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등산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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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마땅히 번쾌(樊噲)를 참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일찍이 40만의 장병을 이끌고 계셨던 고제(高帝)께서도 평성(平城)에서 곤경에 처하셨는데, 오늘날 번쾌는 오직 병사 10만으로 흉노(匈奴)를 유린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이는 면전에서 태후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더욱이 진(秦)은 흉노 정벌에 지나치게 국력을 낭비해서 진승(陳勝) 등이 반기를 드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이제 오늘까지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에도 번쾌는 태후의 면전에서 아첨하여 천하를 동요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
기원전 200년 현재의 산시성 대동 부근인 평성(平城) 부근의 백등산에서 벌어진 전한(漢)과 흉노(匈奴)의 대전투이다. 문헌상 양측의 병력이 도합 72만으로 언급되는데, 중국 역사서 특유의 과장을 고려한다고 쳐도 상당한 전력이 서로 맞붙었으며, 흉노의 완승으로 끝났다. 전투의 발단 자체는 강성해진 흉노의 견제 겸 흉노의 앞잡이가 되버린 한왕 신(韓王 信)을 정벌하려는 유방(劉邦)의 원정이었지만 이에 흉노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양측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동북아시아에서 유목 제국의 시대를 활짝 열어 유목사(遊牧史)의 흐름에서는 실로 기념비적인 대사건인 동시에, 초한전쟁(楚漢戰爭) 이후 이제 막 유일무이한 전 중국 통일 제국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 전한(西漢)으로서는 개국 초기부터 입게 된 최악의 시련이었다. 이후 수백, 수천년 간 이어진 한제국과 흉노, 중화제국과 북방 유목제국이 벌인 대사투의 서막을 열게 된 전투이다.
2. 명칭[편집]
중국 위키백과나 여러 책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은 백등지위(白登之圍)이다. '백등산에서의 포위' 정도의 의미인데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Battle of Baideng이라고 하여 백등전투라는 일반적인 전투로 작성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백등지전(白登之戰)으로 표기하면서 일반적인 전투를 일컫을 때 쓰이는 '지전'(之戰)이라는 표현을 같이 쓰고 있다. 그런데 뜬금없지만 터키 이스탄불 군사 박물관(Istanbul Military Museum)에서는 The Siege Of Baideng 이라고 하여 백등산 포위전이라고 정확히 한정시켜 표현하고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의 경우 아예 항목이 없어서 참조를 할 수가 없고 일본어 위키백과의 경우 白登山の戦い(백등산의 전투)로 표기하고 있다. 그 외에 평성지치(平城之恥), 즉 '평성의 치욕'으로 불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본 문서는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백등지위'의 뜻에 맞게 하여 '백등산 포위전'으로 문서를 우선 작성했다.
추가로 백등지전 · 백등지위 · 백등산 전투 · 평성지치로 검색해도 찾아 들어올 수 있게 했다.
3. 배경[편집]
3.1. 흉노의 사정[편집]
흉노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일단 중국이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접어들 무렵, 중국의 기록에 서술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이 즈음부턴 나름대로 중국까지도 이름을 알릴 정도로 영향력 있는 부족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전국시대 당시엔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나라, 연나라와의 충돌이 많았고, 나름대로 승승장구 했으나 하필 조나라의 명장 이목에 의해 처참하게 깨지면서 전국시대가 끝날때까지 중국의 변경에 얼씬도 못하게 되었다.
거기에 전국시대가 결국 진나라에 의해 종결된 뒤로는 진나라 장수 몽염의 주도하에 하투(河套) 남쪽까지 진군하고, 만리장성의 축조를 시작하는 등 대놓고 시황제가 이민족을 경계하는 태도를 취하자 그 당시 이민족중 나름 영향력이 컸던 동호나 월지 등도 진나라의 견제를 피해 북쪽으로 도주할 수 밖에 없었고, 아직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한 흉노 또한 다를바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진나라의 위세가 얼마 가지 못해 내부적으로 썩어가며 스스로 무너져버리고, 이후 초한쟁패기에 이르는 대혼란기가 벌어지며 그 종결 이후에도 상술한대로 한나라는 내부적으로 곪은 상처들을 처리하는데 바빠 북방의 국경을 수호할 여력이 사실상 없어졌다.
