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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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백남채.jpg


석천(石泉)
본관
수원 백씨[1]
출생
1888년 1월 1일
경상도 자인현 하동면 송림동
(현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송림리)[2][3]
사망
1950년 10월 5일[4]
경상북도 대구시
(현 대구광역시)
학력
계성학교 (졸업)
협화대학 (학사)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381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4. 선거 이력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백남채는 1888년 1월 1일 경상도 자인현 하동면 송림동(현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송림리)에서 아버지 백용달(白龍達)과 어머니 안순이(安順伊) 사이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이후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으며, 계성학교에 진학하였다.

계성학교 졸업 후 1910년 중국 협화대학에 유학하던 중 이시영 등과 교류하게 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18년 협화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모교인 대구 계성중학교 교감 및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이듬해인 1919년, 그는 대구남산교회 장로로 있으면서 그 무렵 상하이로부터 돌아온 김규식의 처 김순애와 동생 백남규(白南圭)를 비롯해, 남성정교회 목사 이만집,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 천도교 경북교구장 홍주일 등과 비밀리에 접촉해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같은 해 3월 1일, 경성부에서 시위가 시작되고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이 심부름차 보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재학생 이용상(李容祥)이 기미독립선언서 200매를 갖고 이튿날 이만집을 찾아오자, 그는 이만집·정재순 등 대구 지역의 유지들과 함께 구체적인 의거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서문 밖 장터를 장소로 하고, 장날인 3월 8일 오후 1시로 시각을 잡았는데, 이 때 백남채는 계성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책임지기로 했다.

그러다가 그는 거사 3일 전인 3월 5일,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으나 거사는 계획대로 추진되어 3월 8일 첫 만세시위가 서문 밖 장터에서 일어났고, 이어 10일에 2차 시위가 대구 남문 밖 시장에서 일어났다.

한편, 그는 그 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이에 공소하여 같은 해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에 상고하였지만 7월 2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교육사업과 경제분야에서 활동하면서 비교적 온건한 독립운동으로 향하게 된다. 그는 먼저 대구요업회사를 설립하여 그 수익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군 군자금을 조달해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동생 백남규가 임시정부 경상도 대표로 일하고 있었고, 북경 유학시절 이시영과 교류가 있었던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1922년 10월에는 서상일과 함께 조양회관(朝陽會館) 건립에 참여하여 벽돌을 기증하기도 했으며, 1926년 대구 희원(喜媛)학교와 순도(順道)학교가 병합되어 희도보통학교(喜道普通學校)가 설립될 때에 자금을 지원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여 식민지 치하에서의 어린이 교육에 열성을 보였다. 한편, 1925년 9월 모종의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9월 2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소요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불기소처분선고받고 출옥하였다.

그러나 1927년부터 신간회 운동이 대두될 때, 그는 여기에 불참하면서 점차 일제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1927년 5월에서 1930년 4월까지 '대구학교 평의원' 을 역임했는데, 학교평의회는 일제가 조선인 교육에 관한 경비 마련을 위해 설치한것으로, 식민지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대구 YMCA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929년에서 1930년 사이에는 대구상업회의소의 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6년에는 일제의 말단지배기구로서의 역할을 한 남산정 제2구 총대(總代)를 지내기도 했다. 한편, 1935년 합명회사 광성초자(光星硝子), 1936년 주식회사 대구요업, 1937년 합자회사 공업친목회 등의 회사를 설립하여 대표로 취임하기도 했다.

1938년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기독교대구연합회를 결성했는데, 그는 재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일본인이었다. 이 때 이 조직에서 추진한 사업은 교회에서 일본의 4대 명절을 지키게 하는 일, 일본인들을 강사로 초빙하여 종교보국 사상을 고취시키는 일 등이었다.

8.15 광복 직후 독립운동가 서상일은 조선군 대구지구헌병대장 간다(神田)로부터 일제가 물러갈 때까지 치안유지에 대해 협조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그 또한 배은희, 엄성문, 서동진, 장인환, 이재영, 송기찬 등과 서상일의 자택에 모여 협의 끝에 건국의 우선과제인 치안 유지를 위해 경북치안유지회를 발족하기로 결의하고, 서상일을 대표로 선출했다.

그 후 대구 지역의 애국지사들은 해방공간에서 원활한 건국사업을 위해 앞서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위원장 김관제)와 경북치안유지회 등 두 조직을 통합하기로 하고, 8월 22일 대구공회당에서 합동회의를 열어 '건국준비치안유지회' 란 이름의 통합단체를 발족시켰다. 이 때 김관제가 위원장, 백남채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1945년 9월 창당된 한국민주당에 관여하기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정계에 투신하게 되었고, 대구지부 수석 부총무, 위원장 등을 지냈다. 이후 가족을 이끌고 상경하여 1946년 12월 조직된 미군정의 임시입법기관인 과도입법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1949년 2월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이에 입당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갑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한 그는 1950년 10월 5일 폐암으로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2년 7월 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3. 제헌 국회 활동[편집]


1948년 6월 11일 제1회 8차 본회의 당시 여러 의원들과 함께 "제주도소요사건선처를위한특별위원단설치에관한건"을 발의했다.[5]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제3선거구(대구시 병))
한국민주당
9,876표 (46.41%)
당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제3선거구(대구시 병))
민주국민당
2,779표 (7.78%)
낙선 (5위)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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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8세 남(南) 항렬.[2] #[3] 수형인명부에는 경상도 자인현 읍내면 교촌동(현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교촌리)가 출생지로 기재되어 있다.[4]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51년 10월 2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5] 같이 발의한 인물로는 오용국,장기영,김우식,서상일,최태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