 경제력이 선진국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눈부시게 많이 상승했지만 1980년대 당시에는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국력이나 국제적인 위상이 지금보다 크게 부족했고, 문화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내세울 인물이 백남준이나 김연자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나 2020년대를 비롯한 현재의 대한민국은 한류의 영향력으로 세계 각국에서 대중문화 수출에 활발히 나서고, 경제분야에서도 매우 큰 효과를 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매우 탁월한 선견지명임을 잘 보여준다.[54] 2인전이 끝나고 백남준과 강익중, 그리고 미국 월가(街)의 금융인들과 가진 식사자리에서 나온 대화였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광적인 독서와 매일 두 시간씩 여덟 개의 주간지, 네 개의 월간지, 세 개의 일간지를 읽었던 백남준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월가에서 벌어지는 세세한 변화들을 꿰뚫어 본 그는 월가의 금융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 직후에 나온 대화가 바로 문제의 30세기에 관한 질문. 후에 강익중은 30세기의 세상을 상상하던 백남준을 두고 낮에도 별을 보는 사람이라고 했다.[55] 클린턴의 스캔들을 비꼬아 사실 클린턴은 주위 사람의 바지를 벗기는 힘이 있기 때문에 백남준이 당한 것이라는 드립도 나왔었다.[56] 백남준은 1932년생, 백남봉은 1939년생으로 두 사람은 7살 차이밖에 안 난다.[57] 참고로 백남봉의 본명은 '박두식'으로 '백남봉'이라는 이름은 연예인 활동용 예명이었는데, 백남준이 국내에 알려지기 십여 년 전부터 이 예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백남준의 명성을 노린 것과는 전혀 관계 없다.[58] 실제로 사카모토 류이치는 백남준에 대한 존경을 담은 헌정곡 'A tribute to NJP'라는 곡을 작곡해 자신의 앨범에 수록한 바 있다. 그가 작곡한 영화음악 등에 비교해보면 다소 전위적인 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