이렇게 점점 위세가 줄어들던 중국과는 달리 흉노는 두만이 선우에 오르면서 세력이 급격히 확장되기 시작했고 이후 묵돌이 두만을 죽이고 권력을 탈취, 그의 압도적인 지휘력과 카리스마 아래 흉노 세력은 두만때 이상으로 급격히 팽창하여 주변의 이민족들을 죄다 흡수하여 북방의 지존이나 다름없는 입장이 되었고, 패권을 잡은 흉노는 당연히도 중국 내륙을 노리고 현재의 산서성 유림시(楡林市) 부근과 하남의 옛 요새까지 침범했다.
묵돌은 연나라 지역과 대(代)의 영역을 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했는데, 활 시위를 당길 수 있는 병력만 30만명에 이르러 이전의 흉노와는 전혀 다른 강력함을 보였다.
3.2. 한나라의 사정[편집]
묵돌 아래 이민족들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에 비해 중국 대륙은 여러모로 하향세였다. 진나라 말기 시황제가 추진했던 만리장성을 비롯한 무리한 부역과 토목공사로 백성들은 지쳐있었고, 진승•오광의 난에 초한전쟁이 벌어지면서 나라꼴이 말그대로 엄청나게 무너진 것. 특히 중국 전토가 크든 작든 관계되었던 만큼 전쟁으로 인해 사방에서 희생자가 속출했으며 난민과 유랑민이 들끓었고 소비되는 물자도 어마어마했다. 후술할 내용들만 봐도 이 당시의 중국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유추할 수 있다.
한군과 초군이 형양(滎陽)에서 몇 해 동안 대치했으나 승패가 나지 않아 젊은 군사들은 오랫동안 행군과 군사작전에 동원되어 싸움이라면 진저리를 치고 있었고, 늙고 허약한 자들은 군사들의 양식을 운반하느라 피로가 극도에 달해 쓰러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기》 <고조본기>(高祖本紀) 중
"천하가 여러 해 동안 흉흉한 것은 오로지 우리 두 사람 때문이다. 원컨대, 나와 한왕이 싸워 자웅을 결한다면 천하의 백성들과 그 자제들이 고생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사기》 <항우본기>(項羽本紀) 중
당시 한나라 군대는 항우(項羽)와 서로 대치하느라 중국이 전란으로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묵돌이 스스로 강성해질 수 있었고, 활시위를 당길 수 있는 군사만도 30여 만에 달했다.
《사기》 <흉노열전>(匈奴列傳) 중
"이제 오늘까지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에도 번쾌는 태후의 면전에서 아첨하여 천하를 동요시키려고 합니다!"
《사기》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중
고조가 동원에서 돌아와 미앙궁(未央宮)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노하여 소하(蕭何)에게 말했다.
"지금 천하는 흉노의 침략과 제후들의 모반으로 동요되어 몇 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고 있음에도, 아직 성패를 알 수가 없소. 이렇게 긴박한 와중에 어찌하여 궁실을 과도하게 축조한 것이오?"
《사기》 <고조본기>(高祖本紀) 중
한 마디로, 개판 5분전이 아니라 개판 그자체였다. 진나라와 붕괴와 초한대전, 한나라의 건국까지 중국 전체가 전란으로 몇 번이고 뒤집어진 끝에 통일 진나라 시대의 막대한 국력이 모두 날아가버렸다. 자타공인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당대 중국의 상황은 피폐 그 자체. 중화의 패권을 두고 격전을 거듭하면서 성장해가는 흉노를 토벌하거나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고, 유방의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시점에는 흉노를 막을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4. 전개[편집]
4.1. 한왕 신의 배신[편집]
통일 이후 비교적 여건이 생긴 유방은 흉노의 확장 소식을 듣고 흉노의 침입을 대비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유방은 초한대전 내내 자신을 보필했던 한왕 신[5] 을 태원군과 그 이북으로 분봉하고, 수도를 진양으로 삼아 흉노와 맞닿은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겼다.[6]
문제는 신이 한(韓)왕으로 온 기원전 201년 바로 그 해 가을에 묵돌 본인이 대군을 이끌고 마읍으로 친정을 했다는 것. 묵돌이 직접 온 만큼 이전까지의 소규모 교전이나 약탈과는 규모도 기세도 달랐고 당연히 이를 부임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제후왕 하나가 막아내는건 무리였던지라 한왕은 나라를 지키는 겸 자기 목숨 또한 보전하고자 강화 협상을 하기 위해 사신을 자주 보내게 된다.
유방 또한 얼마 안가 묵돌의 친정 소식을 듣고, 한왕 신을 지원코자 친정을 결정하며 군대를 편성했으나 한신이 묵돌에게 사신을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얘가 단순히 협상하려는게 아니라 배신하려는거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어버렸고 혹시나 하는 마음+아니더라도 미리 주의주겠단 생각에 유방은 사람을 보내 한신을 훈계했으나 오히려 이를 듣고 한신은 이미 유방은 날 배신자로 보고 있구나!라고 판단해 유방의 의심 탓에 유방이 의심하던대로 흉노에 투신해버린다(...). 이 때가 기원전 201년 9월이었다.[7]
결국 마읍은 이런 한왕 한신의 변절로 인해 대흉노전 수비기지에서 흉노의 전진기지로 역변해버렸고, 묵돌은 이에 힘입어 구주산을 넘어 태원까지 진격했다. 한신 역시 이 군대에 합류했다.
이는 단지 한 세력이 넘어갔다고 보긴 힘들었는데, 그 당시 한신의 실 상황이나 입지가 어떻든 간에 한신은 전한 건국 이후 단 일곱 명만이 봉해진 이성왕(異姓王)[8] 중 한명으로 최측근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었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한신은 유방이 흉노를 전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 보낸 인물인데, 그 인물이 그대로 변절해버린 것이다.
4.2. 유방의 진격[편집]
흉노는 좌현왕(左賢王)과 우현왕(右賢王)에게 각각 1만의 기병을 쥐어준 뒤 진양까지 진격을 명했으나 유방의 한군은 이 2만명의 기병을 패퇴시켰고, 흉노군이 그대로 패주하자 기세를 타고 그들을 쫓아 이석에서 그들의 뒤를 잡고 다시 전투를 벌여 승리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패잔병을 수습한 두 현왕이 정신을 추스를 틈도 없이 한군은 누번에서 전차병과 기병을 앞세워 연승을 거둔다. 다만 이는 2만명이라는 기병까지 걸었던 묵돌의 유인책이었다. 안그래도 겨울이 다가오는 와중에 한나라에겐 익숙하지 않을, 날씨가 추운 북쪽 지방이란 환경에 눈과 비까지 겹치면서 한군은 열에 한, 둘이 심각한 동상에 걸렸을 정도로 위험한 곳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던 중 유방은 묵돌이 대곡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게 단지 유인책인지 아니면 진짜 회심의 수가 될 정보인지 고민한 끝에 10명의 사자를 보내 흉노의 의중을 떠보는 척 하면서 흉노 군영을 정탐하고자 했으나 묵돌은 이를 그대로 간파하여 정예병과 양질의 말들은 어디론가 숨겨버리고, 표면적으로는 비쩍마른 말과 늙은 병사들만 부대애 잔류시킨 채 한의 사신들을 맞이했고, 사신들은 이것만 보고 복귀한 뒤 유방에게 "흉노 놈들의 상태가 심각하니, 한번의 대승으로 처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식으로 보고를 올렸다. 한, 두 명도 아닌 사실상 모두로부터 이런 보고가 공통적으로 들어오자 유방은 이를 의심치않고 진격하다가 묵돌에게 그대로 낚이게 된다. 이때 유경(누경)이 유일하게 이에 반대해 아래의 진언[9] 을 올렸으나 유방은 그에게 화를 내며 '요망한 입으로 군의 사기만 떨어트리는구나!'하고 오히려 엄벌을 내리고자 했다.
4.3. 포위[편집]
백등산 포위전 자체에 대해선 <고조본기>, <공신열전>, <흉노열전> 등에서 서로 통일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어느 쪽이 옳은지 확인할 수 없으나 이하는 <흉노열전>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유방이 데려온 군대 32만명 중 대부분은 보병으로 이들 사이에서 점점 동상 환자가 늘어나 그 숫자가 이전의 약 2배에 달하게 되었다. 결국 계속 지체하기만도 힘들어진 유방은 진격과 후퇴 중 망설이다가 위의 기만책에 낚여서 진격을 결정하여, 전군을 이끌고 묵돌이 있다고 파악된 곳으로 진군했다. 다만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묵돌은 유방이 직접 이끄는 선발대가 평성에 막 도달하자 그대로 그들의 뒤를 둘러싸 선발대와 본대를 고립시켰다.
물론 유방과 한군도 바보는 아니라서 최대한 이 포위망을 풀고자 하였으나 작정하고 포위에 매진하는 흉노 기병을 뚫지 못했고, 결국 유방은 성 안에 갇힌 채 목숨과 식량 걱정만 하게 되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이때 호군중위의 직책으로 유방을 수행하던 진평이 묵돌이 아내에 약한 편[10] 이니 아내인 연지에게 다량의 선물을 뇌물로 받쳐 묵돌을 설득시키자고 제안했다. 유방 입장에선 구차한 수이긴 했으나 별다른 계책도 없었기에 진평의 제안에 그대로 따랐다.
"양국의 군주가 서로를 곤궁한 지경에 몰아넣어도 되겠습니까?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해도 선우께서는 우리는 이곳에 살 수도 없습니다. 또한 한나라의 왕에게는 하늘의 도움이 있는 것 같으니, 선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뇌물[11] 을 받은 연지는 위의 말대로 묵돌을 설득했고, 묵돌도 한왕 신의 태도에 불안함을 가지던 찰나[12] 에 부인의 저런 설득까지 겹치자 한신 세력의 2차 변절로 인한 피해를 두려워해 한 곳의 포위망을 약간 약하게 해 그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주었다.[13]
이때 때마침 백등산에는 크게 안개가 끼었다. 포위망의 한 곳이 풀린 것을 본 유방이었지만, 매복을 의심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노심초사하여 먼저 사람을 보내 그 길을 지나게 했는데, 안개 탓인지 흉노군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 그때가 돼서야 한군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개가 끼었다고 해도 대군이 모두 움직이면 들키는건 시간문제였다. 이에 진평은 강노(强弩)에 두 개의 화살을 메겨 밖으로 향하게 하며 전투 태세를 갖춘 상태에서 한군이 움직이게 했다.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는 흉노군을 향해 강노를 들이밀고 걷는 숨막히는 시간이 지나고, 포위망에서 탈출한 것을 깨달은 유방은
이렇게 하여 유방은 천신만고 끝에 흉노군을 피해서 탈출할 수 있었다[15] . 한군이 탈출한데다 마침 한나라의 대군이 유방을 구원하기 위해 추가로 도착하자, 묵돌도 불리함을 알고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떠났다. 유방은 씁쓸한 기분으로 귀환하면서 수감된 유경을 풀어주고 그에게 진심으로 사죄했다. 여담으로 훗날 원소는 똑같은 상황에서 전풍의 목을 날렸다...그리고 멸망의 길로...
5. 결과[편집]
결과는 위에서 보이듯이 한나라의 참패. 어찌저찌 초나라마저 꺾은 통일제국 한나라로 기세를 올리고 있었지만 얼마 되지도 않아 흉노에게 개박살났다. 심지어 같은 중국의 나라도 아닌 이민족에게 기만책을 당하기까지 하면서 능욕당한건 덤. 위의 회담 이후에도 묵돌은 종종 한나라 변두리를 침공했으나 한고제를 포함해 몇대가 지날 때까지도 이를 제대로 막을 수 없었다.
종전 이후 유방은 유경에게 흉노에 대한 대책을 물었으나 '천하를 평정하는 동안 사람들이 너무 지쳐 우리 힘으로는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다. 다만 원대한 미래를 계획하여 실천해나가면 우리 후손이 저들을 신하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는데 어찌보면 그럴듯해보이지만 사실 까고보면 '일단 당장 아무런 답도 없으니까 까라는대로 까자' 이 뜻이다. 실제로 유방의 친딸인 노원공주를 묵돌의 아내로 정략결혼을 맺게 하는 동시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많은 보물을 보내주면서 그들의 심기를 맞춰야한다 주장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 노원공주가 조왕 장오와 혼인을 맺은 몸이었다는 것.
그런데 유방은 이를 알면서도 유경의 계책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알게 된 여후가 밤낮으로 울고 불며 이를 결사반대하자 유방은 마음이 흔들려 결국 친딸이 아닌, 비슷하게 생긴 서민의 딸아이를 데려와 공주로 꾸며 보내고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16]
그렇게 유방은 사신을 보내 흉노와 ‘화친(和親)’이라는 이름의 조약을 맺었는데, 화친은 다음 네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7]
1, 2번은 그럴듯해보이지만 3,4번은 대놓고 불평등 조약을 티내고 있다. 3, 4번은 보이는 그대로 성의를 보이고[19] 뇌물을 바치라는 뜻이었고 이후 추가된 관시 또한 물자를 보급하기 위함이다. 1, 2번 또한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는데 경계로 삼는댔지 쳐들어가지 않는다곤 안해서 이후에도 흉노는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변방을 종종 약탈하기도 했고 또한 말이 형제지 엄연히 흉노를 윗선으로 여기게 했다. 이때문에 한나라는 계속된 흉노의 침공이 골칫거리였다.
화친 이후 유방은 유경의 제안에 따라 수도인 장안이 있는 관중 지역으로 인구 10만을 이주시켰다. 하지만 화친에도 불구하고 한신, 왕황, 조리 등은 흉노의 장수가 되어 수시로 한나라를 공격하였다.
6. 영향[편집]
이 전투의 영향은 실로 막대한데, 사건 자체만 봐도 황제가 포위되어 이민족의 족장에게 구걸하여 간신히 탈출하고, 이후 속이면서까지 화친을 해야 했던 엄청난 흑역사였다. 그러나 진짜로 중요한 점은 한순간의 쪽팔림 정도가 아니라 이 전투 이후로 적어도 100여년간 한이 흉노에 대하여 저자세로 나가야 했다는 점이다.
유경의 제안으로 흉노와 협약을 맺어 화친을 맺게 된 한나라였지만, 실제로는 협약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흉노는 수차례 군사를 보내 한의 변경을 유린했다. 이는 유방이 죽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였고, 여후는 묵돌에게 대놓고 성희롱에 가까운 조롱을 받았지만 굴욕적이게도 이를 참아야만 했다. 한문제 시절에도 전한은 흉노에 저자세로 일관해야 했다. 양측의 군사력의 우열을 떠나서 한나라로선 내부사정이 좋지 못하기에 군대를 확충해서 흉노의 본진으로 내침할 처지가 안되기에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했고, 이를 흉노가 잘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향후 한나라의 군사 대전략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흉노의 유인 → 포위 전술에 말려들어 패배한 이 전투의 임팩트가 너무나 막대했기에 이후 한문제, 한경제(漢景帝)에 이르러서도 흉노를 상대로 한 전쟁은 주로 쳐들어온 상대를 막고 격퇴하는 정도에 급급했지, 역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것은 한나라 내부에서는 정신나간 행위로 치부되며 실현되지 못했다. 한나라의 군대가 장성을 넘어 흉노의 영역으로 진군해 나간 것은 건국 70년 후, 한무제 때 흉노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로 나가서 위청(衛靑)의 진군부터였다.
이후 한나라는 길고 긴 시간을 조용히 참으며 문경지치의 시대를 거쳐 포텐셜을 터뜨리는데 성공했고, 한무제의 시대에 곽거병 등이 흉노 땅을 역으로 헤집어 버리는 복수에 성공했다. 후한 대에 이르면 흉노는 대단히 약화되어[20] 남흉노(南匈奴)의 경우 한나라의 속국 정도로 떨어지게 되었다. '수모를 참으며 힘을 모으면 자손들은 그들을 신하로 부릴 수 있을 것이다.'는 유경의 말이 긴 미래로 보면 어쨌든 실현된 셈.
반면에 흉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리즈시절 그 자체. 진나라 때문에 밀려난지 불과 몇년 사이에 세력을 엄청나게 확대했고,[21] 결국은 한나라에 대해서도 군사적 우위를 가질 수 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때문에 흉노의 역사를 다루는 책, 글 등에서는 무조건 언급하고 지나가는 전투다. 이후 수백년간 물고 물리는 한나라와 흉노의 관계는 사실상 이 전투로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기에 흉노의 입장에서도 엄청난 비중을 가지고 있다.
흉노의 입장을 떠나 유목사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 전투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데, 이후 2000년간 지속되는 중국의 제국과 북방 유목민의 대결이라는 구도는 바로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했다.[22] 따라서 유목사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언급하는 경우에도 항상 언급되는 전투. 여하간 자세한 전개 과정까진 아니더라도 전투 자체는 상당히 인지도가 있는 편이다.
또한 이후에 벌어진 한신, 팽월 숙청, 영포의 반란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 전투에서 친정한 한의 중앙군이 대패하면서 유방의 권위가 추락하고 중앙군이 약화되자, 군사적 재능으로는 유방을 능가하는 이 세 사람에 대한 숙청 필요성도 더 높아지게 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7. 대체역사[편집]
7.1. 한신, 팽월, 영포 등이 전투에 나섰으면?[편집]
이 전투에 대한 패전의 원인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가 유방의 토사구팽으로 명장들이 죽어버려 군사라고는 모르는 유방이 나가 발려버렸다는 식의 이야기다.
하지만 BC 200년 당시에는 한신, 팽월(彭越), 영포(黥布) 모두 멀쩡하게 살아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토사구팽을 당하고 있는 인물이라면 오직 한신밖에 없었다. 오히려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유방의 권위와 직할 군사력에 모두 타격을 입으면서 이 세 사람에 대한 숙청 필요성이 더 높아졌다는 평가도 있다.
이 당시 한신은 바로 직전해인 BC 201년, 모반 혐의를 받고 진평의 계책을 참고한 유방에게 사로잡혀 초왕에서 회음후(淮陰侯)로 떨어져버린 상태였다. 그 후에는 두문불출하며 유방이 자기를 해치려 한다고 두려워 하고, "내가 관영, 주발 같은 놈들하고 동급이 되다니..." 하며 불평을 늘어놓던 시점이었는데, 이 시점에서 한신에게 30만이 넘는 대군을 맡긴다고 생각을 해보자. 잘못하면 묵돌로 인한 흉노의 위협은 귀여울 정도(…)의 헬게이트가 열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렇듯 애초부터 '한신의 출전'은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물론 총지휘관이 아니라 유방을 따라가는 참모 정도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23] 당시 한신은 병을 핑계삼아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종군을 한다면 병은 구라라는 이야기를 스스로 입증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한신이 진짜로 작정하고 나섰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는 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한신의 군사적 재능을 생각한다면 강대한 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진 못해도 최소한 치욕적인 패전은 면했을 수도 있다.
팽월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시작점이 진희의 반란에 본인이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는 부분이었는데, 이때의 원정에 본인이 참여했을지는 미지수다. 또한 초한전쟁 중에 팽월은 주로 항우의 뒤치기를 하고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활약을 했고, 항우와 정면으로 맞붙은 전투는 해하 전투 밖에 없었다. 영포도 거록대전 등에서 활약을 했지만, 얘는 반란을 일으켜서...
하지만 이와 별개로 이들을 보낼 명분이 없었다. 이들은 이미 제후왕들이라 자기 봉토 내 일을 신경써야지 국경에 함부로 보낼 수도 없었고 이는 설령 한신이 숙청당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보내려고 해 봤자 이들도 온갖 핑계를 대고 안갔을 테고 말이다.
그리고 초한지로 역사를 배운 사람들이 하는 오해로 유방은 절대로 군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굉장한 명장이었다. 실질적으로 초한전쟁 당시 중국에서 유방보다 낫다고 평가받는 지휘관은 한신이나 항우 정도밖에 없었다. 이 둘은 중국사 역대급 명장으로 꼽힌다는 것만 봐도 유방이 얼마나 대단한 명장인지 알게 해준다. 한신과 항우가 신계라면 유방은 인간계 최강으로 항우와의 직접 대결에서 어찌어찌 버티고 살아남았고[26] 훗날 영포의 반란군을 상대로는 시종일관 압도하며 간단히 진압했다. 실제 백등산 전투에서도 유방은 묵돌의 유인책에 대해 어느 정도 의심을 하고 사자를 파견하는 등의 혜안은 보여주었다. 묵돌이 더한 너구리여서 그렇지.[27] 모랄빵이 나고도 어찌됐던 유방은 목숨과 병력은 보전해서 돌아갔다.
그 시점에서 유방이 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판단은 아예 평성으로 진군하지 않는 것이었다. 즉 평성으로 진군한 이상 승리를 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개인의 군사적 능력보다는 차라리 병종(兵種)의 차원으로 가야할 일이고, 지휘관의 영역은 유인하는가, 유인되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는 쪽이 맞을 것이다.
묵돌은 필승의 고지로 한군을 유인하기 위해 책략을 사용했고, 유방 역시 이에 대해 사자를 파견하여 적을 정탐하는 등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묵돌은 유방을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는 한군에게 있어 재앙이 되었다.
7.2. 유방이 죽거나 사로잡혔다면?[편집]
황제가 처음 탄생한 것이 진시황, 그 다음으로 한고제까지 고작 이세황제와 초의제밖에 없었고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 죽은지 딱 10년밖에 안 지났다. 중화제국이라는 개념에 탄생한지 얼마 안가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족 왕조 3대 치욕이라고 꼽히는 영가의 난, 정강의 변, 정통의 변 모두 한족 왕조가 북방 유목민족을 상대로 당한 것인데 그나마 고제가 도망치는데 성공했기 망정이지 실패했다면 만약 이 때 한고제가 평성전투에서 죽거나 사로잡혔다면 영가의 난보다도 먼저 일어난 4대 최초 최악의 사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창업황제 유방의 역량으로 간신히 이룬 통일 한제국도 평성의 패배로 한큐에 분열되어 진ㆍ초의 뒤를 따라가는건 덤이고 후세 한족의 정체성, 그리고 중국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7.3. 만약 항우가 초한전쟁에서 승리하고 흉노와 붙었다면?[편집]
"항우가 만약 천하를 통일하고 묵돌과 맞서 싸운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라는 의견도 있다.
위에 서술했듯이, 한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웠다면 승리는 장담 못 해도 최소한 참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데, 그 한신은 물론이고 항우의 초나라를 제외한 전중국의 모든 세력[28] 이 모여서 막대한 피해[29] 를 감수하며 간신히 이긴 것이 항우다.
또한, 항우가 묵돌이 이끄는 흉노군 정도로 강한 군대를 상대해보지 않은 것도 결코 아니다.
거록대전에서는 무지막지한 기세와 보급을 자랑하던 진나라 군사들을 일당십 수준의 전투력으로 매우 압도적으로 박살내버렸었고, 팽성대전에서는 3만의 군사로 56만 대군에게 정면으로 덤벼들어 30만 명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그 밖에도, 장한, 영포, 유방, 한신, 왕릉, 관영, 팽월 등 당대의 명장들을 상대로 숱한 경험과 승리를 쌓아온 항우가 묵돌에게 밀릴 가능성은 유방보다는 압도적으로 적은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항우가 상대한 적들이 어디까지나 중국 내부의 군대란 것이다. 즉 항우의 강력함은 중국 내부에서는 통할지 모르지만 과연 묵돌의 흉노에게도 승리를 장담하기에는 실제로 붙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당장 초한대전 최후의 승자 유방조차도 묵돌의 거짓 패배에 속아 자만에 빠진 나머지 백등산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하고 간신히 탈출했다. 유방보다 단순한 항우라면 역시 거짓 패배에 넘어가 백등산에서 포위되어 그래도 탈출이라도 한 유방에 비해 해하전투 찍고 훨씬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수도 있다. 오히려 묵돌에게는 유방과 한신보다도 항우가 상대하기 더 쉬운 상대일수도 있다. 다만 잘 알려진 항우의 용력을 생각해보면 무력으로 강행돌파하여 살아남았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리고 유방.항우의 능력과는 관계 없이 당시 중국의 사정이 흉노와 전쟁하기에는 영 좋지 않았다. 이런 사정은 바로 항우의 대학살이 초래한 것이다. 인구만 해도 통일된 진나라가 2천만인데 비해 유방이 초한쟁패전에서 승리했을때 인구가 겨우 5백만...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전한 초에는 장군들조차 말이 없어 소를 타고 다녀야 했다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즉 유방이든 항우든 군대의 절대 다수가 보병이란 말인데 과연 정반대로 군대의 절대 다수가 기병인 흉노를 상대로 제대로 전쟁을 할수 있을까? 한무제가 흉노를 상대로 대규모 정벌을 감행한 것도 문경지치로 경제력을 축적해 대규모 기병을 확보한 뒤에나 가능했다.
만약 항우가 맞붙어서 승리했더라도 한무제 꼴이 났을 것이다. 곽거병이 할 일을 항우가 직접 했다 그 차이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긴다 하더라도 국력이 매우 심각하게 쇠락할 것이 뻔한 전투가 되었을 것이다.[30]